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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나라 탁군(涿郡) 계현(薊縣)은 북경(베이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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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론

 

수양제(隋煬帝)의 재위 중에 감행된 1, 2차 고구려 원정에 동원된 수(隋)의 군대는 침공에 앞서 탁군(涿郡)에 집결하였다. 전쟁 전에 주요 병력을 전방배치하는 것은 상식이므로 탁군은 고구려와의 국경에 인접한 지역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고구려-수(隋) 전쟁 직전 고구려의 서변은 수나라 탁군을 기준으로 대략 그 이북 (또는 이동)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전쟁 개시 전 수(隋)군의 집결지였던 만큼 수(隋)군의 궁극적 공격 목표였을 평양성을 비롯한, 고구려-수(隋) 전쟁과 관련된 여러 고구려 지명들의 위치 비정에 수(隋)의 탁군이 중요한 기준점으로 작용한다. 이렇듯 탁군의 올바른 위치는 고구려 강역사 연구에 매우 유용할 수 있는 반면, 만일 사료의 그릇된 해석 등으로 인하여 탁군의 위치가 잘못 정해지게 되면 마치 첫 단추가 잘못 꿰인 격이 되어 고구려의 지명 위치들 역시 따라서 줄줄이 왜곡될 수 밖에 없다. 고구려-수(隋) 전쟁 당시 수나라의 탁군이 지금의 북경(北京, 베이징) 지역이라는 생각은 강단사학계는 물론이고 재야사학계에서도 대부분 불문율이 되어 있다. 그러나 이처럼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탁군의 위치가 실제로 사료에 근거하여, 신뢰성이 보장된 것일까? 좀 더 알아보도록 하자.

 

22년 (서기 611년) 봄 2월, (수나라의) 양제(煬帝)가 조서를 내려 고구려를 공격하게 하였다. 여름 4월, 양제의 행차가 탁군(涿郡)의 임삭궁(臨朔宮)에 도착하고 사방의 군사들이 모두 탁군에 모였다.  二十二年 春二月 煬帝下詔 討高句麗 夏四月 車蓋至涿郡之臨朔宮 四方兵皆集涿郡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2년

 

(대업) 8년 봄 정월 신사일, 대군(大軍)이 탁군(涿郡)에 집결하였다. 병부상서 단문진을 좌후위 대장군으로 삼았다. 임오일, 조서를 내려 말하였다. .... [중략].... 모두 113만 3천 800명이었는데 200만이라 일컬었으며, 군량을 나르는 자는 그 배가 되었다. 계미일에 제1군이 출발하여, 40일만에 마쳐, 군대 인솔이 이에 끝났으며,깃발이 천리에 뻗쳤다. 근고에 군대 출동의 성대함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  (大業)八年春正月辛巳 大軍集于涿郡 以兵部尚書段文振為左候衞大將軍 壬午 下詔曰 ....[중략].... 總一百一十三萬三千八百 號二百萬 其餽運者倍之 癸未 第一軍發 終四十日 引師乃盡 旌旗亘千里 近古出師之盛 未之有也

『隋書』 권4 帝紀 煬帝 下

 

24년 (서기 613년) 봄 정월, (수나라의) (양)제가 조서를 내려 전국 군사들을 탁군(涿郡)으로 소집하고,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驍果)[각주:1]로 삼아 요동의 옛 성을 수리하고 군량을 저장하게 하였다. .... [중략] .... 그리고 (고구려를) 다시 정벌할 것을 논의하였다.  二十四年 春正月 帝詔徵天下兵 集涿郡 募民爲驍果 修遼東古城 以貯軍糧 .... [중략] .... 乃復議伐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4년

 

 

수나라 탁군 계현, 당나라 유주 계현 및 임삭궁

 

계현(薊縣) : 유주대도독부를 다스리는 곳이다. 옛날 연국(燕國)의 도읍이었다. 한(漢)에서는 계현(薊縣)이었고 광양국(廣陽國)에 속하였다.  薊 州所治 古之燕國都 漢為薊縣 屬廣陽國 

『舊唐書』 지리지 幽州大都督府 薊縣

 

계현(薊縣) : 망(望) 천보(天寳)[각주:2] 원년에 (계현을) 나누어 광녕현(廣寧縣)[각주:3]을 설치하였다가 3년되는 해에 없앴다. 철(鐵)이 있다. 옛 수(隋)의 임삭궁(臨朔宫)이 있다.[각주:4]  薊 望 天寳元年 析置 廣寧縣 三載 省 有鐵 有故隋臨朔宫

『新唐書』 지리지 幽州范陽郡大都督府 薊縣

 

상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영양왕 22년 조항에 따르면 고구려를 침공하기 위해 수(隋)군이 집결한 탁군(涿郡)에는 임삭궁(臨朔宫)이라는 궁궐이 있었다. 임삭궁의 존재는 《新唐書(신당서)》 지리지에서도 또한 확인되는데, 기록에 따르면 임삭궁은 당(唐) 유주幽州(대도독부)의 계현(薊縣)에 있었다.

 

유주대도독부(幽州大都督府) : 수(隋)의 탁군(涿郡)이었다.  幽州大都督府 隋為涿郡

『舊唐書』 지리지 幽州大都督府

 

계현(薊縣) : 옛날에 연군(燕郡)을 설치했었는데, 개황(開皇)[각주:5] 초에 (연군을) 폐하고 대업(大業)[각주:6] 초에 탁군(涿郡)을 설치하였다.[각주:7]  薊 舊置燕郡 開皇初廢 大業初置涿郡

『隋書』 지리지 冀州 涿郡

 

위 《舊唐書(구당서)》 지리지 및 《隋書(수서)》 지리지의 기록들에 의하면 당(唐)의 유주幽州(대도독부)는 본래 수 양제(隋 煬帝) 재위 초기에 설치한 탁군(涿郡)이었고, 수(隋) 탁군의 속현으로서 계현(薊縣)이 있었다. 즉, 임삭궁(臨朔宫)이 위치했던 당(唐) 유주의 계현은 본래 수(隋) 탁군의 계현이었다. 정리하면, 고구려 침공 당시 수(隋)군은 계현을 중심으로 수(隋)의 탁군에 집결하였다. 따라서 계현의 위치를 찾으면 고구려-수(隋) 전쟁 직전 수(隋)군의 집결과 관련한 지리적 정황을 알 수 있게 된다.

 

 

수나라 탁군 계현은 보정시 당현에 있었다.

 

계현은 하북성 정주의 북쪽에 있었다.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가 왕망(王莽), 왕랑(王郞) 등의 적대 세력들에 맞서 대결 상태에 있던 신(新)나라 말엽 및 그 이후 후한 초기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들에 지금의 하북성 일대에서 활약하던 광무제의 이동 동선과 관련되어 '계(薊)' 또는 '계성(薊城)'이라는 지명이 자주 등장한다. 광무제 시기의 지명 '薊'는 한(漢)의 후국인 광양국(廣陽國)의 속현이자 치소였던 계현(薊縣)을 말하고, '薊城'은 계현에 있었던 광양국의 도성을 가리킨다.

 

계현(薊縣) : 유주대도독부를 다스리는 곳이다. 옛날 연국(燕國)의 도읍이었다. 한(漢)에서는 계현(薊縣)이었고 광양국(廣陽國)[각주:8]에 속하였다.  薊 州所治 古之燕國都 漢為薊縣 屬廣陽國 

『舊唐書』 지리지 幽州大都督府 薊縣

 

(경耿)엄(弇)이 대사마 유수(劉秀)가 노노(盧奴)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마침내 북쪽으로 말을 달려 올라가서 배알하였다. 유수는 그를 머물게 하고 장사로 임명하여, 함께 북쪽으로 계(薊)에 이르렀다. [호삼성 주 :  계(薊)는 옛 연(燕)의 도읍이다. 소제(昭帝)가 연(燕)을 광양국(廣陽國)으로 개명하였는데, 치소는 역시 계(薊)였다.]  弇聞大司馬秀在盧奴 乃馳北上謁 秀留署長史 與俱北至薊 [胡三省 註: 薊 故燕都 昭帝改燕為廣陽國 亦治薊]

『資治通鑑』 권39 更始[각주:9] 2년 2월

 

위 《資治通鑑(자치통감)》 기사에는 서기 25년, 젊은 시절의 경엄(耿弇)[각주:10]이 노노(盧奴)[각주:11]로 가서 관직에 임명받고 유수(劉秀, 즉 광무제)와 함께 계(薊)로 이동하였다는 내용이 실려있다. 여기서 계(薊), 즉 광양국(廣陽國) 계현(薊縣)의 위치에 대한 중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즉 노노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계(薊)에 이르렀다고 하였으니 계현은 하북성 정주(定州)시의 북쪽 방향에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참고로, 호삼성 역시 계현에 대하여 옛 연(燕)국[각주:12]의 도읍이자 광양국의 치소였다고 주석하였다.

 

(경시) 2년 정월 왕랑(王郎)의 세력이 새로이 왕성해지자 광무는 북쪽으로 계(薊)에 순행하였다. [이현 주 : 탁군(涿郡)에 속한 현의 이름이었다. 지금은 유주(幽州)의 현이다.]  (更始)二年 正月 光武以王郎新盛 乃北徇薊 [李賢 註 : 縣名屬涿郡 今幽州縣也]

『後漢書』 권1 上 更始 2년 2월

 

유주대도독부(幽州大都督府) : 수나라에서는 탁군(涿郡)이었다. 무덕(武徳) 원년에 유주총관부(幽州總管府)로 고쳤다. .... 7년에 대도독부(大都督府)로 고쳤다.  幽州大都督府 隋為涿郡 武徳元年 改為幽州總管府 .... 七年 改為大都督府

『舊唐書』 지리지 幽州大都督府

 

《舊唐書(구당서)》 지리지에 당(唐) 유주(幽州)의 계현(薊縣) 이 곧 옛 연(燕)국의 도읍이었고, 또한 광양국(廣陽國)의 속현이었다고 하였으니 경엄(耿弇)이 광무제(光武帝)와 함께 도달한 광양국의 치소 계현은 당(唐) 유주幽州(대도독부)의 계현(薊縣)과 동일한 위치임을 알 수 있다. 같은 시점에 광무제가 순행하였던 광양국의 계현이 곧 당(唐)대의 (본래 탁군涿郡이었던) 유주에 속한 계현 이라는 사실은 위 '《後漢書》 권1 上' 문구의 '계(薊)'에 대한 당(唐) 장회태자 이현(李賢)의 주석에 의하여 또한 재확인 된다. 그런데 이미 앞서 당(唐) 유주 계현은 곧 수(隋) 탁군의 계현이었음이 밝혀졌으니 서기 25년 경엄과 광무제가 노노(盧奴)에서 북쪽으로 이동하여 도달한 곳은 수(隋) 탁군의 계현과 동일한 위치였다. 정리하면, 양제(煬帝) 시절 수(隋) 탁군의 계현은 지금의 하북성 정주(定州)시로부터 북쪽 방향에 있었다. 따라서, 지금의 하북성 정주(定州)시 정북 25킬로미터 거리의 당현(唐縣) 일대가 수(隋) 탁군 계현의 비정 위치로서 매우 유력하다. (지도 1 참조) 

 

지도 1  계현의 비정 위치도, 본 지도 출처: openstreetmap.org

 

태조(太祖)가 정주(定州)의 포로들이 살도록 하였다. 한개의 현을 다스린다. 광녕현(廣寧縣) : 한(漢)의 유성현인데 요서군에 속했다. 동북쪽으로는 해와 거란과 맞붙어 있다. 만세통천 원년에 거란 이만영의 손으로 들어갔다. 신룡 원년에 유주(幽州)의 경계로 이주하였다. 개원 4년에 다시 옛 땅으로 돌아왔다. 요(遼)에서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가구수는 3,000이다.  太祖以居定州俘户 統縣一 廣寧縣 漢柳城縣 屬遼西郡 東北與 奚 契丹 接境 萬歳通天元年入契丹李萬營 神龍元年移幽州界 開元四年復舊地 遼改今名 户三千

『遼史』 地理志 營州 隣海軍

 

오대(五代)시대인 양(梁)나라 말에 거란이 정주(定州)의 포로들로써 옛 유성현의 지경에 광녕현(廣寧縣)을 설치하였다.  五代梁末 契丹以定州俘戶置廣寧縣於故柳城縣

『讀史方輿紀要』 권17 北直8 永平府

 

한편, 계현(薊縣)의 비정 위치로서의 현 당현(唐縣)과 그 남쪽 정주(定州)시의 상호간 인접성에 관련하여, 앞서 소개하였던 《新唐書》 지리지에 "계현을 나누어 광녕현(廣寧縣)을 설치하였다."고 한 기록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 《遼史(요사)》 지리지 및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의 기록들에 따르면 요(遼) 태조는 정주(定州)의 주민들을 포로로 잡아서 타지에 새로 설치한 현(縣)으로 옮긴 뒤 그곳에 정착하여 살도록 하였는데, 특히 개설된 현(縣)의 명칭, 즉 '廣寧縣'에서 계현과의 연관성에 대한, 가능성 있는 단서를 얻을 수 있다.

 

안희현은 본래 한나라 영지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定州) 안희현의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평주 동북쪽 60리에 있다. 가구수는 5,000이다.  安喜縣 本漢令支縣地, 乆廢 太祖以定州安喜縣俘户置 在平州東北六十里 户五千

『遼史』 地理志 平州 遼興軍

 

망도현은 본래 한나라 해양현인데 폐한지 오래되었다. 태조가 정주(定州) 망도현 포로들로 설치하였다. 해양산이 있다. 현은 주의 남쪽 30리에 있다. 가구수는 3,000이다.  望都縣 本漢海陽縣 乆廢 太祖以定州望都縣俘户置 有海陽山 縣在州南三十里 户三千

『遼史』 地理志 平州 遼興軍

 

위 《遼史》 지리지의 기록들대로 요나라 평주 요흥군(遼興軍)의 안희현과 망도현은 당시 정주(定州)에 속한 안희현과 망도현에서 각각 잡아온 포로들을 거주민으로 삼아 타지에 개설한 현(縣)들이다. 기록에 보이다시피 포로들의 본래 연고지를 개설된 현(縣)의 이름으로 삼았다. 광녕현(廣寧縣)의 경우도 다르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즉 '광녕(廣寧)'은 본디 정주에 속했던 지명이었고, 그곳에서 잡아온 포로들로써 요나라 영주 린해군(隣海軍)의 '광녕현'이 만들어졌을 개연성이 대단히 높다. 여기까지 필자의 추론이 옳다면 정주의 '廣寧'은 곧 《新唐書》 지리지에 계현(薊縣)을 나누어 설치한 것으로 기록된 광녕현과 관련있는 지명임이 틀림없을 것으로 본다. 당(唐)대에 잠깐 두었다가 없앤 때문인지 광녕현에 관한, 유용한 추가 기록을 쉽게 찾을 수는 없지만, 요(遼) 태조 시기에 지명이동된 광녕현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정주의 '廣寧'이 《新唐書》 지리지의 유주 계현과 연결된다면, 이는 계현의 '당현(唐縣) 위치비정'에 대한 교차검증이 될 수 있다.

 

 

계현은 하북성 진주의 북쪽에 있었다.

 

비동(邳彤)[각주:13], 자는 위군이고 신도(信都)[각주:14] 사람이다. 아버지 길(吉)은 요서태수였다. (비)동은 본래 왕망(王莽)의 화성和成(군)[각주:15] 졸정(卒正)[각주:16]이었다. 세조(世祖)가 (황)하 이북으로 순행하여 하곡양(下曲陽)[각주:17]에 이르니 (비)동이 일어나 (화성)성이 투항하였다. (비동을) 다시 태수로 삼았다. (하곡양에) 며칠을 머문 뒤 세조는 북으로 계(薊)에 도달하였다.  邳彤字偉君 信都人也 父吉 為遼西太守 彤初為王莽和成卒正 世祖徇河北 至下曲陽 彤舉城降 復以為太守 留止數日 世祖北至薊

『後漢書』 任李萬邳劉耿列傳

 

위 《後漢書(후한서)》 임이만비유경열전(任李萬邳劉耿列傳)의 기사는 서기 23년 광무제(光武帝, 즉 세조)가 하곡양(下曲陽)에 순행할 당시, 왕망(王莽)의 신(新)나라 치하에 있던 화성군의 졸정 비동(邳彤)이 투항하자 광무제는 그를 신나라의 관직 졸정과 동격인 태수로 삼고 며칠을 하곡양에서 머물다가 북쪽으로 다시 이동하여 계(薊), 즉 광양국(廣陽國)의 계현(薊縣)에 도달하였다는 내용이다. 하곡양은 지금의 하북성 진주(晉州)시이므로, 앞서 이미 살펴본대로 지금의 정주(定州)시 북쪽에 계현이 위치해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광양국 계현의 위치는 진주(晉州)시 및 정주(定州)시 정북 방향의 당현(唐縣)으로 재차 비정되고, 따라서 같은 위치의 수(隋) 탁군(涿郡) 계현 역시 당현으로 비정된다. (지도 1 참조)

 

통설상 한(漢) 광양국(廣陽國) (즉 후한後漢 광양군廣陽郡) 계현(薊縣)의 위치는 지금의 북경(北京, 베이징)시 서성구(西城區)에 비정되어 있다.[각주:18] 북경시는 앞서 살펴본 노노(盧奴, 지금의 정주定州시) 및 하곡양(下曲陽, 지금의 진주晉州시)을 기준으로 그 북쪽이 아닌 북동쪽 방향이 분명하여 사서의 기록에 배치된다. (지도 2 참조) 이에 대하여 혹자는 넓은 의미에서 '북동쪽'을 '북쪽'으로 기록했을 수 있다고 반론할 수도 있겠다. 이상 살펴본 사료들만을 통하여, 이미 통설로 굳어진 계현의 '북경 비정위치'를 부정하기에는 다소 애매모호한 점이 없지 않은 게 사실인데, 그렇다면 아래의 근거 사료들을 추가로 검토해보자.

 

 

계현의 동남쪽에 있었던 요양현의 무루정

 

왕랑(王郞)이 일어나자 광무제(光武帝)는 계(薊)로부터 동남쪽으로 질주하였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풀밭에서 휴식하며 달려 요양현(饒陽縣)의 무루정(無蔞亭)에 이르렀다. 그때의 날씨는 매우 추웠고, 일행은 모두 굶주리고 지쳐 있었다. 풍이(異)가 콩죽을 바쳤다. 그 다음날 아침, 광무제는 여러 장수들에게 말하였다. 「어제 공손(公孫)[각주:19]이 바친 콩죽 덕분에 추위와 굶주림이 모두 풀렸다.」  及王郎起 光武自薊東南馳 晨夜草舍 至饒陽無蔞亭 時天寒烈 眾皆飢疲 異上豆粥 明旦 光武謂諸將曰 「昨得公孫豆粥 飢寒俱解」

『後漢書』 馮異列傳

 

무루정(蕪蔞亭) : (요양饒陽)현 동북쪽 45리에 있다. 후한(後漢)의 광무(光武)가 계(薊)로부터 동남쪽으로 달려 어둡고 깊은 밤에 요양의 무루정에 도달하였다.  蕪蔞亭 在縣東北四十五里 後漢光武自薊東南馳 昏夜至饒陽蕪蔞亭

『太平寰宇記』 권63 深州 饒陽縣

 

본래 조(趙)의 요읍(饒邑)이었다. 도양왕 6년에 장안군을 요(饒)에 봉하였다. 요양(饒陽)의 옛 이름은 요(饒)이다. 옛 성이 지금 현(縣)의 동북쪽에 있다.  本趙饒邑 悼襄王六年 封長安君以饒 饒陽 故名饒 故城在今縣東北

『중국고금지명대사전』 '饒陽縣'

 

위 《後漢書》 풍이열전(馮異列傳)의 기사에는 서기 25년, 왕랑(王郞)군에 패한 광무제(光武帝)군이 계(薊), 즉 광양국(廣陽國) 계현(薊縣)로부터 동남쪽으로 어렵게 퇴각하여 겨우 요양(饒陽)현의 무루정(蕪蔞亭)에 도달하였을 때의 일화가 소개되어 있다.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에 따르면 무루정은 당시의 요양현으로부터 동북쪽 45리 거리에 있었다. 《太平寰宇記》가 집필되던 북송(北宋)대의 척(尺, 0.3080미터)을 기준으로 통용되던 1리(里)는 1,500척 (462.00미터) 또는 1,800척 (554.40미터)인데, 그 중 '1리 당 1,500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요양현에서 무루정까지의 거리는 20.79킬로미터에 해당된다. 그런데 지금의 요양현 중심부로부터 동북쪽으로 23킬로미터 떨어진 숙녕현(肅寧縣) 동남부에, 공교롭게도 위 일화의 주인공 풍이(馮異)를 연상케 하는 풍가장촌(馮家庄村)이라는 지명이 보인다. 고대의 요양현이 지금의 위치에서 약간 (2~3킬로미터 추정) 동북쪽으로 치우쳐 있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거리와 방향이 모두 《太平寰宇記》의 기록에 일치한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지만, 본 글의 논거에 필요한 용도로서 무난하다고 판단되므로 필자는 광무제가 도달한 무루정의 위치를 지금의 하북성 숙녕현의 풍가장촌에 비정한다. (지도 1 참조)

 

계현(薊縣)의 위치와 관련하여 위 《後漢書》 풍이열전(馮異列傳) 기사의 핵심적인 내용은 광무제(光武帝)가 계현으로부터 동남 방향으로 이동하여 무루정(蕪蔞亭)에 도달하였다는 사실이다. 즉, 계현은 무루정으로부터 서북 방향에 위치하였다. 그런데, 앞서 경엄(耿弇)과 비동(邳彤)에 관한 기록들을 통하여 계현의 유력한 위치로 언급된 당현(唐縣)이 무루정(지금의 숙녕현肅寧縣 풍가장촌馮家庄村)의 서북쪽 84.5킬로미터 (직선 거리) 지점에 있다. 풍이열전에 광무제 일행이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이동했다고 하였다. 그들이 대략 18시간 (오전 5시 ~ 오후 11시) 동안 움직였다고 가정하면 시간당 (직선 거리) 4.69킬로미터를 이동한 것인데, 체력 소모가 심하였겠지만, 아마도 적군에게 쫓기는 다급한 상황에 처했던 것으로 보이는 한창 나이의 장정들로서는 충분히 가능한 노정으로 여겨진다. 이는 무루정에 도착했을 때에 일행 모두가 매우 지친 상태였다고 기록된 사실에도 적절히 부합한다. 이상 무루정을 기준으로 하여 가늠되는 광양국(廣陽國) 계현의 위치는 앞서 노노(盧奴) 및 하곡양(下曲陽)과 관련하여 지금의 당현(唐縣)으로 유력시 된 현(縣)의 위치 비정에 대한 교차검증을 제공한다. (지도 1 참조)

 

한편 숙녕현(肅寧縣) 풍가장촌(馮家庄村) 일대로 신뢰성 있게 비정되는 무루정(蕪蔞亭)은 통설상 광양국(廣陽國) 계현(薊縣)의 위치인 지금의 북경(베이징)시로부터 서남 방향으로 약 171킬로미터 (직선) 거리에 있다. (지도 2 참조) 이는 《後漢書》 풍이열전(馮異列傳)에 기록된 동남 방향에 명백히 배치되고, 또한 하루만에 이동하기에는 너무 먼 거리다. 따라서 《後漢書》 풍이열전의 기록이 틀리지 않다면 광양국 계현은 지금의 북경시가 될 수 없다. 고로 동일한 위치의 수(隋) 탁군(涿郡) 계현 역시 지금의 북경시가 될 수 없다.

 

 

모용준이 점령한 계현

 

이듬해(永和 6년, 350년), (모용)준이 삼군(三軍)을 이끌고 남벌(南伐)하니, 노룡(盧龍)으로부터 나와 무종(無終)에 도착했다. 석계룡(石季龍)의 유주자사(幽州刺史) 왕오(王午)가 성을 버리고 달아나며 그의 장수 왕타(王他)를 남겨두어 계(薊)를 지키게 하였다. (모용)준이 그 성을 공격해 함락하고 (왕)타를 베고는 이를 도읍으로 삼았다.  明年 儁率三軍南伐 出自盧龍 次于無終 石季龍幽州刺史王午棄城走 留其將王他守薊 儁攻陷其城 斬他 因而都之

『晉書』 권110 載記 제10 慕容儁

 

2월에 연왕(燕王) (모용慕容)준(雋)이 모용패(慕容霸)로 하여금 군사 2만 명을 거느리고 동쪽길로부터 도하(徒河)로 나가게 하고, 모여우(慕輿于)는 서쪽길로부터 열옹새(蠮螉塞)로 나가게 하였다. (모용)준은 중간길로부터 노룡새(盧龍塞)로 나와서 조(趙)를 정벌하였다.  二月 燕王雋使慕容霸將兵二萬 自東道出徒河 慕輿于自西道出蠮螉塞 雋自中道出盧龍塞 以伐趙

....

3월에 연나라 군대가 무종(無終)에 도착하니, 왕오(王午)가 그의 장수 왕타(王佗)를 남겨두어 수천 명을 가지고 계(薊)를 지키게 하고, 등항(鄧恒)과 더불어 달아나서 노구(魯口)를 지켰다.  (永和 6년, 350) 三月 燕兵至無終 王午留其將王佗以數千人守薊 與鄧恒走保魯口

『資治通鑑』 권 98 晉紀 20 永和 6년 (350년)

 

지금의 하북 요양(饒陽)현 남쪽에 있다. 진(晉) 영화(永和) 6년에 모용준(慕容雋)이 후조(後趙)를 공격하여 무종(無終)에 도달하자 (후)조 장군 왕오(王午)와 등항(鄧恆)이 계성(薊城)을 버리고 달아나서 노구(魯口)를 지켰다.  在今河北饒陽縣南 晉 永和六年 慕容雋擊後趙 至無終 趙將王午鄧恆𣓪(棄)薊城走保魯口

『중국고금지명대사전』 '魯口城'

 

모용준은 후조를 정벌하기 위해 준비하여 350년에 출정하였다. 계(薊 : 베이징)를 점령하여 수도를 그곳으로 옮기고 기주(冀州 : 허베이 성 중남부)를 공격하였다. 

『위키백과』 '모용준'

 

서기 350년 전연(前燕)의 모용준(慕容雋)은 후조(後趙)의 관할하에 있던 유주(幽州) 지역을 빼앗고 계성(薊城)에 도읍하였다. 당시 모용준은 계성을 점령하기 전 먼저 노룡새(盧龍塞)를 통하여 무종(無終)에 도달하였는데, 이에 위협를 느낀 유주자사 왕오(王午)가 계성을 포기하여 버리고 노구(魯口)로 달아났다. 노구는 지금의 하북성 요양(饒陽)현 남쪽에 있었던 지명이다. 

 

학계의 통설에 따라 노룡새(盧龍塞)는 지금의 당산(唐山)시 북부의 희봉구(喜峰口) 일대, 무종(無終)은 지금의 천진(天津)시 북부 계주(薊州)구 일대, 그리고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계현(薊縣)은 지금의 북경(베이징)시 서성구(西城區) 일대로 각각 비정되어 있다. 즉, 당시 모용준(慕容雋)의 공격로가 [당산시 희봉구] → [천진시 계주구]  [북경시 서성구]의 동선이었던 것으로 설명되고 있는 것이다. (지도 2 참조)

 

지도 2  통설에 따른 계현의 비정 위치도, 본 지도 출처: openstreetmap.org계현(薊縣)을 기준으로, 무루정(蕪蔞亭)의 위치가 사서의 기록에 분명히 배치되는 서남 방향이다.

 

일단 상기 《晉書》 '載記'의 기록에는 모용준이 남벌(南伐)하여 계(薊)를 공격하였다고 했는데, 통설에 따른 공격로는 '남벌'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찮은 ('西'에 가까운) 서남(西南) 방향이다. (지도1 및 지도2에 나타난 모용준의 공격루트 비교).

 

또한, 천진(天津)시 계주(薊州)구는 북경(北京)시 서성구(西城區)로부터 (직선거리로) 100여 킬로미터의 먼 거리에 있다. 통설에 따르자면, 후조(後趙)의 유주자사 왕오(王午)는 100킬로미터 밖에 있는 적이 두려워서 계성(薊城)을 냉큼 포기하고 남쪽의 노구(魯口)까지 (직선거리로) 무려 200여 킬로미터를 줄행랑친 셈이다. (지도 2 참조) 필요 이상으로 성급하게 계성이 포기되어 버려진 듯한, 뭔가 부자연스러운 정황 설명이 아닐 수 없다. 혹시 왕오가 심각한 겁장이였던 것일까?

 

필자는 이전 글의 문헌 고증을 통하여 고대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의 절대위치를 지금의 보정시 완현(完縣, 즉 순평順平현)으로 확인하고, 또한 노룡새(盧龍塞)를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래원(淶源)현의 백석구(白石口)로 비정한 바 있다. (새로 밝혀지는 우북평군 무종현의 절대위치 노룡새, 용머리뼈 장성의 실체를 찾았다 참조) 앞서 살펴본대로 고대 계현(薊縣)의 실제 위치로서 하북성 당현(唐縣)이 매우 유력한데, 더욱이 당현은 북동쪽으로 이웃한 완현(完縣, 즉 무종현)으로부터 불과 17킬로미터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계현을 지금의 당현 위치에 놓고 보면 왕오(王午)가 계성(薊城)를 포기하고 노구(魯口)로 도주한 것은 그가 별난 겁장이여서가 아니라, 계성에 매우 인접한 곳(즉 무종현)까지 쳐들어온 모용준(慕容雋)의 침략군에 그가 실제로 심각한 위협을 느꼈기 때문이었을 개연성이 매우 높다. (지도 1 참조)

 

계현(薊縣) : 유주대도독부를 다스리는 곳이다. 옛날 연국(燕國)의 도읍이었다. 한국(漢國)에서는 계현(薊縣)이었고 광양국(廣陽國)에 속하였다. 진(晉)에서 유주(幽州)를 설치하였는데, 모용준(慕容雋)이 연국(燕國)을 사칭하고 대개 여기서 다스렸다. 진(晉)으로부터 수(隋)에 이르기까지 유주자사(幽州刺史)는 대개 계현(薊)에서 다스렸다.  薊 州所治 古之燕國都 漢為薊縣 屬廣陽國 晉置幽州 慕容雋稱燕 皆治於此 自晉至隋 幽州刺史皆以薊為治所

『舊唐書』 지리지 幽州大都督府 薊縣

 

위 《舊唐書》 지리지의 기록에 의하면 모용준(慕容雋)이 천도하여 정한 전연(前燕)의 도읍 계현(薊縣)은 한(漢) 광양국(廣陽國)의 계현(薊縣)이었고, 앞서 살펴본대로 광양국의 계현(즉 당唐 유주幽州 계현)은 수(隋) 탁군(涿郡)의 계현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모용준의 계현 공략과 관련하여 비정되는 수(隋) 탁군 계현의 위치 역시 지금의 북경(北京)시가 아닌 하북성 당현(唐縣) 일대이다.

 

 

결어

 

상기 여러 사료에 근거하여 논증하였듯이 수(隋) 탁군(涿郡) 계현(薊縣)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 일대로 신뢰성 있게 비정된다. 현재 강단, 재야를 막론하고, 슬그머니 지금의 북경(베이징)시에 비정되어 고정관념화 된 고대 계현의 위치는 실제 사료적 근거에 어긋나는 선입견에 불과한 것이다.[각주:20] 고구려-수(隋) 전쟁 당시 수(隋)군은 수(隋) 탁군 계현의 위치로 통상 알려진 북경(베이징)이 아닌, 그 보다 훨씬 더 서남쪽의 보정시 당현(唐縣)에 집결하여 바로 위쪽의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에 위치하였던 고구려 평양성을 목표로 진격하였던 것이다. (☞ 살수대첩 살수(薩水)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의 폭하(瀑河)이다. 참조)

 

 

 

  1. 효과(驍果) : 군직명 [본문으로]
  2. 천보(天寳) : 당 현종(唐 玄宗) 때의 연호, 사용 기간 742년 1월 1일 ~ 756년 7월 11일 (음력) [본문으로]
  3. 광녕현(廣寧縣)에 대하여는 아래의 요(遼) 태조 시기의 지명 이동과 관련한 논거를 참조 바람. [본문으로]
  4. 계현(薊縣)에 대하여《新唐書》지리지 에는《舊唐書》지리지 와 사뭇 다른 내용이 기재되어 있으나, 두 사서 모두 천보(天寶) 원년에 계현을 나누어 광평현(廣平縣)을 설치하였다고 한 점으로 미루어 양 사서의 '계현'은 동일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본문으로]
  5. 개황(開皇) : 수 문제(隋 文帝) 때의 연호, 사용 기간 581년 2월 14일 ~ 600년 12월 29일 (음력) [본문으로]
  6. 大業(대업) : 수 양제(隋 煬帝) 때의 연호, 사용 기간 605년 1월 1일 ~ 618년 3월 11일 (음력) [본문으로]
  7. 즉, 북위(北魏) 시기 연군(燕郡)의 계현(薊縣)이 수(隋)에 이르러 탁군(涿郡)의 계현이 되었다는 뜻이다. 참고로, 대업(大業) 초에 양제가 새로 설치한 수(隋)의 탁군(涿郡)은 한(漢)대의 탁군과는 별개의 것으로서 그 영역에 차이가 있었다. [본문으로]
  8. 《後漢書(후한서)》군국지에 따르면 한(前漢) 소제(昭帝, 제위 서기전 87년 ~ 서기전 74년) 시기에 연국(燕國)이 광양군(廣陽郡)으로 격하된 뒤 계속 '군(郡)'으로 남았던 것 처럼 보이나,《前漢書(전한서)》지리지에는 선제(宣帝) 본시(本始) 원년(서기전 73년)에 다시 광양국(廣陽國)으로 승격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본문으로]
  9. 更始(경시) : 현한 경시제(玄漢 更始帝) 때의 연호, 사용 기간 23년 3월 1일 ~ 25년 9월 6일 (음력) [본문으로]
  10. 경엄(耿弇) : 후한의 개국 공신이다. '경감'으로 부르기도 한다. [본문으로]
  11. 노노(盧奴) : 지금의 하북성 정주(定州)시 [본문으로]
  12. 연(燕)국 : 한(漢)의 후국 [본문으로]
  13. 비동(邳彤, 서기전 1세기 ~ 30년) : 후한의 개국공신 [본문으로]
  14. 信都(신도) : 지금의 하북성 衡水(형수)시 [본문으로]
  15. 화성군(和成郡) : 지금의 하북성 진주(晋州)시 서부 [본문으로]
  16. 졸정(卒正) : 왕망의 신(新)나라 관직명으로 '태수'와 동급이다. [본문으로]
  17. 하곡양(下曲陽) : 지금의 하북성 진주(晋州)시 [본문으로]
  18. https://zh.wikipedia.org/zh-hant/廣陽郡 참조
  19. 공손(公孫) : 풍이(馮異)의 字 [본문으로]
  20. 한(漢)대 이후 수(隋), 당(唐)대에 이르기 까지 지금의 북경(北京)시에 비정된 계현(薊縣)의 위치는 모두 틀렸다. ☞ 고대 유주 연국 계현 의 절대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당현이다. 참조 바람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