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史記』 '匈奴列傳'
조양은(造陽) 연(燕)나라가 장수 진개(秦開)를 앞세워 동호(東胡)를 침략하고 그 뒤 천여리를 물러난 동호를 막기 위하여 쌓았다고 사서에 전해지는 연장성의 서쪽 기점이다. 조양에 대하여 그 위치가 대체로 今 하북성 장가구시(張家口市) 일대인 것으로 학계의 의견이 수렴한 듯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대략적인 추정일 뿐 주장을 뒷바침 할만한 뚜렷한 사료적 근거나 단서가 있어서는 아니다.
위소가 말하기를 "지명(조양)은 상곡에 있다."고 했다. 韋昭曰 地名在上谷
『史記集解』 권110
[주] 사고가 말하기를 "조양은 지명으로 상곡의 변경에 있고 양평은 즉 요동의 치소이다."라고 했다. 師古曰 造陽地名在上谷界 襄平即遼東所治也.
『前漢書』 권94 上
전국시기 조(趙)나라의 공자 가(嘉)가 스스로 대(代)왕이 되어 군사를 상곡에 주둔시켰다. 진나라가 대(代)를 멸하고 상곡군을 설치하였다. 옛 보정, 역주, 선화이고 순천과 하간의 일부에 미친다. 모두 다 그 지경이다. 戰國時 趙公子嘉自立為代王 軍上谷 秦滅代 置上谷郡 舊保定 易州 宣化 及順天 河間 之一部 皆其境
『中国古今地名大辞典』 '上谷郡'
조양은 선화(宣化)에 있었다. 지금 그땅은 변방의 바깥으로 더욱 멀리 동떨어져 나가 있지만, 진한(秦漢) 때에는 상곡군의 장성, 즉 지금의 거용(居庸)관 등 내삼관(內三關)의 변경이었다. 造陽在宣化 今其地尚懸出邊外 秦漢時上谷郡之長城 即今居庸等內三關之邊牆
『欽定熱河志』 권56
명대(明代)로부터 현재까지 하북성 경내 내장성(內長城) 언저리의 거용관(居庸關), 자형관(紫荊關), 도마관(倒馬關) 등 일련의 3관문이 내삼관(內三關)을 이루었다. 明代時以現今 河北省境內 沿內長城 一路的 居庸關, 紫荊關, 倒馬關 三關為內三關.
『바이두 백과』 '內三關'
위 사료들의 내용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전국(戰國)시기의 상곡군(上谷郡)은 今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일대이고 조양(造陽)은 그 서북 변경 즉, 거용관(居庸關)에서 서남 방향으로 자형관(紫荊關)을 거쳐 보정시 서북부의 도마관(倒馬關)까지 내장성(內長城)을 따라 이어지는 경로에 근접한 어딘가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장가구시(張家口市)에서 남쪽으로 한참을 내려온 보정시 서북부 일대까지도 조양의 후보지에 포함될 수 있다는 점에서 현 학계의 견해와는 사뭇 차이가 있다.
造陽, 內長城, 內三關의 상대적 위치도
한나라의 오원군에 자형관이 있었다.
[주] 색은에 말하기를 "살피건대 《태강지기》에 진(秦)장성의 오원(五原) 북쪽 9리를 조양(造陽)이라고 한다."고 했다. 案隱曰 案太康地記 秦塞 自五原北九里 謂之造陽
『史記』 권110
《진태강지리기》에 "오원새(五原塞)의 북쪽 9리에 있다. 조양(造陽)이라고 한다."고 했다. 晉太康地理記 在五原塞之北九里 謂之造陽
『太平寰宇記』 권71
《진태강지기》에 "진(秦)장성에는 오원군(五原郡)북쪽 9리에 조양(造陽)이라는 지명이 있다."고 했다. 晉太康地記 秦塞 自五原郡北九里 地名造陽
『御批資治通鑑綱目』 권2 上
『사기(史記)』 백납본(百衲本), '흉노전(匈奴傳)'
여러 문헌 사료에 조양(造陽)과 관련된 오원(五原)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오원(五原), 오원새(五原塞), 또는 오원군(五原郡)으로 나타나는데, 모두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에 기원한 기록들인 것으로 미루어 동일한 곳을 가리키는 지명들일 것이다. 오원으로부터 불과 9리의 거리에 조양이 있다고 했으니 오원과 조양은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사료를 통해 오원의 위치를 먼저 찾을 수 있다면 조양이 어디인지는 저절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참고로 《사기색은(史記索隱)》, 《자치통감(資治通鑑)》, 《통전(通典)》 등의 사서들에는 조양이 오원의 북쪽 9리가 아닌 900리인 것으로 잘못 적혀 있어 조양의 위치를 파악하는데 불필요한 혼란을 일으킨다. 이 사안에 대해서는 본글의 말미에 따로 논하기로 한다.
천리사 (千里思)
이릉은 오랑캐 사막에 묻히고 / 李陵沒胡沙 (이능몰호사)
소무는 한나라로 되돌아왔도다. / 蘇武還漢家 (소무환한가)
멀고도 먼 오원의 관문 / 迢迢五原關 (초초오원관)
북방의 눈은 변상의 꽃처럼 날린다. / 朔雪亂邊花 (삭설난변화)
한번 떠나 나라와 떨어지니 / 一去隔絶國 (일거격절국)
돌아가고파 긴 탄식만 하노라. / 思歸但長嗟 (사귀단장차)
큰 기러기 서북을 향하고 / 鴻雁向西北 (홍안향서배)
그 편에 멀리 하늘 끝에 소식 전한다. / 因書報天涯 (인서보천애)
《한서지리지》에 "대군(代郡)에 오원관(五原關)이 있다."고 했다. .... 《태평환우기》에 .... "예전부터 오원관이 있었던 지세(地勢)에 연유하여 군읍의 명칭이 된 '오원'이 있다."고 했다.漢書地理志 代郡有五原關 .... 太平寰宇記 .... 以其地勢有五原 舊有五原關 因為郡邑之稱
『李太白集注』 권5
대군은 진나라가 설치하였다. (왕)망이 염적이라 하였다. 오원관(五原關)과 상산관(常山關)이 있으며, 유주에 속한다. 응소가 말하기를 옛 대국(代國)이라 하였다. 代郡 秦置 莽曰厭狄 有五原關 常山關 屬幽州 應劭曰故代國
『前漢書』 권28 下
** 상산관(常山關), 즉 今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의 도마관(倒馬關)을 가리킨다.
오원현, 3개의 마을이 있다. 지금 주는 남으로 경주 마령현의 북쪽 경계에 이른다. 즉 옛 마령현의 땅이다. 정관2년에 현과 (염)주를 함께 세웠다. 예전부터 오원관이 있었던 지세(地勢)에 연유하여 군읍의 명칭이 된 '오원'이 있다. 五原縣 三鄉 今州南至慶州馬嶺縣北界 即舊馬嶺縣地 貞觀二年 縣與州同立 以其地勢有五原 舊有五原關 因為郡邑之稱
『太平寰宇記』 권37, '鹽州' 조항
이백의 시 '천리사'를 주해한 《李太白集注》는 위와 같이 《한서(漢書)》 '地理志'의 기사를 인용하여 시에 등장하는 오원관(五原關)이 한(漢)나라의 도읍에서 멀리 떨어진 대(代)군에 있던 관문이었음을 전하고 또한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의 인용 기사에 근거하여 오래전부터 오원관이 있었기 때문에 오원관 인근 지역이 '오원군(五原郡)'으로 명명되었던 사실, 즉 '오원군'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도 밝히고있다.
자형관(紫荆關)은 역주 서쪽 80리에 있다. 즉 한(漢)나라의 오원관(五原關)이다. 일명 자장관이다. 송(宋)나라 때에는 또한 금파관이라 했다. 《방여기요》에 이르기를 "송나라 사람들은 자형관을 금파관이라 불렀다"고 했다. 후에 산에 자형나무가 많다고 하여 (자형관으로) 개명하였다.紫荆關在易州西八十里 即漢之五原關也 一名子莊關 宋時亦曰金坡關 方輿紀要 紫荆關宋人謂之金坡關 後以山多紫荆樹改名為
『畿輔通志』 권41
오원(五阮)은 즉 오원(五原)이다. 《설문해자》에 "원(阮)은 대군(代郡)의 오원관(五阮關)이다"라고 했다. 五阮即五原 説文 阮代郡五阮關也.
『通雅』 권16
《설문해자》에 "대군(代郡)의 오원관(五阮關)이다."라고 했다. 《전한지리지》에는 오원(五原)으로 되어있다. 《정음》에 "원(阮)은 원(原)의 옛 글자이다."라고 했다. 또 《광음》에 "오원군(五阮郡)"이라고 했다. 《전한지리지》에는 오원군(五原郡)으로 되어있다. 《說文》 代郡五阮關也. 《前漢地理志》 作五原. 《正韻》 阮, 古原字. 又 《廣韻》 五阮郡. 《前漢地理志》 作五原郡.
한편 보정시 역현(易縣)의 서쪽 산지에 위치한 자형관(紫荆關)은 서기전 239년 여불위(呂不韋)가 편찬한 《여씨춘추(呂氏春秋)》에 형원(荊阮) 이라는 이름으로 문헌상에 처음 등장하는데, 한대(漢代)의 명칭은 오원관(五原關) 또는 오원관(五阮關)이다. 천하구새(天下九塞) 가운데 하나에 들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 오원관을 가리키는 글자가 따로 있을 정도로 유서가 깊은 관문이다.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오원관이 있던 곳에는 관문의 이름에서 유래된 오원군(五原郡)이 있었다. 그런데 중국 역사상 '五原關' 또는 '五阮關'으로 불렸던 관문은 역현의 자형관(紫荆關)이 유일하다. 오원관은 또한 한(漢)대의 명칭이다. 이상의 근거들을 논리적으로 조합하여 추론하면 놀랍게도 今 역현 자형관 부근에 한(漢)나라의 오원군이 있었던 사실이 드러난다.
조양(造陽)은 상곡(上谷)에 있었던 지명이고, 今 자형관(紫荆關)이 위치한 역현(易縣) 역시 진한(秦漢)대에 상곡의 영역이었다. 그러므로 《太康地理志》 기록상의 조양의 인근에 위치했던 오원군(五原郡)은 오원관(五原關) 즉, 보정시 역현의 자형관과 연관된 지명으로 보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欽定熱河志》에 조양이 자형관이 그 중심에 있는 내삼관(內三關)의 변경에 있다고까지 하지 않았는가! (위 '造陽, 內長城, 內三關의 상대적 위치도' 참조)
자형관에 인접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인의장(仁義庄)의 과라타(科罗坨) 봉우리는 이른바 '역수장성(易水長城)' (또는 '연남장성燕南長城')의 서북 기점이다. 자형관(紫荆關)의 협로가 과라타 바로 앞까지 이어진 것으로 보아 애초에 '역수장성'은 당시의 군사적 요충지였을 것이 분명한 오원관(五原關)을 염두에 두고 축조되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오원관과 조양(造陽)의 관련성 및 그 실상에 의하면 연장성(燕長城)의 서단 조양은 今 보정시 역현(易縣)의 자형관 일대이고, 따라서 그곳에서 동남 방향으로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鎭)까지 이어진 '역수장성'의 실체는 바로 진개(秦開)의 동호(東胡) 공략과 관련된 연장성(燕長城)이 틀림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나라의 오원군이 보정에서 내몽골로 교치된 정황
한(漢)나라 오원군(五原郡)의 위치와 관련하여 또 한가지 주목 하여야 할 다음의 사료들이 있다.
오원군은 진(秦)나라의 구원군이다. 무제 원삭 2년(서기전 127년)에 [오원군으로] 이름을 고쳤다. 五原郡 秦九原郡 武帝 元朔二年 更名
『前漢書』 권28 下
한(漢)나라는 또한 상곡의 궁벽하고 외떨어진 현(縣) 조양(造陽)의 땅을 버려 호(胡)에게 주었다. 이 해가 원삭 2년(서기전 127년)이다.漢亦棄上谷之斗辟縣造陽地以予胡 是歲 元朔二年也
『前漢書』 권94 上
위 《전한서(前漢書)》 두 구절은 얼핏 한무제(漢武帝) 원삭(元朔) 2년에 일어난 서로 관련없는 사건을 각각 가리키고 있는 듯 보인다. 하나는 진(秦)나라의 폐군(廢郡) 구원군(九原郡, 今 내몽골자치구 파언뇨이시巴彦淖尔市 오원현五原縣 일대)을 오원군(五原郡)으로 개명한 일이고, 다른 하나는 상곡(上谷)의 조양(造陽) 땅을 동호(東胡)에게 넘겨 준 일이다. 물론, 사서에는 마치 쓸모없는 땅을 동호에게 하사한 것 처럼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무력을 동원한 동호에게 굴복하여 조양을 내주었을 것이다. 《前漢書》 권94의 기록은 조양 땅을 동호에게 빼앗긴 수치스런 사건을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따라 축소, 은폐하여 적은 것으로 보인다. 여하튼, 과연 이 사건들은 상호간에 아무런 연관이 없었을까?
오원현, 3개의 마을이 있다. 지금 주는 남으로 경주 마령현의 북쪽 경계에 이른다. 즉 옛 마령현의 땅이다. 정관2년에 현과 (염)주를 함께 세웠다. 예전부터 오원관이 있었던 지세에 연유하여 군읍의 명칭이 된 '오원'이 있다. 五原縣 三鄉 今州南至慶州馬嶺縣北界 即舊馬嶺縣地 貞觀二年 縣與州同立 以其地勢有五原 舊有五原關 因為郡邑之稱
『太平寰宇記』 권37 鹽州 조항
앞서 소개한 위 《御批資治通鑑綱目》와 《太平寰宇記》의 기록들에 의하면 한(漢)나라의 오원관(五原關) 즉, 今 자형관(紫荆關) 부근에 오원군(五原郡)과 조양(造陽)이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왜 하필이면 조양을 동호에게 빼앗긴 바로 그 해(한무제 원삭 2년)에 조양에 인접한 오원군의 이름을 가져다가 한참 멀리 떨어져있는 내몽골의 구원군(九原郡)을 개명하였을까? 과연 우연의 일치였을까?" 이다. 정황상 단순히 군명만 고친 것은 아닐 것으로 생각된다. 일단 구원군은 원삭(元朔) 2년 당시에 이미 없어진지 오래인 폐군(廢郡)이었으므로 《前漢書》 의 기록에 구원군이 오원군으로 개명되었다는 것은 곧 구원군의 옛 땅에 오원군을 새로 설치하였거나 또는 본래 다른 곳에 있었던 오원군을 그곳으로 옮겨 왔다는 뜻이 분명하다. 조양은 아마도 본 오원군의 속현(屬縣)이었던 것으로 유추 되는데, 원삭 2년에 조양과 함께 조양이 속한 오원군 대부분의 영역 역시 동호의 수중에 떨어진 결과 오원군이 구원군의 옛 땅으로 옮겨져 사실상 교치(僑置) 되었을 정황이 농후하다.
한무제 원삭 2년에 오원군을 설치하였다. 그 땅에 다섯개의 언덕이 있다하여 '오원'이라 이름하였다. 진(晉)대에 이르러 혁련발발에 패망하였다. 후위(後魏)가 평정하여 서안주로 고쳤다. 그 북쪽에 염지가 있었던 까닭에 또 염주로 고쳤다. 수(隋)나라 대업 3년(607년)에 염주군이 되었다. 정관 2년(628년)에 양사도를 쳐서 평정하고 염주를 설치하였다. 천보 원년(742년)에 오원군으로 고쳤다. 건원원년(758년)에 염주로 되돌렸다.漢武帝元朔二年置五原郡 地有原五所 故號五原 至晉 地沒赫連勃勃 後魏平之 改為西安州 以其北有鹽池 又改為鹽州 隋大業三年為鹽州郡 貞觀二年(628)討平梁師都 置鹽州 天寶元年(742)改為五原君 乾元元年(758)復為鹽州
『元和郡縣志』 권4 '鹽州' 조항
특히 위 《원화군현지(元和郡縣志)》의 기사에는 한무제(漢武帝) 원삭(元朔) 2년에 설치되었던 내몽골의 오원군(五原郡)이 진(晉)대에 이르러 혁련발발(赫連勃勃)에 패망하였고, 그 후 당(唐) 정관(貞觀) 2년에 염주(鹽州) [와 더불어 오원현(五原縣)]가 설치되고 천보(天寶) 원년에는 염주가 오원군으로 개명된 것으로 되어있다. 즉 《元和郡縣志》는 당(唐) 염주 오원군의 기원을 한(漢) 내몽골의 오원군에서 찾고 있음을 알 수 있는데, 《太平寰宇記》에 또한 염주의 '오원'이란 지명이 애초에 (보정의) 오원군에 있었던 오원관에서 유래한다고 하였으니 《太平寰宇記》의 오원관 관련 기사는 보정(保定)의 오원군과 내몽골 (및 염주)의 오원군을 이어주는 연결고리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역시 한(漢)나라의 오원군이 보정에서 내몽골로 교치되었음을 암시한다.
그 후 오원(五原)이란 지명은 보정에서 차츰 잊혀져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
조양 북쪽 900리의 오원은 잘못된 기록
《史記》의 '흉노열전(匈奴列傳)'에 주석으로 달린 《史記索隱》 인용 글, 《太平寰宇記》, 《御批資治通鑑綱目》 등의 사료에 "조양(造陽)은 오원(五原)의 북쪽 9리에 있다."고 기록된 것과 달리 현존하는 《史記索隱》 (자체 문헌), 《資治通鑑》에 달린 호삼성(胡三省)의 주석, 《通典》 등의 판본들에는 조양이 오원의 북쪽 9리가 아닌 900리 거리에 위치한 것으로 되어있다. 해당 기록들이 모두 《太康地理志》에서 파생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큰 차이가 있는 만큼 '9리'와 '900리' 둘 중 하나는 오기 또는 의도적인 변조일 수 밖에 없다.
서두에 소개한 《史記集解》의 주석은 위소(韋昭, 204~273년)의 말을 빌어 조양(造陽)이라는 지명은 상곡(上谷)에 있다고 하였다. 위소의 언급은 지금까지도 불확실하게 남아있는 조양의 위치에 관한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다. 더구나 위소는 《太康地理志》 (서진西晉 태강太康 3년, 즉 282년 저작)가 집필되던 때와 거의 같은 시기의 인물이기도 하다. 위소와 《太康地理志》의 저자들은 조양에 관한 공통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따라서 위소의 증언이 틀렸다고 판단할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조양은 그의 말대로 상곡에 속했던 지명으로 보는 것이 옳다. 참고로 《通典》의 저자 두우(杜佑)는 《太康地理志》의 조양 관련 기록을 "오원의 북쪽 900리"로 인용하고도 자신은 《太康地理志》의 기록과 위소의 말 중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며 푸념하였다. 또한 명말청초 중국 고증학의 대가 고염무(顧炎武, 1613~1682) 역시 그의 저작 《일지록(日知錄)》에 조양이 오원의 북쪽 9리에 있다고 하였다.
진한(秦漢) 시기의 상곡은 今 하북성 보정(保定)시 일대이다. 따라서 조양(造陽)이 상곡(上谷)에 있었다는 위소(韋昭)의 말이 옳다면 당연히 조양의 위치 역시 보정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다. 《太康地理志》가 저술되던 진(晉)대 이전에 나타나는 지명 '오원(五原)'은 今 내몽골자치구 파언뇨이(巴彦淖尔)시 일대에 설치되었던 한의 오원군(五原郡)과 필자가 본글에서 처음으로 제시하는 보정의 오원군이 전부이다. 그런데 해당 두 지역 모두 각각 그 위치에서 북으로 900리 떨어진 곳은 거리상 상곡과는 전혀 상관 없이 동떨어진 지역이다. 조양이 상곡땅에 있었다는 위소(韋昭)의 말을 무시하지 않는 이상 오원의 북쪽 900리에 조양이 있었다는 기록들은 모두 거짓임을 쉽게 알 수 있다.
** 본 글은 2018년 2월 필자가 "역사의병대" 다음 카페에 올린 같은 제목의 글을 바탕으로 집필되었음을 밝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