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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유주(幽州) 연국(燕國) 계현(薊縣)의 절대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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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필자는 고대 계현(薊縣)의 위치를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에 비정한 바 있다. '위치 비정'이란, 문자 그대로, 해당 지명에 관계되는 여러가지 역사, 지리적 사실들을 비교, 분석하여 그 대략적인 위치를 유추하는 과정으로서, 그 정확성 또는 확실성에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필자가 이전 글에서 제시한 계현의 위치 비정 역시 그러하였다. 계현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 할수록, 명·청대에 이르러, 그 본연의 위치가 매우 조직적이고도 주도면밀한 문헌 사료의 첨삭을 통해 은폐되어, 지금의 북경(北京)으로 어물쩍 지명 이동된 정황은 더욱 짙어 보였으나, 이른바 '심증은 가는데 물증이 없는', 다소 갑갑했던 부분이 없지 않았었는데, 이번에 고대 계현(薊縣)의 올바른 절대위치를 정하는데 대단히 중요하다고 판단되는 기록(물증)을 《保定郡志(보정군지)》에서 새로이 발견하여, 공개한다.

 

당성은 곧 계성이다.


진(秦)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영(王永)이 진위장군(振威將軍) 유고인(劉庫仁)에게 구원을 요청하자 유고인이 그 아내의 오빠 공손희(公孫希)를 보내 기병 3천을 거느리고 구원하게 하였는데, 평규(平規)를 계(薊)의 남쪽에서 대파하고, 승세를 타고 나아가 당성(唐城) [호삼성 주: 중산군(中山郡)의 당현성(唐縣城)이다.] 에 웅거하며 모용린과 맞서 서로 대치하였다.  秦幽州刺史王永求救於振威將軍劉庫仁,庫仁遣其妻兄公孫希帥騎三千救之,大破平規於薊南,乘勝長驅,進據唐城[胡三省 注: 中山郡之唐縣城也],與慕容麟相持。
『資治通鑑』 권105, 384년 8월

《資治通鑑(자치통감)》에 따르면 서기 384년, 후연(後燕)의 영삭장군(寧朔將軍) 평규(平規)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몰린 전진(前秦)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영(王永)을 구원하기 위해 출격한 공손희(公孫希)는 계(薊)의 남쪽에서 평규의 군사를 무찌르고 당성(唐城)에 들어가 후연의 초대 임금 모용수(慕容垂)의 아들 모용린(慕容麟)에 맞서 대치하였다. 호삼성(胡三省)이 주석하였다시피 기록상의 당성(唐城)은 곧 지금도 동일한 위치에 같은 이름으로 남아 있는 今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의 현성을 가리킨다. 왕영이 후연의 공격을 받은 곳은 물론  유주(幽州)의 치소인 계성(薊城)일 터인데, 기록상의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공손희가 전장에 도달하였을 때에 계성은 후연에 이미 점령되었을 [또는 점령되기 일보 직전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공손희의 급선무는 왕영을 도와 적의 수중에 떨어진 계성을 되찾는 [또는 적의 수중에 떨어질 위기로부터 계성을 지켜내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공손희가 평규를 물리친 뒤 왕영과 함께 웅거하며 후연과 대치하였다는 기록상 '당성(唐城)'의 정체가 모호한데, 필자는 당성이 바로 계성이었을 것으로 본다. 이를테면, 고대의 노룡성(盧龍城)이 '평주성(平州城)' 또는 '조선성(朝鮮城)' 등으로도 불렸듯이 '당성(唐城)' 역시 계성(薊城)의 또 다른 이름이었을 것이다.

 

 

요임금이 봉해진 당현은 곧 계현이다.


감인이 《十三州志(십삼주지)》에 말하길 중산(中山)[국]의 치소는 노노(盧奴)로서 당현(唐縣)의 옛 성이 [중산]국 북쪽 75리에 있다.」 하였다.  闞駰《十三州志》曰:中山治盧奴,唐縣故城在國北七十五里。
『水經注』 권11, '滱水'

《史記(사기)》에서 말하길 「제곡씨(帝嚳氏)가 죽고 제요씨(帝堯氏)가 일어나 당(唐)에 처음 봉해졌다.」하였다. 망도현이 남쪽에 있고 지금 이 성(城)은 남쪽으로 노노(盧奴)의 옛성을 마주하고 있는데, 이에 견줄만한 성(城)이 없다. 예전을 상고하면 지금의 일이 사리에 맞고 어긋남을 알 수 있다. 속명 '망도 옛 성'이 80여 리에 있고, 중산성(中山城)으로부터 70리 떨어져 있어, 길이 증험되고 도읍에 추거(推擧)되었으니 마땅히 당성(唐城)이다.  《史記》曰:帝嚳氏没,帝堯氏作,始封于唐。望都縣在南,今此城南對盧奴故城,自外無城以應之。考古知今事義全違,俗名望都故城則八十許里,距中山城則七十里,驗途推邑,宜為唐城。
『水經注』 권11, '滱水'

 

지도 1  정주에서 당현까지의 최단 도보거리, 29킬로미터. 지도 출처 : 구글지도


위 《水經注(수경주)》의 기사에 따르면 제요(帝堯)씨, 즉 요임금이 봉해진 '唐(당)'은 곧 앞서 논의한 당성(唐城)이 소재한 今 하북성 보정시의 당현(唐縣)이다. 또한 당성이 중산성(中山城) 즉 今 하북성 정주시 북쪽 70리 또는 75리에 있다고 했는데, 《水經注》가 집필되던 북위(北魏)시기로부터 가까운 한(漢)대의 척(尺, 0.231미터)을 기준으로 '1리 당 1,800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해당 기록상의 70리는 실제 최단 도보거리 수치인 29킬로미터에 정확히 일치하므로 《水經注》의 기록상 '당성(唐城)'의 위치는 今 보정시 당현의 중심부이었던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당제(唐帝). 《제계(帝系)》에 이르기를 제곡(帝嚳)의 네 왕비 중 하나인 진풍(陳豐)이 제요(帝堯)를 낳으니 당(唐)에 봉해주었다. 대략 고신씨(高辛氏)가 쇠퇴하자 천하가 그에게로 돌아온 듯하다. 목(木)은 화(火)를 낳으니 화덕(火德)이 되는 것이다. 천하는 이름 짓기를 도당씨(陶唐氏)라고 했다.  唐帝。帝系曰,帝嚳四妃,陳豐生帝堯,封於唐。蓋高辛氏衰,天下歸之。木生火,故為火德,天下號曰陶唐氏。
『漢書』 권21下, 律歴志 제1下

당씨(唐氏)는 기성(祁姓)으로부터 나왔다. 제요(帝堯)가 처음으로 당후(唐侯)에 봉해졌다. 그땅은 중산(中山) 당현(唐縣)이다.  唐氏出自祁姓。帝堯初封唐侯,其地中山唐縣是也。
『新唐書』 권74下, 宰相世系表

당현(唐縣), 기주(冀州)이다. 혹자는 본래 요(堯)임금이 제후에 봉해진 옛 땅인 연유로 '唐(당)'으로 이름지어 졌다 한다.  唐縣 冀州 或本帝堯封侯舊地 因名爲唐也
『保定郡志』 권1, 地里1 建置沿革

《水經注》에 언급된 것과 달리 《史記(사기)》에 「제요씨(帝堯氏)가 당(唐)에 봉해졌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그 대신 《漢書(한서)》를 비롯한 타 사서들에 같은 내용의 기록이 있는 만큼 요(堯)임금이 唐(당)에 봉해진 것은 사실로 여겨진다. 아울러 요임금이 봉해진 '당(唐)'의 위치는 위 《新唐書(신당서》 및 《保定郡志》의 기록들에서 今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으로 재차 확인된다.

무왕(武王)은 선대 성왕들을 추념하여 마침내 신농(神農)의 후손을 초(焦)에, 황제(黃帝)의 후손을 축(祝)에, 제요(帝堯)의 후손을 계(薊)에 [집해 : 《지리지》에 연국(燕國)에 계현(薊縣)이 있다 하였다.], 제순(帝舜)의 후손을 진(陳)에, 우(禹)의 후손을 기(杞)에 각각 포상하여 봉했다.  武王追思先聖王,乃襃封神農之後於焦,黃帝之後於祝,帝堯之後於薊 [集解地理志燕國有薊縣],帝舜之後於陳,大禹之後於杞。
『史記』 권4, 周本紀

그런데 《史記》 '周本紀(주본기)'에 「제요(帝堯)의 후손을 계(薊)에 봉했다.」 는 기록이 있어 필자의 주목을 끈다. '선대 성왕', 즉 요(堯)임금를 추념하여 그 후손이 책봉된 것이므로 그 봉지는 요임금과 관련있는 '당(唐)' 지역일 것이 마땅할 듯한데, 《史記》의 해당 기사에는 '계(薊)'로 적혀 있다. 앞서 살펴본 《資治通鑑》의 '당성(唐城)과 계성(薊城)'의 경우와 유사하게, '당(唐)'과 '계(薊)'를 연결해 줄 뭔가가 있을 듯하면서도 두 지명들간의 상관성은 여전히 모호하다.

 

 

연왕 노관은 지금의 보정시 당현에서 한나라에 반란하였다.

 

.... 진희(陳豨)의 부하였다가 항복한 사람이 옛날 진희가 반란을 일으킬 때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내통했다고 고했다. 이에 임금이 벽양후(辟陽侯)를 노관에게 사자로 보내 맞이해 오라고 하자 노관이 병을 핑계로 명을 받들지 않았다. 벽양후가 돌아와 노관이 반란에 가담한 단서가 있다고 자세히 증언했다. 2월, 번쾌(樊噲)와 주발(周勃)에게 군사를 주어 연왕 노관을 공격하도록 했다. 노관이 흉노로 달아나자 연(燕) 땅의 관리와 백성들, 그리고 반란에 가담한 자들을 모두 사면했다. 황자 건(建)을 연왕으로 삼았다.  .... 陳豨降將言豨反時,燕王盧綰使人之豨所,與陰謀。上使辟陽侯迎綰,綰稱病。辟陽侯歸,具言綰反有端矣。二月,使樊噲、周勃將兵擊燕王綰,赦燕吏民與反者。立皇子建為燕王。
『史記』 권8, 高祖本紀, 高祖12년 (서기전 196년 12월 음)

 

역장군(酈將軍)이 찾아가 심이기(審食其)에게 말했다. 「.... 진평(陳平)과 관영(灌嬰)은 10만의 군사를 거느리고 형양(滎陽)을 지켰으며, 번쾌(樊噲)와 주발(周勃)은 20만의 군사를 이끌고 연(燕)과 대(代)를 평정하였소. ....」  酈將軍往見審食其,曰:「.... 陳平、灌嬰將十萬守滎陽,樊噲、周勃將二十萬定燕、代 ....」
『史記』 권8, 高祖本紀, 高祖13년 (서기전 195년 4월 음)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을 일으키자 주발(周勃)은 상국(相國)으로 있다가 번쾌(樊噲)를 대신해 장수가 돼 계현(薊縣)[사고가 말하길, 즉 유주(幽州) 계현(薊縣)이라 하였다. 薊는 '계(計)'로 발음한다.]을 쳐서 떨어뜨렸고 노관의 대장 지(抵), 승상 언(偃), 군수 형(陘), 태위 약(弱)과 어사대부 시도혼도(施屠渾都)[사고가 말하길, 성이 시도(施屠)이고 이름이 혼도(渾都)라 하였다. '渾'의 음은 '혼(胡昆反)'이다.]를 사로잡았다.  燕王盧綰反,勃以相國代樊噲將,擊下薊 [師古曰即幽州薊縣也 音計],得綰大將抵、丞相偃、守陘、太尉弱、御史大夫施屠渾都 [師古曰姓施屠名渾都 音胡昆反]
『漢書』 권40, 張陳王周傳

광양국(廣陽國), 고제(髙帝)때에 연국(燕國)이다. 소제(昭帝) 원봉(元鳳) 원년에 광양군(廣陽郡)이 되었다. 선제(宣帝) 본시(本始) 원년(元年)에 고쳐 후국(侯國)으로 하였다. 왕망은 광유(廣有)라고 하였다. 가구수는 2,0740이고 인구수는 7,0658명이다. 현은 4개이다. 계현(薊縣), 옛 연국(燕國)이다. 소공(召公)을 봉한 곳이다. 왕망은 벌융(伐戎)이라 하였다.  ....  廣陽國, 髙帝燕國. 昭帝元鳳元年為廣陽郡. 宣帝本始元年更為國. 莽曰廣有. 戸二萬七百四十, 口七萬六百五十八. 縣四. 薊, 故燕國. 召公所封. 莽曰伐戎. ....
『漢書』 권28下, 地理志 幽州 廣陽國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란세력에 연루되어 있음을 알게 된 한고조(漢高祖)는 서기전 195년 먼저 번쾌(樊噲)로 하여금 노관의 연국(燕國)을 치게 하였으나, 번쾌가 곧 유여의(劉如意) 사건으로 모함을 받아 소환되자 주발(周勃)이 대신 출격하여 연국을 평정하게 된다. 위 《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및 《漢書》 '장진왕주전(張陳王周傳)'의 기사들에 그때의 상황이 그려져 있는데, 계현(薊縣)은 당시 한(漢)의 공격 무력이 집중되었을 연국의 도읍이다.

 

주발(周勃), 고조(高祖)가 백등지위(白登之圍)의 곤욕을 치렀다. 주발이 관영(灌嬰)과 더불어 20만 무리를 거느리고 당현(唐縣)에 진을 쳤다.  周勃 高祖困白登之圍 勃與灌嬰將二十萬衆屯於唐縣
『保定郡志』 권9, 職官3 厯代宦蹟, 明 弘治甲寅年(1494년) 간행

한편 《保定郡志》에는 주발(周勃)이 군사를 거느리고 출격하여 今 보정시 당현(唐縣)에 주둔한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기사에 보이듯이 해당 사건은 백등지위(白登之圍, 서기전 200년 발발) 이후의 일이므로, 그보다 5년 늦은 '연국(燕國) 평정'의 연대와 부합하고, 특히 《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의 경우와 똑같이, 당시 주발이 군사 20만을 거느린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주발이 20만 군사를 거느렸던 적은 《四庫全書(사고전서)》 전체를 통틀어, 그가 번쾌(樊噲)를 대신하여 연국(燕國)을 평정했던 때가 유일하다. 더욱이 흉노의 한(漢)에 대한 공략의 전형이 되는 백등지위와 함께 엮여 기재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保定郡志》의 기사는 '주발의 당현 주둔' 사건이 진희(陳豨)와 결탁하여 흉노와 내통한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반란과 연계되어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따라서 《保定郡志》의 '주발의 당현 주둔' 사건은 곧 《史記》 '고조본기'에 기록된 '주발의 연국 평정' 사건과 동일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주발(周勃)이 출격하여 진을 친 《保定郡志》의 '당현(唐縣)'은 곧 《漢書》 '장진왕주전(張陳王周傳)' 및 《史記》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에 주발이 연왕(燕王) 노관(盧綰)의 반란을 평정하기 위해 공격하였다고 전하는 연국(燕國)의 도읍 '계현(薊縣)'과 같은 곳임이 분명하다. 고로 고대 유주(幽州) 연국(燕國) 계현(薊縣)의 절대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이다.

관영성(灌嬰城), 당현(唐縣) 서쪽 40리 당하(唐河) 서쪽 기슭에 있다. 왕릉성(王陵城)과 마주하고 있다. 예로부터 관영(灌嬰)이 쌓았다고 전해진다.  灌嬰城 在唐縣西四十里 唐河西岸 與王陵城相對 舊傳灌嬰所築
『大清一統志』 권 11

《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는 번쾌(樊噲)와 주발(周勃)이 연국(燕國)을 공격할 당시 관영(灌嬰)은 진평(陳平)과 더불어 형양(滎陽)을 지키고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保定郡志》 및 《大清一統志(대청일통지)》의 기록들로 미루어 볼 때, 앞서 언급했듯이 번쾌가 소환되자 형양에 있던 관영 역시 계현으로 가서 주발의 연국 공략에 합세한 것으로 보인다.

왕릉성, 당현(唐縣) 서쪽 25리 당하(唐河) 동쪽 기슭에 있다. 대대로 이어 전하기를 한고조(漢髙祖)가 백등(白登)에서 곤욕을 치렀고, 왕릉(王陵)이 원병을 거느리고 이곳에 진을 쳤던 연유로 이름지어 졌다 한다.  王陵城 在唐縣西三十五里 唐河東岸 相傳漢髙祖困於白登 王陵将援兵屯此因名
『大清一統志』 권 11

왕릉(王陵)은 고조(高祖)를 섬겼다. 그의 어머니가 항우(項羽)에게 겁탈당하였는데, 높으신 분[한고조(漢髙祖)]을 잘 섬길 것을 당부하고 마침내 엎드려 배를 갈라 죽었다. 왕릉은 목숨이 다할 때까지 오로지 한(漢)을 섬기게 되었다. 후에 고조(髙祖)가 백등(白登)에서 곤욕을 치렀고, 왕릉이 군사를 이끌고 당현(唐縣)에 진을 쳤다.  王陵事高祖 其母爲項羽所刼 囑善事長者 遂伏魝而死 陵遂終身事漢 後高祖困於白登陵率兵屯於唐縣
『保定郡志』 권 9, '職官 3' '厯代宦蹟', 明 弘治甲寅年 (1494년) 간행

참고로, 《保定郡志》에 보이는 왕릉(王陵)은 주발(周勃), 관영(灌嬰) 등과 더불어 한(漢)의 개국공신들 중 한사람인데, 기록에 미루어 보아 그 역시 당현(唐縣)과 관련이 깊은 인물인 듯하다.

 

 

결론

 

《保定郡志》에 기록된, 한(漢)의 장수 주발(周勃)이 20만 군사를 거느리고 출격하여 지금의 보정시 당현(唐縣)에 주둔한 사건은 곧 연왕(燕王) 노관(盧綰)이 반역하자 한고조(漢髙祖)가 주발을 보내어 연국(燕國)의 수도 계현(薊縣)을 공격한 것과 동일한 사건이다. 따라서 고대 유주(幽州) 연국(燕國) 계현(薊縣)의 절대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이다.

  1. 본글에서의 '계현(薊縣)'은 진시황의 천하통일 이후 한(漢) 초기로부터 당(唐)대에 이르기까지의 유주(幽州) 계현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한다.
  2. ☞ 수나라 탁군 계현은 북경(베이징)이 아니다. 참조 바람
  3. 노노(盧奴) : 고대 중산국의 수도, 지금의 하북성 정주시(定州市).
  4. 中山城 : 고대 중산국의 도성 (즉 盧奴), 지금의 하북성 정주시(定州市) 소재.
  5. ☞ Chinese units of measurements 참조
  6. 상국(相國) : 중국에서, ‘재상(宰相)’을 이르던 말.
  7. 《史記》 '강후주발세가(絳侯周勃世家)'에 동일한 기록이 있다.
  8. 한고조(漢高祖) : 한 태조 고황제 유방(漢 太祖 高皇帝 劉邦, 서기전 247년~서기전 195년)을 가리킨다. 고조(高祖)는 전한(前漢)을 건국한 창업군주이자 초대 황제(재위: 서기전 202년~서기전 195년)이다.
  9. 백등지위(白登之圍) : 서기전 200년 백등산에서 흉노의 묵돌선우가 유인책을 펴, 유방의 군대를 포위하게 된 사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