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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선의 홍범구주(洪範九疇)와 토란재배 그리고 단군영정에 대한 단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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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이 말하기를, 홍범구주(洪範九疇)는 본래 오행(五行), 오사(五事), 팔정(八政) 등등의 정치이념에 관한 복잡한 이야기가 아니고 정전제(井田制), 즉 농지를 네모 반듯한 아홉 구획으로 나누어 효율적으로 농사지을 수 있게 한 제도를 가리킴에 다름 아니었다고 했다. 즉 다산은 ‘洪範九疇‘의 ‘九疇(구주)’ 부분의 본래 뜻에 대한 그의 견해를 피력한 것인데, 그가 지적하였다시피 '疇(주)'가 그냥 밭고랑을 뜻하는 글자이고 보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홍범은 대법(大法)을 말하고, 구주는 9개 조(條)를 말하는 것으로, 즉 9개 조항의 큰 법이라는 뜻이다.

위키백과‘홍범구주’


정약용의 견해를 따라 숙고하자면 ‘洪範九疇‘의 ‘洪範’ 역시 일반적으로 알려진 ‘대법(大法)’으로 해석할 수는 없을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대법’을 ‘밭고랑’과 결부시킬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範水(범수)’의 ‘範’과 ‘蓒芋濼(한우락)’의 ‘蓒’이 서로 상통하는 글자들일 것이라는 의견을 밝힌 바 있다.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固城이다. 낙랑군 패수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즉 고조선의 왕검성 부근을 흐르던 패수(浿水)는 강가에 한우초(蓒芋草)가 많이 자라고 있어서 한우락이라고도 불렸었는데, 패수로 밝혀진 範水의 강이름 역시 ‘蓒芋濼’의 다른 표현으로 본 것이다. 한우초는 토란(土卵)을 가리키므로 ‘範’ 역시 토란을 의미하는 글자로 볼 수 있다. 아닌 게 아니라, '範'의 간체자(簡體字)인 '范'에는 '풀이름'의 뜻이 있다. 그리고 생뚱맞은 ‘대법(大法)’과는 달리, 묘하게도 ‘토란’은 ‘밭고랑’과 상호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단어이다.


‘範’를 토란으로 가정하고 정약용의 견해에 의거하여 ‘홍범구주(洪範九疇)‘의 뜻을 풀이하자면 '많은 토란이 자라는 아홉 구획으로 나뉘어진 밭고랑', 다시 말해서 '정전제(井田制)에 따라 개간된 대규모 토란농장'이라는 말이 된다.


옛날에는 토란이 쌀 다음으로 중요한 식량이었다 하고 중국, 대만, 인도 등지에서는 여전히 주요 식량 자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한다. 더구나 까다롭고 일손이 많이 가는 쌀농사에 비해 비교적 재배가 수월한 토란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들을 굶주림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한 구황작물의 역할을 하였다. 토란국이 추석 차례상에 오르는 이유 역시 토란이 배고픔을 해결해 준 고마운 음식이라는 아련한 기억 때문일 것이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 성립의 절대 조건들 중 하나로서 충분한 식량생산 능력을 빼놓을 수 없다. 홍범구주(洪範九疇)와 관련하여, 고조선 문명의 태동과 발전의 밑바탕에는 국가차원에서 이루어진 대규모의 토란재배가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한편 필자가 제시하는 '홍범구주'의 새로운 이해와 관련하여, 우리가 흔히 접하는 단군영정에서 중요한 단서를 엿볼 수 있다. 바로 영정에 보이는 단군왕검의 복장에 관한 사안인데, 재야사학계의 일각에서는 단군왕검의 허리에 두르고 어깨에 걸친 장식을 나뭇잎과 풀잎으로 보고 이와 같은 복장으로 말미암아 이미 국가 단계에 들어섰을 고조선이 사실과는 다르게 원시 사회 수준에 머물렀던 것으로 여겨지게 되는 부당한 오해를 부를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하고, 영정에서 '나뭇잎과 풀잎'을 없앨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사진 1, 2 참조) 그러나 필자는 생각을 달리한다.

 

사진 1  단군영정 1


사진 2  단군영정 2


우선 단군왕검께서 옷을 입지 않은 맨몸에 '나뭇잎과 풀잎'으로 보이는 장식들을 두르고 걸쳤다면 모르겠으나 영정속의 모습은 의복을 갖추어 입고 그 위에 치장을 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므로 필자의 소견으로는, 의복 위에 더불어 치장된 장식들을 원시적인 요소로 단정짓는 것은 성급한 생각이다. 또한 거추장스럽기 짝이 없었을 ‘나뭇잎과 풀잎’으로 장식된 복장이 단군의 평상복이었을 개연성은 더더욱 없다. 그렇다면 영정에 보이는 단군의 복장은 모종의 특별한 의례 절차에 사용되던 예복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장식을 갖춘 예복을 필요로 했던 특별한 의례가 과연 무엇이었을까? 필자의 생각에는 지난 한해 동안의 곡식 등 먹거리의 수확에 감사드리고 또한 다음 한해에도 풍성한 수확을 기원하며 차례를 올리는 ‘추수 감사’ 의식이 틀림없었을 것 같다. 필자의 생각이 맞다면 예복의 장식은 나뭇잎과 풀잎이 아닌 고조선의 주요 식량자원을 상징하는 작물들의 잎으로 보는게 옳을 것이다.


사진 3  토란


사진 4  식량으로 쓰이는 토란의 뿌리


따라서, 필자가 앞서 제시한대로 ‘洪範九疇(홍범구주)‘의 ‘範’이 토란을 의미한다면 단군의 허리춤에 둘러진 것은 나뭇잎이 아닌, 고조선의 주식이었던 토란의 잎사귀들일 것이 분명하다. (사진 1, 2, 3 참조) 그렇다면 단군의 어깨에 드리워진 것 역시 단순히 풀잎이 아닌, 토란 다음으로 중요한 고조선의 농작물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 모양새로 보아 기장(Panicum miliaceum) 또는 조(Setaria italica)의 잎이 아닐까 한다. (사진 1, 2, 5, 6 참조) 그리고 나아가 기자(箕子)가 주 무왕(周 武王)에게 전하였다는 '洪範九疇(홍범구주)'의 실체는 그가 망명객으로 지내며 몸소 체험한, 대규모 토란재배에 기반을 둔 고조선의 발전된 정착 농경사회의 윤곽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사진 5  기장 (Panicum miliaceum)


사진 6  조 (Setaria italic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