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관(臨渝關)과 발착수(渤錯水), 새로 밝혀지는 위치 , 당태종의 회군 경로
카테고리 없음당태종(唐太宗)은 안시성(安市城)에서 고구려에 패배한 뒤 회군하여 정주(定州)로 향하였다. 정주로 퇴각하던 도중 당태종군은 임유관(臨渝關)이란 관문을 통과하게 되는데, 1,400여 년이 지나도록 그 위치가 오리무중이다. 임유관은 또한 수(隋)의 오만 무례함에 선제공격으로 답한 고구려가 침략세력을 섬멸하고 승리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만큼 그 정확한 위치는 한국 고대사의 참된 강역을 가늠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서기 645년 고구려-당(唐) 전쟁 관련 사료의 새로운 해석에 기초한, 당태종 친정군(親征軍)의 요동성(遼東城)을 향한 진군 경로를 재구성하고 요수(遼水), 요택(遼澤), 마수산(馬首山) 등 주요 지명들의 위치를 찾아내어 밝힌 바 있다. 앞선 노력의 연장선에서 이번에는 당태종의 회군 경로 분석과 함께 임유관을 비롯하여 발착수(渤錯水) 및 영주(營州)의 유성(柳城) 등 당태종의 회군과 관련되어 사서에 등장하는 지명들의 위치를 추적해보기로 한다.
임유관에는 유수가 있었다.
《資治通鑑(자치통감)》에 따른 당태종의 회군 경과는 다음과 같다.
- 645년 9월 18일 (음), 계미(癸未)일 : 당태종 안시성(安市城, 보정시 역현易縣 북소촌北邵村 인근의 봉황산鳳凰山)에서 회군 칙령을 내림
- 645년 9월 20일 (음), 을유(乙酉)일 : 요동(遼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부근)에 도달함.
- 645년 9월 21일 (음), 병술(丙戌)일 : 요수(遼水,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북쪽의 조하漕河 즉 서수徐水)를 건넘.
- 645년 10월 1일 (음), 병신(丙申)일 : 포구(蒲溝, 위치 미상)에 도착함.
: 발착수(渤錯水, 위치 미상)를 건넘. - 645년 10월 11일 (음), 병오(丙午)일 : 영주(營州, 위치 미상)에 도착함. 유성(柳城)의 동남쪽에서 전사한 사졸들을 위하여 제사함.
- 645년 10월 21일 (음), 병진(丙辰)일 : 태자가 마중온다는 소식을 듣고 임유관(臨渝關, 위치 미상)으로 들어감.
- 645년 11월 7일 (음), 신미(辛未)일 : 유주(幽州, 보정시 당현唐縣)에 도착함.
- 645년 11월 16일 (음), 경진(庚辰)일 : 역주(易州)의 경계(보정시 당현唐縣과 정주시定州市의 중간 지점으로 추정)를 통과함.
- 645년 11월 22일 (음), 병술(丙戌)일 : 정주(定州, 하북 정주시定州市)에 도착함.
위 경과를 살펴보면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부근의 조하(漕河)로 비정되는] 요수(遼水)에서 시작하여 [보정시 당현(唐縣)에 비정되는] 유주(幽州)에 이르기까지, 대략 서남 방향으로 포구(蒲溝), 발착수(渤錯水), 유성(柳城, 즉 영주營州), 임유관(臨渝關) 등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즉, 임유관은 요수(今 조하漕河)와 유주(今 당현唐縣) 사이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에 임유관(臨渝關)이 있다. 주(州) [치소] 서쪽 180리에 있다. 유수(渝水)에 연유하여 이름하였다. 平州石城縣有臨渝關在州西一百八十里 因渝水為名
『通鑑地理通釋』 권 5
송백(宋白)이 말하길 「유관(渝關)의 관성 아래 유수(渝水)가 있어 큰 바다로 들어간다. 그 관문의 동쪽은 바다에 임하였고, 북쪽에는 토이산(兔耳山)과 복주산(覆舟山)이 있는데, 모두 험준하다. 산아래로는 해안에 이어져 동북으로 간다. 좁은 곳으로서 수레바퀴 한축이 겨우 지나갈 수 있다.」 하였다. 宋白曰:渝關關城下有渝水入大海。其關東臨海,北有兔耳山、覆舟山,山皆斗峻,山下尋海岸東北行,狹處纔通一軌。
『資治通鑑』 권 269, 胡三省 註
위 《通鑑地理通釋(통감지리통석)》 및 《資治通鑑》 註의 기록에 따르면 임유관(臨渝關)은 유수(渝水)라는 하천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관문이었음이 틀림없고, 유수는 임유관 인근을 흘렀던 게 분명하다. 따라서 今 조하(漕河)와 今 당현(唐縣) 사이에 유수가 될 만한 물줄기를 먼저 찾으면 임유관의 위치 역시 알 수 있을 것이다.
유수(渝水)와 관련하여,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의 계하(界河)에 주목하여 보자. 계하는 그 위치가 조하(漕河)와 당현(唐縣) 사이로서 앞서 언급한 임유관(臨渝關)의 추적 범위에 들어온다는 점에서 일단 눈여겨 볼 필요가 있고, 또한 계하가 그 일대의 산지(山地)를 동서로 가르는 협로를 따라 흐른다는 사실은 특히 주의을 요하는데, 그 이유는 고대 중국에는 산지의 협로에 관문을 설치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지도상 계하(界河)가 흐르는 협로(이하 편의상 <계하협로>로 표기함)의 남단에 보이는 '渝河'라는 지명은 계하가 예전에 '渝河(유하)' 즉 '渝水(유수)'로 불렸음을 의미할 수도 있으므로 심상치않다. (지도 1, 2 참조) 사료를 찾아 계하에 대하여 좀더 자세히 알아보자.
지도 1 만성현(滿城縣) 계하(界河) 근처에 '西渝河(서유하)'란 지명이 보인다. 본 지도 출처: Karte von Tschili und Schantung, 1907
지도 2 만성현(滿城縣) 계하(界河) 근처에 '東, 西渝河(동, 서유하)'란 지명들이 보인다. 본 지도 출처: 『保定府志』 권 17, 與地略1 疆域, 清(청) 光绪(광서) 8-12년 (1882-1886년) 출간
유수(渝水)는 옛 기록에 일컫는 바 「유수(渝水)가 복류한다」는 그것으로서 [만성]현 서쪽 15리에 있다. 역현(易縣) 대청개산(大靑開山)에서 발원하여 구불거리며 동쪽으로 흘러 역현과 완현(完縣)의 분계를 이루는데, '계하(界河)'라고도 부른다. 토문(土門)의 동남에 이르러 만성(滿城) 경내로 들어와 석정(石井)을 지난다. 또 동남쪽으로 유하촌(渝河村)에 이르러 복류하여 [만성]현 동쪽 8리에서 솟아나 일무천(一畝泉)을 이룬다. 《水經注(수경주)》에 '천두수(泉頭水)'라 이른 곳이다. 유하촌에서부터 동남쪽으로 위공(尉公)을 지나고 또 남쪽으로 장촌(章村)에 이르어 완현(完縣) 경내로 흘러든다. 渝水舊志所稱渝水伏流者在縣西十五里 源於易縣大靑開山蜿蜒東流爲易完分界處赤曰界河 抵土門東南入滿城境越石井 又東南至渝河村伏流至縣東八里湧出爲一畝泉 水經注所云泉頭水也 由渝河村東南過尉公 又南至章村入完縣界
『滿城縣志略』 권 1, 畺域 1, 河流, 민국(民國) 20년 (1931년) 출간
유하(渝河)는 만성현(滿城縣) 서북 15리에 있다. [상류가 곧 계하(界河)이다.] 역주(易州)에서 발원하여 [만성]현 서북을 지나 거의 30리를 복류한 뒤 일무천(一畝泉)에서 솟아난다. 渝河在滿城縣西北十五里 [上流卽界河] 發源易州流逕縣西北 伏流於地𨗂三十里爲一畝泉湧
『保定府志』 권 19, 與地略3 山川2, 清(청) 光绪(광서) 8-12년 (1882-1886년) 출간
계하(界河)는 완현(完縣) 북쪽 채자촌(砦子村)에 있다. 역주 청개(靑開) 산골짜기 가운데서 발원하여 [완]현의 경내를 지난다. 또 동쪽으로 만성현(滿城縣)에 이르러 유하(渝河)가 된다. 界河在完縣北砦子村 源出易州靑開澗中東南逕縣境 又東至滿城縣爲渝河 [舊志]
『保定府志』 권 19, 與地略3 山川2, 清(청) 光绪(광서) 8-12년 (1882-1886년) 출간
유하(渝河)는 만성현(滿城縣) 서북 15리에 있다. 역주령(易州嶺)에서 발원하여 [만성]현의 서북을 지나 거의 30리를 복류하여 일무천(一畝泉)에 이르러 솟아난다. 渝河在滿城縣西北十五里 源易州嶺流逕縣西北 伏流於地𨗂三十里至一畝泉湧出
『大清一統志』 권 10
아니나 다를까 《滿城縣志略(만성현지략)》, 《保定府志(보정부지)》 등 지방지의 기록에 계하(界河)를 일컽는 또 하나의 명칭이 다름 아닌 바로 '유수(渝水)' [또는 '유하(渝河)']였다고 명시되어 있고, 같은 내용이 《大清一統志(대청일통지)》에서 확인된다. 즉, 놀랍게도 계하의 옛 이름이 곧 유수였고, 《滿城縣志略》이 출간되던 1930년 대까지도 계하는 유수로 불렸던 것이다.
이와 같은 정황들이 모두 우연의 일치일 수는 없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필자는 고대의 유수(渝水)를 지금의 만성구(滿城區) 소재 계하(界河)에 비정한다.
유관(渝關)을 통하여 영주(營州) 및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의 경내로 들어간다. 《漢書音義(한서음의)》에 '渝'는 '喻(유)'로 발음한다 하였는데, 지금은 '榆(유)'와 같이 읽는다. 渝關入營州界及平州石城縣界 漢書音義渝音喻 今讀如榆
『資治通鑑』 권 269, 胡三省 註
계하(界河)와 유수(渝水)의 지명적 관련성과 더불어 지리적으로 눈길을 끄는 또 한가지 사실은 <계하협로>의 서북쪽 출구 인근의 만성구(滿城區) 타남향(坨南鄉)에서 동북쪽으로 낭아산(狼牙山) 아래 용문수고(龍門水庫) 부근의 평야지대에 이르기까지 산지 사이로 뚫린 자연적인 통로가 확인된다는 것인데, 용문수고 일대는 곧 고대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의 영역으로서, 이는 곧 임유관(臨渝關)을 통하여 평주 석성현에 도달한다는 위 《資治通鑑》 註의 기록에 일치하여, 임유관이 <계하협로>에 위치하였을 개연성에 대한 교차검증이 된다.
이상의 사실들에 근거하여, 임유관(臨渝關)은 <계하협로>에 설치되어 있었던 관문이 틀림없을 것으로 판단되고, 부근의 지형에 미루어 보아 그 위치는 협로의 중간 지점인 석정향(石井鄕) 인근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필자는 임유관을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석정향(石井鄕) 일대에 비정한다.
그러면 당태종의 회군 경로를 추적, 분석하고 임유관의 위치로서 만성구(滿城區) <계하협로>의 타당성을 추가적으로 검토하여보자.
사진 1 만성구(滿城區) 계하(界河)의 협로 전경, 고대의 임유관(臨渝關)은 표시된대로 석정향(石井鄕)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본 지도 출처: 구글어스
사진 2 만성구(滿城區) 석정향(石井鄕, 임유관 추정 위치) 부근의 계하(界河) 협로
사진 3 만성구(滿城區) 석정향(石井鄕, 임유관 추정 위치) 부근의 계하(界河) 협로
발착수를 찾아라
겨울 10월 초하루 병신(丙申)일 (645년 10월 1일 음)에 황상이 포구(蒲溝)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길 메우기를 독려하여 모든 군대가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는데 [포구와 발착수는 모두 요택(遼澤) 가운데 있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자 물기에 젖은 사졸들이 많이 죽었으므로, 칙령을 내려 길에 불을 지피고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冬,十月,丙申朔,上至蒲溝駐馬,督塡道諸軍渡渤錯水,[蒲溝、渤錯水,皆在遼澤中。] 暴風雪,士卒沾濕多死者,敕然火於道以待之。
『資治通鑑』 권 198
나무와 풀을 베어 진창을 메우고, 심지어는 끌고 온 수레 마저 수렁에 쳐박으며 통로를 만들어 어렵게 요택을 빠져나온 당(唐)군이 발착수(渤錯水)를 건너려던 때 마침 불어닥친 눈보라는 늪지를 헤쳐 나오느라 이미 옷이 모두 젖어버린 그들을 저체온증의 죽음으로 몰아 넣은 듯 보이며, 그때의 비참했던 상황은 《資治通鑑》에 잘 그려져있다.
여하튼, 645년 9월 21일 (음)에 요수(遼水)를 건넌 당(唐)군은 10월 1일 (음) 발착수(渤錯水)를 건너기 전까지, 열흘동안 요택(遼澤)에서 발이 묶여 헤매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당(唐)군의 퇴각로를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요수를 건넌 지점을 찾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이전 글에서 살펴보았듯이 요수로 비정되는 今 조하(漕河)는 만성(滿城)을 기준으로, 하류쪽으로는 갈수록 주변의 습지가 더욱 심화되어 건너기 어려웠을 것이고, 상류 또한 경사가 빨리 가파라지며 사서의 기록상 도하 직후 그들이 진입한 요택의 습지가 형성되기 어려운 지형이 된다. 따라서, 퇴각하던 당(唐)군이 요수를 건넌 곳 역시 전쟁 초기에 요동성(遼東城)을 향하여 진격하던 때의 만성에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는 구간으로 한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퇴각시 요택에 들어온 그들이 진격 때의 기록에서는 안보이는 발착수라는 하천과 마주치게 된다는 사실이 용이할 수 있다. 즉, 발착수를 먼저 찾으면 당(唐)군의 퇴각 루트상 요수 도하 지점과 함께 아울러 이후 얼마간의 이동 경로를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발착수는 요택(遼澤)을 흐르는 강물이므로 그 역시 만성(滿城) 북쪽 방면의 今 조하(漕河) 부근에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요수(遼水) 즉 今 조하를 제외하면 그 일대를 흐르는 물줄기는 만성구(滿城區) 북조장촌(北趙庄村) 인근에서 발원하여, 지금은 물길을 댐으로 막아 저수지가 조성되어 있는 육반산(六盤山) 남쪽 지대를 가로질러 동남 방향으로 조하에 합류하는 今 마련천(馬連川)이 유일하다. (지도 3, 지도 1 참조) 즉, 발착수(渤錯水)가 될 수 있는 하천은 그 일대에서 마련천말고는 찾을 수 없으므로 필자는 고대의 발착수(渤錯水)를 지금의 만성구(滿城區) 소재 마련천(馬連川)에 비정한다.
참고로, 포구(蒲溝)는 기록상 발착수(渤錯水)와 거의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바 이는 별개의 하천을 지칭하는 고유명사가 아닌, 발착수 자체 또는 발착수 부근의 이름모를 작은 냇물을 가리켜 「부들풀이 많은 도랑」으로 표현한 게 아닌가 한다.
지도 3 서기 645년 당태종 친정군의 회군 경로, 본 지도 출처: Karte von Tschili und Schantung, 1907
당태종의 회군 경로
황상이 요동(遼東)은 일찍 추워져서 풀이 마르고 물은 얼어서 군사와 말들이 오래 머물기 어렵고, 또 양식이 다 떨어져가므로 계미(癸未)일 (9월, 18일 음)에 회군하도록 칙령을 내렸다. 上以遼左早寒,草枯水凍,士馬難久留,且糧食將盡,癸未,敕班師。
『資治通鑑』 권 198
을유일 (9월 20일), 요동에 이르렀다. 乙酉,至遼東。
『資治通鑑』 권 198
안시성(安市城, 역현易縣 북소촌北邵村 봉황산鳳凰山)에서 공성전을 벌이며 몇달째 고구려와 대치 상태에 있던 당(唐)군은 날씨가 추워지고 군량이 고갈되는 등 여건이 불리해지자 645년 9월 18일 (음) 회군을 결정하고, 실행한다. 안시성(安市城)을 떠난 당태종의 친정군은 9월 20일 요동[성](遼東[城],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부근)을 거쳐 9월 21일 (음) 요수(遼水, 조하漕河)에 이른다.
병술(丙戌)일 (9월 21일), 요수(遼水)를 건넜다.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가지 못하자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써 다리를 삼았다. 황상은 몸소 말의 안장걸이에 섶을 묶는 일을 도왔다. 丙戌,渡遼水。遼澤泥潦,車馬不通,命長孫無忌將萬人,翦草塡道,水深處以車爲梁,上自繫薪於馬鞘以助役。
『資治通鑑』 권 198
앞서 논거를 통해 밝혔듯이 당(唐)군이 요수(遼水)를 건넌 뒤 요택(遼澤)을 지나 도달한 발착수(渤錯水)는 만성구(滿城區) 북쪽 방면의 今 마련천(馬連川)이다. 따라서 당군은 진격때와는 달리, 요동에서 今 서흑산촌(西黑山村)과 今 백보촌(白堡村) 일대를 경유하는 마수산(馬首山, 상산象山) 북쪽 방면의 경로를 택하여 요수 동변에 도달한 뒤 今 야리촌(野里村) 부근에서 도하하여 요택에 진입한 것으로 보인다. (지도 3 참조)
병술(丙戌)일 (9월 21일), 요수를 건너 발착수(渤錯水)에 이르기까지 10리간의 요택(遼澤)이 진창이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가지 못하자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양사도(楊師道)를 불러 문무관료들 및 소집된 병졸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를 교량으로 삼았다. 태종은 교량이 완성되지 못 할 것을 걱정하며 몸소 섶을 말위에 쌓고 장손무기 등에게로 가서 일을 도왔다. 丙戌, 渡遼水至渤錯水, 十里間遼澤餘潦, 車馬不通. 詔長孫無忌·楊師道率文武官寮及征兵萬人, 翦草塡道而進, 水深之處, 以車爲梁道. 太宗憂梁道不成, 自積柴馬上, 詣無忌等以助役.
『册府元龜』 권 117
위 《册府元龜(책부원귀)》의 기사에 따르면 당(唐)군의 요수(遼水) 도하 지점으로부터 발착수(渤錯水)까지의 거리는 10리로서, '당대척(唐大尺) 1리 당 1,800보(步)'의 표준을 적용하면, 당(唐)군은 요수를 건넌 후 5.32킬로미터의 요택(遼澤) 구간을 거쳐 발착수에 도달한 것을 알 수 있다. 수치에 미루어 보아 당(唐)군은 今 만성구(滿城區) 책가좌촌(翟家佐村) 인근에서 발착수(渤錯水, 今 馬連川)를 건넌 것으로 추정된다.
만성구(滿城區)의 마련천(馬連川) 유역은 지금도 홍수 다발지역으로서, 마련천의 물길을 댐으로 가로막아 조성된 마련천수고(馬連川水庫, 저수량 498만 세제곱미터)가 그 일대의 홍수 방지용으로 운용된다는 사실은 용문수고(龍門水庫, 각주 13 참조)에 더하여, 필자가 제시하는 요택(遼澤)의 비정위치와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겨울 10월 초하루 병신(丙申)일 (10월 1일 음), 황상이 포구(蒲溝)에 이르러서 말을 세우고 길 메우기를 독려하여 모든 군대가 발착수를 건너는데, [포구蒲溝와 발착수渤錯水 모두 요택遼澤 가운데 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쳐 물기에 젖은 사졸들이 많이 죽었으므로, 칙령을 내려 길에 불을 지피고 그들을 맞이하게 하였다. 冬十月丙申朔,上至蒲溝駐馬,督填道諸軍渡渤錯水。[蒲溝,渤錯水,皆在遼澤中] 暴風雪,士卒沾濕多死者,敕然火於道以待之。
『資治通鑑』 권 198
병오(丙午)일 (10월 11일 음), 영주(營州)에 도착하였다. 조서를 내려 요동(遼東)에서 사망한 사졸들의 해골을 유성(柳城)의 동남쪽에 모두 모아 놓게 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태뢰(太牢)를 갖추어 베풀게 하였다. 황상이 손수 글을 지어 제례를 올리고 곡하여 극진히 애도하였다. 丙午,至營州。詔遼東戰亡士卒骸骨並集柳城東南,命有司設太牢,上自作文以祭之,臨哭盡哀。
『資治通鑑』 권 198
요택(遼澤)의 늪지에서 열흘동안이나 고전한 뒤 어렵사리 빠져나와 발착수(渤錯水)를 건넌 당(唐)군이 임유관(臨渝關) 협로의 서북쪽 입구 (만성구滿城區 동토문촌東土門村 부근)으로 가는 유일한 경로는 발착수 도하 지점에서 서남쪽으로 今 타남향(坨南鄉)을 경유하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발착수를 건넌 후 당태종은 영주(營州)의 유성(柳城)에 도달하여 열흘 정도 그곳에 머물면서 전사자들을 위한 제례를 치루는 등의 뒷 정리 작업을 병행했던 것으로 여겨지는데, 임유관에서 그리 멀지 않았던 것으로 유추되는 유성에서 대기하며 마중나오기로 한 태자의 원군을 기다렸던 것으로 생각된다. 아마도 임유관의 협로 어딘가에 매복해 있을지도 모를 고구려군의 기습을 염려한 당태종의 조심스런 퇴각 행적으로 여겨진다. 필자는 당(唐)군이 거쳐간 영주(營州)의 유성(柳城)을 지금의 만성구(滿城區) 타남향(坨南鄉) 일대에 비정한다.
병진(丙辰)일 (10월 21일 음), 황상은 태자가 마중을 위해 곧 도착한다는 소식을 듣고 비기(飛騎) 3000기를 따라 임유관(臨渝關)으로 말달려 들어가 길에서 태자와 상봉하였다. 丙辰,上聞太子奉迎將至,從飛騎三千人馳入臨渝關,道逢太子。
『資治通鑑』 권 198
신미(辛未)일 (11월 7일 음), 거가가 유주(幽州)에 이르렀더니 고구려의 백성들이 성의 동쪽에서 영접하여 절하고, 춤추며 환호하였는데, 땅에서 뒹굴기도 하여 흙먼지가 퍼지는 것이 바라보였다. 十一月,辛未,車駕至幽州,高麗民迎於城東,拜舞呼號,〈號,戶高翻。〉宛轉於地,塵埃彌望。
『資治通鑑』 권 198
경진(庚辰)일 (11월 16일 음),16일에 역주(易州)의 경계를 통과하였다. 庚辰,過易州境
『資治通鑑』 권 198
병술(丙戌)일 (11월 22일 음),22일에 거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丙戌,車駕至定州。
『資治通鑑』 권 198
태자의 구원군이 오고있다는 소식을 듣고서야 안심하고 임유관(臨渝關)으로 빠져나온 당태종은 정주(定州, 하북성 정주시定州市)를 향한 회군 노정을 이어갔다.
이상, 안시성(安市城)으로부터 정주(定州)까지, 사서에 기록된 당태종 친정군의 회군 경과를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일대의 지리적 여건에 대비하여 살펴본 바 고대의 임유관(臨渝關)은 만성구의 <계하협로>에 위치했던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된다.
결론
- 고대의 임유관(臨渝關)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소재 계하(界河)가 흐르는 협로에 위치한 석정향(石井鄕) 인근에 비정된다.
- 임유관과 관련된 고대의 유수(渝水)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소재 계하(界河)이다.
- 고대의 발착수(渤錯水)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소재 마련천(馬連川)이다.
- 당(唐) 영주(營州) 유성군(柳城郡) 유성현(柳城縣)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타남향(坨南鄉) 일대에 비정된다.
- 고조선과의 회담이 결렬된 뒤 돌아가는 길에 비왕(裨王) 장(長)을 찔러 죽인 한(漢)의 사신 섭하(涉何)가 패수(浿水)를 건너 달아나 들어간 당(唐) 평주(平州) 유림관(楡林關)은 곧 임유관(臨渝關)으로 추정된다.
- 이맥(李陌)의 《태백일사(太白逸史)》 '고구려본기'에 「고구려의 평원왕(平原王)이 장군 온달을 거느리고 갈석산(碣石山)과 배찰산(拜察山)에서 북주(北周)를 토벌하고 유림관(楡林關)까지 추격하여 대파하였다」는 기록상의 유림관(楡林關) 역시 임유관(臨渝關)과 같은 곳으로 추정된다.
- 학계의 통설에 따른 임유관의 위치는 막연히 지금의 하북성 진황도시(秦皇島市) 근교의 산해관(山海關)에 비정되어 있으나, 이는 사료적 근거 없는 낭설일 뿐이다.
- ☞ 요수와 요택 그리고 마수산,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위치 참조 바람
- ☞ 수나라 탁군 계현은 북경이 아니다. 및 ☞ 고대 유주 연국 계현의 절대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당현이다. 참조 바람
- 송백(宋白) : 송(宋) 태종(太宗) 때 문신으로 자는 태소(太素). 이방(李昉)과 함께 《문원영화(文苑英華))》 천여 권을 편찬하였다.
- 軌(궤) : 좌우 바퀴 간의 거리
- 伏流(복류) : 하천 바닥 아래에서의 지하수 흐름. 특히 마른 하천 아래에서 흐르는 지하수를 이른다.
- 필자는 이전부터 만성구(滿城區) 서쪽 산지를 관통하는 '계하협로'를 주시했었고☞ 포구수, 경수, 류수와 우북평군의 속현 위치 비정 (참조바람) 사서의 기록에 따라 추적한 바 그곳이 임유관(臨渝關)의 위치로서 유력하다는 생각은 했었지만, 계하(界河)의 또 다른 이름이 설마 '유수(渝水)'일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 ☞ 우북평군 석성현에 갈석산이 있었다. 참조 바람
- ☞ 요수와 요택 그리고 마수산,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위치 참조 바람
- 遼左(요좌) : 북쪽에서 내려다 보았을 때 요(遼)의 왼쪽, 즉 요동(遼東)을 말함.
- 班師(반사) : 군사를 이끌고 돌아옴. 즉 '회군'을 말함.
- ☞ 안시성과 주필산, 새로 밝혀지는 위치 참조 바람
- 특히 마련천(馬連川) 일대의 저지대 바로 북쪽 조하(漕河) 상류에 위치한 용문수고(龍門水庫, 저수량 1억1천800만 세제곱미터)의 댐이 조하 유역의 홍수 조절을 주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바이두 백과 '龍門水庫')은 조하 주변에 본래 요택(遼澤)의 습지가 형성되어 있었을 개연성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
- ☞ Chinese units of measurement 참조 바람
- 당(唐) 영주(營州) 유성군(柳城郡) 유성현(柳城縣)으로서 한(漢)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과는 다른 곳이다. ☞ 한(漢), 당(唐)대 사이에 서쪽으로 옮겨진 요수와 유성 참조 바람
- 정주에 도달하기 전 지나친 유주(幽州, 보정시 당현唐縣)에서 고구려의 백성들이 당태종 일행을 「영접하여 절하고 춤추며 환호했다」는 엉뚱한 기사는 고구려 백성들이 고구려의 승리에 기뻐서 춤추며 환호하고, 퇴각하는 당(唐)군 패잔병들에게 야유를 퍼부은 일을 둔갑시켜 당태종의 실책을 얼버무리려 한 허구로 여겨지지만, 이를 통하여 지금의 보정시 당현(唐縣) 일대가 당시 고구려의 강역이었던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다.
- 당(唐)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의 위치와 관련한 추가 자료는 ☞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위치 비정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