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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기 연행로와 원나라 함평부(咸平府) - 고려 서경 위치 비정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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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평부에서 길이 막혀 돌아온 고려 공주와 세자

 

10월 무인일, 공주와 세자가 원(元)으로 갔다. ...[중략]... 11월 을미일 공주가 서경(西京)에 도착하였다가 함평부(咸平府)에서 도적이 일어나서 길이 막혔다는 말을 듣고는 마침내 개경으로 돌아왔다.  10月 戊寅 公主·世子如元. ...[중략]... 乙未 公主至西京, 聞賊起咸平府道梗, 遂還.
『高麗史』  권 30, 世家 30, 충렬왕( 忠烈王) 13년 (1287년)

 

《고려사》 충렬왕 13년(1287) 10~11월 조항에 고려의 공주와 세자가 원(元)에 가기 위해 개경을 떠나 서경에 이르렀다가, 원(元) 함평부(咸平府)에 도적이 일어나서 길이 막혔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는 수 없이 개경으로 돌아왔다는 기사가 있다. 함평부에서 도적이 일어난 때문에 그들의 목적지였을 원(元)의 수도 대도(大都)로 가는 여정을 포기하였으므로 함평부는 서경에서 대도로 가는 경로에 인접한 어느 곳이었을 것이다. 본 글의 1부에서 논증한 바와 같이 서경과 대도는 서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었으므로 그 중간 어디쯤이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함평부 역시 서경과 대도 양쪽으로부터 멀지 않았을 것이다. 함평부의 위치를 먼저 찾으면 고려 서경으로부터 원(元) 대도에 이르는 부분적 연행의 경로를 파악하는데 유용할 듯하다. 원(元) 함평부(咸平府)의 위치를 사료에 근거하여 추적해보자.

 

 

원나라 함평부는 당나라 안동도호부의 마지막 위치에 있었다.

 

함평부(咸平府)는 옛 조선땅으로서 기자를 그곳에 봉하였으며 한(漢)의 낙랑군이다. 후에 고구려가 쳐들어와 그 땅을 차지하였다. 당(唐)이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를 두어 거느렸다. 이어서 발해의 대(大)씨가 그곳을 점거하였다. 요(遼)나라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땅이 지세가 험하여 막힌 곳이 많다 하여, 성을 짓고 피난민이 살게하여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이라 이름하였다. 함평현(咸平縣)을 거느린다.  咸平府,古朝鮮地,箕子所封,漢屬樂浪郡,後高麗侵有其地。唐滅高麗,置安東都護以統之,繼為渤海大氏所據。遼平渤海,以其地多險隘,建城以居流民,號咸州安東軍,領縣曰咸平。
『元史』 권59, 地理2 開元路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이 설치되었으며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고구려 동산현(銅山縣) 지역으로 발해는 동산군(銅山郡)을 설치하였다. 지역은 한나라 때의 후성현(候城縣) 북쪽과 발해의 용천부(龍泉府) 남쪽에 있다. 산이 많고 험준하여 도적떼들이 모여있는 곳이어서 평주(平州)와 영주(營州)의 객호(客戶) 수백을 불러 성을 세우고 거주케 하였다. 처음에는 학리태보성(郝里太保城)이라 불렀다가 개태 8년 주를 설치하였다. 군사와 관련된 일은 북여진병마사에 속하게 하였다. 관할 현은 하나이다.  함평현(咸平縣) 당나라 안동도호(安東都護)가 천보(天寶) 연간에는 영주(營州)와 평주(平州) 사이에 있었다고 하는 곳이 이곳이다. 태조가 발해를 멸망시키고 다시 안동군(安東軍)을 설치하였다. 개태연간에 현을 두었다.  咸州安東軍 下 節度, 本 髙麗 銅山縣地, 渤海 置 銅山郡, 地在漢候城縣北 渤海龍泉府南地. 多山險 寇盜以為淵藪, 乃招平營等州客户數百 建城居之, 初號 浩里太保城, 開泰八年 置州, 兵事屬北女直兵馬司, 統縣一. 咸平縣 唐安東都䕶 天寳中 治 營平二州 間, 即此 太祖 滅 渤海 復置 安東軍, 開泰中 置縣. 
『遼史』 권38 地理志2 東京道

《元史(원사)》 '지리지'는 함평부(咸平府)에 대하여 요(遼)나라의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이라 하였고, 《遼史(요사)》 '지리지'는 함주 안동군의 유일한 속현인 함평현(咸平縣)이 당(唐) 천보(天寶)연간(742~756)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가 있었던 곳이라 하였다. 따라서 천보연간 당(唐) 안동도호부의 위치를 알 수 있다면 원(元)함평부의 위치 또한 생각보다 수월히 찾을 수 있다.

신룡원년(705) 다시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라 하였다. 개원2년(714)년 안동도호(安東都護)를 평주(平州)로 옮겨 설치하였다. 천보2년(743년) 요서옛군성(遼西故郡城)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지덕(756~758) 이후에 폐하였다.  神龍元年,復為安東都護府。開元二年,移安東都護於平州置。天寶二年,移於遼西故郡城置。至德後廢。
『舊唐書』 권39 志第19 地理2

고구려를 물리친 직후 평양에 설치되었던 당(唐)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는 이후 여러번 이전되었는데, 《舊唐書(구당서)》에 따르면 천보2년(743)에 요서옛군성(遼西故郡城)으로 옮긴 후 758년 경 안사의 난(安史之亂) 와중에 폐지되기 전까지 같은 자리에 있었다. 따라서 《舊唐書》 기록상의 '요서옛군성'은 안동도호부의 마지막 위치로서, 바로 《遼史(요사)》 '지리지'에서 가리키는 「천보(天寶)연간 안동도호부」의 위치이다.

그렇다면 안동도호부의 마지막 위치인 요서옛군성(遼西故郡城)은 정확히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마지막 안동도호부는 서진 평주 창려현의 위치에 있었다.

 

요동을 나누어 평[주]로 삼았다. 치소는 창려(昌黎)인데, 지금의 안동부(安東府)이다.  分遼東為平 治昌黎 今安東府
『通典』  권171 州郡

창려군(昌黎郡), 한(漢)에서는 요동속국(遼東屬國) 도위(都尉)에 속했고, 위(魏, 즉 曹魏)에서 군을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로서 창려(昌黎)와 빈도(賔徒)이고 가구수는 900이다.  昌黎郡, 漢屬遼東屬國都尉, 魏置郡. 統縣二, 戶九百. 昌黎. 賔徒. 
『晉書』  권14 地理上 平州 昌黎郡

두우(杜佑)의 《通典(통전)》에 서진(西晉)의 평주(平州)에 대하여 「[그 이전 시기의] 요동을 나눈 일부분으로서 그 치소는 창려였는데, 창려는 [《通典》이 집필되던 ] 당시의 안동부(安東府)이다.」라고 하였다. 두우(杜佑, 735~812)는 대력(大曆)원년(766년)부터 30여 년 걸려 《通典》을 저술하였으므로 위 《通典》 권 171 기록상의 '안동부'는 앞서 살펴본 마지막 위치의 안동도호부이고, 그곳은 곧 서진 평주의 치소 창려현과 같은 곳임을 알 수 있다. 서진 평주의 창려현은 今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인근에 비정되므로 원(元) 함평부(咸平府)의 중심부 역시 같은 곳에 비정된다. 서진(西晉) 평주(平州)의 치소 창려현(昌黎縣)은 또한 전한(前漢) 유주(幽州)의 요서군(遼西郡) 교려현(交黎縣)과 동일한 위치로서, 위 《舊唐書》 기사상의 '요서옛군성(遼西故郡城)'은 곧 전한(前漢) 시기 교려현에 있었던 요서군성(遼西郡城)을 가리킨다.

 

지도 4 - 고려 서경과 원(元) 함평부(咸平府)의 위치 비정, 본 지도 출처: openstreetmap.org


한편 《元史》 '지리지'에 의하면 원(元)의 함평부(咸平府)는 곧 요(遼)나라의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이었고 그  치소는 함평현(咸平縣)이었다. 따라서 함주 함평현의 위치 역시 今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인근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遼史(요사)》 '지리지'에 또한 「함평현은 천보(天寶)연간 당(唐) 안동도호부의 위치로서, 그곳이 당(唐)의 영주(營州)와 평주(平州)사이에 있었다.」고 하여 함평부의 위치 비정에 매우 유용하다. 즉 필자가 이전 글에 고증하였다시피 당(唐) 평주(平州)의 치소 노룡현(盧龍縣)은 今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즉 고려 서경의 위치]에, 그리고 당(唐) 영주(營州)의 치소 유성현(城縣)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타남향(坨南鄉)에 각각 비정되는데, 공교롭게도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이 고성진과 타남향의 중간에 위치한다는 사실은 (지도4 참조) 「함평부 = 당호진 위치 비정에 교차검증을 제공한다.

 

지도 5 - 통설상 당(唐) 평주(平州), 당(唐) 영주(營州) 및 요(遼)나라 함주(咸州)[원(元) 함평부]의 비정 위치, 본 지도 출처: openstreetmap.org

 

참고로, 학계의 통설상 당(唐)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은 今 하북성 진황도 노룡현(盧龍縣)에, 당(唐) 영주(營州) 유성현(城縣)은 今 요녕성 조양(朝陽)에, 그리고 요(遼)나라 함주(咸州) 함평현(咸平縣)은 今 요녕성 개원(開原)에 각각 비정되어 있는데, 지도5에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다시피 요(遼)나라 함주[즉 원(元) 함평부]가 당(唐) 영주와 평주로부터 동떨어진 곳에 비정되어 있어 요(遼)나라 함주 함평현이 당(唐) 영주와 평주 사이에 위치하였다는 《遼史(요사)》 '지리지'의 기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제멋대로 지명들의 위치를 비정해 놓은 통설이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요점 정리하면, 1287년10~11월(음)에 도적이 일어나 고려 서경에서 원(元)의 대도(大都)로 가는 길이 막힌 원(元)의 함평부(咸平府)는 今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일대로 비정된다.

본 글의 1~3부에 고증하였듯이 고려 서경의 위치는 今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鎮)이다. 필자 역시 처음에는 그랬듯이, 이 글을 읽는 독자들 가운데 이에 대하여 고개를 갸우뚱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즉 고려의 공주와 세자는 당연히 원(元)의 도읍인 대도(大都), 즉 통설상 今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가고 있었을 터인데, 곧바로 북경으로 향하지 않고 서남쪽으로 한참 떨어져있는 보정의 정흥에는 무엇 때문에 들렸던 것이며, 또한 북경은 정흥을 기준으로 동북 방향인데, 정흥 서쪽 방면의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일대에 비정된다는 함평부(咸平府)에 도적이 일어났기 때문에 대도로 가는 길이 막혔다는 것은 또 무슨 뚱딴지 같은 말인가 하는 것이다. 필자가 서경과 함평부의 위치를 한참 잘못 짚은 것일까?

 

 

 

5부에서 계속 ...  https://earthlin9.tistory.com/52

  1. 이연령, 최탄 등이 1269년에 반역하여 이듬해 서경에 동녕부가 설치되고 그로부터 5년 뒤에 동녕로총관부(東寧路總管府)로 승격되었으므로, 1287년 10월 (음) 고려의 공주와 세자가 도달하였던 '서경'이 실제로는 원(元) 치하의 동녕로(東寧路)였음을 알 수 있다.
  2. ☞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위치 비정 참조 바람
  3. ☞ 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참조 바람
  4. ☞ 임유관(臨渝關)과 발착수(渤錯水), 새로 밝혀지는 위치, 당태종의 회군 경로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