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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의 위치를 밝힌 청나라 학자들의 충격적인 증언 - 고려 서경 위치 비정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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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은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에 있었다.

 

동녕로(東寧路). 본래 고구려(高句驪) 평양성(平壤城)으로 또한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하였다. 한(漢)이 조선(朝鮮)을 멸하고 낭랑(樂浪),·현토군(玄菟郡)을 설치하였는데, 이것이 낙랑지역이었다. 진(晉) 의희(義熙) 연간 후반에 그 왕 고련(高璉)이 처음으로 평양성(平壤城)에 머물렀다[居]. 당(唐)이 고려(高麗)를 정벌할 때 평양(平壤)을 공략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데에 있었는데, 평양의 옛터가 아니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西京)이 되었다. 원(元) 지원(至元)6년(1269)에 이연령(李延齡)·최탄(崔坦)·현원열(玄元烈) 등이 부주현진(府州縣鎮) 60개 성(城)을 가지고 와서 귀부하였다. 지원8년(1271)에 서경을 고쳐 동녕부(東寧府)라고 하였다. 지원13년(1276)에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로 승격시키고 녹사사(錄事司)를 설치하였으며 정주(靜州)·의주(義州)·인주(麟州)·위원진(威遠鎭)을 나누어 파사부(婆娑府)에 예속시켰다. 본로(本路)는 사(司) 1개를 거느렸고, 나머지 성은 폐하여져서 사(司)를 설치한 것이 남아 있는 것이 없으니, 지금은 옛 이름만 남아있다.

녹사사(錄事司). 토산현(土山縣). 중화현(中和縣). 철화진(鐵花鎮).

도호부(都護府). 당(唐)이 끝나고부터 땅이 고려에 편입되었다. 부주현진(府州縣鎮) 60여 성을 설치하여 이것이 도호부가 되었는데, 비록 당(唐)의 옛 명칭 그대로이지만 도호부의 실상은 없다. 지원 6년(1269)에 이연령 등이 그 땅을 가지고 와서 귀부한 후 성의 치소가 폐하여 지고 훼손되어 겨우 그 이름만 보존하고 있으며 동녕로에 속하여 있다.

정원부(定遠府). 곽주(郭州). 무주(撫州). 황주(黃州)〈안악(安岳), 삼화(三和), 용강(龍岡), 함종(咸從), 강서(江西) 5현(縣)과 장명(長命) 1진(鎮)을 거느린다〉. 령주(靈州). 자주(慈州). 가주(嘉州). 순주(順州). 은주(殷州). 숙주(宿州). 덕주(德州)〈강동(江東), 영청(永清), 통해(通海), 순화(順化) 4현(縣)과 영원(寧遠), 유원(柔遠), 안융(安戎) 3진(鎮)을 거느린다〉. 창주(昌州), 철주(鐵州)〈정융(定戎) 1진(鎮)을 거느린다〉. 태주(泰州). 개주(价州). 삭주(朔州). 선주(宣州)〈영삭(寧朔), 석도(席島) 2진(鎮)을 거느린다〉. 성주(成州)〈수덕(樹德) 1진(鎮)을 거느린다〉. 희주(熙州). 맹주(孟州)〈삼등(三登) 1현(縣)과 초도(椒島), 단도(椴島), 영덕(寧德) 3진(鎮)을 거느린다〉. 연주(延州)〈양암(陽巖) 1진(鎮)을 거느린다〉. 운주(雲州).
東寧路,本高句驪平壤城,亦曰長安城。漢滅朝鮮,置樂浪、玄菟郡,此樂浪地也。晉義熙後,其王高璉始居平瓖城。唐征高麗,拔平壤,其國東徙,在鴨綠水之東南千餘里,非平壤之舊。至王建,以平壤為西京。元至元六年,李延齡、崔坦、玄元烈等以府州縣鎮六十城來歸。八年,改西京為東寧府。十三年,升東寧路總管府,設錄事司,割靜州、義州、麟州、威遠鎮隸婆娑府。本路領司一,餘城堙廢,不設司存,今姑存舊名。
錄事司。土山縣。中和縣。鐵化鎮。
都護府,自唐之季,地入高麗,置府州縣鎮六十餘城,此為都護府,雖仍唐舊名,而無都護府之實。至元六年,李延齡等以其地來歸,後城治廢毀,僅存其名,屬東寧路。
定遠府。郭州。撫州。黃州。〈領安岳、三和、龍岡、咸從、江西五縣,長命一鎮。〉靈州。慈州。嘉州。順州。殷州。宿州。德州。〈領江東、永清、通海、順化四縣,寧遠、柔遠、安戎三鎮。〉昌州。鐵州。〈領定戎一鎮。〉泰州。价州。朔州。宣州。〈領寧朔、席島二鎮。〉 成州。〈領樹德一鎮。〉熙州。孟州。〈領三登一縣,椒島、椴島、寧德三鎮。〉 延州。〈領陽巖一鎮。〉 雲州。

『元史』 권59, 地理2 東寧路

 

《元史》 '지리지'에 명료히 서술되어 있듯이 원(元)의 동녕로(東寧路)는 본래 고조선(위만조선)이 멸망한 뒤 한(漢)의 낙랑군이 설치된 곳으로서, 훗날 고구려의 장수왕이 천도한 평양성의 터전이었으며, 또한 왕건 고려의 서경이 같은 곳 자리잡았는데, 그 후 1269년에 서경이 원(元)에 귀속되어 동녕부가 들어서고, 이어 동녕로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를 알면 원(元)의 동녕로와 고려 서경의 위치 또한 알 수 있게 된다. 현 강단사학계가 고려 서경을 今 한반도 평양에 비정하는 이유 역시 결국 그들이 그곳에 고구려 평양성이 있었다고 믿기 때문인 것이다. 필자는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를 今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鎮)에서 찾아내어 밝힌 바 있으므로 답은 이미 나온 셈이지만, 견해를 분명히 해두자면, 고려 서경 역시 고성진 일대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명나라 광녕위는 보정에 있었다.

 

금(金) 광녕부(廣寧府)의 실제 위치는 당시의 웅주(雄州), 패주(霸州), 보주(保州), 안주(安州), 수주(遂州), 안숙주(安肅州) 등 6주를 아우르는 지역, 즉 今 하북성 보정시 일대였다. 광녕부는 원(元)대에 광녕부로(廣寧府路)로 바뀌었고, 명(明)대에 이르러서는 동일한 위치에 광녕위(廣寧衛)가 설치되었으므로 명(明)의 광녕위 역시 보정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본 글의 2부에 《明史(명사)》 '지리지'를 근거로 논증하였듯이 명(明)의 광녕위 북쪽 방면에 원(元)의 동녕로(東寧路), 즉 고려 서경이 위치하였다. 따라서 고려 서경은 今 보정을 기준으로 그 북쪽 방면의 멀지 않은 곳 어디엔가에 있었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지도2 참조) 그런데 보정[중심부]의 북북동쪽 35킬로미터 지점에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鎮)이 있다. 공교롭게도 고성진은 다름 아닌, 필자가 고구려 평양성으로 주장하는 곳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정황은 「고려 서경 = 정흥현 고성진」의 위치 비정에 대한 교차검증이 될 수 있다.

 

지도 2 - 고려 서경과 명(明) 광녕위(廣寧衛)의 실제 위치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6-精裝本-宋遼金)

 

 

고려 서경의 위치를 밝힌 청나라 학자들의 충격적인 증언

 

《武英殿本二十三史考証(무영전본23사고증)》은 한림원(翰林院) 소속 학자 등 당시 청나라 최고의 두뇌들이 대거 참여하여 중국의 정사 23사를 분석, 고증한 책으로서, 자신 역시 한림학사(翰林學士)였던 손가감(孫嘉淦)이 주도하여 건륭4년(1739)에 편찬하였다. 필자는 《武英殿本二十三史考証》을 살펴보던 중 책의 「《元史(원사)》 고증」 부분에서 원(元) 동녕로(東寧路)의 정확한 위치(즉 고려 서경의 위치)를 밝혀놓은 대단히 놀라운 기록을 발견하였다. 아직 국내에 알려진 바 없는 듯하므로 이 기회를 빌어 공개한다.

 

《遼志(요지)》(즉 《遼史(요사)》 '지리지')를 살펴보면 순주(順州)는 수나라 개황(開皇)중에 처음 설치되었는데, 생각컨대 옛 범양(范陽) 땅으로서 본지(즉 《元史》 '지리지') 동녕로(東寧路)의 순주(順州)가 이곳이다. 당나라가 끝나고부터 땅이 고려에 편입되었다가 지원6년(1269)에 이르러 이연령이 비로소 [그 땅을] 가지고 원나라에 귀부하였다.  按遼志順州隋開皇中始置蓋古范陽地 本志東寧路之順州是也 自唐季地入高麗至至元六年李延齡始以歸元
『武英殿本二十三史考証』 元史 第63冊 孫嘉淦 編

 

기사에 보이듯이 《武英殿本二十三史考証》을 저술한 청나라 학자들은 《遼史(요사)》 '지리지'에 근거하여, 단도직입적으로 원(元) 동녕로(東寧路)의 순주(順州)가 옛 범양(范陽) 땅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더 나아가 [범양에 있었던] 동녕로는 당나라가 망한 뒤 고려의 영토로 편입되었다가 1269년에 이연령이 그 땅을 들어 원나라에 귀부하였다고 서술하여 그곳이 바로 고려 서경이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순주(順州), 귀화군(歸化軍), 中, 刺史. 진(秦)의 상곡군(上谷)이었고, 한(漢)의 범양(范陽)이었으며, 북제(北齊)의 귀덕군(歸徳郡) 지경이었다. 수(隋) 개황(開皇) 년간에 속말말갈이 고구려와 더불어 싸워 이기지 못하자 궐계부장(厥稽部長) 돌지계(突地稽)는 8부와 병사 수천명을 이끌고 와서 부여성 서북으로부터 부락을 들어 내부하니  순주(順州)를 설치하고 살게하였다. 당(唐) 무덕(武徳) 초기에 연주(燕州)로 고쳤고 회창(會昌) 년간에 귀순주(歸順州)로 고쳤으며 당(唐) 말기에는 또한 순주(順州)라고 하였다.  順州, 歸化軍, 中, 刺史. 秦上谷, 漢范陽, 北齊歸徳郡境. 隋開皇中, 粟末靺鞨與髙麗戰不勝, 厥稽部長突地稽率八部勝兵數千人, 自扶餘城西北舉落内附, 置順州以處之. 唐武徳初改燕州, 會昌中改歸順州, 唐末仍為順州.
『遼史』 권40 地理志4 南京道

 

순주(順州)는 범양군성에 있다. 당(唐) 천보 초에 설치하였다가 이내 또 순의(順義), 귀화(歸化) 2현으로 고쳐 하북도에 속하게 하였다. 석진(石晉) 초에 거란에 함락되었다. 송(宋) 선화(宣和) 때에 금(金)과 함께 거란을 공격하였다. [선화]5년 금(金)이 [순]주의 땅을 돌려주었다. [선화]7년 금(金)이 들어와 노략질하고 다시 그 땅을 취하였다.  順州在范陽郡城 唐天寳初置 尋又改為順義歸化二郡屬河北道 石晉初没於契丹 宋宣和時與金夾攻契丹 五年金以州地來歸 七年金入冦復取其地
文獻通考 권316

《武英殿本二十三史考証》의 해당 기사가 지적한 《遼史(요사)》 '지리지'의 순주(順州)는 요나라의 남경도(南京道) 관할 하의 속주로서, 《遼史(요사)》 '지리지'에는 그곳이 한(漢)의 범양(范陽)이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아울러 후대에 이르러서도 순주가 범양 지역에 계속 머물러 있었던 사실은 《文獻通考(문헌통고)》 등 여러 사서들에서 거듭 확인된다.

범양현(范陽縣)은 중국 역사상 고대의 지명이자 행정구역으로서 대략 지금의 보정(保定) 이북, 북경(北京) 이남 일대이다. 진(秦) 왕정 21년(서기전 226)에 범양현을 처음 설치하였다. 범수(范水)의 북쪽에 있다 하여 [범양(范陽)이란] 이름을 얻었다.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경내에 있었으며, 치소는 고성(오늘날의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이었다. 서한(西漢) 시기 계속 범양현이었고, [왕망의] 신(新)나라 때는 순음(順陰)이라 이름하였으며, 동한(東漢) 시기에는 또 범양후국(范陽侯國)이라 불렀다.  范陽縣是中國歷史上,古代的一個地名和行政區劃,約在今保定以北,北京以南這一帶。 秦朝在秦王政21年(公元前226年)初設范陽縣,因在范水之北而得名,在河北省保定市定興縣境內,治所在故城(今定興縣固城鎮)。西漢繼續為范陽縣,新朝更名為順陰,東漢又稱為范陽侯國。
『바이두 백과』 '范陽縣'

 

고성진(固城鎮)은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에 속해있다.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 관할의 '진(鎮)'이다. 옛날에는 강물(水)의 북쪽을 '양(陽)'이라 일컬었다. 성(城)이 범수의 북쪽에 있다하여 범양(范陽)이란 이름을 얻었다.  (범수: 즉 지금의 정흥현 고성진의 계조하이다.)  固城鎮隸屬於河北省保定市定興縣 是河北省保定市定興縣轄鎮, 古時稱南水北為陽, 城在范水之北而得名范陽 (范水: 即今定興縣固城鎮雞爪河)
『바이두 백과』 '固城鎮'

 

지도 3 - 한(漢) 탁군(涿郡) 범양현(范陽縣)의 위치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2-精裝本-秦漢)


상기 《遼史》 '지리지' 기사상의  한(漢)의 범양(范陽)」은 곧 서한(西漢) 탁군(涿郡)의 속현인 범양현(范陽縣)을 가리키는데, 뒤를 이은 동한(東漢) 시기에는 범양후국(范陽侯國)으로 불렸으며, 그 중심부인 치소는 오늘날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이다. (지도3 참조) 놀랍게도 《武英殿本二十三史考証》은 원(元) 동녕로(東寧路)의 위치(즉 고려 서경의 위치)를, 필자가 지난 수년간 고구려 평양성으로 주장해 온 정흥현의 고성진에 정확히 지정하고 있는 것이다.

 

서북면의 순주(順州)·자주(慈州)·강동(江東)·덕주(德州)·은주(殷州)·평양(平壤) 등 주군(州郡)에서 큰물이 졌다.  西北面順州、慈州、江東、德州、殷州、平壤等州郡大水。
『조선왕조실록』 태조실록 14권, 태조 7년 6월 29일 癸酉, 1398년 명(明) 홍무(洪武) 31년

 

1398년 서북면의 큰 홍수를 기록한 위 《조선왕조실록》의 기사에 등장하는 순주(順州), 자주(慈州), 강동(江東), 덕주(德州), 은주(殷州) 등의 지명들이 모두 《元史》 '지리지'에 동녕로(東寧路)의 속주들로 기재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기록상의 '순주(順州)'는 원(元)대 동녕로의 관할 하에 있던 순주가 틀림없다. 학계의 통설상 동녕로의 순주는 자주(慈州), 은주(殷州) 등과 함께 今 한반도 평양 근교의 평안남도 순천시에 비정되어 있지만, 앞서 논하였듯이 순주의 실제 위치는 대륙의 범양(范陽) 지역이다. 따라서 순주 등 동녕로의 속주들과 함께 홍수 피해를 본 것으로 기록된 조선 초기의 '평양(平壤)'은 고려의 서경, 즉 오늘날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鎮)을 정확히 가리키고 있다.



4부에서 계속 ... https://earthlin9.tistory.com/51

  1. 혹자는「당(唐)이 고구려(高麗)를 정벌할 때 평양(平壤)을 공략하여 그 나라가 동쪽으로 옮겨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데에 있었는데, 평양의 옛터가 아니었다. 왕건(王建)에 이르러 평양이 서경(西京)이 되었다.」는 기록을 「요녕성에 있던 고구려가 망한 뒤 한반도로 이동하여 훗날 고려가 건국되고 한반도 평양이 서경이 되었다.」로 해석하기도 하는데, 기록에는 압록수(鴨綠水)의 동남쪽 1,000여리 되는 곳이 고구려 평양이 아니라고 했을 뿐, 그곳이 고려 서경이란 말은 어디에도 없다.
  2. 주지하듯이 통설상 명(明)의 광녕위(廣寧衛)는 今 요녕성 북진시(北鎮市) 일대에 비정되어 있다. 그러나 금(金)의 광녕부(廣寧府)와 뒤이은 원(元)의 광녕부로(廣寧府路)는 처음부터 끝까지 보정에 있었던 게 확실하고, 1390년, 광녕부로를 폐한 위치에 새로 설치된 명(明)의 광녕위(廣寧衛) 역시 적어도 조선 초기에 이르기까지 보정에 그대로 있었을 것으로 필자는 판단한다.
  3. ☞ 의무려산(醫巫閭山)과 금나라 광녕부(廣寧府)의 위치 비정 참조 바람
  4. ☞ 원나라 동녕로(東寧路) 비정위치의 통설상 자체모순 - 고려 서경 위치 비정 2부 참조 바람
  5. 손가감(孫嘉淦, 1683-1753) : 강희, 옹정, 건륭 3조에 걸쳐 요직을 역임하였고, 또한 직언을 서슴치 않는 신하로 유명하였다.
  6. 당시에 존재하였던 《史記(사기)》로부터 《元史(원사)》까지, 시대별 총 23가지의 정사(正史)를 가리킨다.
  7.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8. 광녕위(廣寧衛) 치소의 위치는 확실치 않으나, 대략 今 보정시의 중심부 일대에 큰 무리없이 비정할 수 있을 듯하다.
  9. 기사상의 '순주(順州)'는 《元史(원사)》 권59 '지리(地理)2 동녕로(東寧路)' 조항의 순주(順州)를 가리킨다. 동일한 곳으로 여겨지는 순주가 《元史》 '지리지'의 '대도로(大都路)' 조항에도 보이는데, 순주의 속현을 폐하고 주(州)만 보존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1290년 동녕로가 사실상 폐지되고 그 영토가 고려로 반환된 뒤, 잔류한 순주의 일부 행정조직 등, "껍데기 뿐인" 순주가 아마도 대도로에 기치(寄治)된 때문이 아닌가 한다.
  10. 고대의 범양(范陽)은 요나라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지역인데(☞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범양에 있던] 순주(順州)가 《遼史(요사)》 '지리지'에 동경도(東京道)가 아닌 남경도(南京道)의 속주로 기록된 이유는 936년 후진(後秦)의 석경당(石敬瑭)이 요나라에 바친 연운16주를 승격시킨 남경이 새로 설치된 연유로 938년 본래의 남경이 동경으로 바뀐 일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즉 요나라 동경은 본래 남경이었다.
  11.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12. 석진(石晉) : 석경당(石敬瑭)이 세운 오대십국 시대의 후진(後晉, 936년~946년)을 말한다.
  13. 강동(江東)은 《元史》 '지리지'에 덕주(德州)의 속현들 중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