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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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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평주는 어디에 있었나?

 

《晉書》에 실린 기록에 근거하면 진(秦), 한(漢) 시기에 동호(東胡)가 자몽(紫䝉)의 들에 모여 살았다. 《唐書》 '지리지'에 평주(平州)에 자몽, 백랑, 창려 등의 수(戍)가 있다고 하였다. 모두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이다.  據晉書載記 秦漢之間 東胡邑于紫䝉之野 唐書地理志平州有紫䝉白狼昌黎等戍 盖平州之北境契丹之南界也

『資治通鑑』 권 214, 胡三省 註

 

'천문미분야(天文尾分野)[각주:1]'이다. 우(禹)임금의 기주(冀州) 지역이다. 순(舜)임금이 처음 기주를 나누어 그 동북이 영주(營州)가 되었다. 즉 상(商)나라의 고죽국(孤竹國)이다. 주(周)나라의 유주(幽州)에 속하였다. 춘추(春秋)시기에 산융(山戎)과 비자(肥子) 두 나라의 땅이었다. 진(秦)나라의 요서(遼西)와 우북평(右北平) 두 군이었다. 한(漢)나라 말엽에는 공손도(公孫度)의 거점이었다. 위(魏)나라가 노룡군(盧龍郡)으로 고쳤다. 북연(北燕)이 평주(平州) 및 낙랑군(樂浪郡)을 두었다. 후위(後魏)가 낙랑(樂浪)을 북평군(北平郡)으로 고쳤다. 수(隋)나라가 평주(平州)로 고쳤다가 후에 주(州)를 폐하고 군(郡)으로 삼았다. 천보(天寳) 초에 북평군(北平郡)으로 고쳤다. 건원(乾元) 초에 평주로 되돌렸다. 오대(五代) 당(唐) 때에 요(遼)나라가 일어나 군으로 삼았다. 본조(宋)가 평주(平州)로 삼았다.  天文尾分野 禹貢冀州之域 初虞[각주:2]分冀州 東北為營州 即此商為孤竹國 周屬幽州 春秋時為山戎肥子二國地 秦為遼西右北平二郡地 漢末為公孫度所據 魏改盧龍郡 北燕置平州及樂浪郡 後魏改樂浪為北平郡 隋改為平州後廢州為郡 唐後改為平州 天寳初改為北平郡 乾元初復為平州 五代唐為遼興郡 本朝為平州

『記纂淵海』 권 22 '平州', 宋 潘自牧 撰

 

호삼성(胡三省)은 위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석에 당(唐) 평주(平州)의 자몽, 창려, 백랑 등 수(戍)들의 위치에 대하여 송(宋)대의 지리적 배경에 기반하여 서술하였다. 즉, 호삼성이 언급한 '평주의 북쪽 지경'에서 '평주'는 그가 살던 송(宋)나라 시기의 평주 지역을 말하고, '거란의 남쪽 경계'란 서기 1125년 금(金)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기 직전의 거란 즉 요(遼)나라와 북송(北宋)의 국경선을 가리킨다. 위 《記纂淵海(기찬연해)》의 기사에 의하면 송(宋)과 당(唐) 시기 사이에 평주의 위치에 변동은 없었다. 따라서 호삼성이 언급한 송(宋)대의 평주와 당(唐)대의 평주는 동일한 지역이다. (지도1, 2 참조)

 

(평주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는 https://earthlin9.tistory.com/15#section2_1 참조 바람)

 

 

지도1  송(宋)나라 시기(1111년)의 평주와 범양[각주:3]



 

지도2  당(唐)나라 시기(741년)의 평주와 범양[각주:4]

 

 

그런데 학계의 통설에 따라 진황도시 난하 하류 유역에 비정된 평주(平州)의 위치를 호삼성 주석의 내용에 적용하여 살펴보노라면 평주의 북부를 지났다는 요(遼)-북송(北宋) 국경선이 도대체 어디에 있었다는 말인지 도무지 설명이 안된다. 통설상 송(宋)대의 평주는 전부 요(遼)나라의 영역으로 되어있어 송(宋)나라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곳이고 그 지역 일대의 남쪽 경계 밖에는 발해만의 바다가 있었을 뿐 송(宋)나라는 없었기 때문이다. (지도1 참조) 실제로 역사상 송나라의 영역은 북동쪽으로 지금의 천진(天津)시를 넘지 못하였다. 호삼성이 헛소리를 한 것이 아니라면 평주의 위치 비정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즉시 알 수 있는 것이다.

 

통설에 따른 평주의 위치 비정에 보이는 어처구니없는 오류는 당나라 번진(藩鎭)들 중 하나인 노룡군(盧龍軍)의 위치와 관련된 사료를 통해서도 드러난다. 살펴보도록 하자.

 

원위(元魏)가 유주와 연군을 세웠다. 북제(北齊)가 동북도행대를 설치하였다. 후주(後周)가 (북)제를 평정하고 총관부를 설치하였다. 수(隋) 개황(開皇)초에 군을 폐하였다. 대업(大業) 초에 부를 폐하고 탁군(涿郡)을 세웠다. 당(唐) 무덕(武徳) 원년에 유주가 되었다. 천보(天寳) 원년에 범양군(范陽郡)이라 하고 노룡군(盧龍軍)으로 승격시켰다. 9현을 다스린다.  元魏立幽州及燕郡 北齊置東北道行臺 後周平齊 置總管府 隋開皇初郡廢 大業初府廢立涿郡 唐武徳元年為幽州 天寳元年曰范陽郡升為盧龍軍 領縣九

『輿地廣記』 권 20, 宋 歐陽忞 撰

 

수(隋)가 탁군(涿郡)을 세우고 당(唐)이 유주(幽州)로 삼았다. 천보(天寳)년간에 범양군(范陽郡)이라 하고 노룡군(盧龍軍)으로 승격시켰다.  隋立涿郡 唐為幽州 天寳間曰范陽郡陞為盧龍軍

『説郛』 권 56, 元 陶宗儀 撰

 

'산후팔군'은 탁, 영, 영, 막, 평, 계, 규, 단을 가리킨다. 모두 노룡절도사에 종속되었다. 노룡(盧龍)은 곧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이다.  山後八軍謂𣵠營瀛莫平薊嬀檀 皆隸盧龍節度 盧龍乃幽州范陽郡也

『資治通鑑釋文』 권 28, 宋 史炤 撰

 

위 《여지광기(輿地廣記)》의 기사에 따르면 당(唐) 천보(天寳, 742~756)년간에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이 노룡군(盧龍軍)으로 승격되었고, 이 사실은 위 《설부(説郛)》와 《자치통감석문(資治通鑑釋文)》의 기사들에서도 역시 확인된다. 즉, 노룡군 번진(藩鎭)은 본래 범양군이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범양(范陽)은 중국 고대의 지명이자 행정구역명이다. 역사상 (범양의) 관할 범위에 많은 변동이 있었다. 처음에는 하북 보정 정흥현에 있었다가 후에 보정 래수현이 범양현이라 불리기도 하였고 탁주 지역 또한 일찍이 범양이라 불렸었다.  范陽 是中國古代地名及行政區劃名 所轄范圍在歷史上多有變動 初於河北保定定興縣 后河北保定淶水縣亦為稱范陽縣,涿州地區曾亦稱范陽

『바이두 백과』 '范陽'

 

고성진(固城鎮)은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에 속해있다.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관할의 '진(鎮)'이다. 옛날에는 강물(水)의 북쪽을 '양(陽)'이라 일컬었다. 성(城)이 범수의 북쪽에 있다하여 범양(范陽)이란 이름을 얻었다.  (범수: 즉 지금의 정흥현 고성진의 계조하이다.)  固城鎮隸屬於河北省保定市定興縣 是河北省保定市定興縣轄鎮, 古時稱南水北為陽, 城在范水之北而得名范陽 (范水: 即今定興縣固城鎮雞爪河)

『바이두 백과』 '固城鎮'

 

'범양(范陽)'은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 일대에서 북경에 이르는 지역 전부를 가리키는 광의의 지명으로 고대에 이미 보편화되었으나 본래는 범수(范水) 즉 계조하(雞爪河) 바로 북쪽의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 일대를 지칭하는 지명이었다. 당(唐)대의 범양군(范陽郡)이 범양에 있었던 것은 자명하므로 동일한 위치의 범양군을 승격시켜 개설한 노룡군(盧龍軍) 역시 범양에 있었을 수 밖에 없다.

 

노룡군(盧龍軍)은 평주성(平州城)안에 있다. 관하의 병졸이 10000명이고 말이 300필이다.  盧龍軍在平州城内 管兵萬人 馬三百疋

『舊唐書』 권 38

 

노룡군(盧龍軍)은 평주성(平州城)안에 있다. 병졸이 10000명이다.  盧龍軍在平州城内 兵萬人

『資治通鑑』 권 215, 胡三省 註

 

그런데 위 《구당서(舊唐書)》의 기록과 호삼성의 《資治通鑑》 권 215 주석에 따르면 당(唐)의 노룡절도사(즉 유주절도사)가 다스리던 노룡군(盧龍軍)의 치소는 평주성(平州城)이었다. 평주성은 즉 당(唐) 평주(平州)의 치소를 말하는데, 평주성이 평주의 치소와 더불어 노룡군의 치소 역할도 겸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노룡군의 치소는 당연히 노룡군의 관할 지역내에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노룡군은 본래 범양군(范陽郡)이었으므로 논리적으로 평주의 치소였던 평주성 역시 응당 범양(范陽)에 위치해 있었을 것이다. 또한 역으로 평주의 치소가 범양에 있었다면 평주의 영역은 그 중심부인 치소를 둘러싼 범양지역을 포괄하였을 것도 분명하다. 지도1 및 지도2에 보이듯이 범양은 난하 유역에 비정된 통설상 평주의 영역과는 겹친 부분이 전혀없이 동떨어진 지역이다. 결국 통설상 고대 평주의 위치가 심각하게 왜곡되어 알려져 있다는 사실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이다. 반면 평주를 고대의 범양을 포괄하는, 보정시 일대의 올바른 위치에 놓고 살펴보면 호삼성이 언급한대로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에 있었던 자몽, 백랑, 창려 등 지명들의 지리적 윤곽이 안개가 걷히듯이 뚜렷해짐을 인식할 수 있다.

 

북제의 평주자사 혜엽이 독항피(督亢陂)를 개척하여 둔전[각주:5]을 두었다. 건명원년 (560년) 괄지지(括地志)에 (독항)피가 유주 범양현 동남 10리에 있다 하였다.  北齊平州刺史 嵇曄開督亢陂置屯田 乾明元年 括地志 陂在幽州范陽縣東南十里

『玉海』 권 21, 宋 王應麟 撰

 

범양태수 노문위(盧文偉, 482~541)가 평주자사 후연(侯淵, ?~535)을 유인하여 사냥을 나가게 한 뒤 문을 걸고 막았다. (후)연은 본래 평주를 거느리고 범양을 지켰다. 범양은 곧 탁군이다. 후한의 장제가 (범양으로) 개명하였다.  范陽太守盧文偉誘平州刺史侯淵出獵 閉門拒之 淵本領平州鎮范陽 范陽即涿郡 後漢章帝改焉

『資治通鑑』 권 154

 

그 밖에 범양(范陽)이 전통적으로 평주(平州)에 속한 지역이라는 정황들이 위 《왕해(玉海)》 와 《資治通鑑》의 기록들에서 확인된다.

 

건명(乾明, 560)원년에 북제(北齊)의 평주자사 혜엽(嵇曄)이 개척한 독항피(督亢陂)는 독항이라는 고장에 있던 방죽을 말하는데, 독항피는 위 《玉海》에 인용된 《괄지지(括地志)》의 기록에 명시된 바와 같이 범양지역에 있었다. 만약 평주가 통설대로 범양과는 상관없는 진황도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면 그 지역의 수장인 평주자사가 어떻게 자신의 관할지역과는 동떨어진 범양의 대규모 토목공사를 주도할 수 있었겠는가? 범양이 평주에 속한 지역이 아니고서는 설명이 안되는 부분이다.

 

《資治通鑑》 권 154의 기록은 범양태수 노문위(盧文偉)가 상급자인 평주자사 후연(侯淵)을 따돌려 배척한 사건을 다룬 내용인데, 이에 따르면 노문위가 태수로 있던 범양군(范陽郡)이 평주자사에게 종속된 하부 관할지역이었음이 자명하다. 본래부터 평주는 범양지역을 일부 포괄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일대에 있었던 것이다.

 

 

평주 노룡성과 범양의 유수

 

고안현(故安縣), 염향(閻鄉)이다. 역수(易水)가 나와서 동쪽으로 범양(范陽)에 이르러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병주(并州)에 물을 댄다. 역수는 또한 범양(范陽)에서 래수(淶水)로 들어간다. 사고가 말하기를 "역수(易水)가 범양(范陽)에 이르러 래수(淶水)로 들어간다고 말하기도 한다."고 했다. '濡'의 음은 놘(乃官反)이다. 故安 閻鄉 易水所出 東至范陽入濡也 并州䆮 水亦至范陽入淶 師古曰 言易水又至范陽入淶也 濡音乃官反

『漢書』 권 28上 '地理志', '幽州' '涿郡'

 

《한서(漢書)》 '지리지'의 기록에 역수(易水)가 범양에서 유수(濡水)로 들어간다고 하였다. 그런데 같은 구절에서 역수는 범양(范陽)에서 또한 래수(淶水)에 들어간다고도 하였다. 듣기에 따라서는 다소 혼란스러운 표현일 수도 있다. 논리적으로, "역수가 유수로 들어갔다."는 것은 곧 "역수가 유수와 합류하여 유수가 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그렇게 유수와 합류하여 이미 소멸된 역수가 또 다시 래수와 합류하였다니 혼란스럽단 말이다.  안사고(顔師古)도 이 부분에 보충 설명이 필요하다고 느꼈던지 (의역해서) "범양에서 유수로 들어가는 역수를 두고 세간에서는 역수가 래수로 들어간다고 말하기도 한다." 라고 주석하여 본문의 의미를 보다 명확히 하였다. 유수(濡水)는 곧 래수(淶水) 즉 거마하(拒馬河)라는 말이다. 그리고 덧붙여 '濡'는 '놘(乃官反)'으로 발음한다고 하였다. 본래 거마하를 지칭하던 강이름 '놘수(濡水)'가 후대에 보정(保定)에서 진황도(秦皇島) 방면으로 옮겨져 '난(놘)하(灤河)'가되었음을 암시하는 대목이다.

 

《漢書(한서)》 '지리지'에 「역수(易水)가 탁군 고안현 염향에서 나와서 동쪽으로 범양에 이르러 유수(濡水)[곧 래수(淶水)이다]에 흘러든다」하였다.  漢志易水出涿郡故安縣閻鄉東至范陽入濡[即淶]
『欽定周官義疏』  권33, 1754년 간행

아닌 게 아니라 필자의 짐작대로, 청(淸)대의 《欽定周官義疏(흠정주관의소)》에는 범양에서 역수(易水)와 합류하는 《漢書(한서)》 '지리지'상의 유수(濡水)에 대하여 직접적이고도 명료하게  「곧 래수(淶水)이다」라고 주해되어, 유수(濡水)의 실체가 보다 분명히 밝혀져 있다.

 

'渜'은 '놘(奴官切)'으로 발음한다. 치(徴)[각주:6], 차탁음[각주:7]이다. (놘渜)수는 요서(遼西) 비여(肥如)에 있었다.[각주:12] (그곳에서) 바다로 들어갔다. 혹은 '濡'로도 되어있다. 《전한서》 '지리지'에 역수(易水)가 동쪽으로 범양(范陽)에 이르러 유(濡)수로 들어간다고 했다.  渜 奴官切 徴次濁音 水在遼西肥如入海 或作濡 前地理志易水東至范陽入濡

『古今韻㑹舉要』[각주:8] 권 5

 

원(元)대의 웅충(熊忠)은 위 《고금운회거요(古今韻㑹舉要)》의 기사에 요서의 비여(肥如)에 있던 놘수(渜水)는 '濡水'로 쓰기도 한다고 전하면서 《漢書》 '지리지'를 인용하여 유수(濡水)[각주:9]가 범양(范陽)에 있었다고 하였다. 웅충이 고대의 평주(平州) 요서군(遼西郡) 비여현에 있었던 놘수와 《前漢書》 '지리지'에 범양에서 역수(易水)와 합류하는 것으로 기록된 유수 즉 거마하(拒馬河)를 동일한 하천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수와 거마하에 관하여는  《수경주》의 어이진은 산서성 영구이고 고하는 상건하, 유수는 거마하이다 참조 바람)

 

유수(濡水)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옛 노룡성(盧龍城)의 동쪽을 지난다. 한(漢)나라 건안(建安, 196~220) 12년에 위(魏) 무제(武帝, 즉 조조)가 답돈을 정벌하고 쌓은 곳이다.  濡水又東南 逕盧龍故城東 漢建安十二年 魏武征蹋頓所築也

『水經注』 권 14

 

범양 옛성은 진(秦)나라 범양현이다. (역易)현 동남쪽 62리 범수의 북쪽에 있었다.  范陽故城秦范陽縣也 縣東南六十二里 以在范水之陽

『元和郡縣志』 권 22, '易縣'

 

앞서 살펴본대로 당(唐) 평주(平州)의 치소 평주성(平州城)은 범양(范陽)지역에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당(唐) 평주의 치소는 노룡현(盧龍縣)에 있었으므로 범양의 평주성은 곧 노룡성(盧龍城)이다. 또한 위 《漢書》 '지리지'와 《古今韻㑹舉要》의 기사들을 통하여 유수(濡水)가 범양지역을 지나 흘렀던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위 《수경주(水經注)》 권14의 유수는 바로 《漢書》 '지리지'와 《古今韻㑹舉要》에 언급된 범양의 유수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고 아울러 《水經注》의 '옛 노룡성'이 바로 당(唐)대에 이르러 평주 및 (범양군范陽郡이 승격된) 노룡군(盧龍軍)의 치소가 된 평주성이란 사실 또한 분명해진다. 그런데 일명 '범양고성(范陽故城)'으로도 알려진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고성(固城)'의 동쪽 방면에 그 일대를 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거마하(拒馬河), 즉 유수가 위치해 있다. (지도3 참조) 固城과 그 일대를 지나는 거마하의 상대적 위치 및 거마하의 흐름방향은 《水經注》의 「유수(濡水)는 또 동남쪽으로 흘러 옛 노룡성(盧龍城)의 동쪽을 지난다.」는 기록에 정확히 부합한다. 정흥현의 固城이 바로 노룡성이자 평주성일 개연성이 농후한 것이다.  (지도3 참조)

 

 

[클릭 확대] 지도3  노룡성의 위치 비정

 

 

조선, 기자(箕子)를 뒤에 요(遼)의 낙랑에 봉하였다. 지금 평주(平州)의 노룡(盧龍)에 조선성(朝鮮城)이 있다. 그런 연유로 무덕(武徳, 618~626)년간에 요(遼)를 기주(箕州)로 삼았다. 8년 고구려 역시 그 지역이다.  朝鮮 箕子後封遼之樂浪 今平之盧龍 有朝鮮城 故武徳以遼為箕州 八年 而髙麗亦其地

『路史』 권 27, 宋 羅泌 撰

 

조선성, 즉 은나라의 기자가 봉함을 받은 지역이다. 지금은 폐성이다.  朝鮮城 即殷箕子受封之地 今有廢城

『太平寰宇記』 권 70, '平州' '盧龍縣'


위 《로사(路史)》의 기록에 언급된 '노룡(盧龍)'은 당(唐) 평주(平州)의 치소인 노룡성(盧龍城)이 있었던 노룡현(盧龍縣)을 말하고, 또한 노룡현에 있었다고 하는 조선성(朝鮮城)은 물론 고조선의 왕검성을 가리킨다. 고조선의 왕성이었으니 만큼 조선성은 노룡현 일대에서 가장 큰 성이었을 것이다. 즉, 노룡현의 대표적인 도성이었을 조선성은 곧 노룡성이다. 노룡현에 있었다고 하는 조선성(朝鮮城)의 존재는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서도 역시 확인되는데, 《太平寰宇記》의 '평주' '노룡현' 조항에는 오직 조선성만 소개되어 있을 뿐 노룡성 또는 평주성(平州城)에 대한 언급이 따로 없다. '노룡현' 조항에서 노룡성이 누락되었을 리는 없으므로 조선성이노룡성(평주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진(晉)이 평주(平州)를 설치하였다. 후위 시기의 고구려가 그곳(晉 平州)에 도읍하였고 당(唐)이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였다.  晉置平州 後魏時 高麗國都其地 唐置安東都護府

『通鑑地理通釋』 권 10

 

송(宋)나라 왕응린(王應麟, 1223~1296)의 《통감지리통석(通鑑地理通釋)》에 북위(北魏, 즉 後魏) 시기에 고구려가 평주(平州)에 도읍하였다고 하였다. 즉 왕응린은 장수왕의 평양 천도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고구려가 평주에 도읍하였다면 그 도성은 당연히 평주성이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평주성은 곧 고구려의 평양성이었을 수 밖에 없다. 서기 668년 나-당 연합군에 멸망당하기까지 고구려의 평양성은 평주성의 위치에 있었고 당(唐)은 고구려를 물리친 뒤 같은 곳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설치하였던 것이다. 정리하면, 왕검성, 조선성, 평주성, 노룡성, 평양성은 모두 같은 곳, 즉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을 가리킨다. (왕검성과 평양성의 위치에 관하여는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固城이다. 낙랑군 패수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노룡성의 위치 교차검증

 

노룡새는 (노룡)성 서북쪽 200리에 있다.  盧龍塞在(盧龍)城西北二百里

『通典』 권 178, '平州'

 

필자는 고대의 노룡구(盧龍口)를 지금의 래원현(淶源縣) 남쪽의 백석구(白石口)에 비정하고 노룡새(盧龍塞)는 그 주변을 지나는 내장성(內長城)이라 주장한 바 있다. (☞ 노룡새, 용머리뼈 장성의 실체를 찾았다 참조) 두우(杜佑, 735~812)의 《통전(通典)》에 따르면 노룡새는 노룡성(盧龍城), 즉 평주성(平州城) 으로부터 서북쪽 200리 거리에 있었다. 그런데 래원현의 백석구는 필자가 노룡성으로 비정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으로부터 직선거리로 정확히 서북쪽 87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通典》이 집필되던 당(唐)대의 대척(大尺, 0.2955미터)을 기준으로 통용되던 1리(里)는 1,500 대척 (443.25미터) 또는 1,800 대척 (531.90미터)인데[각주:10], 그 중 '1리 당 1,500 대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固城에서 백석구까지의 거리는 196.28리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수치는 '서북' 방향과 더불어 사서에 기록된 200리 거리에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지도3 참조)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는 또한 장성을 쌓았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 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史記』 '匈奴列傳'

 

양평(襄平)은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襄平 縣 屬遼東郡 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後漢書』 권 104 下, 李賢 注

 

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의 위 《후한서(後漢書)》 주석에 따르면 노룡성(盧龍城)이 위치해 있던 당(唐)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의 서남쪽에 연(燕)장성의 동단인 것으로 《사기(史記)》에 기록된 한(漢)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이 있었다. 아직까지도 그 흔적이 뚜렷히 남아있는 연장성의 동단은 필자가 노룡성의 위치로 비정한 정흥현(定興縣) 固城에서 서남쪽으로 16킬로미터 떨어진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서 확인되며[각주:11] 固城과 수성진의 상대적 위치는 이현(李賢)의 기록에 정확히 부합한다. (지도3, 4 참조. 연장성의 위치에 관하여는 진개 연장성의 기점 조양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자형관 일대에 있었다 참조 바람)

 

 

지도4  전국시대 연(燕)장성의 동단, 지금의 하북성 정흥현(定興縣) 및 고비점시(高碑店市) 일대로 비정되는 고대의 독항(督亢) 서남쪽, 당시의 발해만 해안 즉, 지금의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서 확인된다. 본 지도 출처: The Cambridge history of Ancient China, From the Origins of Civilization to 221 B.C., M. Loewe and Edward L. Shaughnessy,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99, 636쪽

 

 

무종과 토은(土垠)은 모두 우북평군에 속한 현명들이다. 무종의 옛성은 지금의 어양현에 있고 토은의 옛성은 평주(平州) 서남쪽에 있다. '垠'은 '은(銀)'으로 발음한다.  無終土垠並縣名屬右北平郡 無終故城在今漁陽縣 土垠故城在今平州西南 垠音銀

『後漢書』 권 49, 李賢 注

 

이현(李賢)은 《후한서(後漢書)》의 주석에 또한 한(漢) 우북평군 토은현(土垠縣)의 옛성이 평주(平州)의 서남쪽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 '평주'란 평주의 중심부인 평주성(平州城), 즉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을 말한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고대의 토은현이 지금의 보정시 만성(滿城)에 있었던 사실을 고증한 바 있는데, 만성은 정흥현(定興縣)의 固城 서남쪽 38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다. 固城과 만성의 상대적 위치 또한 이현(李賢)이 남긴 기록에 정확히 부합한다. (지도3 참조. 우북평군 토은현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는  포구수, 경수, 류수와 우북평군의 속현 위치 비정 참조 바람)

 

 

  1. 天文尾分野: 천문도의 28개 별자리 중 '尾'로서 중원을 중심으로 동북 방향을 가리킨다. [본문으로]
  2. 虞: 순(舜)임금을 말함 [본문으로]
  3. 본 지도 출처:『中國歷史地圖集6-精裝本-宋遼金』譚其驤 지음 [본문으로]
  4. 본 지도 출처:『中國歷史地圖集5-精裝本-隋唐五代』譚其驤 지음 [본문으로]
  5. 屯田 : 변경이나 군사 요지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마련하기 위하여 설치한 토지 [본문으로]
  6. 徴: 5음(音) 즉 '궁상각치우'의 '치' [본문으로]
  7. 차탁음(次濁音): 콧소리 즉 비음을 말한다. [본문으로]
  8. 《고금운회거요(古今韻㑹舉要)》는 중국 원나라 때의 웅충(熊忠)이 그의 스승인 황공소(黃公紹)가 1292년에 지은 《고금운회(古今韻會)》 에 주석을 첨가하여 전 30권으로 만든 운서(韻書)이다. [본문으로]
  9. 濡水는 보통 '유수'로 읽는다. [본문으로]
  10.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units_of_measurement 참조 [본문으로]
  11. 본래의 연장성은 전국시대 당시 발해만의 해안에 접하여 있던 지금의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까지 축조되었다. 수성진에서 동쪽으로 이어진 장성은 본래의 연장성이 처음 축조된 이후 황하에 실려온 토사의 퇴적에 의하여 해안선이 점차 동쪽으로 물러남에 따라 오랜 세월에 걸쳐 조금씩 증축되어 연장된 부분이다. [본문으로]
  12. 비여(肥如)현,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유수(濡水)로 들어간다. 유수(濡水)는 남쪽으로 해양(海陽)현으로 들어간다. 또한 로수(盧水)가 있어 남쪽으로 현수(玄水)로 들어간다. 왕망은 비이(肥而)라고 하였다. 肥如,玄水東入濡水。濡水南入海陽。又有盧水,南入玄。莽曰肥而。『漢書』 권28下 지리지, 幽州 遼西郡 ////// 신창(新昌)현, 전한(前漢)에서 탁(涿)군에 속하였고 후한(後漢)과 진(晉)에서는 요동(遼東)군에 속하였다가 후에 [북평군(北平郡)에] 속하였다. 노룡산(盧龍山)이 있다. 新昌前漢屬涿,後漢、晉屬遼東,後屬,有盧龍山。『魏書』 권106上 지형지, 平州 北平郡 ////// ... 개황(開皇) 6년에 또한 비여(肥如)현을 없애어 신창(新昌)현에 편입시켰다. 18년에 노룡(盧龍)현으로 개명하였다. ... 開皇六年又省肥如入新昌,十八年改名盧龍。『隋書』 권30 지리지, 北平郡 ////// 《漢書》 '지리지' 요서군(遼西郡) 비여현(肥如縣) 조항에는 현수(玄水)가 동쪽으로 유수(濡水)에 흘러든다고 되어 있을 뿐 유수가 명확히 비여현에 있었다는 기록은 없다. 한(漢) 탁군(涿郡) 신창현(新昌縣)과 요서군 비여현은 동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지는 바 실제로 유수(濡水)는 신창현을 흘렀던 것으로 유추되는데, 이는 곧 《漢書》 '지리지' 탁군(涿郡) 고안현(故安縣) 조항의 유수(濡水)와 동일한 하천임이 분명하다. 수(隋) 개황(開皇)6년(586)에 비여현은 신창현에 편입되고, 신창현은 개황(開皇)18년(598)에 노룡현(盧龍縣)으로 개명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