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대 (唐代) 의 기록으로 본 갈석산 (碣石山)의 바른 위치
카테고리 없음《상서(尚書)》의 우(禹)임금의 치수에 관한 기사에 당(唐)나라의 유학자 공영달(孔穎達, 574~648)이 소(疏)를 달아 치수와 관련된 여러 산천(山川)의 상대적 위치를 아래와 같이 밝혀 놓았다.
제수(濟水)는 왕옥산(王屋山)에서 발원하고, 기수(淇水)는 태행산(太行山)에 가까우며, 항수(恆水), 위수(衛水), 호타수(滹沲水), 구수(滱水) 및 역수(易水)는 항산(恆山)과 갈석산(碣石山)의 무리에 가깝다. 濟出王屋,淇近太行,恆、衛、滹沲、滱、易近恆山、碣石之等也.
『尚書正義』 권6
《상서정의(尚書正義)》의 기록에 보이는 산천(山川)의 이름들을 1789년 일본인 유학자 나가쿠보 세키스이(長久保赤水)가 간행한 《당토역대주군연혁지도(唐土歷代州郡沿革地圖)》집의 《우공구주도(禹貢九州圖)》에서 찾아 대조하여 보니 공영달이 인식한 갈석산의 위치는 대무산(大茂山)에서 백석산(白石山)과 낭아산(狼牙山)으로 이어지는 지금의 하북 보정(保定)시 서북부의 산지(山地) 일대에 명료하게 드러난다. 《尚書正義》의 기록을 도외시하지 않는다면 갈석산의 바른 위치는 절대로 지금의 하북 보정시에서 멀리 벗어난 곳일 수 없는 것이다.
나가쿠보의 《禹貢九州圖》에 보이는 산천(山川)의 위치는 (아래 지도에 노란색 표시) 모두 《尚書正義》의 기록에 정확히 일치하는데, 유독 갈석산만이 공영달이 남긴 기록과 배치된 지금의 진황도시 방면에 (보라색 표시) 동떨어져 있다. 공영달이 살던 당나라 시기에는 분명히 보정에 있었던 갈석산이 세월이 지나면서 동쪽으로 수백 킬로미터를 지명 이동한 것이 자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