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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구수(鮑丘水), 경수(庚水), 류수(灅水)와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속현(屬縣) 위치 비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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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글을 읽기 전에 아래에 링크된 글들을 반드시 먼저 읽어볼 것을 권함.

    ☞ 새로 밝혀지는 우북평군 무종현의 절대위치

    《수경주》의 어이진은 산서성 영구이고 고하는 상건하, 유수는 거마하이다

 

《수경주(水經注)》에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부근을 지나는 포구수(鮑丘水), 경수(庚水) 및 류수(灅水)에 관한 자세한 지리적 정보를 담은 기록들이 있다. 새로 밝혀진 무종현의 절대 위치 즉 지금의 보정시(保定市) 완현(完縣)을 기준점으로 하여 《水經注》를 중심으로 해당 사료를 살펴보고 또한 타 사료들과 비교, 분석하여 포구수, 경수, 류수의 경로를 찾아 그 실체를 밝혀보도록 한다. 뒤에 분명해지겠지만, 포구수, 경수, 류수의 실체가 밝혀지면 (후한後漢 시기) 우북평군의 나머지 속현들(준미현俊靡縣, 토은현土垠縣, 서무현徐無縣)의 위치도 쉽게 드러나게 된다. 단, 《水經注》는 고대 중국 대륙의 지리를 연구하는데 필수적인 사료임에도 불구하고 후대에 이루어진 지명 이동에 맞추어 가필된 흔적이 보이는 등 주의할 부분이 있는 사서라는 점을 미리 언급해둔다.

 

북평(北平) 옛성은 완현(完縣)의 동북에 있다.  北平故城在完縣東北

『大清一統志』 권 11

 

북평(北平), 역시 한(漢)나라의 옛 현(縣)이다. 당(唐)나라의 정주(定州)에 속하였었다. 《구역지(九域志)》(즉 《元豊九域志》)에 (정)주(州)의 북쪽 9리에 있었다고 했다. 송백(宋白)이 말하기를 "정주(定州) 북평현(北平縣)은 한(漢)나라 곡역현(曲逆縣)의 땅이다. 후한(後漢)이 '포음(蒲陰)'으로 고쳤다. 후위(後魏) 효창(孝昌)년간에 지금의 현 동북 20리의 북평성(北平城)에 북평군(北平郡)을 설치하였다. 당(唐)나라가 북평현(北平縣)으로 삼았다."고 했다.  北平 亦漢古縣 唐屬定州 九域志 在州北九里 宋白曰 定州北平縣 漢曲逆縣地 後漢改蒲陰 後魏孝昌中 於今縣東北二十里置北平郡於北平城 唐為北平縣

『資治通鑑』 권 242 (胡三省 註)

** 송백(宋白) 송(宋) 태종(太宗) 때 문신으로 자는 태소(太素). 이방(李昉)과 함께《문원영화(文苑英華))》천여 권을 편찬하였다.

 

북평현(北平縣), .... 본래 곡역현(曲逆縣)의 땅이다. .... 《(십삼주지(十三州志)》에 이르기를 "후한(後漢) 장제(章帝)가 북악(北岳)에 순행하였다. '곡역(曲逆)'이란 이름이 좋지 않다하여 '포음(蒲陰)'으로 고쳤다. 후위(後魏) 효창(後魏)년간에 지금의 현 동북 20리의 북평성(北平城)에 북평군(北平郡)을 설치하였다."고 했다.  北平縣 .... 本秦曲逆縣之地 .... 《十三州志》云 後漢章帝巡北岳 以曲逆名不善 改爲蒲陰縣 後魏孝昌中 于今縣東北二十里北平城置北平郡

『太平寰宇記』 권 62

 

한나라의 곡역현(曲逆縣)이다. 후한(後漢)이 포음(蒲陰縣)으로 개명하였다. 북제(北齊)가 개명하여 북평(北平縣)이되었다. 옛 치소가 지금의 직예(直隸) 완현(完縣)의 동남쪽에 있다.  漢曲逆縣 改曰蒲陰 北齊改爲北平 故治在今直隸完縣東南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蒲陰縣'

 

위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 《자치통감(資治通鑑)》 주(註)《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의 사료에 따르면 고대의 북평성(北平城)은 지금의 완현(完縣) 동북 20리에 있었다.

 

경수(庚水)는 또한 남쪽으로 흘러 북평성(北平城) 서쪽을 지난 후에 또 남쪽으로 흘러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가는데 이 곳을 척구(拓口)라 한다.  庚水又南逕北平城西 而南入鮑丘水 謂之拓口

『水經注』 권 14 '鮑丘水'

 

위 《水經注》의 기록에 북평성(北平城)의 위치를 기준점으로 적용하여 살펴보면 경수(庚水)는 지금의 완현(完縣) 동쪽 측면을 북에서 남으로 지나는 물줄기임을 알 수 있다. 이로 미루어 《水經注》의 경수는 보정시 완현(즉 순평현順平縣)과 만성구(滿城區) 사이를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지금의 계하(界河)가 틀림없다. (지도 1, 2 참조)

 

포구수(鮑丘水)는 어이진(禦夷鎭) 북쪽 새(塞) 가운데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흘러 구장령(九莊嶺) 동쪽을 지나는데 세간에서는 대유하(大榆河)라고 한다.  鮑丘水出禦夷北塞中 南流逕九莊嶺東 俗謂之大榆河

『水經注』 권 14 '鮑丘水'

 

포구수(鮑丘水)는 또한 동쪽으로 흐르다가 경수(庚水)가 포구수(之)로 들어간다.  鮑丘水又東 庚水注之 

『水經注』 권 14 '鮑丘水'

 

위 《水經注》의 두 기록은 포구수(鮑丘水)에 관한 두가지 사실을 알려준다. 하나는 포구수가 어이진(禦夷鎭) 북쪽에서 발원하는 물줄기라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포구수가 무종현(無終縣) 부근에서 경수(庚水)와 합류한다는 것이다. 어이진은 지금의 산서성 영구(靈丘)에 있었고 경수는 지금의 계하(界河)로 밝혀졌으니 이 두가지 사실을 단초로 하여 포구수의 경로를 찾을 수 있다. 

 

(포구수는) 또 남으로 흘러 어이진(鎮) 동남쪽 90리의 서밀운(西密雲)의 수비성(戍) 서쪽을 지난다.  又南 逕鎮東南九十里西密雲戍西

『水經注』 권 14 '鮑丘水'

 

북계수(其水)는 남쪽으로 흘러 활염현(滑鹽縣) 옛 성의 동쪽을 지나는데 왕망이 광덕현(匡徳縣)으로 바꾸었고 한(漢)의 명제(明帝)는 염전현(鹽田縣)으로 바꾸었다. 오른쪽으로 승치(承治)가 있는데 세간에서는 곡염성(斛鹽城)이라고 하며 서북쪽으로 어이진까지 200리이다. (북계수는) 남쪽으로 포구수(鮑丘水)로 들어간다.  其水南流逕滑鹽縣故城東 王莽更名匡徳也 漢明帝改曰鹽田 右承治 世謂之斛鹽城 西北去禦夷鎮二百里 南注鮑丘水

『水經注』 권 14 '鮑丘水'

 

더욱이 포구수(鮑丘水)는 어이진(禦夷鎭)으로 부터 동남쪽으로 90리되는 지점과 200리되는 지점 부근을 통과하여 지나간다고 기록되어 있다. 어이진을 산서성 영구(靈丘)에 놓고 보면 기록은 현 당하(唐河)의 경로에 정확히 부합한다. 이로서 포구수는 영구의 동북쪽 산지에서 당하의 지류(지금의 落水河)로서 발원, 당하에 합류하여 대략 동남 방향으로 한참을 흐른뒤, 당현(唐縣)의 서쪽에 이르러 당하로부터 갈라져나와 동쪽으로 당현을 지나고, 완현(完縣)에 이르러 곡역하(曲逆河) 및 계하(界河)와 차례로 합류한 뒤 동쪽으로 계속 진행, 청수하(府河) 및 부하(府河)로 이어져 발해만의 바다에 이르는 물줄기임을 알 수 있다. (지도 1, 2, 3 참조)

 

지도 1  右北平郡 하천 위치도 1, 본지도 출처: 『保定府志』 권 17 (1886년)

 

지도 2  右北平郡  하천 위치도 2, 본지도 출처: Karte von Tschili und Schantung, 1907

 

준미(俊靡), 류수(灅水)가 동남쪽으로 무종(無終)에 이르러 동쪽으로 경(수)로 들어간다. (왕)망이 '준마(俊麻)'라고 말하였다. (안)사고가 '灅'의 음은 '류(力水反)' 또는 '뢰(郎賄反)'라고 말하였다.  俊靡 灅水南至無終 東入庚 莽曰俊麻 師古曰灅音力水反又音郎賄反

『前漢書』 권 28上 '地理志'

 

《지리지(地理志)》에서 말하기를 ‘류수(灅水)는 준미현(俊靡縣)에서 나와서 남쪽으로 무종(無終)에 이르러 동쪽으로 흘러 경수(庚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는데 경수는 세간에서 척수(拓水)라고도 한다.  地理志曰 灅水出俊靡縣 南至無終 東入庚水 庚水世亦謂之為拓水也

『水經注』 권 14 '鮑丘水'

 

경수(庚水)는 또 서남쪽으로 흐르다가 류수(灅水)가 경수로 들어간다. 류수(水)는 우북평(右北平) 준미현(俊靡縣)에서 나오는데 왕망의 준마(俊麻)이다.  庚水又西南流 灅水注之 水出右北平俊靡縣 王莽之俊麻也

『水經注』 권 14 '鮑丘水'

 

완현(完縣) 부근에서 동쪽으로 계하(界河 즉 고대의 庚水)와 합류하는 두 물줄기 즉 곡역하(曲逆河)와 포하(蒲河) 중에 곡역하는 위에 논한 바와 같이 포구수(鮑丘水)로 밝혀졌으니 나머지 하나인 포하는 류수(灅水)가 틀림없다. 더구나 포하는 남쪽 또는 동남쪽으로 흘러 무종(無終)에 이르고 동쪽으로 계하와 합류하는데, 이는 《水經注》에 기록된 류수의 경로에 부합한다. 또한, 발원지로부터 계하의 경로는 거의 대부분 동남 방향이지만 무종 인근의 매우 짧은 구간을 서남으로 흐른 뒤 포하와 합류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경수가 서남쪽으로 흐르며 류수와 합류한다고 한 《水經注》의 기록에 놀랍도록 일치하는 부분이다. (지도 2 참조)

 

경수(水)는 우북평(右北平) 서무현(徐無縣)의 북쪽 새(塞) 가운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서무산(徐無山)을 지난다.  水出右北平徐無縣北塞中 而南流 厯徐無山

『水經注』 권 14 '鮑丘水'

 

류수(灅水)와 경수(庚水)의 실체가 밝혀짐으로써 우북평군(右北平郡) 서무현(徐無縣)과 준미현(俊靡縣)의 위치도 저절로 드러나게 되었다. 즉 류수는 우북평군 준미현에서 발원한다고 하였으니 준미현은 지금의 완현(完縣) 북쪽 포하(蒲河)의 상류에 위치했음을 쉽게 알 수 있고, 서무현의 위치 또한《水經注》의 기록에 따라 지금의 계하(界河) 상류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지도 3 참조)

 

이로써 후한(後漢) 시기 우북평군(右北平郡)의 4현 중 3현의 위치가 확인 되었다. 그러면 나머지 1개 현 즉 토은현(土垠縣)의 위치를 추적하여 보자.

 

(建武元年 25) 광무(光武)가 원지(元氏)에서 북쪽으로 우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을 공격했다. 추격하여 우북평(右北平)에 이르러 연이어 쳐부수었다. 또 순수(順水)의 북쪽에서 싸웠으나 승리의 기세를 타고 진격하며 적을 가벼이 여기다가 도리어 패하였다.  光武北擊尤來 大搶 五幡於元氏 追至右北平 連破之 又戰於順水北 乘勝輕進 反為所敗

『後漢書』 권 1 上 '光武帝紀'

 

한(漢)나라의 광무(光武)가 동마(銅馬), 오번(五幡)을 북평(北平)까지 추격하여 순수(順水)의 북쪽에서 부수었다. 승리의 기세를 타고 북으로 추격하였으나 패하였다. .... 순수는 서수(徐水)의 별명일 것이다.  漢光武追銅馬 五幡于北平破之于順水北 乘勝追北 為其所敗 .... 順水 蓋徐州之別名也

 

『水經注』 권 11 '滱水'

 

.... 광무가 계(薊)로 돌아와 다시 경엄과 오한, 경단(景丹), 합연(蓋延), 주우(朱祐), 비융, 경순(耿純), 유식(劉植), 잠팽(岑彭), 제준(祭遵), 견담, 왕패(王覇), 진준(陣俊), 마무(馬武) 등 13장군을 보내 적들을 노(潞)의 동쪽까지 추격하도록 했는데  평곡(平谷)에 이르러 두 번 싸워 1만 3천여급(級)을 참수(斬首) 시켰다. 우북평군(右北平郡)의 무종(無終)과 토은(土垠) 사이에서 마침내 추격을 중단하고 준미(俊靡)에 이르러 (薊로) 돌아왔다.  .... 光武還薊 復遣弇與吳漢 景丹 蓋延 朱祐 邳彤 耿純 劉植 岑彭 祭遵 堅鐔 王霸 陳俊 馬武十三將軍 追賊至潞東 及平谷 再戰 斬首萬三千餘級 遂窮追於右北平無終土垠之間 至俊靡而還
『後漢書』 권 49 '耿弇傳'
** 《水經注》 권 14 '포구수' 조항의 기록 즉 "구하(水)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서쪽에 있는 산의 백양곡(白楊谷)에서 나온다. (구하는) 서북쪽으로 흘러 어양군 평곡현(平谷縣)을 지난다.  水出右北平無終縣 西山 白楊谷 西北流逕平谷縣" 에 미루어 평곡(平谷)은 무종(無終)의 서북쪽 산지 일대에 있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광무제(光武帝)의 오번(五幡) 등에 대한 북벌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後漢書》 '경엄전(耿弇傳)'의 위 기사를 같은 책 '광무제기(光武帝紀)'의 기사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건무(建武)원년(25년)에 우북평에서 첫번째 대승을 거둔 기세에 취해 무리하여 순수(順水,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와 서수구徐水區 일대의 서수徐水)를 건넜다가 적들의 반격을 받고 대패한 광무제는 일단 계(薊, 지금의 보정시 당현唐縣)로 후퇴한 뒤 장수들로 하여금 군졸들을 추스려 다시 적진을 향해 돌진하게 하였다. 그 결과, 광무제군은 평곡(平谷)에서 대승을 거두고, 이어서 북동쪽으로 달아나는 적들을 뒤쫓았다. 《後漢書》의 저자 범엽(范曄)은 당시 광무제군의 2차 추격로에 대해 서술하면서 광무제군이 무종(無終)과 토은(土垠)의 중간 지점까지만 추격하고 준미(俊靡)를 거쳐 돌아왔다고 하였다. 아마도 1차 공격때 순수 이북의 적진 깊숙이 진입했다가 도리어 대패한 경험 때문에 광무제군은 순수에 못 미치는 곳에 이르러 더이상의 추격을 포기하고 회군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런데 그 일대에서 준미(지금의 포하蒲河 상류)로 가는 길은 경수(庚水, 지금의 계하界河)를 따라 산지를 관통하는 협로가 유일하다. 따라서 광무제군은 경수까지 적들을 추격하고 북서 방향으로 경수를 거슬러 올라가서 준미에 이르른 뒤 류수(灅水, 지금의 蒲河) 상류를 거쳐 남쪽 계(薊)에 위치한 우군의 진영으로 돌아온 것이 분명해 보인다. (지도 3 참조) 중요한 점은 지금의 완현(完縣)과 만성구(滿城區)의 중간 지점을 계하(界河, 고대의 경수庚水)가 동서로 가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지리적으로 보았을 때 고대의 토은현(土垠縣)은 지금의 보정시 만성구 일대에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클릭 확대] 지도 3  右北平郡의 속현, 관련 지명 및 하천 위치도

계(薊)의 비정 위치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https://earthlin9.tistory.com/20 참고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