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가점하층문화 (夏家店下層文化)
카테고리 없음만리장성의 북쪽과 남쪽에 거주하였던 강력한 세력 집단을 대표하는 하가점하층문화는 하(夏)•상(商) 문화의 형성, 발전, 그리고 교체에 대단히 중요한 역할을 하였지만 사서에 기록되지 못하였다. 끊임없이 깊어지는 이 문화에 대한 이해와 함께 피할 수 없는 질문은 "어떠한 역사적 사건들이 일어났는가?" 그리고 "그 유적지들이 어떠한 종족 또는 나라에 속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이 사안를 전문적으로 다룬 논문이 학계에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이 주제를 간략히 언급하였고 상당수의 흥미로운 견해들이 제기되었다.
조우항(鄒衡)에 의하여 대표되는 첫번째 견해는 연산 이북의 하가점하층문화는 숙신(肅愼)과 관련된 반면, 연산 이남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장종페이(張忠培)의 견해인데, 그 분포영역 및 연대와 더불어 이웃 문화들과의 연관성 등에 비추어 볼 때 연산(燕山) 이남의 하가점하층문화는 산해경(山海經)에 언급된 선상(先商)의 통치자들 및 왕들과 관련이 있는 반면, 연산 이북의 하가점하층문화는 이(夷)족의 고고(考古)문화라는 것이다.
세번째 의견에 의하면 하가점하층문화는 상(商)시기에 그 북쪽에 있었던 고죽(孤竹), 산융(山戎), 토방(土方) 등의 여러 나라들을 포괄한다.
네번째 견해는 하가점하층문화가 선상(先商)문화의 한 갈래라고 주장한다. 길림대학교 교수 진징방(金景芳)은 상(商)문화가 동북에서 기원하였다고 하는 사안을 다시 언급하였다. 이는 상(商)문화가 연(燕)으로부터 나왔다는 간지갱(干志耿)의 지지를 받는다. 그들은 모두 하가점하층문화를 중요한 고고학적 증거로 여긴다. 즉, 하가점하층문화가 상(商)문화의 기원과 관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마지막 견해는 하가점하층문화가 선연(先燕)문화라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천진(天津)의 다창(大廠) 다투오토우(大坨頭) 유적의 간략한 발굴 보고서에 처음으로 언급되었으나 그리 많은 주목을 끌지 못하였다. 나는 이 주장에 동의하려 한다. 그리고 이 주장이 자세히 다루어졌던 적이 없었던 만큼 추가의 근거들을 내 놓으려 한다.
첫째, 주(周)초에 소공(召公)이 연(燕)에 봉해졌다는 것은 오래전부터 학계에서 지적되었다. 그런데 연(燕)은 서주(西周) 때에 귀족들이 봉해진 사실이 기록됨으로서 비로소 나타난 것이 아니라 그 이전 시기에 이미 있었다. 갑골에 새겨진 글에는 '燕'에 해당하는 글자가 이미 존재하였다. 서주(西周)초 연(燕)의 수도가 된 북경의 유리하(琉璃河)에서 최근 상(商)보다 이른 층들이 발견되었다. 유리하의 서주(西周)초 층 아래에서 하가점하층문화의 무덤들이 발견된 것이다. 하지만 연(燕)문화는 중원의 요소들 뿐만 아니라 북방 문화와 연관된 고유의 특징들을 가지고 있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서주(西周)초 연(燕)이 분봉(分封)되기 전의 상(商)시대에 연(燕)이 이미 존재하였음을 시사한다. 즉, 선연(先燕)의 문화적 전통이 서주(西周)초 분봉 이후인 서주(西周)의 연(燕)국 문화 속에서도 계속 유지되고 있었다.
둘째, 연(燕)문화와 하가점하층문화 사이에는 과도기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더 이른 시기에 하가점하층문화의 채색토기에 완성된 형태로 나타난 수면문(獸面文)은 상(商)시대 도철문(饕餮文)의 선행 요소들 중 하나일 것이다. 연(燕)에서 도철문은 서기전 약 300년 전국(戰國)시기 말까지 지속되었다. 이 시기에 이르면 동주(東周) 및 제(齊)와 진(秦) 등의 수막새에 도철문이 단순화 된 형식의 운문(雲文)이 사용되지만, 연경(燕京)에서는 전국시대에 까지도 수막새에 표준적인 도철문이 유지되었다. 유리하(琉璃河) 연(燕) 무덤들의 칠기는 매우 정교하여 하가점하층문화의 선진적 채색토기와의 연관성을 시사한다. 특히 부른 배에 주머니 같이 생긴 세발이 달린 모양의 연식(燕式) 력(鬲)이 그러한데, 이것은 틀림없이 하가점하층문화의 우형(盂形) 력(鬲)과 연관 되었을 것이다.
하가점 하층문화의 채색토기 - 력(鬲) 하가점 하층문화의 수면문 채색토기
전국(戰國) 연(燕) 도철문반원막새 연식(燕式) 력(鬲)
셋째, 연(燕)과 상(商)은 같은 기원을 가지고 있다. 중원에 왕조를 세운 상(商)나라는 그곳에 기원을 둔 것 같지 않고 오히려 북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고고학적 결과물들로는 상(商)의 주된 특색이라 할 수 있는 력(鬲)이 하가점하층문화 및 연(燕)의 그것과 흡사하다. 그것들은 모두 솥 모양의 몸체와, 몸벽 대신에 주머니 모양의 세발을 가졌다. 상(商)의 청동기 중에는 또한 종머리(bell-head) 장식, 짐승머리 칼, 활 모양 동기(銅器) 등과 같은 북방의 형식을 볼 수 있다. 최근에는 판치펑(潘其風)이 종족을 식별해내는데 인골학(人骨學)적 증거를 사용할 것을 제시하고 상(商)왕족을 대표하는 은허(殷墟)의 중형 및 소형 무덤에서 나온 인골들에서 동아시아와 북아시아 인종의 특성들이 복합적으로 보인다는 것을 밝혀 내었다. 이는 황하 중하류 유역의 거주민들이 갖는 성질이 아니다. 아마도 그 대신 북방의 사람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양시장(楊錫璋)도 비슷한 주장을 하였다.
이상의 견해들에 기초하여 우리는 다음과 같은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가점하층문화는 그 발전 과정에서 여러 갈래로 나뉘어졌다. 그 중 하나는 남쪽으로 이동하여 상(商)문화의 기원이 되었고 다른 한 갈래는 같은 자리에 오랫동안 머무르며 연(燕)의 선행문화가 되었다. 따라서 하가점하층문화를 선연(先燕)문화로 보는 것이 아마도 본래의 역사적 사실에 근접할 것이다.
『The Archaeology of Northeast China, Sarah Milledge Nelson, 1995』에 수록 된 Guo Da-Shun(郭大順)의 논문 'Lower Xiajiadian Culture'의 결론 부분을 발췌, 번역하였음.
- 원문에는 「Another view, represented by Zhang Zhong-Pei, is that Lower Xiajiadian south of Yanshan, in terms of its distribution areas, in date as well as the relationship with its neighboring cultures, is related to pre-Shang dukes and kings mentioned in Shanhaijing, whereas Lower Xiajiadian south of Yanshan is the archaeological culture of the Yi tribe.」으로 되어 있으나, 문맥상 두번째 "south of Yanshan"은 "north of Yanshan"의 오기로 보이므로 이에 부응하여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