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영평부(永平府) 노룡현(盧龍縣)은 보정에서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동된 가짜다. (문헌 증거사료 공개)
카테고리 없음주지하듯이 현 학계의 통설상 당(唐)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의 위치는 갈석(碣石), 창려(昌黎), 고죽(孤竹) 등 관련 지명들과 더불어 今 하북성 진황도시 난하(灤河)유역에 비정되어 있는데, 이는 명(明)‧청(淸)대의 왜곡된 역사지리관을 바탕으로 지어진 사서들의 서술 내용이 제대로 된 사료 비판 과정을 거치지 않은 채 답습된 결과다. 이에 따라, 대륙의 하북 평원 지역에서 북동쪽으로 옮겨진 여러 고대 지명들의 잘못된 위치가 불행히도 국내외의 연구에 그대로 반영되면서 우리 민족사의 강역은 왜곡자들의 본래 의도대로 대폭 축소되고 말았다. 이렇듯 왜곡된 지명들 중에서도 특히 당(唐) 평주 노룡현은 시대에 따라 고조선(위만조선)의 왕검성, 고구려 평양성 및 발해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의 터전이었던 곳이고, 이에 더하여 보다 훨씬 늦은 시기인 고려말의 서경(西京) 역시 같은 곳에 있었던 것으로 밝혀지면서, 그곳이 한국 고대사는 물론, 중세사의 주요 영역이었음이 서서히 드러나고 있으니, 그 왜곡된 위치가 한국사 연구에 미치는 폐해는 심각할 수 밖에 없다 할 것이다.
상(商) 시기 고죽국이고, 춘추(春秋) 시기 비자국이다. 한(漢)이 비여현을 설치하였다. 후위(後魏)가 신창현에 교치하였다. 수(隋)가 비여현을 없애어 신창현에 편입하고, 신창현을 노룡현으로 고쳤다. 수(隋) 말엽에 노룡현을 되돌려 비여현으로 고쳤다. 당(唐)이 거듭 노룡현으로 고쳤다. 명‧청(明‧清)이 나란히 직예 영평부의 치소로 삼았다. 민국(民國) 초에 직예진해도에 속하였다. 지금은 하북성에 속하여 있다. 商孤竹國。春秋爲肥子國。漢置肥如縣。後魏僑置新昌縣。隋省肥如縣入新昌。改新昌曰盧龍。隋末復改盧龍曰肥如。唐仍改盧龍。明清皆爲直隸永平府治。民國初屬直隸津海道。今屬河北省。
『中國古今地名大辭典』 '盧龍縣', (고대의 노룡현이 명‧청대 영평부의 치소와 동일한 곳으로 왜곡되어 있다.)
그런데 여러 사료들에서 드러난 정황상 당(唐) 평주의 노룡이 갈석, 창려, 놘수(濡水) 등의 지명들과 함께 今 하북성 보정 일대에서 진황도시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동되었을 개연성은 농후하지만, 막상 그 사실이 직접적으로 기재된 사료를 찾기가 쉽지 않아 다소 갑갑했던 바가 없지 않던 차에, 얼마전 명(明)대의 정치가, 문학가이자 한림학사(翰林學士)였던 유정지(劉定之)의 《呆齋集(보재집)》에 실린 《遊梁氏園記(유양씨원기)》에서 해당 증빙사료로서 매우 유력하다고 판단되는 기록을 비로소 발굴하여, 본 글에 소개한다.
《呆齋集(보재집)》 : 양씨원(梁氏園)은 지금의 경사 서남 56리에 있고 그 바깥에 옛 성(城)이있다. 옛 성(城)이란 당(唐) 번진(藩鎮)으로서 요(遼), 금(金) 별도(別都)의 성(城)이다. 원(元)이 도읍을 점점 동쪽으로 옮겨감에 따라 옛 성의 동쪽 절반이 마침내 도회에 잠식되고, 사이에 흔적을 전혀 볼 수 없는데, 서쪽 절반은 아직 남아있어 「소태후성(蕭太后城)」이라 이름하였으니, 즉 양씨원이 있는 곳이다. 소태후는 요(遼)왕후로서 모두 소(蕭)씨 성이었는데, 아들이 임금이었다. 즉 태후는 따로 궁성에 거처하며 딸린 부서를 총괄하였다. 마지막 임금 순(淳)이 죽자 그의 아내가 가히 홀로 남아 태후(太后)라 하고 그 나라에 영향을 미쳤으나 이듬해에 이내 멸망하였다. 혹자는 이곳이 요(遼), 금(金)의 도성이기는 하였으나 당(唐)의 번진은 아니었다고 하지만, 그렇지 않다. 당(唐) 시기에 이곳은 범양(范陽) 번진이었는데 안사(安史)반란 뒤에 노룡(盧龍)으로 개명되었으나 유주(幽州)의 치소 계(薊)는 바뀌지 않았다. 지금은 계(薊)를 옮겨 주(州)로 이름하였고, 노룡(盧龍)을 옮겨 현(縣)으로 이름하였으니 각각 이곳(범양)으로부터 수백리 떨어져 있다. 실제로는 당(唐)의 노룡과 계(薊)가 이곳(범양)에 있었으니, 어찌 당(唐) 번진의 옛성이 아니겠는가? 요(遼), 금(金)이 번진에 연유하여 도읍을 삼지 않았다면 어디에 연유했다는 말인가? 또한 [사서에] 실린 모든 기록을 헤아려보아 요(遼), 금(金)은 또 어느 때에 도성을 창건하였는가? 지금 그 성은 흙만 겨우 남아 있을 뿐, 사람들이 벽돌을 모두 취하여 간 바람에 이제 더이상 가져갈 것도 없다. 그 흙은 모두 순수한 황토였는데, 토착인들이 가져다가 석탄을 섞어 불태우고, 혹은 무덤을 높고 견고하게 만드는데 쓰는 자도 있었다. 《呆齋集》:梁氏園在今京師西南五六里,其外有舊城。舊城者,唐藩鎮遼金別都之城也。元遷都稍東,於是舊城東半遂入于朝市,間全無跡可見,而西半猶存,號為「蕭太后城」,即梁氏園所在也。蕭太后者,遼后皆以蕭為姓,有子為帝,則太后別居宮 城,統部屬。故其亡也,末帝淳之妻猶得獨存,稱太后以至其國,踰年乃滅也。或謂此雖遼金都城,而非唐藩鎮城不然也, 唐時此為范陽藩鎮,安史反後改名盧龍,而所治幽州薊縣不改,今移薊以名州,移盧龍以名縣,各去此數百里,其實唐之盧龍與薊在此也,惡得非唐藩鎮舊城乎?遼、金不因藩鎮以為都,而曷因乎?且稽諸載記,遼金亦何嘗創建都城乎? 今其城僅存土爾,甓皆為人取去,今取猶未己,其土皆真黃,土人取之和煤炭以燒,亦有即之作墓者,以其髙堅也。
『欽定古今圖書集成』 方輿彙編/職方典 제45권 順天府部
우선 위 《遊梁氏園記》의 「지금은 '계(薊)'를 옮겨 주(州)로 이름하였고, '노룡(盧龍)'을 옮겨 현(縣)으로 이름하였다.」라는 기록에 드러나 있듯이 당시의 계(薊)와 노룡(盧龍)은 본래의 위치에서 다른 곳으로 옮겨진 것이 분명하다. 물론 유정지(劉定之)가 말하는 「계(薊)를 옮겨 만든 주(州)」는 그가 살던 명(明)대의 순천부(順天府) 계주(薊州)를 가리키고, 「노룡(盧龍) 옮겨 만든 현(縣)」 은 영평부(永平府) 노룡현(盧龍縣)을 가리킴이 자명하다. 주지하다시피 명(明) 순천부 계주는 今 하북성 천진시(天津市) 계주구( 薊州區)이고, 명(明) 영평부 노룡현은 今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盧龍縣)이다. (지도 1 참조)
지도 1 - 보정에서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동된 노룡현(盧龍縣),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7-精裝本-元明
본 글의 주제인 '노룡현'에 한정하여 살펴보자면, 당(唐)의 노룡번진(盧龍藩鎮)은 본래 범양번진(范陽藩鎮)이었으므로 그 위치는 범양(范陽), 즉 [넓은 의미로 보아] 今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일대로부터 북경(北京)의 서남 방면에 이르는 지역의 어딘가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유정지(劉定之)가 아울러 언급하였듯이, 노룡이 옮겨진 위치(즉 今 하북성 진황도시 노룡현)가 노룡의 본래 위치(즉 범양)에서 수백리 떨어진 곳이라는 사실과도 부합한다. (실제 도보 거리는 대략 320km이다.) 결국 유정지는 본래 범양에 있었던 당(唐)대의 노룡(즉 평주 북평군 노룡현)이 명(明)대에 이르러 북동쪽 今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동되어 영평부(永平府) 노룡현(盧龍縣)이 설치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증언하고 있는 것이다.
단, 유정지(劉定之)는 당(唐)대의 노룡번진이 경사 서남쪽 56리에 있는 양시원(梁氏園) 부근 요나라 소태후(蕭太后)의 별궁이 있었던 곳이었다고 주장하였으나, 위 《遊梁氏園記》의 본문에 보이듯이 이는 당시의 정설이 아닌 유정지의 개인적인 견해였던 듯하다. 그는 또한 「당(唐)의 노룡번진(藩鎮)이 요(遼), 금(金) 별도(別都)의 성(城)이 되었다.」라고 하였는데, 「요(遼), 금(金) 별도(別都)의 성(城)」이란 요(遼), 금(金)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의 도성, 즉 당(唐)대의 평주성(平州城, 즉 노룡성盧龍城)으로서, 필자는 그 위치가 今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鎭)(즉 좁은 의미의 범양范陽)이었음을 고증한 바 있다.
당(唐) 평주(平州)의 노룡(盧龍)이 범양(范陽)지역으로부터 今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동되어 명(明)의 영평부(永平府) 노룡현(盧龍縣)이 새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도 아닌, 명나라 조정의 대신이었던 유정지(劉定之)의 증언에 의하여 명백히 밝혀졌다. 명(明) 영평부의 노룡현은 결코 노룡의 본래 위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당(唐) 평주의 노룡은 물론이고, 노룡과 관련된 한(漢) 낙랑군 조선현, 진(晉) 낙랑군 평주, 갈석산, 창려(昌黎), 양평(襄平), 고죽국(孤竹國), 노룡새(盧龍塞), 등이 본래부터 지금의 난하 유역에 있었다는 그릇된 주장은 이제 멈추어야 한다.
- 유정지(劉定之, 1409~1469) : 명나라의 대신이자 문학가이다. 한림학사(翰林學士)로서, 저작으로는 《劉文安公文集(유문안공문집)》, 《周易圖釋(주역도석)》, 《否泰錄(부태록)》, 《呆齋集(보재집)》 등이 있다.
- 대동소이한 내용이 《欽定古今圖書集成(흠정고금도서집성)》을 비롯하여《欽定日下舊聞考(흠정일하구문고》, 《明文衡(명문형》 등 여러 사서들에 《遊梁氏園記(유양씨원기)》란 제목으로 기재되어 있다. 본 글에 소개된 문헌은 《遊梁氏園記》의 일부이다.
- ☞ 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참조 바람
-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및 ☞ 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참조 바람
- 경사(京師) : 유정지(劉定之)가 살던 15세기 중반 명나라의 수도, 즉 지금의 북경(北京, 베이징)을 가리킨다.
- 안사반란(安史反) : 안사의 난(安史之亂, 755~763), 즉 당나라의 절도사 안록산(安祿山, 703?~757)과 그의 부하 사사명(史思明, 703~761)이 일으킨 대규모 반란사건을 가리킨다. ☞ 안사의 난 (安史之亂) 안록산 (安祿山) 반란사건의 본거지 갈석산 (碣石山) 참조 바람
- ☞ 고려 서경의 위치를 밝힌 청나라 학자들의 충격적인 증언 - 고려 서경 위치 비정 3부 참조 바람
- 북요(北遼)의 덕비(德妃) 소보현녀(蕭普賢女)를 가리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