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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경주(水經注)》의 어이진(禦夷鎭)은 산서(山西)성 영구(靈丘)이고 고하(沽河)는 상건하(桑乾河), 유수(濡水)는 거마하(拒馬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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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설의 어이진 위치는 잘못 비정되었다.

 

역도원(酈道元)은 《수경주(水經注)》에 어이진(禦夷鎭)을 기준으로 하여 고하(沽河)와 유수(濡水)의 발원 위치를 명시 하였다. 즉 고하는 어이진 서북쪽 90리에서 발원하고 또한 유수는 어이진의 동남쪽에서 발원 한다고 한 것이다.

 

고하(沽河)는 새(塞) 밖으로부터 온다.  沽河從塞外來

[주] 고하(沽河)는 어이진(禦夷鎮) 서북쪽 90리 단화령(丹花嶺) 아래에서 나온다.  [注] 沽河出禦夷鎮西北九十里 丹花嶺下

『水經注』 권 14 '沽河'

 

유수(濡水)는 새(塞) 밖으로부터 와서 동남으로 흘러 요서군 령지현(令支縣) 북쪽을 지난다.  濡水從塞外來 東南過遼西令支縣北

[주] 유수(濡水)는 어이진(禦夷鎮) 동남쪽을 나온다. 유수는 두 곳에서 발원하여 한 쌍을 이루며 서북쪽 산골짜기로 이끌려 흐르다가 산을 나와 합류하여 하나의 하천을 이룬다.  [注] 濡水出禦夷鎮東南  其水二源雙引 夾山西北流 出山 合成一川

『水經注』 권 14 '濡水'

 

고하(沽河, 문헌에 고수沽水로도 나타난다)와 유수(濡水)는 패수(浿水) 및 요수(遼水)와 더불어 한국 고대사의 영역을 바로잡는데에도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水經注》가 고하와 유수의 실체를 밝히는데 매우 유용한 단서를 제공하고 있으니 즉 어이진(禦夷鎭)의 절대 위치만 찾으면 고하와 유수가 지금의 어느 강들을 가리키는지는 저절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주] 또한 대곡수(大谷水)는 남쪽으로 독석(獨石)의 서쪽을 지나며 또한 남쪽으로 어이진(禦夷鎮)성의 서쪽을 지난다. 위(魏) 태화(太和)때 설치한 것인데 북적(北狄)을 막기 위한 것이다.  [注] 大谷水又南逕獨石西 又南逕禦夷鎮城西 魏太和中置 以捍北狄也

『水經注』 권 14 '沽河'

 

[주] (후로)수(水)는 서북쪽의 산에서 나와서 동남쪽으로 흘러 후로성(候鹵城) 북쪽을 지난다. 성은 거용현(居庸縣) 서북쪽 200리에 있는데, 옛 이름은 후로(候鹵)라고 한다. 태화(太和)년간에 (후로성의) 이름을 어이진(禦夷鎮)으로 바꿨다.  [注] 水出西北山 東南流逕候鹵城北 城在居庸縣西北二百里 故名云候鹵 太和中更名禦夷鎮

『水經注』 권 14 '沽河'

 

어이진은 북위(北魏) 6진(鎭)의 하나인데, 《水經注》에 어이진(禦夷鎭)의 설치와 관련하여 위 기록이 있다. 정리하면 북위의 고조(高祖)가 다스리던 태화(太和, 477~499)년간에 후로성(候鹵城)의 이름을 어이진으로 바꿈으로서 어이진이 설치되었다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그 위치가 명확한 '거용(居庸)'의 서북쪽 200리에 있다고 했으니 어이진의 위치 또한 무리없이 비정될 수 있을 듯 보인다. 6진은 북위(北魏)의 북쪽 국경지대에 설치된 여섯 기지로 회삭진(懷朔鎭), 무천진(武川鎭), 무명진(撫冥鎭), 유현진(柔玄鎭), 회황진(懷荒鎭), 어이진(禦夷鎭)이다.

 

지도1  담기양의 중국역사지도에 표기된 어이진, 난하(담기양이 주장한 유수濡水)의 발원

가《水經注》의 기록과 달리 어이진의 동북쪽에 위치해 있다. 원 지도 출처: 谭其骧

国历史地图集』 4-精装本-南北朝

 

지도 2  백하와 난하의 발원지 일대 지형도

 

지도 3  양수경(楊守敬)수경주도(水經注圖)의 백하와 난하의 발원지 일대,

난하의 발원지가 실제 보다 훨씬 더 남쪽으로 내려와 있다.

 

통설에서는 이에 따라 어이진(禦夷鎭)이 지금의 하북성 장가구(張家口)시 동북부 적성(赤城)의 북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있다. 그런데 문제는 통설이 가리키는 어이진 일대에서는《水經注》의 기록에 부합하는 고하(沽河)와 유수(濡水)의 발원지를 찾을 수 없다는 점이다. 물론 고하를 지금의 백하(白河), 그리고 유수를 지금의 난하(灤河)로 정해놓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도1 및 지도2에 드러나 있듯이 끼워 맞추기식의 억지스런 비정일 뿐이다. 설령 무리하여 지도상 어이진의 위치를 《水經注》의 기록에 부합하도록 이리 저리 움직여 조절해본다 하여도 백하와 난하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나온 궁여지책이었는지 양수경(楊守敬)은 《수경주도(水經注圖)》에서 고무줄 잡아당기기식으로 난하의 상류를 실제보다 길게 늘이다가 그 발원지가 본래의 위치에서 수십 킬로미터나 남쪽으로 옮겨져버린 엉터리 지도 위에 어이진을 그려 놓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 복잡하게 설명할 필요도 없이 백하와 난하 상류의 유로와 발원지들의 상대적 위치를 잠시만 논리적으로 살펴보아도 《水經注》의 고하와 유수를 절대로 그곳에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렇다면 고하와 유수의 발원지 부근에 어이진이 있었다고 한 《水經注》의 기사는 어떻게 된 일일까?

 

 

북위의 태무제가 설치한 어이진

 

위(魏) 세조(世祖, 423년~452년간 재위)가 연연(蠕蠕)을 쳐부수고 투항한 사람들을 한(漢)의 남쪽에 줄지어 배치하였다. 동으로 유원(濡源)에 이르고 서로 오원(五原), 음산(隂山)의 끝 3,000리에 미친다. 6진(鎮)으로 나누었는데, 지금의 무천(武川), 무명(撫㝠), 회삭(懐朔), 회황(懐荒), 유현(柔玄), 어이(禦夷)이다. 주(註)를 달아 이르기를 "6진은 동서로 천리에 불과하였다."고 했다. 즉 응당 대도(代都) 북쪽의 새(塞)로부터 동으로 유원에 이르렀을 뿐이다. 두우(杜佑)가 말하기를 "후위(後魏)의 6진은 마읍(馬邑), 운중(雲中), 선우부(單于府)의 지경에 나란히 있었다."고 했다.  魏世祖破蠕蠕 列置降人於漢南 東至濡源 西暨五原 隂山 竟三千里 分為六鎮 今 武川 撫㝠 懐朔 懐荒 柔玄 禦夷也 下云 六鎮東西不過千里 則當 自代都北塞而東至濡源耳 杜佑曰 後魏六鎮並在馬邑 雲中 單于府界

『資治通鑑』 권 136 (胡三省 註)

** '蠕蠕'은 유연(柔然)을 가리킨다. ** 대부분의 사료들에는 '漢'이 '막(漠)'으로 되어있다.

 

사조(史炤)의 석문(釋文)에 이르기를 유원(濡源)은 상곡(上谷)의 북쪽 유주(幽州)에 속하여 있다고 하였다. 《水經注》를 살펴보건대 유수(濡水)는 새(塞) 밖으로부터 들어온다고 하였다. 그 발원지는 유주의 영역이 미치지 못하는 먼 북방의 거친 땅에 있었다. 후위(後魏) 태무제(太武帝) 시기에 어이진(禦夷鎮)을 유원의 서북에 설치하였다. 史炤釋文曰 濡源在上谷之北 屬幽州 余按 水經注 濡水從塞外來入塞 其發源之地逺在北荒中 不屬幽州至 後魏 太武帝時 置禦夷鎮於濡源之西北

『通鑑釋文辯誤』 권 4

** 史炤釋文, 남송(南宋)의 사조(史炤)가 지은 《자치통감석문(資治通鑑釋文)》을 가리킨다. ** 태무제(太武帝) 즉 북위(北魏)의 제3대 황제 세조(世祖)를 말한다.

 

회삭진성(懐朔鎮城), 기(旗)의 동북에 있다. 후위(後魏) 태무(太武)가 유연을 쳐부수고 투항한 사람들을 사막의 남쪽에 줄지어 배치하였다. 동으로 유원(濡源)에 이르고 서로 오원(五原), 음산(隂山)의 끝 3,000리에 미친다. 6진(鎭)으로 나누어 회삭(懐朔), 무천(武川), 무명(撫㝠), 회황(懐荒), 유현(柔玄), 어이(禦夷)라 불렀다. 생각컨대 회삭이 가장 서쪽에 있었다. 효창(孝昌, 525~528)년간에 삭주(朔州)로 고쳐서 설치하였다. 후에 폐하였다. 懐朔鎮城  在旗東北 後魏太武破蠕蠕列置 降人于漠南 東至濡源 西暨五原隂山 竟三千里 分為六鎮 曰懐朔 武川 撫㝠 懐荒 柔逺 禦夷 惟懐朔最西 孝昌中改置朔州 後廢

『大清一統志』 권 408

 

역도원(酈道元)이 《水經注》에 이르기를 "유수(濡水)는 어이진(禦夷鎮)의 동남쪽에서 나온다."고 했다. 살펴보건대 어이진(禦夷鎮)은 북위(北魏) 6진(鎮)의 하나이었다. (어이)진을 세웠다는 위치가 비록 옳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위(魏) 태조(太祖, 386~409년간 재위)가 적고 말하기를 "장천(長川)의 서쪽에 장성을 쌓았다. 적성(赤城)에서부터 서쪽으로 오원(五原)까지 이어진 길이가 2,000리이었다."고 했다. 또 위 세조(世祖)가 유연(柔然)을 쳐부수고 투항한 사람들을 사막의 남쪽에 줄지어 배치하였다. 동으로 유원(濡源)에 이르고 서로 오원, 음산의 끝에 미친다. 6진(鎭)으로 나누었는데 어이(禦夷)는 6진의 동쪽에 자리잡았다. 酈道元水經注云 濡水出禦夷鎮東南 按禦夷鎮為北魏六鎮之一 其建鎮之所雖不可考 而魏太祖紀云 築長城於長川之西 自赤城西至五原 延袤二千里 又魏世祖破蠕蠕 列置䧏人於漠南 東至濡源西概五原隂山 分六鎮 是禦夷居六鎮之東

『熱河志』 권 69

** 장천(長川)은 지금의 내몽골자치구 흥화현(興和縣)이다.

 

《水經注》에 유수(濡水)는 어이진(禦夷鎮) 동남쪽에서 나온다고 했다. [어이]진은 탁발(拓拔) 위(魏) 태무(太武) 시기에 설치한 것이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濡'의 음은 '놘(乃官翻)'이라고 하였다.  水經注 濡水出禦夷鎮東南 鎮拓拔魏太武時所置也 師古曰濡音乃官翻

『資治通鑑』 권 82 (胡三省 )

 

앞서 살펴본대로 《水經注》에는 북위(北魏)의 태화(太和, 477~499)년간에 어이진(禦夷鎭)을 설치하였다고 되어있다. 그런데 《자치통감(資治通鑑)》등 다른 사서들을 살펴보면 태화년 보다 수십년 이른 시기인 북위의 제3대 황제 세조(世祖) 즉 태무(太武, 423년~452년간 재위)제가 왕위에 있던 시기에도 또한 어이진이 설치되었다는 기사가 여러 곳에 보인다. 더욱이 태무시기에 설치된 어이진에 관한 모든 기록들은 한결 같이 어이진이 유원(濡源) 즉 유수(濡水)의 발원지 서북에 있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水經注》의 태화년 간에 설치된 어이진과 관련된 '거용(居庸)', '후로(候鹵)' 등의 지명은 전혀 언급하지 않는다. 이는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水經注》에 전하는 태화(太和)년간에 설치된 어이진(이하 편의상 '태화어이진'으로 표기함) 말고도 그 이전의 태무(太武)황제 시기에 설치된 또 다른 어이진(이하 편의상 '태무어이진'으로 표기함)이 별도로 존재 했음이 틀림없다. 통설의 어이진, 즉 '태화어이진'의 위치로 비정되는 백하(白河) 상류 일대에서 고하(沽河)와 유수(濡水)의 발원지를 찾을 수 없었던 이유는 고하와 유수는 '태무어이진' 일대에서 발원한 물줄기들일 뿐 '태화어이진'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말해서 《水經注》의 고하(沽河)편과 유수(濡水)편의 첫머리에 각각 나타나는 '어이진 서북 90리에서 발원한 고하'와 '어이진 동남쪽에서 발원 한 유수'과 관련된 어이진은 '태화어이진'이 아니라 '태무어이진'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水經注》에는 그 설치된 년대와 위치가 전혀 다른 2개의 어이진(禦夷鎭)에 관한 문구들이 뒤섞여 있는 듯 하다. 위 《열하지(熱河志)》의 문구에도 잘 드러나 있듯이 《水經注》를 연구한 일부 청(淸)대의 학자들이 고하, 유수 등과 관련되어 당시에도 용인되던 어이진(禦夷鎭)의 [백하白河 상류] 위치 비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아마도 어이진을 둘러싼 《水經注》의 모순점들에 대해 이미 눈치채고 있었을 것이다.

 

한편 《水經注》가 부분적으로 후대에 가필되었을 가능성 또한 생각해 볼 수 있다. 거용(居庸) 북쪽 200리에 있었던 후로성(候鹵城)이 그 이름이 바뀌어 어이진(禦夷鎭)이 되었다고 한 《水經注》의 기록이 5~6세기를 살았던 역도원(酈道元)의 글이 맞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다른 사서들의 이곳 저곳에서 여러번 인용되었어야 마땅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후로성에 관한 기록 또는 거용을 언급한 어이진의 위치에 관한 기록은 《수경주집석정와(水經注集釋訂訛)》, 《수경주석(水經注釋)》 등 명(明), 청(淸)대 이후에 저작된 《水經注》의 일부 주해서들에서만 보일 뿐이다. 반면 유수(濡水), 유원(濡源), 울주(蔚州), 등의 지명들과 연결되어 나타나는 어이진(禦夷鎭)의 기록는 여러 시대에 걸친 많은 사료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수경주》의 일부가 유실되어 명, 청대에 복원이 이루어졌다고 전해지는데, 그 과정에서 후대 사람들의 지리 인식이 반영되어 가필 및 변조로 이어졌을 정황이 있는 것은 분명하다.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태화어이진'이 명, 청대에 가공된 허구일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뒤에 분명해지겠지만 덧붙이자면, '태화어이진'이 허구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사실 본글의 주된 목적인 고하(沽河)와 유수(濡水)의 실체를 밝히는데 별 영향를 주지 않는다.

 

10세기 무렵 책의 일부 내용이 유실되었다. 그리고, 책의 내용도 경문(본문)과 주석이 뒤죽박죽이 되었다. 《水經注》를 복원하려고 명나라. 청나라의 유명한 학자들이 조사하여 조합한 결과, 여러 종류의 복원이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가장 상세한 고증본은 명나라의 주모위(朱謀瑋)가 1615년에 복원한 《수경주소(水經注疏)》이다. 《水經注疏》를 토대로 하여 전조망과 대진 등이 문장을 추가한《水經注》가 나왔다.

『위키백과』 '수경주'

 

그렇다면 '태무어이진'은 어디에 설치되었었던 것일까?

 

 

어이진은 산서성 영구에 있었다.

 

뜻밖에도 두우(杜佑, 735~812)의 《통전(通典)》등 여러 사서에 북위(北魏)가 회황진(懷荒鎭)과 더불어 어이진(禦夷鎭)을 산서(山西) 영구(靈丘)에 설치했었다고 버젓이 적혀 있다. 영구(靈丘)는 장가구(張家口)시 적성(赤城) 인근의 백하(白河) 상류에 있는 통설의 어이진과는 전혀 관련없이 멀리 떨어져 있는 곳이다. (지도 4  어이진, 고하 및 유수의 위치 개요 참조)

 

회황진(懐荒鎭)과 어이진(禦夷鎮)은 모두 북위(北魏)가 설치하였다. [광령(廣靈)]현의 지경에 종속되어 있었다. 懐荒鎭 禦夷鎮 胥北魏置 縣境隸焉

 『山西通志』  권 58 '廣靈縣'

 

한(漢)나라가 평서(平舒)현을 설치하였다. 북제(北齊)가 없애고 영구(靈丘)에 편입시켰다. 오대(五代)의 후당(後唐)이 광릉(廣陵)현을 설치하였다. 금(金)나라가 광령(廣靈)으로 개명하였다. 청나라때에 산서 대동부(大同府)에 속하였다. 민국(民國) 초에 산서 안문도(雁門道)에 속하였다.  漢置平舒縣 北齊省入靈丘 五代後唐置廣陵縣 金改曰廣靈 清屬山西大同府 民國初屬山西雁門道

『中國古今地名大辭典』  '廣靈縣'

 

울주(蔚州), 지금의 치소는 영구(靈丘)현이다. 《주례(周禮)》에 "병주(并州)에 구이(嘔夷)라는 하천이 래수(淶水)와 역수(易水)에 물을 댄다."고 했다. 구이수(嘔夷水)는 영구현(靈丘縣)의 지경에 있다. 래수(淶水)는 비호현(飛狐縣)의 지경에 있다. 전국(戰國)초에 조(趙)나라에 속하였다. 그 후에 또 연(燕)나라에 속하였다. 진(秦), 한(漢), 진(晉)의 대군(代郡) 에 속하였다. 후위(後魏)가 회황(懷荒), 어이(御夷) 2진을 설치 하였다. 동위(東魏)가 북영구군(北靈丘郡)을 설치하였다. 후주(後周)가 울주(蔚州)를 설치하였다. 수(隋)나라가 상곡군(上谷郡)을 설치하였다. 당(唐)나라가 울주를 설치하였다. 혹은 안변군(安邊郡)이 되었다. 영구(靈丘), 비호(飛狐), 안변(安邊) 3개 현을 다스린다.  蔚州 今理靈丘縣 周禮并州川曰嘔夷 浸曰淶易 嘔夷水在靈丘縣界 淶水在飛狐縣界 戰國初屬趙 後又屬燕 秦 漢 晉屬代郡 後魏置懷荒 御夷二鎮 東魏置北靈丘郡 後周置蔚州 隋置上谷郡 大唐置蔚州 或為安邊郡 領縣三 靈丘 飛狐 安邊

『通典』  권 179

** 嘔夷水는 지금의 당하唐河를 가리킨다.

 

 

『大同府志』 권1 沿革, 乾隆47년(1782) 간행 - 어의진(禦𠋣鎭 즉 禦夷鎭), 회황진(懷荒鎭), 撫㝠鎭(무명진), 유원진(柔元鎭 즉 柔玄鎭) 등 6진 중 4진이 영구현(靈丘縣) 및 사천현(莎泉縣)과 더불어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를 포괄한] 북위(北魏)의 북영구군(北靈丘郡)에 속하였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위 《通典》의 기사는 저자 두우(杜佑, 735년~812년)가 살았던 당(唐)나라 시기 울주(蔚州)의 지리와 연혁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사에 언급된 후위(後魏)의 회황(懷荒), 어이(禦夷) 2진(鎭)이 새로 설치된 곳은 당연히 당(唐)의 울주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당(唐) 울주의 치소 영구(靈丘)는 지금까지도 같은 위치 산서성 영구에 같은 지명으로 남아있다. 북위(北魏)의 어이진이 영구에 설치되었던 사실은 위 산서통지(山西通志)》의 기록을 통해서도 역시 확인된다.

 

송백(宋白)이 말하기를 "울주(蔚州)는 진(秦), 조(趙)동안에도 대군(代郡)의 땅이었다. 후위(後魏)가 회황(懐荒), 어이(禦夷) 2진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동위(東魏)가 이곳에 북영구군(北靈丘郡)을 설치하였다. 후주(後周) 대상(大象) 2년(580)에 울주를 설치하였다. 당(唐) 개원(開元, 713~741)초에 군의 치소를 영구(靈丘) 서남 130리로 옮겼다. 서쪽 380리에 삭주(朔州)가 있다."고 했다.  宋白曰 蔚州秦趙間亦為代郡之地 後魏置懐荒禦夷二鎮於此 東魏於此置北靈丘郡 後周大象二年置蔚州 唐開元初移郡治於靈丘西南一百三十里 西至朔州三百八十里

『資治通鑑』 권 253 (胡三省 )

** 송백(宋白) 송(宋) 태종(太宗) 때 문신으로 자는 태소(太素). 이방(李昉)과 함께 《문원영화(文苑英華))》 천여 권을 편찬하였다.  ** 대동소이한 내용이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 《문헌통고(文獻通考)》 등에도 보인다. 

 

어이진(禦夷鎭)의 정확한 위치는 위 송백(宋白)의 말을 빌은 호삼성(胡三省, 1230년~1302년)의 《資治通鑑》 권 253 주석 글에서 더욱 확실해진다. 즉 해당 문구 후위가 회황, 어이 2진을 이곳에 설치하였다.  後魏置懐荒禦夷二鎮於此에서 '이곳(此)'은 곧 "진(秦), 조(趙) 시기에 대군(代郡)의 땅이었던" 울주(蔚州)를 말한다. 그러므로 위 기사의 '울주'는 두말할 나위 없이 지금의 산서성 영구를 가리키는 것이고, 따라서 호삼성이 인식하는 어이진의 위치 역시 영구인 것이다.

 

《水經注》에 유수(濡水)는 어이진(禦夷鎮) 동남쪽에서 나온다고 했다. (어이)진은 탁발(拓拔) 위(魏) 태무(太武) 시기에 설치한 것이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기를 '濡'의 음은 '놘(乃官翻)'이라고 하였다.  水經注 濡水出禦夷鎮東南 鎮拓拔魏太武時所置也 師古曰濡音乃官翻

『資治通鑑』 권 82 (胡三省 )

 

호삼성(胡三省)은 또한 앞서 언급하였던, 같은 책 《資治通鑑》 권 82의 주석에서 북위(즉 탁발위) 태무(太武)제 시기에 설치한 어이진(禦夷鎮)의 동남쪽에서 유수(濡水)가 발원한다고 하였다. 위 《資治通鑑》 권 253에서 호삼성이 어이진의 위치를 영구(靈丘)로 인식하고 있음이 이미 밝혀졌으니 그가 여기서 말하는 영구의 어이진은 북위 태무제가 설치한 사실 또한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이렇듯 후위(後魏) 즉 북위(北魏)의 태무(太武)제 때에 지금의 산서성 영구(靈丘)에 어이진(禦夷鎭)이 설치 되었던 사실은 너무나도 명백하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통설에서 주장하는 어이진의 위치를 제대로 반박한 연구논문 등이 없었던 것으로 미루어, 좀 의아하기는 하지만 아마도 두우(杜佑)의 《通典》, 또는 《資治通鑑》 주(註) 등에 실린 어이진(禦夷鎭)의 기사를 여태껏 아무도 보지 못한 듯 하다.

 

 

 

 

북위(北魏) 영안(永安)년간 어이(禦夷), 회황(懷荒) 2진(鎭)의 기치(寄治)에 대하여

 

울주(蔚州), 영안(永安)년간에 회황(懷荒), 어이(禦夷) 2진을 [울주(蔚州)로] 고쳐 만들어 병주(並州) 오현(鄔縣)의 경내에 기치(寄治)하였다.  蔚州 永安中改懷荒 禦夷二鎮置 寄治並州 鄔縣界
『魏書』 권 106 上

 

어이진(禦夷鎭)의 위치와 관련하여, 혹자는 북위(北魏) 영안(永安)년간 병주(並州) 오현(鄔縣)에 기치(寄治)된, 상기 '《魏書》 권 106 上'의 '蔚州'를 '《資治通鑑》 권 253' 및 '《通典》 권 179'에 언급된, 당(唐), 송(宋)대의 울주(蔚州)와 혼동하여 어이진(禦夷鎭)이 산서성 개휴(介休) 일대에 있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는데, 이는 사서의 기록을 정확하게 읽지 못한데서 오는 착오이다.
** 永安: 북위 효장제(孝莊帝) 시기의 연호, 528~530년간 사용  ** 鄔縣: 지금의 산서성 개휴介休 동북 27리에 위치


우선 '《資治通鑑》 권 253' 및 '《通典》 권 179'의 기사는 그 이전에는 없었던 어이(禦夷), 회황(懷荒) 2진(鎭)이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 시기에 이르러, 당(唐), 송(宋)대 울주(蔚州)의 위치에 해당하는 지금의 산서성 영구(靈丘) 일대에 새로 설치된 사실을 알려주는 반면, '《魏書》 권 106 上'의 기사는 이미 존재하던 2진(鎭)을 영안(永安)년간에 폐하고 다른 이름(즉 '蔚州')으로 병주(並州) 오현(鄔縣)에 의탁한, 전혀 다른 시대에 일어난 별개의 사건을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후자는 육진의 난(六鎭之亂)의 여파로 인하여 산서성 영구(靈丘) 지역에서 밀려난 회황(懷荒), 어이(禦夷) 2진(鎭)을 폐기하여 산서성 태원(太原) 서남쪽의 개휴(介休)로 퇴각시키게 된 사태, 즉 2진(鎭)의 '개설(開設)'이 아닌 '종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 12 참조)
** 太武帝: 북위 제3대 황제, 재위 423~452년

 

기치(寄治)는 공적인 임시 의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지방관청이 타처에 더부살이하며 잠시 관리하는 것.  寄治是謂假托公義之名。地方官署僑居他地。暫時治理。
『바이두 백과』 '寄治'

 

명색이 북방 이민족의 침입을 막기 위해 설치한 6진(鎭)의 일부인 2진(鎭)이 도리어 남쪽으로 쫓겨 왔으니 체면이 말이 아니었을 것은 둘째치고, 어이(禦夷), 회황(懷荒) 2진은 그 존재의 의미 자체를 상실하여 폐기된 뒤, 잔류한 일부 행정조직 등이 본래의 연고지인 영구(靈丘) 일대의 전통적 지명인 '蔚州'를 차용하여, 명목상의 '문패'를 바꾸어 달고 오현(鄔縣)에 더부살이한 것이다.

 

지도 12  폐(廢) 어이진의 퇴각로 (북위北魏 영안永安년간)


 

 

 

이제 어이진(禦夷鎭)의 위치를 《通典》 등이 전하는대로 산서성의 영구(靈丘)에 놓았을 경우 고하(沽河)와 유수(濡水)는 어디에 나타나는지를 알아 볼 차례다.

 

지도 4  어이진, 고하 및 유수의 위치 개요

 

공교롭게도 영구(靈丘)의 서북과 동남에 각각 강물의 발원지를 뜻하는 지명이 보인다. 이는 역사상 비중있는 강물이 그곳에서 발원하였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혼하(渾河)의 발원지 혼원(渾源)과 래수(淶水)의 발원지 래원(淶源)이 그것이다. 지도4 및 지도8에 보이는대로 정확히 영구의 서북쪽 40km (90리) 지점에서 혼하가 발원하고, 동남 방향의 그리 멀지않은 곳에서 래수 곧 거마하(拒馬河)가 발원한다.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겠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혼하(상건하桑乾河)가 곧 《水經注》에 어이진(禦夷鎭)과 연관되어 기록된 고하(沽河)이고 거마하는 유수(濡水)이다.

 

 

《한서》 '지리지'의 고하는 어이진 서북 90리에서 발원한다.

 

우선 고하(沽河)에 대하여 알아보자. 고하에 관한 연구는 이미 논하였다시피 그 신빙성에 부분적으로 의심이 가는 《水經注》에 전적으로 의존하기 보다는 《漢書(한서)》 '地理志(지리지)' 등 타 사서의 기록들과 교차 검증이 수반된 방식이 도움이 된다.

 

차여현(且如縣), 우연수(于延水)가 새(塞) 밖에서 나와 동쪽으로 흘러서 영현(寕縣)에 이르고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중부도위(中部都尉)가 다스린다. 且如, 于延水出塞外 東至寕入沽 中部都尉治

『漢書』 권 28 下 '地理志', '代郡'

 

루수(㶟水)는 또 동으로 흘러 좌측의 우연수(于延水) 하구에 도달한다. [우연]수는 새(塞) 밖의 유현진(柔玄鎮) 서쪽 장천성(長川城) 남쪽의 작은 산에서 나온다.  㶟水又東 左得于延水口 水出塞外柔玄鎮西長川城南小山

『水經注』 권 13 '㶟水'

 

우연수(于延水)는 수원성(綏遠省) 흥화현(興和縣) 동북에서 발원하여 나온다. 일명 수수(修水)이다. 동남으로 흘러 찰성(察省) 회안현(懷安縣)의 경계로 들어와 동양하(東洋河)가 된다.  于延水 源出綏遠省興和縣東北 一名修水 東南流入察省懷安縣界爲東洋河

『중국고금지명대사전』 '于延水'

 

지도 5  우연수와 고하의 합류, 본 지도 출처: 『수경주도(水經注圖)』 양수경(楊

守敬) 지음

 

위 사료들에는 내몽골의 흥화현(興和縣)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장가구(張家口)시 동남부 일대에서 고하(沽河)와 만나는 우연수(于延水) 즉 지금의 동양하(東洋河)의 물길이 묘사되어 있다. 상건하(桑乾河)와 합류하기까지의 동양하의 흐름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는 곧 《漢書》 '地理志' 의 고하는 《水經注》 13권의 루수(㶟水) 즉 지금의 상건하란 뜻이다. 너무나도 명확하여 더이상의 설명이 필요없다.

 

평서현(平舒縣), 기이수(祁夷水)가 북쪽으로 흘러 상건현(桑乾縣)에 이르고 고하(沽河)로 들어간다. 왕망(王莽)이 평보(平葆)라 했다.  平舒, 祁夷水北至桑乾 入沽 莽曰平葆

『漢書』 권 28下 '地理志', '代郡'

 

기이수(祁夷水)는 또 동북으로 비호곡(飛狐谷)에 도달한다. .... 기이수는 또 동북으로 흘러 대성(代城)의 서쪽을 지난다. .... 기이수는 또 북으로 상건고성(桑乾故城)의 동쪽을 지나 북으로 흘러 루수(㶟水)에 물을 댄다. 《지리지》에 이르기를 "기이수가 평서현(平舒縣)에서 나와 북으로 상건현(桑乾縣)에 이르러 루수로 들어간다."고 한것이 그것이다. 祁夷水又東北得飛狐谷 .... 祁夷水又東北流逕代城西.... 祁夷水又北逕桑乾故城東 而北流注于㶟水《地理志》曰 祁夷水出平舒縣 北至桑乾入㶟是也 

『水經注』 권 13 '㶟水'

 

옛 [한서漢書]《지리지》에 기이수(祁夷水)가 평서현(平舒縣)에서 나와 북으로 상건현(桑乾縣)에 이르러 습수(濕水)로 들어간다고 했다. 지금의 호류하(壺流河) 부근이다.  古地理志 祁夷水出平舒縣 北至桑乾 入濕 今壺流河勢近之

『山西通志』 권 21

** 습수(濕水)는 루수(㶟水)의 다른 이름이다.

 

지도 6  기이수와 고하의 합류, 원 지도 출처: 《수경주도(水經注圖)》양수경

(楊守敬) 지음 ** 참고로 양수경은 고하를 지금의 백하로 보고있다. 고하의 실

체에 대한 해답을 지도에 그려 놓고도 정작 위치 비정은 틀렸다.

 

 

살펴보건대, 지리지에 기이수가 평서현을 나가 북쪽으로 상건에 이르러 루(㶟)수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루(㶟)수는 고(沽)수라고도 한다.  澍按 地理志 祁夷水出平舒縣 北至桑乾入㶟 㶟一作沽,『十三州志』 闞駰 (감인, 北魏의 지리학자 ) 지음, 청(淸)대 장수집본(張樹輯本)

 

《水經注》에 기록된 기이수(祁夷水)가 지나는 '비호곡(飛狐谷)', '대성(代城)' 등의 지명들은 지금도 장가구시 울현(蔚縣)의 호류하(壺流河) 인근에서 확인되며 그 위치가 《水經注》에 서술된 내용에 정확히 들어맞는다. 또한 역도원(酈道元)은 《漢書》 '地理志'의 고하(沽河)를 루수(㶟水) 즉 상건하(桑乾河)와 동일시하고 있고 《山西通志》에는 루수에 합류한 기이수가 호류하(壺流河)인 것으로 명시되어 있다. 북위(北魏)의 저명한 지리학자 감인(闞駰)은 十三州》에 명쾌하게 "기이수가 평서현을 나가 북쪽으로 상건에 이르러 루(㶟)수로 들어가는데, 루(㶟)수는 고(沽)수라고도 한다."고 했다. 우연수(于延水)와 더불어 기이수와 관련된 문헌사료 역시 《漢書》 '地理志'의 고하는 곧 지금의 상건하임을 분명히 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도 7  서양 제작 지도에 보이는 기이수와 고하의 합류, Guei(기이祁夷), Lukeu(노구盧溝) 및 

Sangkan(상건桑乾) 등의 명칭이 보인다. 지금의 호류하(壺流河)를 기이수(Guei flu.)로 표기하

였다. 본지도 출처: Blaeu, Joan, 1665 Amsterdam

 

소치고(蘓志臯)가 고안현지(固安縣志)에 이르기를 "혼하(渾河)는 (고안)현 서쪽 20 여리에 있다. 본래 상건하(桑乾河)이다. 루하(漯河)라 이름하기도 하고 세간에서는 흔히 혼하라 부른다. 또한 흐르는 물이 탁하다고 하여 소황하(小黄河)라고 하기도 하였다."고 했다.  蘓志臯 固安縣志曰 渾河在縣西二十餘里 本桑乾河 又名漯河 俗呼渾河 亦曰小黄河以流濁故也

『遼史拾遺』 권 14

** 고안현은 지금의 북경(北京)에 있었다.  ** 漯河는 곧 㶟水이다.

 

영정하, 또는 노구하, 또는 혼하, 또는 상건하라고 부른다. 영정[하]의 이름들이다.  永定河 亦曰盧溝河 亦曰渾河 亦曰桑乾河 永定之名

『直隷河渠志』

 

지금의 혼하(渾河)는 산서성 혼원현(渾源縣)의 항산恒山(즉 玄嶽) 인근에서 발원하여 서남으로 흐르다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상건하(桑乾河)와 합류하기까지의 물줄기를 가리키지만, 예전의 '혼하'는 상류의 혼하 및 상건하와 하류의 영정하(永定河) 전부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이름이었다. 이미 언급한대로 혼하가 산서(山西)에서 시작하여 발해만(渤海灣)의 바다에 이르는 비중있는 물줄기이었기 때문에 '혼원(渾源)'이라는 지명도 생겨났을 것이다. 그렇다면 응당 혼하의 발원지는 곧 상건하의 발원지이자 고하(沽河)의 발원지인 것이다.

 

지도상의 혼하(渾河)가 희한하게도 정확히 영구(靈丘)의 서북쪽 40km (90리) 지점에서 발원하고 있다는 사실은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水經注》의 고하(沽河)는 곧 《漢書》 '地理志'의 고하(沽河) 즉 지금의 상건하(桑乾河)이며, 이제 그 위치가 영구로 밝혀진 어이진(禦夷鎭)의 서북 90리에서 발원한다고 한 《水經注》의 기록이 틀림없음을 웅변하는 증거이다. 또한 한편으로는 《水經注》의 자기모순적인(어이진이 장가구시 적성赤城의 백하白河 상류에 있다고도 했으므로) 측면을 잘 보여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이제 유수(濡水)에 대하여 살펴보자.

 

[클릭 확대] 지도 8  어이진, 고하 및 유수의 위치

** 포구수(鮑丘水)에 관한 내용은  ☞ 포구수, 경수, 류수와 우북평군의 속현 위치 비정 을 참조 바람

 

 

유수는 거마하이다.

 

앞서 논하였다시피 《水經注》 14권의 유수(濡水)는 통상 지금의 하북성 당산(唐山)시 및 진황도(秦皇島)시 방면의 난하(灤河)와 동일시 취급된다. 국내의 재야학계에서도 대부분 비판없이 통설에 따라 난하를 유수로 받아들이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바로 그 난하인 것으로 알고있던 유수가 어이진(禦夷鎭)의 동남쪽에서 발원한다고《水經注》 14권, '유수'편의 첫머리에 적혀있는 것이다. 산서성 영구(靈丘)에 어이진이 있었던 것이 분명한 만큼 당연히 그곳에서 발원한 유수가 지금의 난하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설령 장가구시 적성(赤城)의 통설이 정한 위치에 어이진을 가져다 놓는다 하여도 그곳에서 발원하는 유수를 찾을 수 없음 또한 앞서 논한 바와 같다.

 

언급한대로 어이진이 있었던 지금의 산서성 영구(靈丘) 동남쪽 산지에서 발원하는 거마하(拒馬河)가 곧 고대 유수(濡水)의 실체임이 매우 유력하다. 그러면 문헌사료에서 이에 대한 근거들를 찾아보도록 하자. 

 

[클릭 확대] 지도 9  유수 하류, 본 지도 출처: Karte von Tschili und Schantung, 1907

 

고안현(故安縣), 염향(閻鄉)이다. 역수(易水)가 나와서 동쪽으로 범양(范陽)에 이르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병주(并州)에 물을 댄다. 역수는 또한 범양(范陽)에서 래수(淶水)로 들어간다.  故安 閻鄉 易水所出 東至范陽入濡也 并州䆮 水亦至范陽入淶  [주] 사고가 말하기를 "역수(易水)가 범양(范陽)에 이르러 래수(淶水)로 들어간다고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濡'의 음은 놘(乃官反)이다.  [註] 師古曰 言易水又至范陽入淶也 濡音乃官反

『漢書』 권 28上 '地理志', '幽州' '涿郡'

 

범양(范陽)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의 정흥현(定興縣), 래수현(淶水縣), 역현(易縣), 그리고 탁주(涿州)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이다. 《漢書》 '地理志'의 기록에 역수(易水)가 범양에서 유수(濡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같은 구절에서 역수는 범양에서 또한 래수(淶水)에 들어간다고도 하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혼란스러운는 표현일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역수가 유수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역수가 유수와 합류하여 유수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수와 합류하여 소멸된 역수가 또 다시 래수와 합류하였다니 혼란스럽단 말이다. 

 

안사고(顔師古)도 이 부분에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던지 [의역해서] "범양에서 유수로 들어가는 역수를 두고 세간에서는 래수로 들어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라고 주석하여 본문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였다. 즉 유수(濡水)는 곧 래수(淶水)라는 말이다. 그리고 덧붙여 '濡'는 '놘(乃官反)'으로 발음한다고 하였다. 옛 이름이 놘수(濡水)였던 지금의 난(놘)하(灤河) 역시 갈석, 노룡 등의 지명들과 함께 보정(保定)에서 당산(唐山), 진황도(秦皇島)시 방면으로 옮겨졌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漢書(한서)》 '지리지'에 「역수(易水)가 탁군 고안현 염향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범양에 이르러 유수(濡水)[곧 래수(淶水)이다]에 흘러든다」하였다.  漢志易水出涿郡故安縣閻鄉東至范陽入濡[即淶]
『欽定周官義疏』  권33, 1754년 간행

아닌 게 아니라 필자의 짐작대로, 청(淸)대의 《欽定周官義疏(흠정주관의소)》에는 범양에서 역수(易水)와 합류하는 《漢書(한서)》 '지리지'상의 유수(濡水)에 대하여 직접적이고도 명료하게  「곧 래수(淶水)이다」라고 주해되어, 유수(濡水)의 실체가 보다 분명히 밝혀져 있다.

 

광창현(廣昌縣), 래수(淶水)가 동남쪽으로 흘러 용성(容城)에 이르러 하수(河水)로 들어가는데 3개의 군을 지나며 500리를 간다. 병주(并州)에 물을 댄다. 왕망이 말하기를 광병(廣屏)이라 했다.  廣昌 淶水東南至容城入河 過郡三 行五百里 并州䆮 莽曰廣屏

『漢書』 권 28下 '地理志', '幽州' '代郡'

 

유수(濡水)와 래수(淶水)가 동일한 강이라는 사실은 위 구절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즉 《漢書》 '地理志'의 '유주 탁군 고안(幽州 涿郡 故安)' 조항에서 유수(濡水)가 "병주에 물을 댄다(并州䆮)"는 기록이 '유주 대군 광창(幽州 代郡 廣昌)' 조항에서는 강 이름만 래수로 바뀌어 똑같이 "병주에 물을 댄다(并州䆮)"고 되어있다.

 

'渜'은 '놘(奴官切)'으로 발음한다. 치(徴), 차탁음이다. (놘渜)수는 요서(遼西) 비여(肥如)에 있었다. (그곳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혹은 '濡'로도 되어있다. 《전한서》 '지리지'에 역수(易水)가 동쪽으로 범양(范陽)에 이르러 유(濡)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渜 奴官切 徴次濁音 水在遼西肥如入海 或作濡 前地理志易水東至范陽入濡

『古今韻㑹舉要』 권 5

** 徴, 5음(音) 즉 '궁상각치우'의 '치'  ** 차탁음(次濁音), 콧소리 즉 비음을 말한다.  ** 《고금운회거요(古今韻㑹舉要)》는 중국 원나라 때의 웅충(熊忠)이 그의 스승인 황공소(黃公紹)가 1292년에 지은 《고금운회(古今韻會)》에 주석을 첨가하여 전 30권으로 만든 운서(韻書)이다.

 

원(元)대의 웅충(熊忠)은 《古今韻㑹舉要》에서 요서의 비여에 있던 놘수(渜水)는 '濡水'로 쓰기도 한다면서 《漢書》 '地理志'를 인용하여 유수(濡水)는 범양(范陽)에 있었다고 하였다. 웅충은 통상 지금의 당산(唐山), 진황도(秦皇島)시 방면에 비정되는 고대의 평주(平州) 요서군(遼西郡) 비여현(肥如縣)과 그 일대를 흐르던 유수가 범양 즉 지금의 보정(保定)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분명히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래수(淶水)는 보정부 역주 래수현 동북 30리에 있다. 북역수(北易水)라 이름하기도 한다. 역수(易水)는 보정부 안주성(安州城) 북쪽에 있다. 남역수(南易水)라 이름하기도 한다.  淶水在保定府易州淶水縣東北三十里 亦名北易水 易水在保定府安州城北 亦名南易水

『周禮述註』  권 19 (李光坡 저, 1651~1723)

 

또 유수(濡水)는 (용성容城)현의 서쪽에 있다. 북역수(北易水)라 부르기도 한다. 박수(雹水)는 현의 남에 있다. 원래 포수(鮑水)이었다. 《水經注》에 실려있다.  又濡水在縣西 亦曰北易水 雹水在縣南 旣鮑水 載於水經注

『萬歷容城縣志』  권 7 (萬歷: 1573~1620)

 

유수濡水는 (역易)주의 북에 있다. 즉 북역수(北易水)이다. 동남쪽으로 정흥현의 경계에 들어간다.  濡水在州北 即北易水也 東南入定興縣界

『大清一統志』  권 30 '易州'

 

서남에 오회산(五迴山) 이 있다. '뢰(雷)'라는 시냇물이 나온다. 서하(徐河)의 위쪽 발원지이다. 서북에 궁독산(窮獨山)이 있다. 유수(濡水)가 그곳에서 나온다. 또한 남쪽에는 역수(易水)가 있는데, (역州)주의 가장가리 서쪽 산에서 나온다. 유수(濡水)와 함께 모두 동쪽으로 흘러 백구하(白溝河)가 된다. 이른바 북역수(北易水)이다.  西南有五迴山 雷溪出焉徐河之上源也 西北有窮獨山 濡水所出 又南有易水 出州境之西山 與濡水並東流 而為白溝河 所謂北易水也

『明史』  권 40 '保定府'

 

백구하(白溝河)는 신성현(新城縣) 남쪽 35리에 있다. 거마하(拒馬河)의 하류이다. 송(宋)나라와 요(遼)나라의 경계였던 곳이다.  白溝河在新城縣南三十五里 拒馬河下流 宋與遼分界之處

『明一統志』  권 2 '保定府'

 

위 《주례술주(周禮述註)》, 《만력용성현지(萬歷容城縣志)》 및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 등의 사료에 의하면 래수(淶水) 즉 거마하(拒馬河)와 유수(濡水)가 모두 북역수(北易水)로도 불렸다. 거마하가 곧 유수라는 뜻으로 들린다. 그런데 그뿐만 아니라 《명사(明史)》와 《명일통지(明一統志)》에 유수의 하류가 백구하(白溝河)이고 거마하의 하류 역시 백구하라고 하였으니 유수 와 거마하는 동일한 강의 다른 명칭이었음이 확실하다. 또 한가지 눈여겨 볼 점은 유수를 기록한 가장 이른 문헌사료인 《漢書》 '地理志'에 유수가 분명히 보정 일대에서 역수(易水)와 합류하는 강으로 나타나 있다는 점이다. 또한 앞서 소개한 《資治通鑑》 82권의 기사에 나오는 어이진(禦夷鎭)의 동남쪽에서 발원한 유수 역시 《漢書》 '地理志'의 유수 관련 기사의 경우와 똑같이 안사고(顔師古)의 말을 빌어 '濡'를 '놘'으로 발음 한다고 하였다. 어이진의 동남쪽에서 발원하여 범양에 이르른 뒤 역수와 합류하는 고대의 유수는 곧 거마하임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유수의 발원지 유원은 지금의 보정시 래원이다.

 

가을 7월 수레를 타고 유원(濡源)에서 서쪽으로 참합파(參合陂)에 나들이하였다. 북궁전의 담장쌓기를 30일만에 마침으로서 곧 궁으로 돌아왔다.  秋七月 車駕 自濡源 西幸參合陂 築北宮垣 三旬而罷乃還宮

『魏書』 권 2 '太祖紀'

 

[대군(代郡)의 참합파(參合陂)는] 지금의 마읍군(馬邑郡)에 있다.  [代郡之參合陂]在今馬邑郡

『通典』 권 196

 

후위(後魏)의 삭주(朔州)이다. 북제(北齊)의 북삭주(北朔州)가 되었다. 수(隋)나라가 대군(代郡)을 설치하였다. 거듭 마읍(馬邑)으로 개명하였다. 당나라가 삭주로 되돌렸다. 또 다시 마읍이 되었다. 거듭 되돌려 삭주가 되었다. 즉 지금의 산서(山西) 삭현(朔縣)이 치소이다.  後魏朔州 北齊爲北朔州 隋置代郡 尋改名馬邑 唐復爲朔州 又改爲馬邑 尋復爲朔州 卽今山西朔縣治

『中国古今地名大辞典』 '馬邑郡'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참합(參合)의 옛성이 삭주(朔州) 정양현 북쪽에 있다 하였다.  括地志云 參合故城在朔州定襄縣北

『御批資治通鑑綱目』 권 17

 

'유원(濡源)'은 유수(濡水)의 발원지를 뜻한다. 위 《위서(魏書)》 '태조기(太祖紀)'의 기록에 따르면 북위(北魏) 태조(太祖, 386년~409년간 재위)가 나들이한 참합파(參合陂)는 유원의 서쪽 방면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通典》 등의 사서에 참합파는 당(唐)대의 마읍군(馬邑郡) 즉 지금의 산서성 삭주(朔州) 일대에 있었다고 했다. 《어비자치통감강목(御批資治通鑑綱目)》 에 전하는 《괄지지(括地志)》의 기록을 통해서도 또한 참합(合)의 옛성이 지금의 삭주 일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삭주(朔州)와 마읍(馬邑)은 아래의 《대청광여도(大淸廣輿圖)》에서 그 위치가 확인된다. 거마하(拒馬河)가 발원하는 래원(淶源)에서 정확히 서쪽 방향이다. (지도 10 『大淸廣輿圖』에 나타나는 유원과 참합파의 상대적 위치 참조) 《魏書》 '태조기'의 기록은 지금의 래원(淶源)이 고대 유수(濡水)의 발원지인 유원(濡源)임을 알려주는 또 하나의 근거가 된다. 반면 장가구(張家口)시 적성(赤城) 방면에 정해 놓은 통설의 유원(濡源)에서 볼 때 산서성 삭주(朔州)는 도저히 서쪽이라고 할 수 없는 서남 방향이다. 그리고 또한 그곳에서 수레를 타고 이동하였다고 하기에는 삭주까지의 거리가 지나치게 멀다.

 

지도 10 『大淸廣輿圖』에 나타나는 유원과 참합파의 상대적 위치  ** 지도에 보이는 '광창(廣昌)'

은 래원의 또 다른 고대 지명이다.

 

 

거마하는 두곳에서 발원한다.

 

서두에 소개하였던 《水經注》의 유수(濡水) 관련 기록으로 돌아가서 거마하(拒馬河)의 발원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살펴보자.

 

유수(濡水)는 어이진(禦夷鎮) 동남쪽을 나온다. 유수는 두 곳에서 발원하여 한 쌍을 이루며 서북쪽 산골짜기로 이끌려 흐르다가 산을 나와 합류하여 하나의 하천을 이룬다.  濡水出禦夷鎮東南  其水二源雙引 夾山西北流 出山 合成一川

『水經注』 권 14 '濡水'

 

위 《水經注》 기록의 '夾山西北流'는 '夾流'와 '山西北'의 뜻이 합쳐진 것으로 볼 수 있다. '夾流'는 "산골짜기를 흐른다."는 의미인 것이 분명하다. (기록에 '골짜기 협峽'이 아닌 '낄 협夾'이 사용된 이유는 다음 글자 '山'이 바로 따르기 때문이다. 즉, '夾山西北'에는 '峽'과 '山西北'의 두가지 의미가 응축되어 있다고 본다.) '山西北'의 경우 산이름도 없이, 막연히 '산의 서북쪽'이라고만 되어있어 해석이 막막해 보이지만, 래원(淶源)의 지리적 특성에 적용시켜 분석하면 그 뜻이 통한다. 래원은 사방팔방이 험준한 산들로 둘러싸여져 있는 고원분지이다. (지도 8  어이진, 고하 및 유수의 위치 참조) 따라서 '山西北'은 유수(濡水) 즉 거마하(拒馬河)가 관통하는 래원의 중심부에서 바라보았을 때 병풍처럼 주위를 뱅 둘러싸고 있는 산지(山地)의 서북방향에 위치한 부분을 가리킨다. 아래 위성지도에 드러난대로 래원의 중심부를 기준으로 그 서북쪽의 산지에서 발원하는 거마하가 두 갈래의 물줄기를 이루며 각각의 산골짜기를 나란히 타고 흘러내리다가 산을 벗어나면서 하나로 합치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도 11 거마하의 발원지 3D 위성지도 참조) 《水經注》의 기록에 정확히 일치한다.

 

거마하(拒馬河)는 보정(保定)시 래원현(淶源縣)과 대동(大同)시 영구현(靈丘縣)을 가르는 산지에서 발원한다. 어이진(禦夷鎭)을 영구에 놓고 보면 《水經注》의 "유수(濡水)는 어이진 동남쪽을 나온다."는 기록에 놀랍도록 부합한다. 결국 유수와 관련된 위의 모든 근거들은 통설에 따라 당산(唐山), 진황도(秦皇島)시 일대의 난하(灤河)인 것으로 잘못 알려졌던 유수의 실상은 보정의 거마하(拒馬河)가 틀림없음을 밝히고 있다.

 

지도 11  거마하의 발원지 3D 위성지도, 두갈래의 물길이 각각 서북쪽의 산골짜기를 타고 흘러나와 

합류하는 지형이 뚜렸이 확인된다. 본 지도 출처: 구글어스

 

이상 《通典》, 《資治通鑑》 등의 문헌사료에서 새로 발굴한 기록에 따른 어이진(禦夷鎭)의 위치를 중심으로 《水經注》에 기술된 고하와 더불어 유수의 실체를 밝혀 보았다. 그 결과 고하(沽河)는 산서(山西)성 대동(大同)시 혼원(渾源)현의 항산(恒山) 일대에서 발원하여 지금의 혼하(渾河), 상건하(桑乾河) 및 영정하(永定河)로 이어지는 물줄기임이 확인되었고, 유수(濡水)는 하북성 보정(保定)시 래원(淶源)현의 서북쪽 산지에서 발원하는 지금의 거마하(拒馬河)로 확인되었다. 고하, 유수 등 고대 물줄기의 위치를 잘못 비정하게 되면 첫 단추를 잘못 끼우는 격이 되어 노룡(盧龍), 낙랑(樂浪), 갈석(碣石), 양평(襄平), 고죽(孤竹), 수성(遂城) 등 한국 고대사의 참된 영역을 밝히는데 핵심적인 지명들이 줄줄이 왜곡될 수 밖에 없다. 시정이 시급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