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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룡새(盧龍塞), 용머리뼈 장성의 실체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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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경이 가리키는 노룡새

 

원(元)나라의 관료이자 유학자인 학경(郝經, 1223~1275)은 그의 저작 《능천집(陵川集)》에 노룡새(盧龍塞)의 위치에 관한 실마리를 제공하는 두 기록을 남겼다.

 

첫번째는 '居庸關銘'이란 제목의 글에 나오는 다음 문구이다.

 

진롱(秦隴)으로부터 대하(황하)를 건너면 태화(太和)가 동쪽을 가로막고 자형(紫荊)이 노룡의 새(盧龍之塞)를 둘러싼다. 줄지은 관문이 수십이며 거용관(居庸關)이 유주의 북쪽에 있다. 가장 깊고 험하여 천하사새(天下四塞)의 하나로 불린다.  自秦隴亂大河 東抵太和 紫荊繞出盧龍之塞 列關數十 而居庸關在幽州之北 最為深阻 號天下四塞之一

《欽定四庫全書 陵川集》 권 21 '居庸關銘'

** '繞出'의 '出'은 동사의 뒤에 붙어 앞의 동사에 상응하는 행위가 '이루어짐'을 뜻한다.

 

위 기사의 '진롱(秦隴)'은 감숙(甘肅)과 섬서(陝西) 지방을 말하고 '태화(太和)'는 태화령(太和嶺) 즉 산서성 삭주(朔州)의 동쪽을 북동 방향으로 길게 가로지르는 산줄기를 가리킨다. 안문관(雁門關)이 이곳을 관통한다. '자형(紫荊)'은 자형령(紫荊嶺)을 말한다. 자형령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역현(易縣)과 래원현(淶源縣) 사이를 북동 방향으로 가르는 산줄기, 즉 자형관(紫荊關)이 관통하는 지금의 오회령(五廻領) 산줄기을 가리킨다. 다시 말해, 감숙과 섬서에서 황하(黃河)를 건너고 안문관을 통과하여 동쪽으로 가면 자형령이 노룡의 새(盧龍之塞)를 둘러싼다(繞出)고 기록되어 있다. ('노룡새 위치도' 1 참조) 그런데 자형령이 주변을 둘러싼 형태의 지형은 래원 고원 지대의 동남부에서 유일하게 찾을 수 있다. 도마관(倒馬關)으로 부터 이어진 통로의 입구가 남쪽에 열려 있고 동쪽에 거마하(拒馬河)를 따라 자형관으로 이어진 통로의 출구가 있으며 백석산(白石山)을 포함한 자형령의 산줄기가 구역 전체의 남동쪽을 둘러싸고 있다 ('노룡새 위치도' 2, 3 참조). 또한 고대에 그 일대의 요충지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비호구(飛狐口)가 래원 고원의 북쪽 통로에 근접해 있다. 노룡의 새(盧龍之塞)는 곧 삼국지 조조(曹操)의 오환(烏丸) 토벌과 관련하여 유명한 노룡새(盧龍塞)를 말하는데, 위 사료는 아직까지도 그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한 노룡새의 절대적 위치를 알려주는 결정적인 단서가 아닐 수 없다.

 

노룡새 위치도 1

 

유수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노룡새를 지난다.  濡水又東南逕盧龍塞

『水經注』 권 14 '濡水'

 

더구나 고대의 유수(濡水)로 밝혀진 거마하(拒馬河)가 래원(淶源)의 서북쪽 산지에서 발원하여 동남 방향으로 흘러 래원의 동남부를 지나가고 또한 거용관(居庸關)에서 서남 방향으로 이어진 내장성(內長城)이 래원에 이르러 주변를 둘러싼 자형령(紫荊嶺)의 산지를 따라 이어져 있다. 래원 부근을 지나는 내장성의 일부 구간을 노룡새(盧龍塞)로 본다면 래원의 동남부는 유수가 동남쪽으로 흘러 노룡새를 지난다고 한 《수경주》의 기록에 정확히 부합하는 지리적 요건을 갖추고 있다. (☞ 《수경주》의 어이진은 산서성 영구이고 고하는 상건하, 유수는 거마하이다 참조) 

 

학경의 두번째 기록은 '左副元帥祁陽賈侯神道碑銘'이란 제목의 글에 다음과 같이 나온다.

 

여기에는 수십개의 성이있다. 사방 천여 리에 절도사(節度使)의 주(州)가 둘, 자사(刺史)의 주(州)가 다섯, 그리고 십여 만 가구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병사 수만이 있다. 서(西)로 상산(常山)의 꼬리에 다다라 정주(定州)를 둘러싸고 지키며 좌(左)로 비호의 구(蜚狐之口)를 돌아서 동(東)으로 하간(河間)을 취하고 구하(九河)로 나간다. 남(南)에서 분야(糞野)로 들어와서 북으로 탁(涿)주와 역(易)주에 이르러 가로로 상곡(上谷)과 노룡의 새(盧龍之塞)에 이어졌는데, 그 너머에 연(燕)과 조(趙)가 있었다. 항악(恒嶽)의 진영은 호타(滹沱)하, 래(淶)수, 역(易)수에 젖어들어 뽕나무, 삼, 물고기, 소금의 이로움이 있고 대추, 밤, 오곡의 넉넉함이 있다.  於是有城數十 地方千餘里 節度之州二 刺史之州五 勝兵數 而戸不啻十餘萬 西盡常山之尾 繞出鎮定 左轉蜚狐之口 東包河間 出九河 南入糞野 北盡涿 易 横絡上谷 盧龍之塞 而跨有燕趙 恒嶽之鎮有滹沱淶易之浸 有桑麻魚鹽之利 棗栗五榖之饒

『欽定四庫全書 陵川集』 권 35 '左副元帥祁陽賈侯神道碑銘'

 

노룡새 위치도 2

 

'左副元帥祁陽賈侯神道碑銘'의 문구에는 상산(常山), 정주(定州), 비호구(蜚狐口), 하간(河間), 탁주(涿州), 역주(易州) 등 보정(保定)을 중심으로 그 언저리에 위치한 지명들이 적시되어 있다. 학경(郝經)이 보정에 실제로 거주하였던 인물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기록은 정확하였을 것으로 판단되는데, 문구를 잘 살펴보면 지명들간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특히 탁주 및 역주(易州)로부터 "가로(横)로" 노룡새(盧龍之塞)에 이어진다는 기록은 본글의 논점인 노룡새의 위치와 과련하여 핵심되는 부분이다. 즉 해당 문구 바로 뒤에 노룡새 너머에 연(燕)과 (특히)조(趙)가 있었다고 했으므로 여기에서 '가로'는 서쪽 방향을 의미하는 것이 틀림없다. 따라서 학경(郝經)의 증언에 의하면 노룡새는 탁주 및 역주의 서쪽 방면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노룡새 위치도' 2 참조) 이는 노룡새의 위치를 지금의 당산시(唐山市) 북부의 희봉구(喜峰口)로 정해놓은 학계의 통설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실제로 탁주와 역주 부근에서 서쪽으로 이동하여 자형관을 통과하면 거마하(拒馬河)를 따라 래원(淶源)으로 이어진 길이 있고 래원으로 들어서는 그 길목에서부터 남쪽 방면이 자형령(紫荊嶺)에 둘러싸인 지형을 이룬다. 그곳이 바로 학경의 《陵川集》 두 기록에 언급된 노룡새(盧龍塞)의 위치에 해당하는 곳이다.

 

 

조조의 군대가 통과한 노룡구는 지금의 백석구이다

 

서기 207년, 조조(曹操)의 원정군이 오환(烏丸)을 정벌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던 중 홍수로 인하여 무종(無終)에서 길이 끊겼다. 오도 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한 조조의 군대를 그곳의 지리에 밝은 전주(田疇, 169~214)가 앞장서 노룡새(盧龍塞)의 샛길로 인도하였다. 여기서 무종은 후한(後漢)의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을 말하는데, 그 위치는 지금의 보정시(保定市) 완현(完縣)이다. (☞ 새로 밝혀지는 우북평군 무종현의 절대위치 참조) 

 

노룡새 위치도 3

 

태조(太祖)는 전주(田疇)에게 그가 원래 갖고 있던 군사들을 인솔하게 하고, 서무산(徐無山)으로 올라가 노룡(盧龍)으로 나와, 평강(平岡)을 지나서 백낭퇴(白狼堆)에 올랐다. 유성(柳城)으로부터 2백여 리까지 갔을 때, 적군은 비로소 깜짝 놀랐다. 선우(單于)는 스스로 진(陳)에 임했다. 태조는 대군을 인솔하여 그와 접전을 벌였는데, 목을 베거나 사로잡은 자가 매우 많았으며, 또 도망가는 적을 추격하여 유성에 이르렀다.  太祖令疇將其衆為郷導 上徐無山 出盧龍 歷平岡 登白狼堆 去柳城二百餘里 虜乃驚覺 單于身自臨陣 太祖與交戰 遂大斬獲 追奔逐北 至柳城

『三國志』 권 11 '魏志' '田疇傳'

 

위 《三國志(삼국지)》 '魏志(위지)' '전주전(田疇傳)'의 기사에서 전주(田疇)가 조조(曹操)의 군사를 인솔하여 무종(無終)으로부터 서무산(徐無山)을 거쳐 노룡새(盧龍塞)에 이르렀던 것을 알 수 있다. 

 

경수(水)는 우북평(右北平) 서무현(徐無縣)의 북쪽 새(塞) 가운데에서 나와 남쪽으로 흘러 서무산(徐無山)을 지난다.  水出右北平徐無縣北塞中 而南流 厯徐無山

『水經注』 권 14 '鮑丘水'

 

전주(田疇)가 말하기를 ".... 만약 조용히 군사를 돌려, 노룡구(盧龍口)를 향하여 백단(白檀)의 험한 곳을 넘어 (노룡구를 통하여) 텅빈 곳으로 빠져나간다면 가까운 곳에 길이 있어 편리할 것이니 그들이 아무런 준비를 하고 있지 않을 때에 엄습하여 답돈(蹋頓)을 싸우지 않고 사로잡을 수 있습니다.”고 했다.  疇曰 .... 若嘿回軍 從盧龍口越白檀之險 出空虛之地 路近而便 掩其不備 蹋頓可不戰而禽也

『三國志』 권 11 '魏志' '田疇傳'

 

경수(庚水)는 지금의 보정시 완현(完縣)과 만성구(滿城區) 일대의 산지에서 발원하는 계하(界河)이므로 서무산(徐無山)은 계하 상류에 위치한 산이다. (☞ 포구수, 경수, 류수와 우북평군의 속현 위치 비정 참조)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陵川集》의 기록에 따라 노룡새(盧龍塞)로 비정되는, 래원(淶源)의 동남부 변경을 지나는 내장성(內長城)이 있다. 계하 상류 일대에서 북쪽으로 백석산(白石山)의 험준산령을 지나 백석구(白石口)를 통과하면 곧장 래원의 평지가 펼쳐진다. 즉 전주(田疇)의 인솔에 따라 진군한 조조(曹操)의 원정군은 지금의 완현에서 계하를 거슬러 올라가 서무산으로 비정되는 지금의 용담호풍경구(龍潭湖風景區) 일대의 산지를 넘고 백석산의 험준산령(즉 백단白檀)을 지난 뒤 백석구(즉 노룡구盧龍口)를 통해 래원의 평원에 진입한 것으로 여겨진다. 위 三國志 '魏志' '田疇傳' 기사의 '텅빈 곳(空虛之地)'은 아마도 백석구를 나오자마자 펼쳐지는 래원의 평지를 가리키는 말일 것이고 "가까운 곳에 길이있어 편리하다(路近而便)"란 중원으로부터 분하(汾河), 호타하(滹沱河) 따라 평형관(平型關)에 이르러 영구(靈丘), 래원을 경유하고, 자형관(紫荊關)을 통해 하북의 평원으로 이어진 고대의 교통로로 곧장 들어설 수 있다는 의미일 것이다.

 

白石口 전경도, 관문 뒤 험준산령으로 이어진 샛길이 보인다. (출처 - 廣昌縣志 1875년 간행)

 

 

노룡새는 용머리뼈 장성이었다

 

필자가 노룡구(盧龍口)로 비정하는 보정시 래원현(淶源縣)의 백석구(白石口) 인근을 지나는 내장성(內長城)의 경로에 거대한 바위가 지표 밖으로 돌출되어 우뚝 솟아있다. 거대 바위 바로 곁으로 지나는 장성은 명(明)대에 개축되었다고 하나 돌로 쌓아올린 고졸한 모습으로 보아 개축 이전 본래의 장성이 상당히 오래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위성지도 ☞  https://satellites.pro/#39.262436,114.732252,18

 

'巨石陣(거석진)'으로 불리는 이곳은 장성 유지를 따라 산에 오르는 등산객들에게 매우 인기있는 곳인 듯 한데, 멀리서 바라본 바위의 모양이 필자의 눈에는 반쯤 땅속에 묻힌 용(龍)머리뼈의 형상으로 보인다. 특히 바위 뒷부분에 뿔 두개가 솟아난 듯한 모양을 보아 더욱 그렇다. (아래 사진 참조)

 

'顱(노)'와 같이 머리뼈(頭盧首骨)로 통한다.  與顱通頭盧首骨也

『康熙字典』 '盧'

 

《강희자전(康熙字典)》에 의하면 '盧'에는 '머리뼈'의 뜻이 있다. 중국의 장성(塞)은, 산세(山勢)를 따라 굽이치는 그 모습이 흔히 용(龍)에 비유되곤 하는데, 그렇다면 '盧龍塞'는 곧 '용머리뼈(또는 머리뼈 용) 장성'의 의미가 된다. '盧龍'이란 이름에 딱 어울리는 거석진의 용머리뼈 형상 바위와 그 옆에 허물어진 옛 장성의 조합이 우연의 일치라고 하기에는 심상치 않은 것이다. 그곳은 고대에도 특별한 의미를 지닌, 흔치 않은 장소였을 것으로 보여지는 만큼 분명히 고대인들이 그곳을 지칭하는 이름이 있었을 것이다. 특별한 장소에 이름을 지어 붙일 때는 나름의 까닭이 있는 법이다. 여기가 바로 그 이름을 잃어버린 고대의 노룡새(盧龍塞)일 것이다.

 

백석구 방면에서 바라본 巨石陣(거석진)의 전경(첫번째~세번째 사진)과 허물어진 장성 유지의 모습(네번째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