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의 고대사공부방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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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지도를 스크린에 띄워 놓고 패수로 의심되는 하천의 물줄기를

하류에서 부터 손가락으로 짚어가며 거슬러 올라가던 중 

한 마을의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순간, 필자 지구인은 기절하는 줄 알았다.


 

서론

이미 잊혀진지 오래인 고대 지명의 위치를 찾기 위해서는 세월이 지나도 좀처럼 변하거나 움직이지 않는 강(江), 산(山), 인공구조물로는 성곽, 관문, 또는 그 위치가 분명한 또 다른 지명 등을 먼저 찾아 절대 기준점으로 정하고, 사료에서 확인 가능한 해당 지명과의 상대적 관련성 즉 거리, 방향 등을 적용하는 방법이 가장 유효하다.


고조선의 왕검성(王儉城, 또는 왕험성王險城으로도 칭함, 이하 왕검성으로 표기)도 예외는 아니어서 왕검성 부근을 흘렀다는 패수(浿水)를 먼저 찾기 위한 많은 노력과 시도가 있어 왔음은 주지하는 바와 같다.  ** 패수는 고조선과 한(漢)나라의 경계를 가늠하는데 중요한 단서가 되므로 패수를 찾는 것 자체에도 물론 의미가 있다.  특히 왕검성의 경우, 물론 한민족의 첫 국가 고조선의 중심지라는 점에서도 당연히 중요하겠지만, 왕검성을 찾음으로서 고구려의 평양성, 발해의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 및 한(漢) 낙랑군의 위치가 동시에 함께 드러나게 되고 그 결과에 따라 낙랑군의 속현들을 비롯하여 고구려의 안시성, 요동성, 백암성, 환도성 등과 더불어 살수대첩의 현장인 살수(薩水)를 찾는 데에도 유용한, 새로운 좌표의 기준이 제시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중대하다.


그런데 고조선사 연구의 모든 면에서 그렇듯이 패수 역시 사료가 부족하다. 단편적으로나마 남아있는 사료 또한 패수의 흐름 방향 등 기본적인 사실에서 조차 서로 정면 배치되는 내용들이 혼재하는 등의 문제가 있고 이에 더하여 패수의 '浿'자 대신 모양이 비슷하거나 음이 같은 다른 글자가 쓰인 경우도 있어 혼란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런 만큼 각기 패수의 다른 위치를 주장하는 견해들 역시 판이하여 중심점은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이렇듯 패수 찾기가 정작 본래의 취지인 왕검성 찾기 보다 오히려 더 어려울 듯한 지경이 되다 보니 패수를 통하여 왕검성을 찾으려는 노력이 이제 한계점에 다다른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게 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싶었다.

 

《晉書》에 실린 기록에 근거하면 진(秦), 한(漢) 시기에 동호(東胡)가 자몽(紫䝉)의 들에 모여 살았다. 《唐書》 '地理志'에 평주(平州)에 자몽, 백랑, 창려 등의 수(戍)가 있다고 하였다. 모두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이다. 據晉書載記 秦漢之間 東胡邑于紫䝉之野 唐書地理志平州有紫䝉白狼昌黎等戍 盖平州之北境契丹之南界也
資治通鑑 권 214, 胡三省 註


미력하지만 필자 역시 수차례 기존의 연구자료 및 인터넷 상의 원문사료 등을 열심히 뒤져가며 나름 애써 보았으나 번번이 막다른 골목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정녕 패수와 왕검성은 베일에 가려진 채 영영 풀 수 없는 수수께끼로 남겨지고 마는 것인가 하는 답답함이 별 도리 없이 누적되어 가고 있을 무렵 송(宋), 원(元)대의 학자 호삼성(胡三省, 1230~1302) 이 남긴 위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석 글이 운 좋게도 필자의 '집요한' 키워드 원문검색에 걸려 나왔다. 기록의 중대성을 즉시 포착하고 이를 결정적 단초로 삼아 추적하여 곧 낙랑군 패수현(浿水縣)의 정확한 절대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비로소 패수의 실체가 밝혀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발견된 패수의 동쪽 가까운 곳에 고조선 왕검성의 옛터가 바로 드러났다.

 

 

당(唐) 평주의 자몽은 북송(北宋)과 거란의 국경지역이었다.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현(鏤方縣)을 나와서 동남쪽으로 임패현(臨浿縣)을 지나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浿水出樂浪鏤方縣 東南過臨浿縣 東入于海
『水經』 '浿水'

 

패수(浿水)는 낙랑군 루방(鏤方)을 나와서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수부(水部)이고 '패(貝)'의 소리를 따른다. 어떤 사람은 패수현을 나온다고 하였다. '浿'는 배(普拜切)로 읽는다.  浿, 水出樂浪鏤方東入海从水聲一曰出浿水縣普拜切

『説文解字』 권 11上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漢) 루방현(鏤方縣)이었다. 후에 불녈국(拂涅國)이 동평부(東平府)를 설치하고 자몽현을 관할하였다. 후에 요성으로 옮겨 황령현에 편입하였다. 발해가 자몽현으로 회복시켰다. 호구 수는 1,000호이다.  紫蒙縣 本 漢 鏤方縣地 後 佛寧國 置 東平府 領 紫蒙縣  後徙 遼城 并入 黄嶺縣 渤海 復為 紫䝉縣 户一千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패수를 찾기 위해서는 사서에 패수의 발원지로 기록되어 있는 낙랑군 루방현(누방현)과 패수현의 위치 추적을 가장 먼저 고려해 볼 수 있다. 루방현(鏤方縣)에 대하여 알아보자.


위 《수경(水經)》과 《요사(遼史)》 '지리지'의 기록에 따르면 패수는 한(漢)의 낙랑군 루방현에서 발원하는데, 훗날 요(遼)나라의 자몽현(紫蒙縣)이 그곳에 자리하였다. 그런데 낙랑군 루방현에 관한 사료는 《水經》 등에 기존에 알려진 기록들 말고는 같은 내용이 다른 사서들에서 반복 된 것들만 있을 뿐 그 위치와 관련하여 더 이상의 유용한 기록은 존재하지 않는다. 좀 더 많은 기록이 남아있을 듯한 자몽현에 기대를 걸 수 밖에 없는데, 자몽현 역시 예로부터 동호(東胡)가 기거하던 곳이라는 것과, 서기 294년에 선비족 모용외(慕容廆)가 도읍한 대극성(大棘城)이 있었던 곳이라는 사실로 미루어 막막하나마 북중국의 어디 쯤으로 짐작할 수 있을 뿐 그 위치를 좀더 구체적으로 가늠할 만한 사료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번에 여태껏 사서에 숨겨져 있던 새로운 사료를 필자가 발굴하여 자몽현의 추적 범위를 대폭 좁힐 수 있었다. 바로 앞서 소개하였던, 《資治通鑑》 권 214에 실린, 호삼성이 '자몽'을 주석한 글이다. 호삼성의 주석 글을 그가 인용한 《진서(晉書)》 및 《신당서(新唐書)》 '지리지'의 본문과 더불어 다시 한번 살펴보자.


《晉書》에 실린 기록에 근거하면 진(秦), 한(漢) 시기에 동호(東胡)가 자몽(紫䝉)의 들에 모여 살았다. 《唐書》 '地理志'에 평주(平州)에 자몽, 백랑, 창려 등의 수(戍)가 있다고 하였다. 모두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이다.  據晉書載記 秦漢之間 東胡邑于紫䝉之野 唐書地理志平州有紫䝉白狼昌黎等戍 盖平州之北境契丹之南界也
資治通鑑 권 214, 胡三省 註

** '戍'는 수자리 즉 변경의 요새를 뜻한다.
** 청(淸)초 고염무(顧炎武)의《영평이주지명기(營平二州地名記)》와 고조우(顧祖禹)의《독사방여기요(讀史方輿紀要)》에도 호삼성의 기록이 인용되어 있다.

 

모용외(慕容廆). 자(字)는 혁낙괴(弈洛瑰)다. 창려(昌黎)의 극성(棘城)의 선비인(鮮卑人)이다. 그 선조(先祖)는 유웅씨(有熊氏)의 묘예(苗裔-현손)이다. 세세토록 북이(北夷)에 거하여 자몽(紫蒙)의 들에 읍(邑)을 삼으며 동호(東胡)라 불렀다.  慕容廆 字弈洛瑰 昌黎棘城鮮卑人也 其先有熊氏之苗裔 世居北夷 邑於紫蒙之野 號曰東胡
『晉書』 권 108


평주(平州) 북평군(北平郡) 下, 처음에 임유(臨渝)에서 다스리다가 무덕(武德) 원년에 노룡(盧龍)으로 옮겨 다스렸다. 토공(土貢)으로는 곰가죽과 순비기나무열매(蔓荆實)와 인삼(人葠)이 있다. 가구수는 3113이고 인구수는 2,5086명이다. 현은 3개이다. 부(府)가 하나인데 노룡(盧龍)이라고 한다. 노룡군(盧龍軍)이 있는데 천보(天寳) 1년에 설치하였다. 또한 유성군(柳城軍)이 있는데 영태(永泰) 원년에 설치하였다. 온구(温溝)와 백망(白望)과 서협석(西狹石)과 동협석(東狹石)과 녹주(緑疇)와 미부(米磗)와 장양(長楊)과 황화(黄花)와 자몽(紫蒙)과 백랑(白狼)과 창려(昌黎)과 요서(遼西) 등의 12 수(戍)가 있다. 애천(愛川)과 주기(周夔) 등의 2개의 진성(鎮城)이 있다. 동북쪽에는 명질관(明垤闗)과 골호성(鶻湖城)과 우모성(牛毛城)이 있다.  平州 北平郡 下 初治臨渝 武德元年徙治盧龍 土貢 熊鞹 蔓荆實 人葠 户三千一百一十三 口二萬五千八十六  縣三  有府一 曰盧龍 有盧龍軍 天寳一載置 又有柳城軍 永泰元年置 有 温溝 白望 西狹石 東狹石 緑疇 米磗 長楊 黄花 紫蒙 白狼 昌黎 遼西 等十二戍, 愛川 周夔 二鎮城 東北有 明垤闗 鶻湖城 牛毛城
『新唐書』 '地理志' 권 39


호삼성은 《晉書》와 《新唐書》의 기사에 근거하여, 동호(東胡)가 진(秦), 한(漢) 시기에 자몽(紫蒙)의 들에 거주하였는데 자몽은 당(唐) 평주(平州)의 수(戍)들 가운데 하나이었다고 했다. 자몽이 평주에 위치해 있었다는 사실은 동진(東晉) 시기에 평주자사(平州刺史)를 지냈던 모용선비(慕容鮮卑)의 수장 모용외(慕容廆)의 행적을 통해서도 또한 분명히 드러난다.

 

원강(元康, 291년~299년) 4년, (모용외가) 대극성(大棘城)에 도읍을 정하였는데 소위(所謂) 자몽의 읍(紫蒙之邑)이라 한다.  元康四年 定都大棘城 所謂紫蒙之邑也
『別本十六國春秋』 권 3, 北魏 崔鴻 撰

 

진(晉) 영가(永嘉)의 난에 선비족 모용외(慕容廆)가 창려(昌黎) 대극성(大棘城)에 웅거하였다. 원제(元帝)가 (모용외를) 평주자사(平州刺史)에 제수하였다. 고구려왕 을불리(乙弗利)가 요동에 빈번히 쳐들어오자 (모용)외가 감당하지 못하였다.  晉永嘉亂 鮮卑慕容廆據昌黎大棘城 元帝授平州刺史 句驪王乙弗利頻寇遼東 廆不能制

『梁書』 권 54

** 원제(元帝) : 중국 동진(東晉)의 초대 황제 사마예(司馬睿, 276년~322년).

** 乙弗利(을불리) : 고구려의 미천왕(美川王, ?~331년).

 

평주(平州)는 모용외(慕容廆)를 자사(刺史)로 하여 처음 설치되었고 마침내 (晉에) 속하였다. 영가(永嘉)의 난에 모용외는 무리에 의하여 추앙되었다.  平州初置 以慕容廆為刺史 遂屬 永嘉之亂 廆為衆所推

『晉書』 권 14 '地理 上', '平州'

 

위(魏)에서는 동이교위(東夷校尉)를 설치하여 양평(襄平)에 두고 요동(遼東), 창려(昌黎), 현토(玄莵), 대방(帯方), 낙랑(樂浪) 등 5군으로 구분하여 평주(平州)로 삼았다.  魏置東夷校尉 居襄平 而分遼東 昌黎 玄莵 帯方 樂浪 五郡為平州

『晉書』 권 14 '地理 上', '平州'

 

위 《별본십육국춘추(別本十六國春秋)》, 《양서(梁書)》 및 《진서(晉書)》 '지리지' 의 기록들을 종합하여 살펴보면 모용외(慕容廆)의 근거지였던 자몽의 읍(紫蒙之邑)은 곧 창려(昌黎)의 대극성(大棘城)이었고 대극성이 위치했던 창려는 평주(平州)의 일부분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모용외는 평주의 자몽 지역 백성들의 추앙을 받고 또한 평주자사(平州刺史)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것이다.

 

낙랑군(樂浪郡)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조선현(朝鮮縣)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屯有縣), 혼미현(渾彌縣), 수성현(遂城縣)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루방현(鏤方縣), 사망현(駟望縣).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晉書』 권 14 '地理 上', '平州'


한편 위 《晉書》 '지리지' '평주(平州)' 조항에 한(漢)이 설치한 낙랑군(樂浪郡)의 속현으로서의 루방현이 기재되어 있다. 《晉書》 '지리지' 기록상의 평주(平州)에 속한 루방현은 물론 「자몽현(紫蒙縣)은 본래 한(漢) 루방현(鏤方縣)이었다.」라고 한 《遼史》 '지리지'의 루방현과 동일한 곳임이 자명하다. 따라서 요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소속의 자몽현은 진(晉) 시기의 평주에 속했던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혹자는 "그렇다면 양서(梁書)의 기록은 왜 자몽 즉, 대극성을 '낙랑(樂浪) 대극성'이라 하지 않고 '창려(昌黎) 대극성'이라 했는가?" 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겠으나, 《梁書》가 《晉書》의 진(晉, 265년~420년)나라보다 1~2세기 늦은 양(梁, 502년~557년)나라 시기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평주 내부의 구획과 관련하여 양 시기간에 다소간의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혹시 서기 313년에 고구려의 미천왕이 낙랑군을 공격하여 그 세력을 몰아낸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한다. 여하튼 '자몽(紫蒙)'은 아마도 중국측의 '루방(鏤方)'에 상응하는 북방 민족의 지명이었을 터인데, 세월이 흐르며 평주 지역의 수명(戍名)으로 잔존하여 《新唐書》 '지리지'의 '평주' 조항에 기록된 듯 하고 그 후 발해(渤海)때에 이르러 현명(縣名)이 되어 요(遼)나라에 인습된 것으로 보인다. 정리하면, 호삼성이 《資治通鑑》 주석에 언급한 '자몽'과 《遼史》 '지리지'의 '자몽현'은 같은 곳을 가리키는 지명들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호삼성의 글에서 알 수 있는 참으로 중요한 사실은 당(唐)의 수(戍) 자몽이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에 있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가 말하는 평주는 그가 살던 시대 즉 남송(南宋) 및 원(元)대의 평주 지역을 말하고, '거란의 남쪽 경계'란 서기 1125년 금(金)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기 직전의 거란 즉 요(遼)나라와 북송(北宋)의 국경선을 가리킨다. 따라서 '자몽'의 위치 추적 범위는 거란-북송 국경선의 경로 중 평주 즉 대체로 지금의 보정시(保定市) 관할지역 경내를 지나는 부분으로 좁혀진다. 이 한도 내에서 자몽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당시의 거란-북송 국경선은 담기양(譚其驤)의 해당 시기 역사지도에 상당히 정밀하게 그려져 있으므로 이를 이용하면 효과적인 위치 추적이 가능하다. (지도 1 참조)

 

지도 1  서기 1111년 거란과 북송(北宋)의 국경선, 붉은색 타원으로 표시되어 있는 부분이 자몽의

         위치 추적 범위이다. 본 지도 출처:中國歷史地圖集6-精裝本-宋遼金譚其驤 지음

 

 

남쪽의 조주(趙州), 심주(深州) 및 하간(河間)으로부터 그 이북의 평주(平州)에 이르기까지 구수(滱水), 유수(濡水), 점수(沾水), 역수(易水) 등은 모두 같이 동쪽으로 바다를 향하여 달린다. 南自趙 深 河間以北至平州 如滱水 濡水 沾水 易水 䓁 皆東趋于海
『書蔡氏傳旁通』 권 2, 元 진사개(陳師凱) 편찬
** 滱水 : 지금의 당하(唐河)

** 沾水 : 산서성 석양현(昔陽縣)에서 발원하는 호타하(滹沱河)의 지류
** 濡水 : 지금의 거마하 ( ☞ 《수경주》의 어이진은 산서성 영구이고 고하는 상건하, 유수는 거마하이다 참조)

 

 

지도 2 《書蔡氏傳旁通》에 나타나는 평주의 위치, 沾水 滱水 易水 濡水 및 趙 深 河間 등이 보인다.

        본 지도 출처: 최신중화형세일람도(最新中華形勢一覽圖)-1935년

 

참고로 담기양(譚其驤)의 지도에 그려진 거란-북송 국경선의 위치로 미루어 호삼성이 인식하는 (그가 살던 시대의) 평주(平州)는 대체로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의 영역과 일치하는 것이 분명한데, 이는 곧 당(唐) 평주와 동일한 지역이다. 호삼성이 살았던 당시 평주의 위치는 동시대에 편찬된 《서채씨전방통(書蔡氏傳旁通)》의 위 기사에 여실히 드러난다. (지도 2 참조. 평주의 옳은 위치에 관한 자세한 논거는 ☞ 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참조 바람)

 

 

천 수백년의 세월을 견디어낸 발해의 '常樂'

 

거란-북송(北宋) 국경선의 경로 중 고대의 평주(平州)에 속하는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정흥현(定興縣), 만성구(滿城區) 및 역현(易縣) 일대를 동남 방향으로 지나는 물줄기로는 폭하(瀑河, 즉 南易水), 서수(徐水), 계조하(鷄爪河), 역수(易水) 등이 있다.


모용외(慕容廆). 자(字)는 혁낙괴(弈洛瑰)다. 창려(昌黎)의 극성(棘城)의 선비인(鮮卑人)이다. 그 선조(先祖)는 유웅씨(有熊氏)의 묘예(苗裔-현손)이다. 세세토록 북이(北夷)에 거하여 자몽(紫蒙)의 들에 읍(邑)을 삼으며 동호(東胡)라 불렀다.  慕容廆 字弈洛瑰 昌黎棘城鮮卑人也 其先有熊氏之苗裔 世居北夷 邑於紫蒙之野 號曰東胡
『晉書』 권 108


그런데 앞서 소개한 위 《晉書》의 기사에 따르면 동호(東胡)가 사는 곳은 자몽의(紫蒙之) '들()'이었다고 하였으니 이로써 자몽이 넓은 들판 한 가운데 위치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자몽에 있었던 패수의 발원지 역시 당연히 평원지대이었을 것이다. 패수의 후보로 위에 언급된 폭하(瀑河), 서수(徐水), 계조하(鷄爪河) 및 역수(易水) 가운데 평지에서 발원하는 하천은 오직 계조하가 있을 뿐 나머지 하천들은 모두 보정시 서북쪽의 험준한 산지에서 발원한다.

 

계조하(雞爪河) : 역도원의 《水經注(수경주)》에 '범수(范水)'라 칭하였다. 정흥현 고성진(固城鎮) 서북쪽 평지의 계조샘에서 물이 솟아나며 발원한다.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서수현, 용성현, 안신현을 거쳐 흐른다.  雞爪河,酈道元《水經注》稱范水,雞爪泉平地涌水,發源於定興縣固城鎮西北,流經河北省保定市定興縣,徐水縣,容城縣,安新縣。

바이두 백과 '雞爪河'

그럼 계조하의 발원지를 찾아보자.

 

계조하(鷄爪河)는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서남부의 세 지점에서 각각 발원한다. 발원지로 부터 뻗은 세 갈래의 지류가 합류하는 모양이 닭발을 닮았다 하여 계조하이다. 그 중 가장 북동쪽의 지류가 정확히 한 마을에서 발원하는데, 마을 이름이 놀랍게도 상락부촌(常樂富村)이다.


상락부촌 지도 ☞ https://goo.gl/maps/QBmmqKc1wpc7tx3k8

 

 

지도 3  常樂富 마을에서 발원하는 계조하(鷄爪河), 본 지도 출처: http://map.ps123.net/china/5000.html

 

요양현(遼陽縣)은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 지역이었다. 한(漢)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때에 상락현(常樂縣)이 되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遼陽縣 本渤海國 金徳縣地 漢浿水縣 髙麗改為勾麗縣 渤海為常樂縣 户一千五百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 조선 정조 때의 실학자 유득공(柳得恭)渤海考》에서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에 속한 상락현(常樂縣)은 한(漢)나라 때 패수현이었다고 하였다.


《遼史》 '지리지'에 이르기를 한(漢)나라의 본 패수현(浿水縣)은 고구려가 구려현으로 고쳤고 발해가 상락현(常樂縣)으로 고쳤다. 패수는 한나라 낙랑군에 있었다. 지금의 조선의 경계 안쪽이다. 금덕(金徳)과 상락(常樂)은 곧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의 현명이다. 모두 이곳(한반도 조선)에 없었다.  遼志云 本漢浿水縣 高麗改為句麗縣 渤海為常樂縣 浿水在漢樂浪郡 今朝鮮界内 金徳常樂乃渤海中京顯徳府縣名 皆不在此
『欽定盛京通志』 권 100

** 참고로, 상기《欽定盛京通志》의 문구는 는 금덕(金徳)과 상락(常樂)이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의 현(縣)명들로서 한반도 조선에는 없었다고 하면서도 패수와 낙랑군은 한반도 조선의 땅이라고 하는 자기모순적인 기록을 담고있다.

 

허신(許慎)은 말하기를 패수(浿水)는 루방현을 나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가는데 혹은 패수현을 나온다고 하였다. 십삼주지(十三州志)에서 말하기를 패수현은 낙랑 동북쪽에 있고 루방현은 군의 동쪽에 있는데 (패수의 발원 지류들은) 모두 그 (각각 발원하는) 현을 나와 남쪽으로 루방현을 지난다고 하였다.  許慎云 浿水出鏤方 東入海 一曰出浿水縣 十三州志曰 浿水縣在樂浪東北 鏤方縣在郡東 盖出其縣南逕鏤方也

『水經注』  권 14 '浿水'


《遼史》 '지리지', 《欽定盛京通志》 및 유득공의 《渤海考》 등 여러 사서에 나오는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 관할의 상락현(常樂縣)이 있는데, 한(漢)나라 시기에는 패수현(浿水縣)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상락현이 패수(浿水)의 발원지라는 뜻이다.

 

한편 상락부촌(常樂富村)에서 발원한 계조하(鷄爪河)는 동남쪽으로 흘러 서수구(徐水區) 중심부의 북쪽에 이르른 뒤 동쪽 방향으로 이어진다. 한(漢)대 당시에는 지금의 서수구(徐水區) 동쪽 인근까지 발해만의 바다가 들어와 있었으므로 계조하의 경로는 패수(浿水)가 동남쪽으로 흐르다가 동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고 한 《水經》의 기록에 정확히 일치한다. 결국 낙랑군 패수현(浿水縣)의 절대위치를 정흥현(定興縣)의 상락부촌(常樂富村)에서 찾은 것이다. 계조하가 패수인 또 다른 근거들이 뒤에 추가로 제시되겠지만, 무려 일천년하고도 수백년전 발해(渤海)의 지명이 사서의 기록대로 정확히 패수의 발원지에 나타난 실로 놀랍고도 절묘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패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지금의 계조하(鷄爪河)이다.

 

지도 4  고지도에서 확인되는 계조하(鷄爪河)와 '상락(常樂)', 본 지도 출처:『保定府志』권17,1886년 간행 (지도를 이어 붙이기 위해 편집 하였음). 참고로, 지도상의 常樂富(상락부) 바로 아래쪽에 鮮魚村(선어촌)이란 지명이 보인다. 《漢書》 '지리지'에 따르면 신(新)나라를 세운 왕망(王莽)은 낙랑군 패수현을 樂鮮亭(락선정)으로 불렀다 하였는데, 常樂과 더불어 鮮魚 역시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지명이라면 樂鮮「常樂과 鮮魚」에서 유래했을 개연성이 높다.


루방현의 위치에 관하여는 위 《水經注》에 인용된 《十三州志》의 기사를 계조하의 유로에 적용하여 논리적으로 분석하면 루방현(鏤方縣)과 패수현(浿水縣) 경내에서 각각 발원한 패수(즉 계조하)의 지류들이 루방현 경내로 모인다는 사실이 도출된다. 즉 패수현의 남쪽에 루방현의 영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지도 5 참조)


이상의 사실과 더불어 자몽(紫蒙, 즉 루방현)이 거란-북송의 국경선 가까이에 있었다고 한 《資治通鑑》 권 214의 호삼성 주석을 참고하면 루방현은 계조하의 가장 서남쪽 지류가 발원하고, 거란-북송 국경선이 근접하여 지나는 정흥현(定興縣) 신목촌(辛木村) 일대로 신뢰성 있게 비정된다. (지도 5 참조)

 

八月, 扶尉厭伐九里城拔之置句麗縣入紫蒙城[昆都]. 紫蒙王西川以其妻婁洽乞命, 尉厭遂通婁洽而妾之, 西川又以其雀舌来乞命. 尉厭亦取之, 約歲貢牛馬二千匹‧薬草二十種‧虎皮七十張而退軍湖海, 献紫蒙豕大如牛者及婁洽‧雀舌.  8월, 부위염(扶尉厭)이 구리성(九里城)을 쳐서 빼앗아 구려현(句麗縣)을 설치하고서 자몽성(紫蒙城)[곤도(昆都)]으로 들어갔더니, 자몽왕 서천(西川)이 자신의 처 루흡(婁洽)을 내어놓으며 목숨을 구걸하기에 위염이 루흡과 상통하여 첩을 삼았으며, 서천이 또다시 작설(雀舌)을 바치며 찾아와서 목숨을 구걸하기에 위염이 또한 취하고는, 매년 소와 말 2천 필과 약초 20종 및 호피 70장을 조공하기로 약조를 받고 군대를 호해(胡海)로 물렸으며, 크기가 소만한 자몽돼지(紫蒙豕)와 더불어 루흡과 작설을 상께 바쳤다.

南堂遺稿 『芻牟鏡』 下 권6 本紀 제7, 동명성왕 16년 (서기전 22년)

 

참고로,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의 필사본 《추모경(芻牟鏡)》에 고구려 동명성왕의 장수 부위염(扶尉厭)이 구리성(九里城)을 접수하여 구려현(句麗縣)을 세운 뒤 곧장 자몽성(紫蒙城)으로 향하여 역시 무력으로 굴복시킨 기사가 있다. 정황상 자몽성(루방현과 같은 위치)과 구리성(구려현 즉 패수현과 같은 위치)은 서로 가까이 위치해 있었던 것이 분명한데, 필자가 자몽현과 구려현으로 각각 비정하는 지금의 정흥현(定興縣) 신목촌(辛木村)과 상락부촌(常樂富村)은 서로간 불과 6킬로미터 남짓 떨어진 거리에 있어 《추모경》의 기사에 부합한다. (지도 5 참조)

 

[클릭 확대] 지도 5  패수, 패수현, 루방현과 왕검성의 위치, 거란-북송 국경선은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6-精裝本-宋遼金』을 참조하였다. 발해만의 고대 해안선은『Caroline Blunden & Mark Elivn, Cultural Atlas of China, 1998』와 『가정하간부지(嘉靖河間府志), 1540』에 수록된 '구하도(九河圖, 지도 5-1)를 참조하였다.

 

 

지도 5-1 『가정하간부지(嘉靖河間府志)』(1540년 발간)의 구하도(九河圖), 한(漢) 시기의 발해만 일대가 그려져 있다. 지금의 천진(天津)은 당시의 먼 바다에 표시되어 있고, 하간(河間) 및 임구(任丘) 역시 바다에 잠겨 있다. 구하도에 따르면 지금의 하북성 보정(保定)시 인근 고양(高陽)현은 당시 발해만의 해안지역이었다.

 

 

요동고새는 패수에 이르렀다.

 

조선왕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나라의 전성기에 비로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속하게 하고, 관리를 두고 장새를 쌓았던 적이 있었다. 진(秦)나라가 연나라를 멸하자 요동(遼東) 밖의 변방에 속하게 되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서 지키기 어렵다 하여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까지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손질하여 복구시키고 경계로 삼아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 爲界 屬燕

『史記』'朝鮮列傳'

 

위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의 기록에 따르면 전한 시기 고조선과 한나라의 국경선이었던 요동고새(遼東故塞) 즉 요동의 옛 장성이 패수와 만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주장하는대로 지금의 계조하(鷄爪河)가 패수인 것이 사실이라면 요동고새의 경로는 반드시 어느 지점에선가 계조하와 맞닿아야만 한다.

 

연나라 남장성은 서(西)기점인 현 하북성 역현 서쪽 지경의 인의장(仁義庄) 서쪽 과라두(科羅頭, 즉 科羅坨)산 제2 봉우리에서 시작한다. 동으로 역현의 동쪽 경계인 곡성촌(曲城村)에 이르러 서수현(徐水縣) 태화장(太和庄)으로 진입한 뒤 서수 해촌(解村)을 지나 서수현 성관(城關)에 이른다. 다시 동으로 상평장(商平庄)을 지나 용성현(容城縣) 흑룡구촌(黑龍口村)에 이른다.  燕國南長城西起今河北易縣西境仁義庄西科羅頭的第二個山峰上 向東至易縣東境曲城村入徐水縣太和庄 經徐水解村至徐水縣城關, 再往東經商平庄至容城縣黑龍口村

『燕文化』, 陳平 지음 2006, 168쪽.

** 서수현(徐水縣)은 2015년에 서수구(徐水區)로 바뀌었음.

 

보정의 낭아산(狼牙山) 동북쪽 끝자락의 과라타(科羅坨) 봉우리에서 시작하여 동남 방향으로 진행한 뒤 서수구(徐水區)를 관통하는 '연(燕)장성'을 요동고새(遼東故塞)로 볼 수 있다. '연장성'의 경로는 위 《燕文化》의 기사에 밝혀진 바와 같이 서수구를 지나 동쪽으로 용성현 흑룡구촌(黑龍口村)에 다다른다. 그런데 흑룡구촌은 계조하(鷄爪河) 강변에 접하여 있는 마을이다. 즉 '연장성'과 계조하가 흑룡구촌에서 만나는 것이다. 이는 곧 요동고새가 패수에 이르렀다고 한 《史記》 '조선열전'의 기록에 정확히 일치한다. (지도 5, 6 참조)

 

지도 6  패수와 만나는 요동고새 (붉은색 원 표시), 본지도 출처:『東北文化與幽燕文明』, 郭大順 지음 2005, 591쪽

** 서수현(徐水縣)은 2015년에 서수구(徐水區)로 바뀌었음.

 

연왕 노관이 (한나라를) 배반하고 흉노로 들어가자 만(滿)도 망명하였다. 무리 천여 인을 모아 북상투에 오랑캐의 복장을 하고서, 동쪽으로 (요동의) 새(塞)를 나와서 패수를 건너가 진의 옛 공지인 상하장에 살았다.  燕王盧綰反 入匈奴 滿亡命 聚黨千餘人 魋結蠻夷服而東走出塞 渡浿水 居秦故空地上下鄣

『史記』'朝鮮列傳'

 

광양국(廣陽國), 고제(髙帝)때에 연국(燕國)이다. 소제(昭帝) 원봉(元鳳) 원년에 광양군(廣陽郡)이 되었다. 선제(宣帝) 본시(本始) 원년에 고쳐 후국으로 하였다. 왕망은 광유(廣有)라고 하였다. 가구수는 2,0740이고 인구수는 7,0658명이다. 현은 4개이다. 계현(薊縣), 옛 연국(燕國)이다. 소공(召公)을 봉한 곳이다. 왕망은 벌융(伐戎)이라 하였다. ....  廣陽國 髙帝燕國 昭帝元鳳元年為廣陽郡 宣帝本始元年更為國 莽曰廣有 戸二萬七百四十 口七萬六百五十八 縣四 薊 故燕國 召公所封 莽曰伐戎 ....
『漢書』 권 28下 '地理志'
** 고제(髙帝) : 한 태조(漢太祖) 유방(劉邦), 재위 서기전 202 ~ 서기전 195

** 소제(昭帝) 원봉(元鳳) 원년 : 서기전 80년, 선제(宣帝) 본시(本始) 원년 : 서기전 73년

 

계(薊)는 옛 연(燕)의 도읍이다. 소제(昭帝)가 연(燕)을 광양국(廣陽國)으로 개명하였는데, 치소는 역시 계(薊)였다.  薊 故燕都 昭帝改燕為廣陽國 亦治薊
『資治通鑑』 권 39 胡三省 註

 

또한 패수를 계조하(鷄爪河)의 위치에 놓고 살펴보면 위만(衛滿)이 무리 1,000여인과 함께 연국(燕國)을 탈출하여 고조선으로 들어오던 때의 망명로가 명료하게 드러난다. 즉, 위 《漢書(한서)》 '지리지' 및 《資治通鑑(자치통감)》 '호삼성 주'의 기록들에 따르면 당시 연국의 치소는 계현(薊縣)이었고 그 위치는 지금의 보정시 당현(唐縣)에 비정되는데 (연국 계현의 위치 비정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 수나라 탁군 계현은 북경이 아니다.☞ 고대 유주 연국 계현의 절대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당현이다. 참조), 그렇다면 위만 일행은 지금의 당현을 출발, 동북쪽으로 이동하여 완현(完縣, 즉 순평현順平縣) 및 만성구(滿城區)를 거쳐 서수구(徐水區) 해촌(解村) 일대에 다다른 뒤 연장성(새塞)를 통과하여 고조선의 영역에 들어온 다음, 이어서 계조하(패수)를 건너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 일대(즉 상하장)에 도달한 것이 명백하며, 이는 위만이 동쪽으로 새(塞)를 먼저 벗어난 뒤에 패수를 건넌 것으로 되어 있는 위 《史記(사기)》 '조선열전'의 기록에 절묘히 부합한다. (지도 6, 6-1 참조)

 

지도 6-1  위만의 망명로

 

 

범양 옛성은 진(秦)나라 범양현이다. (역易)현 동남쪽 62리 범수의 북쪽에 있었다.  范陽故城秦范陽縣也 縣東南六十二里 以在范水之陽

『元和郡縣志』 권 22, '易縣'

 

더불어 위 《元和郡縣志(원화군현지)》의 기록에 범양고성(范陽故城) 지역, 즉 지금의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 일대는 진(秦)나라의 범양현(范陽縣)이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위만(衛滿)과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망명하여 자리잡은 상하장(上下鄣)이라는 곳이 진(秦)의 옛 공지(空地)였다고 전한 《史記(사기)》 '조선열전'의 기록과도 적절히 부합한다.

 

 

 

계조하(鷄爪河)는 곧 니하(泥河)이다.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有蒲河 清河 浿水 亦曰 泥河 又曰 蓒芋濼 水多蓒芋之草
『遼史』'地理志', '東京遼陽府'

 

위 《요사(遼史)》 '지리지'의 기사를 통하여 요(遼)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있었던 고대의 패수(浿水)가 '니하(泥河)'로도 불렸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조선(朝鮮)의 땅이었다.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감옥에서 풀어주자 (기자는) 조선으로 갔고, (무왕은) 이로 인해 그를 봉해 주었다. .... 한(漢)나라 초기에 연나라 사람 만(滿)이 옛 공지에서 왕이 되었다. 무제(武帝) 원봉(元封) 3년(기원전 108)에 조선을 평정하여 진번, 임둔(臨屯), 낙랑(樂浪), 현도(玄菟) 4군(郡)을 설치하였다.  東京遼陽府 本 朝鮮之地 周武王釋 箕子囚 去之朝鮮 因以封之 .... 漢初 燕人滿王故空地 武帝元封三年 定朝鮮 為 真番 臨屯 樂浪 玄菟 四郡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요(遼)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본래 고조선의 땅으로서 위만(衛滿)이 왕이 되었다가 한무제(漢武帝)에게 평정되어 4군(郡)이 설치된 곳이므로 그곳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된 '패수(浿水)'는 당연히 왕검성과 관련된 바로 그 '문제의 패수'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필자가 패수로 주장하는 계조하(鷄爪河)가 고대에 '니수(泥水)'로 불렸었다.

 

역수(易水)가 또 동쪽으로 진행하면서 니수(埿水)가 (역수로) 흘러든다. (역)수는 위로(북쪽으로)부터 용성현(容城縣) 동남쪽의 두 못을 연결하는데, 대니정(大埿淀)과 소니정(小埿淀)이라 일컫는다. 그 하천(埿水)이 남쪽으로 역수에 흘러드는 곳을 니동구(埿洞口)라 일컫는다. 하천의 곁에 혼니성(渾埿城)이 있으며 역수가 그 남쪽을 지나 동쪽으로 구수(滱水)와 합류한다.  易水又東 埿水注之 水上承二陂于容城縣東南 謂之大埿淀 小埿淀 其水南流注易水 謂之埿洞口 水側有渾埿城 易水逕其南 東合滱水
水經注권11, '易水'
** '埿'는 '泥'의 본자(本字)이다.

 

남역수(南易水)는 (용성容城)현의 남쪽에 있다. 영주(瀛州) 고양현(高陽縣)의 경내로 흘러들어 구수(滱水)와 합류한다. 폐현성(廢縣城)이 (웅雄)주의 서북쪽 50리에 있다. 대니정(大泥淀)이 (용성)현 남쪽 30리에 있다. 《水經》에 주석하여 이르기를 역수(易水)가 동쪽으로 용성(容城)의 대니정(大泥淀)에 흘러드는 곳을 가리켜 니동구(泥同口)라고 한다 하였다.  南易水在縣南 流入瀛州高陽縣界 與滱水合流 廢縣城在州西北五十里 大泥淀在縣南三十里 注水經云 易水東流容城 大泥淀注之 泥同口之謂也
太平寰宇記권 67, '雄州' '容城縣'

 

위 《수경주(水經注)》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의 기사에 따르면 고대의 니수(泥水)라는 하천이 남쪽으로 흘러 남역수(南易水, 즉 폭하瀑河)와 합류하여 용성현(容城縣) 동남쪽의 대니정(大泥淀) 및 소니정(小泥淀)에 유입되었다. ** 위 《太平寰宇記》 기사의 내용에 의하면 《水經注》 권11의 니수(泥水)와 합류하는 '易水'는 더 정확히 南易水를 가리킨다. 대니정(大泥淀)과 소니정(小泥淀)은 보정시(保定市) 서수구(徐水區) 및 용성현의 동남쪽에 위치한 백양정(白洋淀) 습지의 고대 명칭들인 것이 분명하고 남역수는 현재도 같은 이름으로 같은 자리에 존재하므로 남쪽 방향으로 남역수와 합류하여 백양정에 흘러드는 것으로 기록된 고대의 니수(泥水)는 의심의 여지없이 지금의 계조하이다. (지도 7 참조) ** 하천의 명칭에 흔히 '水'와 '河'가 서로 넘나들며 사용되므로 '泥水'는 곧 '泥河'이다. 이 사실은 패수의 실체가 계조하임을 증명하는 또 하나의 강력한 증거가 아닐 수 없다.

 

 

 

지도 7  남역수(南易水)와 합류하는 니수(泥水)


 

왕검성 및 평양성은 보정시 정흥현의 固城이다.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鎮)에  '고성(固城)' 또는 '범양고성(範陽古城)'으로 알려진 옛 성터가 남아있다.


固城 위성지도 https://satellites.pro/China_map#E39.133408,115.694891,17


위성사진상 성터 거의 대부분이 주택가 등에 잠식당한것으로 확인되지만, 허물어진 성벽인 듯한 윤곽이 식별되고 군데 군데 보이는 물웅덩이는 아마도 해자의 흔적일 것이다.

 

고성진은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에 속해있다.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관할의 '진(鎮)'이다. 옛날에는 강물(水)의 북쪽을 '양(陽)이라 일컬었다. 성(城)이 범수의 북쪽에 있다하여 범양이란 이름을 얻었다.  (범수: 즉 지금의 정흥현 고성진의 계조하이다.)  固城鎮隸屬於河北省保定市定興縣 是河北省保定市定興縣轄鎮,古時稱南水北為陽,城在范水之北而得名范陽 (范水:即今定興縣固城鎮雞爪河)
『바이두 백과』 '固城鎮'


요동군 험독현, 응초(應劭)가 말하기를 조선의 임금 위만이 도읍한 곳이다. 물의 험한 것에 의지하였기에 험독이라 하였다. 신찬(臣瓉)이 말하기를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험독은 그냥 험독이다. 師古가 말하기를 臣瓉의 설명이 옳다고 하였다. '浿'의 음은 배(普大反)이다.  遼東郡 險瀆, 應劭曰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曰險瀆 臣瓉曰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 師古曰 瓚説是也 浿音普大反
『前漢書』 권 28下 '地理志'


계조하(鷄爪河) 동쪽 7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固城은 《전한서(前漢書)》 '지리지'의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증언에 정확히 일치한다. (지도 5 참조) 한편, '固城' 이란 명칭에서는 "완고한 성" 또는 "고집스러운 성"이라는 뉘앙스가 느껴지는데, 아마도 끝까지 한(漢)나라의 침략에 맞서 싸우다 최후를 맞은 왕검성의 조선왕 우거(右渠)와 대신(大臣) 성기(成己)의 항거에 빗대어 지어낸 이름일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사마천 역시 《사기》 '조선열전'에서 「우거는 (자신의) 완고(固)함에 기대다가 나라의 사직을 잃었다. 右渠負固 國以絶祀」라고 평하였다. 固城은 또한 한(漢)나라의 패수현(浿水縣)이자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의 속현인 상락현(常樂縣)의 위치로 밝혀진 상락부촌(常樂富村)의 동남쪽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다. 固城이 바로 고조선의 왕검성이자 발해 중경현덕부의 치소인 것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길 고(구)려는 평양성에 도읍하였는데 본래 한(漢) 낙랑군 왕험성이며 또 옛부터 말하기를 조선의 땅이라 한다 하였다.  括地志云 高驪都平壤城 本漢樂浪郡王險城 又古云朝鮮地也
『史記』'朝鮮列傳' 正義


현덕부(顯德府)는 본래 조선의 땅으로 곧 평양성이다. 주(周) 무왕(武王)이 기자(箕子)를 봉하고, 한(漢) 말에 공손탁(公孫度)의 거점이 되었고, 진(晉)때에 고구려에 점령되었고, 당(唐)이 안동도호(安東都護)를 두었고, 대(大)씨의 소유가 되었다. 중종때에 이름을 홀한주(忽汗州)라 명하였다.  顯德府 本朝鮮之地 卽平壤城 周武王以封箕子 漢末爲公孫度所據 晉時陷於高句麗 唐置安東都護 爲大氏所有 中宗時賜名忽汗州
『渤海考』 


원위(元魏, 즉 북위) 태무제(太武帝)가 그들(즉 고구려)이 거주하는 평양성에 사신을 보냈으니, 요()라 동경이 바로 이곳이다. 당(唐)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평정하고 여기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지만, 나중에 발해의 대씨(大氏)가 차지하였다. .... 홀한주는 바로 옛 평양성으로, 중경현덕부 라고도 한다.  元魏 太武遣 使 至其所居平壤城, 遼 東京 本此 唐髙宗 平 髙麗 於此 置 安東都䕶府, 後為 渤海大氏所有 .... 輝罕州即 故 平壤城也 號 中京顯徳府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 요나라의 동경을 지금의 요녕성 요하 유역의 요양(랴오양)으로 보고, 고구려의 평양이 그곳에 있었다고 하는 최근 학계의 견해가 있는데, 요나라 동경의 위치에 평양이 있었던 것으로 본 것은 옳지만, 동경을 요하 유역에 비정한 것은 심각한 오류이다. 본글에서 알 수 있다시피 요나라의 동경 요양부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일대에 있었다.

 

위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註, 《발해고(渤海考)》 및 《요사(遼史)》 '지리지'의 기사를 통하여서도 역시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徳府)는 본래 고조선 왕검성의 자리이었던 곳에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

 

안동대도호부, 순임금이 청주를 나누어 영주로 삼고 목(牧)을 두었으니 마땅히 요수의 동쪽이 이곳이다. 춘추 및 전국시대에는 아울러 연(燕)에 속하였고 진(秦)과 전, 후한(漢)대에는 요동군이라 하였다. 동쪽으로 낙랑과 통하였다. 진(晉)이 인습하였고 겸하여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後魏) 때에 고구려가 그 땅에 도읍하였다.  安東大都護府, 舜分靑州爲營州 置牧 宜遼水之東是也 春秋及戰國 竝屬燕 秦二漢曰遼東郡 東通樂浪 晉因之 兼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通典 권 180, '州郡' 

** 혹자는 평주를 진황도시 난하 유역 일대로 보아 그곳에 평양이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를 평주의 중심부로 인식한 것은 탁월한 식견이지만, 아쉽게도 평주를 후대에 지명 이동된 위치에 잘못 비정하는 바람에 평양성의 위치 역시 따라서 빗나가고 말았다. 한국 고대사의 영역은 생각보다 훨씬 더 깊숙이 대륙의 서쪽 방면으로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진(晉)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 시기의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通鑑地理通釋』 권 10

 

특히 위 《通典》과 《通鑑地理通釋》의 기사에는 북위(北魏, 즉 後魏 또는 元魏) 시기 고구려가 진(晉)나라의 평주가 위치해 있었던 곳에 도읍하였다고 했는데, 이는 곧 《遼史》 '지리지'의 북위 태무제가 사신을 보낸 '평양성'과 동일한 곳으로서 바로 고구려의 장수왕이 천도하여 도읍한 평양성을 가리킨다. 즉 고조선의 왕검성은 훗날 같은 자리에 고구려의 평양성이 되었고 뒤이어 발해 중경현덕부의 치소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폐허가 된 정흥현(定興縣)의 固城에 그 흔적들이 남아 있는 것이다.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에 있는 固城 기념비


 

청평(淸平)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淸平云 粟末水之陽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 卽平壤也
『揆園史話』'단군기'

** 淸平: 《진역유기(震域遺記)》의 저자 이명( 李茗)을 말한다.


뿐만 아니라 《규원사화(揆園史話)》에 인용된 위 《진역유기(震域遺記)》의 기사가 정확하다면 固城 일대는 단군조선의 첫 도읍지이고 따라서 하북성 보정의 정흥현(定興縣) 및 서수구(徐水區) 지역은 한민족의 발상지가 된다.

 

 

평양성은 패수 하구로부터 60리 거리에 있었다.

 

요동의 전쟁에 (내)호아(護兒)가 누선을 이끌고 창해(滄海)로 가서 패수(浿水)에 진입하니 평양까지의 거리가 60리였다.  遼東之役 護兒率樓船 指滄海 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隋書권 64, '來護兒'


좌익위대장군 내호아(來護兒)가 수백리에 달하는 강회(江淮) 수군의 선단을 이끌고 나아가 바다를 통하여 먼저 패수(浿水)에 진입하니 평양까지의 거리가 60리였다.  左翊衛大將軍來護兒 帥江淮水軍 舳艫數百里 浮海先進入自浿水 去平壤六十里
삼국사기권 20, 고구려본기 '영양왕 嬰陽王'


위 《수서(隋書)》 와 삼국사기의 기록들에 따르면 영양왕(嬰陽王) 23년(서기 612) 수(隋)나라 양제(帝)가 고구려를 공격할 당시 수나라 장수 내호아(來護兒)가 수군 선단을 이끌고 발해만의 바다로부터 패수(浿水)에 진입하여 평양으로 향하였는데, 패수의 하구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60리(里)였다.

 

지금의 계조하(鷄爪河) 하류 강변에 접하여 있는 보정시(保定市) 용성현(容城縣) 관할의 흑룡구촌(黑龍口村)은 강의 하구를 뜻하는 그 명칭과 백양정(白洋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그 위치로 미루어 백양정의 습지가 발해만 바다의 일부이었던 고대시기에 해안으로 이어진 계조하의 하구이었을 것이 분명해 보인다. 필자가 주장하는 바와 같이 계조하가 고대의 패수(浿水)라면 수(隋)나라 수군은 틀림없이 흑룡구 부근의 하구로부터 시작하여 계조하 하류와 그 지류인 평하(萍河)를 차례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의 평양성으로 여겨지는 固城(고성)에 도달하였을 것이다. (지도 8 참조)


그런데 흑룡구촌에서 계조하와 평하의 유로를 거슬러 固城(고성)에 이르는 경로의 길이는 약 26킬로미터이다. (구글지도 등의 거리측정 기능 이용)  《隋書》가 집필되던 당(唐)대의 대척(大尺, 0.2955미터)을 기준으로 통용되던 1리(里)는 1,500 대척 (443.25미터) 또는 1,800 대척 (531.90미터)인데, 그 중 '1리 당 1,500 대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흑룡구촌에서 固城까지의 거리는 58.7리에 해당된다. 사서에 기록된 60리에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units_of_measurement 참조


이상의 논거를 통하여 고대의 패수는 곧 계조하임과 아울러 고구려의 평양성이 固城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된다.

 

지도 8  패수 하구로부터 평양성까지의 거리

 

 

範水(범수)는 곧 蓒芋濼(한우락)이다.


패수로 밝혀진 계조하(鷄爪河)는 사서에 '範水(간체자 范水)'로 많이 등장한다. 범양(範陽)이란 보정의 고대 지명도 범수(範水)의 북쪽(陽)이라는 의미에서 비롯되었다. 앞서 소개한 《遼史》 '지리지'의 기사를 다시 한번 살펴보자.


포하(蒲河), 청하(淸河), 패수(浿水)가 있다. 패수는 니하(泥河) 또는 한우락(蓒芋濼)이라고도 하는데, 강에 한우초가 많기 때문이다.  有蒲河 清河 浿水 亦曰 泥河 又曰 蓒芋濼 水多蓒芋之草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 蓒芋濼은 '헌우락' 또는 '한우력'으로도 알려져 있다.

 

기사에 따르면 패수는 蓒芋濼(한우락)으로도 불렸다.
그런데 묘하게도 '範水'의 '範'과 '蓒芋濼'의 '蓒'은 서로 매우 닮은 모양의 글자들이다. 우연의 일치일까?

그렇지 않을 것으로 본다.

 

우선 '範'의 간체자 '范'에는 '풀 이름'의 뜻이 있고 '蓒芋'는 토란(특히 물가에서 자라는 물토란)을 가리킨다는 점에서 '範'과 '蓒'은 일맥상통한다. (☞ 고조선의 홍범구주와 토란재배 그리고 단군영정에 대한 단상 참조).


  蓒


'範'은 '常'이다.  範 常也
『康熙字典』 '範'


'範'의 모양을 본뜬 것이 '常'이다.  範者 模法之常也
『爾雅注疏』 권 1


더욱이 《강희자전(康熙字典)》에 '範'은 '常'이다라고 하였고 《康熙字典》이 인용한 《이아주소(爾雅注疏)》의 기록에 '常'은 '範'의 모양을 본뜬 것이라 하였다. 종합하면 결국 '範水'와 '常樂'은 모두 '蓒芋濼'의 다른 표현들이었을 개연성이 농후하다. 즉 範水(범수, 즉 계조하)가 곧 常樂(상락)이자 蓒芋濼(한우락)이라면, 범수는 동시에 패수인 것이다. 놀라운 사실이다. ('상락현常樂縣'과 '패수현浿水縣' 역시 같은 의미의 지명들임도 알 수 있다.) 이는 위치 추적과는 전혀 다른 측면에서 지금의 계조하가 곧 패수임을 재확인 시켜주는 교차검증이 된다.

 

 

결론

 

필자가 새로 발굴한 《資治通鑑》 권 214 호삼성 주석의 기록이 결정적인 단초가 되어 한(漢) 낙랑군 패수현(浿水縣)의 절대위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아울러 루방현(鏤方縣)의 위치 또한 신뢰성 있게 비정되었다. 패수현의 위치가 밝혀짐으로서 패수와 함께 인접한 왕검성의 실체가 어렵지 않게 드러나게 되고, 더불어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 및 발해의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가 모두 동일한 위치에 있었던 사실도 알 수 있었다. 더 나아가 호삼성의 기록과는 별개의 사료들을 통하여 새로 밝혀진 패수의 실체를 교차 검증 하였다.


이번에 밝혀진 패수 및 주요 지명들의 정확한 위치는 다음과 같다.

 

고조선 왕검성: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 일대 (河北省 保定市 定興縣 固城鎮 일대)
고구려 평양성: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 일대 (河北省 保定市 定興縣 固城鎮 일대)
발해 중경현덕부: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고성진 일대 (河北省 保定市 定興縣 固城鎮 일대)
한(漢) 낙랑군 패수현: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상락부촌 일대 (河北省 保定市 定興縣 常樂富村 일대)
한(漢) 낙랑군 루방현: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신목촌 일대 (河北省 保定市 定興縣 辛木村 일대)
패수(浿水):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및 서수구 일대의 계조하 (河北省 保定市 定興縣 및 徐水區 일대의 鷄爪河)

 

 

 

본글의 영문본은 이곳에 있음 Peishui found. Wanggomsong of Old Choson and Pyongyangsong of Koguryo located at Gucheng of Dingxing Baodi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