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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밝혀지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의 절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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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의 고향은 하북성 보정시 완현이다.

 

전주(田疇, 169~214)는 중국 후한(後漢) 말의 인물이다. 그는 젊은 시절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에게 발탁되어 헌제(獻帝)가 있던 장안(長安)에 사자로 보내어졌었는데, 장안에서 돌아와 유우가 정적이었던 공손찬(公孫瓚)에게 이미 살해당했음을 알게되어 통탄해 하며 일족을 이끌고 산 속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서기 207년, 조조(曹操)는 오환(烏丸)으로 망명한 원상(袁尙)을 쫓아 오환을 공격하기에 이르렀다. 때마침 홍수로 인하여 무종(無終)에서 길이 끊겨 조조의 원정군이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상황에서 그곳의 지리에 밝은 전주가 앞장서 노룡새의 샛길로 조조를 안내하였다. 전주의 인도에 따라서 잠행한 조조의 군사는 오환의 허를 찔러 큰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그 뒤 전주는 모든 관직을 마다하고 다시 산으로 돌아갔는데, 그의 행적은 정사 《삼국지(三國志)》의 '위지(魏志)' '전주전(田疇傳)'에 상세히 그려져 있다.

 

《三國志》의 기록에 따르면 전주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 출신의 사람이다. 우북평군은 연(燕)나라의 장수 진개(秦開)가 동호(東胡)를 공략한 후에 설치된 연5군(燕五郡) 중 하나로 전(前), 후한(後漢)이 이어받았고 위진(魏晉) 시기에 이르러 북평군(北平郡)으로 개명되었다.

** 燕五郡 즉 어양군(漁陽郡), 요동군(遼東郡), 요서군(遼西郡), 상곡군(上谷郡), 우북평군(右北平郡)을 말한다.

 

     정사『三國志』 권 11 '魏志' '田疇傳'의 앞부분, 「田疇字子泰 北平無終人也 好讀書擊劒 (전

    주는 자가 자태이고 우북평 무종 사람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검술에 뛰어났다.)」라는 문구

    가 보인다.

 

한편 명(明)나라 홍치(弘治) 갑인(甲寅)년(1494)에 간행된 《보정군지(保定郡志)》에는 당시 하북성 보정(保定) 지역의 지리, 행정, 민생 등에 관한 방대한 내용이 실려 있는데, 보정의 역대 주요 관직에 있었던 인물들을 소개한 조항에 뜻밖에도 전주(田疇)가 등장한다. 현 학계의 통설에 따르면 전주가 활동했던 곳이자 그의 연고지인 후한(後漢) 시기의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은 지금의 하북성 천진(天津), 당산(唐山) 방면의 계주구(薊州區) 또는 옥전현(玉田縣) 지역에 있었다. 보정은 그곳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전혀 관련이 없는 곳이라는 점에서 뜻밖이란 말이다.

 

《保定郡志》에 서술된 내용이 《삼국지(三國志)》 '위지(魏志)' '전주전(田疇傳)'의 기사를 간추린 대동소이한 것인 점에 미루어 《保定郡志》의 전주는 《三國志》의 전주와 동일 인물임이 틀림없다. (아래 원문 및 번역문 참조) 더욱이《保定郡志》에는 《三國志》의 「田疇字子泰 北平無終人也 好讀書擊劍 전주는 자가 자태이고 우북평 무종 사람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검술에 뛰어났다.」라는 기록이 그대로 인용되어 있는데 '우북평무종인(右北平無終人)'이 '북평완현인(北平完縣人)'으로 바뀌어져 있다. 《보정군지》의 '북평(北平)'은 위진(魏晉) 시기에 이르러 '북평군(北平郡)'으로 개명된 전(前), 후한(後漢)의 우북평군(右北平郡)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므로 해당 문구의 내용은 고대 우북평군 무종현(無終縣)의 절대위치가 지금의 하북성 보정(保定)시 완현(完縣)이라는 의미가 된다.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물론 완현은 통설이 무종현의 위치로 비정한 지금의 하북성 계주구(薊州區) 또는 옥전현(玉田縣)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이다. 설마하니 《保定郡志》의 저자들이 (실제로 조작이라면) 무모할 수 밖에 없는 역사 조작을 감행했을 리는 없다. 생각컨대 아마도 보정을 다룬 지방지(地方志)이니만큼 '無終'이라는 고대 지명 대신 편찬 당시의 지명인 '完縣'을 넣어, 자신들이 알고 있는 역사 및 지리적 지식에 의거하여 당당히 저술한 것으로 보인다.

** 완현(完縣)은 1993년에 행정구역명이 바뀌어 지금은 순평현(順平縣)이다.

 

참고로, 《보정군지》에는 전주(田疇)외에도 무종(無終)에 도읍한 요동왕 한광(韓廣)과 우북평태수 이광(李廣)이 보정의 주요 관직에 있었던 인물들로 소개되어있다. 무종과 우북평(右北平)이 지금의 보정에 있었던 지명들이 아니고서는 역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전주(田疇)는 자가 자태(子泰)이고 북평(北平) 완현(完縣) 사람이다. 독서를 좋아하고 검술에 뛰어났다. 마침 동탁(董卓)이 임금를 장안(長安)으로 내쫓자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가 예를 갖추어 전주를 초대하여 서로 처음 대하고 전주를 장안(長安)으로 파견하였는데, 그때 전주의 나이 22세이었다. 장안에서의 임무를 마치고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으나 나라안의 난리(亂離)로 인하여 임금이 도읍를 떠나 있는 때에 영예를 좋아하여 쫓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말을 달려 돌아와 보고하려 하였을 때는 이미 유우가 공손찬(公孫瓚)으로부터 해를 입은 뒤였다. 오랜 벗들과 더불어 맹서하여 말했다. “주군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서 있을꼬!” 마침내 서무산(徐無山)의 깊고 험준한 산속으로 들어가 평탄하고 넓은 곳을 만들어 살 곳을 정하고 몸소 밭을 갈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몇 년 사이에 그에게 귀속한 마을사람들이 5백여 가구가 되었다. 이에 전주는 살인ㆍ상해ㆍ분쟁에 관한 법령을 약속하여 제정했다. 시집가고 장가드는 예의에 관한 규정도 정했다.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이렇게 하는 것이 편리하다고 생각하였으며 길위에 놓인 남의 잃어버린 물건 조차 줍지 않았다. 북방은 그의 권위와 신뢰에 복종하였다. 오환(烏丸)족과 선비(鮮卑)족은 각기 사신을 보내어 와 공물을 바쳤고 원소(袁紹) 역시 몇 차례 사절을 보내어 왔다.  田疇字子泰北平完縣人 好讀書善擊刺 適董卓逐帝扵長安 幽州牧劉虞禮請相祖而遣至長安 時年二十二歲 致命長安拜騎都尉 疇以天子蒙塵 不可以荷榮寵逐 馳還報時 虞已爲公孫瓚所害後 與故舊盟曰 君仇不報 将何以立扵世 遂入徐無山中 營深險平曠地而居 躬耕以養父母 數年鄕人歸者五百餘家 疇乃爲約束殺傷 爭訟之法 制爲婚姻嫁娶之禮 衆皆便之 道不拾遺 北方服其威信 烏丸鮮卑各遣使來貢 袁紹亦數有使來  

 

『保定郡志』권 9 '職官' '厯代宦蹟', 明 弘治甲寅年 (1494년) 간행

 

 

《保定郡志》와는 별도로 1934년에 간행된 《완현신지(完縣新志)》의 인물편에도 또한 전주(田疇)에 관한 기사가 실려있다. 역시 《三國志》 '魏志' '田疇傳'과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 있다. (아래 원문 및 번역문 참조) 물론 전주가 완현(完縣)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기 때문에 완현의 지방지에 그가 소개되었을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完縣新志》에는 유우(劉虞)가 공손찬(公孫瓚)에게 죽임을 당한 뒤 전주가 '포음(蒲陰)의 서무산(徐無山)'으로 들어가 은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서 포음은 곧 포음현(蒲陰縣)을 가리킨다.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 따르면 포음현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保定)시 완현(完縣) 일대에 있었던 고대 지명이다. 《完縣新志》는 또한 전주(田疇)가 관직을 따라 고향을 등지지 않고 서무산(徐無山)에 남아 삶을 마친 연고가 있었기 때문에 완현(完縣)의 인물지에 실렸다고 하여 《수경주(水經注)》등 여러 사서에 등장하는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서무산이 지금의 완현 부근에 있었다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하고 있다. 앞서 논의한《保定郡志》의 기록에 부합하는 내용이다. 《完縣新志》가 간행된 1930년대까지도 통설이 가리키는 곳과는 동떨어진 지금의 보정시 완현 일대가 《三國志》의 전주가 활동했던 고대의 우북평군 무종현(無終縣) 지역인 것으로 공공연히 알려져 있었던 듯한 사실은 특히 주목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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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田疇)는 자가 자태(子太)이고 무종(無終) 사람이다. 검술에 뛰어났다. 동탁(董卓)이 임금를 장안(長安)으로 내쫓자 유주목(幽州牧) 유우(劉虞)에게 발탁되어 장안으로 갔다. 그때 전주의 나이 22세이었다. 기도위(騎都尉)에 임명되었으나 나라안의 난리(亂離)로 인하여 임금이 수도를 떠나 있는 때에 영예를 좋아하여 쫓을 수는 없다고 하였다. 말을 달려 돌아와 보고하려 하였을 때는 이미 유우가 공손찬(公孫瓚)으로부터 해를 입은 뒤였다. 오랜 벗들과 더불어 맹서하여 말했다. “주군의 원수를 갚지 못하였으니, 무슨 면목으로 이 세상에 서 있을꼬!” 마침내 포음(蒲陰)의 서무산(徐無山) 속으로 숨어 들어가 몸소 밭을 갈며 부모를 봉양하였다. 그에게 귀속한 마을사람들이 5백여 가구이었다. 분쟁에 관한 법령을 약속하여 제정하니 그의 권위와 신뢰에 복종하였다. 원소(袁紹)가 찾아와 공손찬(公孫瓚)을 쳐부수자고 하였다. 후에 위무제(魏武帝)가 원소를 패배시켜 그가 죽자 세 아들이 후계자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전주는 다시 숨어 살며 관직을 맡지 않았다. 원희(袁熈)와 원상(袁尙)이 공손강(公孫康)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조조(曹操)가 북방을 토벌하고자 하였으나 지리를 알지 못하였다. 무리 가운데 전주가 향도관(鄕導官)에 천거되었다. 노룡(盧龍)에서 바위를 파면서 오백리를 갔다. 백단(白檀)의 험난함을 뛰어넘어 텅빈 곳으로 나왔다. 전주의 공로가 있어 그를 유성후(柳城侯)에 봉하여 그 땅을 지키게 하려 하였으나 전주는 "나 전주는 의로움을 등지고 산속으로 도망쳤던 사람이건만 승상의 대은을 입어 삶을 보존하는 것만도 천만 다행이오. 어찌 노룡의 새(盧龍之塞)를 팔아 조정의 벼슬과 봉록을 어지럽힐 수 있겠소?"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렸다. 전주가 제후의 직분을 받아 들이지 않자 그를 의랑(議郞)으로 임명했으나 서무산으로 다시 들어가 기거하였다. 당나라의 방현령(房玄齡)이 전주가 어떤 사람이었는냐고 문중자(文仲子)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옛적의 의인(義人)이었다고 했다. 전주가 서무산에서 삶을 마친 고로 완현(完縣)의 인물지에 실리게 되었다.  田疇字子太無終人 善擊刺 董卓逐帝長安 幽州牧劉虞聘至長安 時年二十有二 拜騎都尉 疇以天子蒙塵 不可以荷寵榮逐 馳還報時 虞已爲公孫瓚所害 疇哭虞墓 與故舊盟曰 君讐不報 將何以立於世 遂隱入蒲陰徐無山中 躬耕養親 歸者五百餘家 約束爭訟 威信服人 袁紹聘之攻公孫瓚破之 後魏武破袁紹 紹死三子爭立 疇復隱居不仕 熈尙被公孫康殺 操欲北征不識地理 衆擧疇爲鄕導官 自盧龍塹岩五百餘里 越白檀之險 出空虛之地 有功封疇爲柳城侯 使守其地 疇曰 疇負義逃竄之人耳 蒙恩全活 爲幸多矣 豈可賣盧龍之塞 以討爵祿哉 涕泣橫流 不受侯職操 乃封爲議郞 復入徐無山居焉 唐房玄齡問文仲子 曰疇何人也 曰古之義人也 因疇終於徐無山故載入完之人物志

 

『完縣新志』권 6 '人物', 民國 23년 (1934년) 간행 

 

한나라의 곡역현(曲逆縣)이다. 후한(後漢)이 포음(蒲陰)으로 개명하였다. 북제(北齊)가 개명하여 북평(北平)이되었다. 옛 치소가 지금의 직예(直隸) 완현(完縣)의 동남쪽에 있다.  漢曲逆縣 改曰蒲陰 北齊改爲北平 故治在今直隸完縣東南 

『中國古今地名大辭典』 '蒲陰縣'

 

《保定郡志》와 《完縣新志》에 드러나 있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의 절대위치가 통설과 상충될 뿐만 아니라 이제것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것인 만큼 다른 문헌사료에서 확인이 되는지, 그리고 또 타당성이 있는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漢, 魏 우북평군 무종현은 唐 정주 북평현이다.

 

문헌에 전하기를 양성(城)은 정주(定州) 북평(北平) 사람이다. 북평은 곧 한(漢), 위(魏)나라에 딸린 무종(無終)이다. 城 傳書定州北平人 北平乃漢魏後無終

『山西通志』 권 130 '人物'

 

당서(唐書)의 본전을 살펴보건대 양성(城)은 정주(定州) 북평(北平) 사람이다. 북평은 곧 한(漢), 위(魏)나라에 딸린 무종이라는 기록이 있다.  按唐書本傳 城為定州北平人 有志以北平乃漢魏後無終

『解州全志』 권 8 '夏縣', 1764년 간행 

 

위 《山西通志(산서통지)》와 《解州全志(해주전지)》의 기사에는 당(唐)나라 시기의 양성(陽城)이란 인물이 소개되어 있다. 그가 정주(定州) 북평(北平) 사람이란 사실과 함께 기사에 나오는 '北平'은 한(漢) 및 위(魏)나라의 '無終'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北平'은 양성이 살았던 당나라 시기의 정주에 속한 북평현(北平縣)을 가리키고 '無終'은 한(漢) 및 (조조의) 위(魏)나라의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을 말한다.

 

《위서(魏書)》 '지형지(地形志)'를 살펴보건대 북평군(北平郡)은 북평현(北平縣)을 다스렸다. 즉 한(漢)나라의 북평(北平)이다. 후주(後周)가 영락(永樂)으로 개명하였다. 지금의 만성현(滿城縣)이다. 그 북평군의 치소였던 북평성(北平城)이 곧 수(隋), 당(唐)나라 정주(定州)의 북평(현)이다. 지금의 완현(完縣)이다.  按魏書地形志 北平郡領北平縣 即漢之北平 後周改名永樂 今滿城縣是也 其北平郡所治北平城 乃隋唐定州之北平 今完縣是也

『大清一統志』 권 11 '保定府' '北平故城'

 

양성(陽城, 736년~805년), 자(字)는 항종이고 정주(定州) 북평(北平)현 (지금의 하북성 완현) 사람이다. 일찍이 간의대부(諫議大夫 )와 도주 (지금의 호남성 도현 서쪽)자사(道州刺史)를 역임하였다.  陽城 (736年-805年) 字亢宗 定州北平縣 (今河北完縣) 曾任諫議大夫 道州 (今湖南道縣西) 刺史

『위키백과』 '陽城 (唐朝)'

 

당(唐)나라 정주(定州) 북평현(北平縣)의 위치는 《大清一統志》와 《위키백과》에 위와 같이 명료하게 지금의 보정시 완현(完縣)으로 적시되어 있다.

 

정주(定州) 북평현(北平縣) 동남쪽 15리에 포음(蒲隂)의 옛성이 있다.  定州北平縣東南十五里 蒲隂故城是也

『사기정의(史記正義)』  권 93

 

포음(蒲隂)은 옛 현의 이름이다. 동한(東漢) 원화3년(공원86년)에 곡역현(曲逆縣)을 고쳐 설치하였다. 치소는 지금의 하북 완현(完縣) 동남쪽에 있다.  蒲陰 古縣名 東漢元和三年(公元86年)改曲逆縣置 治所在今河北完縣東南

『바이두백과』'蒲陰'

 

《사기정의(史記正義)》에는 정주(定州) 북평현(北平縣)의 동남쪽에 포음(蒲隂)의 옛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후한(後漢)의 포음현(蒲隂縣)을 말하는데, 포음현의 치소는 지금의 완현(完縣)의 동남쪽에 있었다. 《史記正義》는 당나라 시기의 인물  장수절(張守節)의 저작이므로 그가 말하는 정주 북평현은 곧 당나라 정주의 북평현을 가리킨다. 즉 당(唐)대의 저술인 《史記正義》를 통해서도 또한 당나라의 정주 북평현은 지금의 보정시 완현 중심부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위 《산서통지(山西通志)》, 《대청일통지(大清一統志)》, 《史記正義》 등을 비롯한 사료들의 내용을 종합하여 정리하면 한(漢), 위(魏)나라의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은 지금의 보정시 완현(完縣)의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이는《保定郡志》 및 《完縣新志》의 기록에 정확히 부합한다.

 

지도 1 - 무종현 관련 지명 위치도, 발해만의 고대 해안선은 『Caroline Blunden & Mark Elivn, Cultural Atlas of China, 1998』과 『Tristram R Kidder & Yijie Zhuang, Archaeology of the Anthropocene in the Yellow River region, China, 8000-2000 cal. BP, The Holocene, 2014』, 그리고 『가정하간부지(嘉靖河間府志)』에 수록된 구하도(九河圖)를 참조하였다.

 

 

보정시 만성구 일대는 고대 우북평군의 영역이었다.

 

(建武원년, 서기 25년) 광무(光武)가 원지(元氏)에서 북쪽으로 우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을 공격했다. 추격하여 우북평(右北平)에 이르러 연이어 쳐부수었다. [이현 주 : 북평현(北平縣)은 중산국(中山國)에 속하였다. 지금의 역주(易州) 영락현(永樂縣)이다. 신현(臣賢)이 생각컨대 《동관기東觀記》와 《속한서續漢書》에 모두 '右'자가 없다. 더하여진 '右'는 오류다. 영주(營州) 서남쪽에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옛성이 따로 있다. 이곳이 아니다.] 또 순수(順水)의 북쪽에서 싸웠으나 [이현 주 : (역)도원(道元)이 《수경주(水經注)》에 이르기를 "서수(徐水)는 북평현(北平縣) 옛성의 북쪽을 지난다. 광무(光武)가 동마(銅馬), 오번(五幡)을 추격하여 순수(順水)에서 부수었으니 즉 (순수는) 서수의 별명이다."라고 했다. 지금의 역주(易州)에 있다. 본문은 경계하여야 할 오류로 의심된다.] 승리의 기세를 타고 진격하며 적을 가벼이 여기다가 도리어 패하였다.  (建武元年光武北擊尤來 大搶 五幡於元氏 追至右北平 連破之 [李賢 註 : 北平縣屬中山國今易州永樂縣也 臣賢案東觀記續漢書並無右字此加右誤也 營州西南别有右北平郡故城非此也] 又戰於順水北 [李賢 註 : 酈元 水經注云 徐水經北平縣故城北 光武追銅馬五幡破之於順水 即徐水之别名也 在今易州 本或作慎者誤也] 乘勝輕進 反為所敗

『後漢書』권 1 上 '光武帝紀'

 

한(漢)나라의 광무(光武)가 동마(銅馬), 오번(五幡)을 북평(北平)까지 추격하여 순수(順水)의 북쪽에서 부수었다. 승리의 기세를 타고 북으로 추격하였으나 패하였다. .... 순수는 서수(徐水)의 별명일 것이다.  漢光武追銅馬 五幡于北平破之于順水北 乘勝追北 為其所敗 .... 順水 蓋徐水之別名也

『水經注』권 11 '滱水'

** 「蓋徐水之別名也」 문구의 '徐水'는 판본에 따라 '徐州'로도 기록되어 있다.

 

범엽(范曄, 398~445)이 지은 《後漢書(후한서)》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당시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위치를 알게 해 주는 위 기사가 있다. 기사에 따르면 광무제가 북으로 오번(五幡) 등을 추격하여 우북평군에서 승리하였다. 그리고 또 다시 북쪽 방향으로 순수(順水)를 건너가서 싸우다 패하였다고 하였으니 광무제(光武帝)는 순수를 건너기 전에 이미 우북평군의 영역에 도달해 있었던 것이다. 이로써 순수 이남 지역이 우북평군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당(唐)나라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水經注》를 인용하여 '光武帝紀'에 주석하였다시피 순수(順水)는 서수(徐水)의 별칭으로 지금도 '徐水'라는 이름으로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와 서수구(徐水區) 일대를 흐른다. (지도1 참조) 즉, 순수는 《保定郡志》, 《完縣新志》등의 사료에서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의 위치인 것으로 드러난 완현(完縣)에서 동북쪽으로 불과 20여 킬로미터 거리에 그 일대를 동남 방향으로 가로질러 흐르는 지금의 서수(徐水)인데, 완현은 서수 바로 이남 지역이므로 만약 그곳이 당시의 무종현이었다면 당연히 그곳은 동시에 우북평군의 영역이었을 수 밖에 없다. 이는 《後漢書》 본문의 기록과 정확히 상호 부합한다.

 

그런데 이현(李賢)은 광무제(光武帝)가 오번(五幡) 등을 물리치고 순수(順水) 근처의 우북평군(右北平郡)에서 승리했다고 전한 《後漢書》의 기록을 부정하였다. 즉 범엽(范曄)이 가리키는 '순수 인 지역'은 이현이 살던 당시의 역주(易州) 영락현(永樂縣, 지금의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일대)이고 한(漢)대에는 중산국(中山國)의 북평현(北平縣)이 있었는데 《後漢書》를 저술한 범엽(范曄)이 '北平縣'을 '右北平郡'으로 잘 못 적었다는 주장이다. 과연 그럴까? 이현의 지적에 일리가 있는지 살펴보자.

 

.... 이리하여 유주(幽州)의 병력을 모두 징발하였다. 징발된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서 광무(光武)를 도와 동마(銅馬), 고호(高湖), 적미(赤尾), 청독(靑犢)을 격파하고 또 우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을 원지(元氏)에서 추격하였다. 이때 경엄(耿弇)은 늘 날랜 기병들을 거느리고 군(軍)의 선봉이 되어 적들을 퇴각시키곤 했다. 광무가 승승장구의 여세를 몰아 순수(順水) 근처에서 싸움을 시작했다. 오랑캐(虜)들이 다급해지자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 무렵 광무의 병사들이 매우 지쳐있었으므로 마침내 대패하였다. 되쫓겨 오다가 범양(范陽)에 보루를 쌓고 피해있었다. .... [중략] ....광무가 계로 돌아온 후에 다시 경엄과 오한, 경단(景丹), 합연(蓋延), 주우(朱祐), 비융, 경순(耿純), 유식(劉植), 잠팽(岑彭), 제준(祭遵), 견담, 왕패(王覇), 진준(陣俊), 마무(馬武) 등 13장군을 보내 적들을 노(潞)의 동쪽까지 추격하도록 했는데  평곡(平谷)에 이르러 두 번 싸워 1만 3천여급(級)을 참수(斬首) 시켰다. 마침내 우북평군(右北平郡)의 무종(無終)과 토은(土垠) 사이에 이르러 추격을 마치고 준미(俊靡)를 거쳐 돌아왔다.  .... 於是悉發幽州兵 引而南 從光武擊破銅馬 高湖 赤眉 青犢 又追尤來 大槍 五幡於元氏 弇常將精騎為軍鋒 輒破走之 光武乘勝戰順水上 虜危急 殊死戰 時 軍士疲弊 遂大敗奔還 壁範陽 .... [중략] .... 光武還薊 復遣弇與吳漢 景丹 蓋延 朱祐 邳彤 耿純 劉植 岑彭 祭遵 堅鐔 王霸 陳俊 馬武十三將軍 追賊至潞東 及平谷 再戰 斬首萬三千餘級 遂窮追於右北平無終 土垠之間 至俊靡而還

『後漢書』 권 49 '耿弇傳'

 

우선 두가지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번째는 범엽(范曄)이 지금의 만성구(滿城區) 일대에 우북평군(右北平郡)있었다고 실제 인식했던 것으로 보는 경우이다. 같은 사건 즉 '광무제의 오번 등의 북벌 사건'을 기록하고 있는 같은 책 《後漢書》 '경엄전(耿弇傳)'의 위 기사를 '광무제기(光武帝紀)'의 기사와 비교하여 살펴보면 범엽은 광무제(光武帝)가 우북평에서 첫번째 대승을 거둔 기세에 취해 무리하여 순수(順水)를 건넜다가 적들의 반격을 받고 대패하여 후퇴한 뒤 군졸들을 추스려 다시 우북평의 적진을 향해 돌진할 당시 광무제군의 공격로에 대해 서술하면서 우북평군의 4개 현들 중 3개 즉 무종(無終), 토은(土垠), 준미(俊靡) 등을 직접 관련지어 언급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범엽이 우북평군의 지리에 상당히 밝았다는 것을 말해주며, 따라서 범엽이 북평현과 우북평군을 구분 못 할 정도로 우북평군의 지리에 어두웠다고 보기는 매우 어렵다. 그러므로 범엽이 지금의 만성구 일대가 우북평군의 영역인 것으로 알고 있었다면 그의 생각은 옳았을 것이다.

 

두번째는 범엽(范曄)이 실수로 '右'자를 덧붙였다고 보는, 말그대로 오기인 경우인데, 솔직히 '右北平'에서 실수로 '右'자를 빠뜨릴 수는 있어도 '北平'에 실수로 '右'자를 덧붙이는 경우는 좀 상상하기 어렵지만, 여하튼 살펴보도록 하자.

 

진(晉)나라 태시(太始)초에 문제(文帝)의 아들 기(機)를 연(燕)왕에 봉하였다. 기(機)가 아들이 없이 죽자 나라를 없앴다. 얼마 후 범양군(範陽郡)을 고쳐 범양국(範陽國)이라 했고 우북평(右北平)을 고쳐 북평(北平)이라 했는데 유주(幽州)에 있었다.  晉太始初 封文帝子機為燕王 機薨無子 國除 尋改範陽郡曰範陽國 分上谷置廣寧郡 仍隸範陽國 改右北平曰北平 而幽州存焉

『太平寰宇記』 권 69 '幽州'

 

이현(李賢)이 언급한 《동관기(東觀記)》 (즉 《東觀漢記》를 말함)와 《속한서(續漢書)》 두 책 모두 온전한 형태로 전하지 않기 때문에 그 책들에는 '右北平'이 아닌 '北平'으로 적혀 있었다는 이현의 증언을 직접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위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의 기사에 따르면 서진(西晉, 265~316)의 태시(太始) 초 (대략 260년대 중반)에 우북평군(右北平郡)이 북평군(北平郡)으로 개명되었으므로 일단 서진(西晉) 시기의 저작인《續漢書》의 경우 '右北平' 대신 개명 이후의 지명인 '北平'으로 기록 되었을 수 있으므로 문제 될 것이 없다. 도리어 이현이 혹시 '右北平郡'이 '北平郡'으로 개명되었던 사실을 미처 몰랐던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東觀漢記》의 경우 후한(後漢)말에 완성된 것으로 전해지기는 하나 《東觀漢記》가 오랜 기간에 걸쳐 수 많은 학자들이 참여하여 증보형식으로 내용이 계속 추가된 특이한 경력이 있는 사서인 점(위키백과 '東觀漢記' 참조)과 이현(李賢)이 《東觀漢記》를 접했을 7세기 말엽은 이미 '右北平'이 '北平'으로 개명되고도 40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른 시점임을 감안하면 역시 이현은 서진 이후 개명된 지명 등의 내용이 후대에 첨가된 간행본을 보았을 개연성이 높다. 그러므로 《東觀漢記》와 《續漢書》에 '右北平'이 아닌 '北平'으로 되어 있으니 범엽(范曄)이 기록한 《後漢書》의 지명 즉 '右北平'이 틀렸다는 이현(李賢)의 주장은 타당하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광무제(光武帝) 당시의 지명인 '右北平'을 정확히 기록한 범엽의 저술이 노련하고 지조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참고로 유실된 《東觀漢記》를 복원한 청나라의 학자들도 범엽의 《後漢書》에 따라 光武北擊尤來 大搶 五幡於元氏 追至右北平 連破之로 먼저 적고 이현의 의견은 뒤에 덧붙이기만 하였다.

** 「《東觀漢記)》와 《續漢書)》에는 '右北平'이 아닌 '北平'으로 적혀 있으니 '右北平'은 오류다.」라는 이른바 이현(李賢)의 주석에 대한 필자의 심증은, 아마도 이는 실제로 이현의 글이 아닌, 그의 이름을 빙자한 명(明), 청(淸)대의 가필에 지나지 않을 것으로 의심된다는 것이다. 해당 주석글이 7세기 중, 말엽의 인물인 이현의 것이 맞다면 오랜 세월이 지나는 동안 후대의 여러 사서들에서 인용되었어야 마땅하나,「범엽의 '右北平'은 오류다.」라는 내용이 이현의 글로서 인용된 사서는,《後漢書》말고는 앞서 언급한《東觀漢記》의 청(淸)대 복원본 하나뿐이다.

 

또한 위 《後漢書》 '光武帝紀'의 기사에 광무제(光武帝)가 원지(元氏)에서 북쪽으로 우래(尤來), 대창(大槍), 오번(五幡) 등을 쫓기 시작하여, 우북평(右北平)에 이르러 그들을 연이어 격파하였다고 한 점에도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원지는 하북성 석가장(石家庄)시 남쪽의 지명으로 지금도 같은 이름으로 남아있다. '연이어' 격파하였다고 했으므로 호타하(滹沱河) 유역의 석가장시 부근까지 침입한 각각의 반란 세력 즉 우래, 대창, 오번 등을 지금의 당현(唐縣), 완현(完縣) 및 만성구(滿城區) 등이 위치한 북쪽 방향으로 추격하면서 얼마간의 거리와 시차를 두고 차례로 격파하였다고 보여진다. (지도1 참조) 다시 말해서 '현(縣)'의 좁은 영역에서 적들을 일거에 소탕하였다기 보다는 더 넓은 '군(郡)' 크기의 지리적 범위 내에서 순차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 읽힌다는 것이다. '光武帝紀'에 기술된 반란 세력 토벌 사건의 무대는 북평현(北平縣)이 아닌 우북평군(右北平郡)인 것이다.

 

이현(李賢)은 또한 그가 아는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옛성이 영주(營州) 서남쪽에 있다는 점도 '右北平'이 범엽(范曄)의 실수라는 주장의 근거로 내세웠다. 그런데 《後漢書》에 덧붙여진 이현의 주석글만으로는 그가 인식하는 영주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지 분명치 않으므로 다른 사료를 참조해보도록 하자.

 

평주(平州)는 은(殷)나라 시기에 고죽국(孤竹國), 춘추(春秋) 시기에 산융(山戎), 비자(肥子) 2국이었다. 전국(戰國) 시기에는 연(燕)나라에 속하였는데, 진(秦)나라 시기에 우북평(右北平) 및 요서(遼西) 2군의 땅이 되었고 전(前), 후한(後漢)에 인습되었다.  平州 殷時孤竹國 春秋山戎 肥子二國地也 戰國時屬燕 秦為右北平及遼西二郡之境 二漢因之

『通典』 권 178

 

'천문미분야(天文尾分野)'이다. 우(禹)임금의 기주(冀州) 지역이다. 순(舜)임금이 처음 기주를 나누어 그 동북이 영주(營州)가 되었다. 즉 상(商)나라의 고죽국(孤竹國)이다. 주(周)나라의 유주(幽州)에 속하였다. 춘추(春秋)시기에 산융(山戎)과 비자(肥子) 두 나라의 땅이었다. 진(秦)나라의 요서(遼西)와 우북평(右北平) 두 군이었다. 한(漢)나라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의 거점이었다. 위(魏)나라가 노룡군(盧龍郡)으로 고쳤다. 북연(北燕)이 평주(平州) 및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후위(後魏)가 낙랑(樂浪)을 북평군(北平郡)으로 고쳤다. 수(隋)나라가 평주(平州)로 고쳤다가 후에 주(州)를 폐하고 군(郡)으로 삼았다. 천보(天寳) 초에 북평군(北平郡)으로 고쳤다. 건원(乾元) 초에 평주로 되돌렸다. 오대(五代) 당(唐) 때에 요(遼)나라가 일어나 군으로 삼았다. 본조(남송南宋)가 평주(平州)로 삼았다.  天文尾分野 禹貢冀州之域 初虞分冀州 東北為營州 即此商為孤竹國 周屬幽州 春秋時為山戎肥子二國地 秦為遼西右北平二郡地 漢末為公孫度所據 魏改盧龍郡 北燕置平州及樂浪郡 後魏改樂浪為北平郡 隋改為平州後廢州為郡 唐後改為平州 天寳初改為北平郡 乾元初復為平州 五代唐為遼興郡 本朝為平州

『記纂淵海』(1209년, 南宋 潘自牧 지음) 권 22 '平州'

** 天文尾分野, 천문도의 28개 별자리 중 '尾'로서 중원을 중심으로 동북 방향을 가리킨다.  ** 虞, 순(舜)임금을 말함.

 

위 《통전(通典)》과 《기찬연해(記纂淵海)》의 기사를 통하여 순(舜)임금이 땅을 나누어 설치한 영주(營州)는 전국(戰國) 말엽 및 진(秦), 한(漢) 시기에 우북평군(右北平郡)이 자리잡았었고 수(隋), 당(唐), 송(宋)나라 시기에는 평주(平州)로 불리던 곳임을 알 수 있다. 바로 이 지역이 우북평군과 연관된 고대의 영주일 것이고 이현이(李賢) 언급한 우북평군의 옛성(城) 역시 이곳에 있었을 수 밖에 없다. 

 

산융(山戎)은 도읍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춘추(春秋)이래 일찍이 도읍에서 두루 걱정할 일 또한 없었다. 주로 순(舜)의 영주(營州) 고죽국(孤竹國)의 땅에 살았는데 동으로 요수(遼水)에 이르고, 북으로 연(燕)의 계(薊)에 이르렀다.  山戎逺於中國 自入春秋 亦未嘗為中國 患以職方考之 葢居舜之營州古孤竹國之地也 東距遼水 北距燕薊

『春秋經筌』 (北宋 말엽 趙鵬飛 지음) 권 4

 

또한 위 《춘추경전(春秋經筌)》의 기사를 통하여 순(舜)임금의 영주(營州)가 연(燕)나라 계(薊)의 남쪽에 있었음도 알 수 있다.

 

연(燕)나라 양왕(襄王)은 하(河)를 경계로 하고 계(薊)를 도읍으로 하여 탁(涿)과 방성(方城)을 습격하고 제(齊)를 멸하고 중산(中山)을 평정하였다. 연나라와 함께하면 세력을 얻고 연과 우의가 없으면 경시되었다. 그러나 양왕이 죽자 이내 연도 쇠망해 갔다.  燕襄王以河為境 以薊為國 襲涿 方城 殘齊 平中山 有燕者重 無燕者輕 襄王之氓社稷也 而燕以亡

『韓非子』  '有度'

** 고대의 '河'는 보통 황하를 뜻하지만, 래수(淶水), 즉 거마하(拒馬河)가 용성(容城)에 이르러 하(河)로 흘러든다고 한 《한서(漢書)》 '지리지'의 서술 내용을 감안하면 여기서의 '河'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의 백양정(白洋淀) 습지로서 그 흔적이 남아 있는 고대 발해만의 내해(內海)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지도1 참조)  광창현(廣昌縣), 래수(淶水)가 동남쪽으로 흘러 용성(容城)에 이르러 하(河)로 들어가는데, 3개의 군을 지나며 500리를 간다. 병주(并州)에 물을 댄다. 왕망이 말하기를 광병(廣屏)이라 했다.  廣昌,淶水東南至容城入河,過郡三,行五百里,并州浸。莽曰廣屏。『漢書』 권 28下 '地理志', '幽州' '代郡'

 

위 《한비자(韓非子)》 기사의 '양왕(襄王)'은 소양왕(昭襄王) 즉 소왕(昭王)을 말한다. 소왕 시기 연나라의 도읍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연하도(燕下都)이며 현 보정시 역현(易縣)에 그 유지(遺址)가 있다. 소왕 때 계(薊)를 수도로 삼았다고 했고 소왕 때 연나라의 수도는 연하도이었으니 계는 곧 연하도이다. 

 

따라서 이현(李賢)이 말하려는 영주(營州)는 역현(易縣) 연하도(燕下都) 이남, 지금의 보정(保定)시 만성구(滿城區), 서수구(徐水區) 및 완현(完縣) 일대를 포괄하는 지역 즉《後漢書》의 저자 범엽(范曄)이 가리키는 순수(順水) 인근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영역과 정확히 일치하는 곳이다. 사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보정 일대에 우북평군은 없었다고 주장한 것으로 보아 아마도 이현은 후대에 다른 곳으로 옮겨진 지명을 순(舜)임금의 영주로 잘못 인식한 듯 하다. 여하튼 결과적으로 "범엽이 말하는 우북평군 땅에 옛 우북평성이 있으니 그곳은 우북평군이 아니다." 라는 이상한 말을 한 꼴이 되었으니 이현의 주장은 틀렸다.

 

 

고대의 무종현은 지금의 보정시 래원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의 군대를 깨뜨리고 진희(陳豨)의 부대장인 흉노족 왕황(王黃)의 군대를 대(代)의 남쪽에서 무찔렀다.  破得綦毋卬 尹潘軍於無終 廣昌 破豨别將胡人王黃軍代南

『前漢書』 권 41 '樊酈滕灌傅靳周傳'

 

무종(無終), 무종자국(無終子國)의 가부(嘉父)가 맹락(孟樂)을 진(晉)나라로 보냈다고 전해진다. 두주(杜注)에 "무종(無終)은 산융(山戎)의 나라 이름이다."라고 했다. 휘찬(彚纂)에 진(秦)나라가 무종현을 설치하고 항우(項羽)는 한광(韓廣)을 무종왕에 봉하였다고 했다. 도읍은 무종이었으니 즉 지금의 순천부(順天府) 옥전현(玉田縣)이다. 현의 서쪽에 옛 무종성이 있다. 지금 살펴보니 고염무(顧炎武)가 말하기를 "무종이 지금의 옥전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기는 하지만 그해에 무종자국(無終子國)의 가부(嘉父)가 맹락(孟樂)을 진(晉)으로 보내어 위장자(魏莊子)를 연줄로 하여 범과 표범의 가죽을 공납하게 함으로써 모든 융(戎)과 화친하게 하도록 했다. 소왕 원년에는 진(晉)나라의 중행목자(中行穆子)가 태원(太原)에서 무종과 오랑캐의 무리를 패배시켰으며, 한서(漢書) 번쾌전(樊噲傳)에 진희(陳豨)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기무앙(綦毋卬)과 윤반(尹潘)을 무종과 광창(廣昌)에서 사로잡았다고 했다. 그렇다면 옥전과의 거리가 천여리이다. 그 무종국은 먼저 운중(雲中), 대군(代郡)의 지경에 있었다가 후에 비로소 우북평(右北平)에 옮겨진 것인가?"라고 했다. 생각컨대 고(顧)씨의 설이 옳다. 광창 즉 지금의 광창현은 한(漢)나라의 대군(代郡)에 속했었고 당(唐)나라의 울주(蔚州) 비호현(飛狐縣)이었으며 명(明)나라가 다시 광창으로 되돌려 개명하여 대동부(大同府) 울주에 귀속시켰는데 지금은 직예(直) 보정부(保定府) 역주(易州)로 바뀌어 속해져 있다. 옥전의 무종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사서들은 한결같이 예전의 무종 땅이 광창에서 가까왔을 것이라고 말한다.  無終 傳無終子嘉父使孟樂如晉 杜注 山戎國名 彚纂 秦置無終縣 項羽封韓廣為無終王 都無終 即今順天府玉田縣也 縣西有古無終城 今按顧炎武曰 無終為今之玉田 無可疑者 然此年 無終子使孟樂如晉 因魏莊子納虎豹之皮 以請和諸戎 昭元年 晉中行穆子敗無終及羣狄於太原 漢書樊噲傳 擊陳豨破 得綦毋邛尹潘軍於無終廣昌 則去玉田千有餘里 豈無終之國 先在雲中代郡之境 後始遷 右北平與 按顧氏此說是也 廣昌即今之廣昌縣漢屬代郡 唐為蔚州飛狐縣 明復改廣昌屬大同府蔚州 今改屬直𨽻保定府易州 去玉田之無終逺而 史合言之蓋舊時無終之地近廣昌也

『春秋地理考實』  권 2, 江永(1682~1762) 지음

** 嘉父는 무종자국의 임금이다.  ** 杜注는《春秋左傳杜注》를 말한다.  ** 孟樂은 無終子國의 使臣이다.  ** 彚纂(휘찬)은《欽定春秋傳說彚纂》을 말한다.  **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중국 명말(明末)청초의 사상가·학자이다.  그의 저서《日知録》에 무종의 위치에 관하여 논하였다.  ** 위장자(魏莊子, ? - 서기전 522년), 휘는 위강(魏絳)으로 중국 춘추 시대 진(晉)나라의 경(卿)이다.

 

《전한서(前漢書)》 '번역등관부근주전(樊酈滕灌傅靳周傳)'에 번쾌(樊噲)가 무종(無終)과 광창(廣昌)에서 기무앙(綦毋卬), 윤반(尹潘)과 싸워 승리한 기록이 있다. 사건의 정황상 무종과 광창은 서로 가까운 거리에 있었을 수 밖에 없다. 주지하다시피 광창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래원현(淶源縣)인데, 문제는 통설상의 고대 무종현이 래원현에서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 있는 지금의 천진(天津), 당산(唐山) 방면의 계주구(薊州區) 또는 옥전현(玉田縣)에 비정되고 있다는 점이다. 명말청초 중국 고증학의 대가 고염무(顧炎武)도 이 사안에 주목하였는데, 위 《춘추지리고실(春秋地理考實)》의 기사에 그 자세한 내용이 소개되어있다. 당시에도 용인되던 통설상 무종현의 위치 비정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명, 청대의 학자들도 이미 자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春秋地理考實》의 저자 강영(江永)은 "(광창에서) 옥전의 무종까지는 거리가 너무 멀다. 사서들은 한결같이 예전의 무종 땅이 광창에서 가까왔을 것이라고 말한다."라며 그의 논거를 매듭짓고 있다. 한편 보정시 완현(完縣)과 래원현(淶源縣) 즉 옛 광창현(廣昌縣)은 지금도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가까운 거리에 있다. 《保定郡志》와 《完縣新志》에 드러난 고대 무종현의 위치가 절대로 공허한 이야기가 아님을 뒷바침하는 견실한 근거가 아닐 수 없다.

 

 

결어

 

이상 이제까지의 통설과는 전혀 다른 고대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의 절대위치를 명시한 《保定郡志》 및 《完縣新志》의 사료를 소개하고 또한 타 사료와 비교, 검토하여 본 바 보정시 완현(完縣)은 고대의 무종현이 위치했던 곳이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무종현이 속했던 우북평군은 전국시기 연나라가 진개를 앞세워 동호(東胡)를 물리치고 빼앗은 영토에 설치한 연5군(燕五郡)의 하나이므로 무종현의 정확한 위치는 동호의 영역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실마리가 될 수 있다. 더욱이 동호의 실체가 곧 고조선일 수도 있는 조건에서 그 의미는 지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