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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살수(薩水)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의 폭하(瀑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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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성에서 가장 가까운 산은 30리 거리에 있었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고조선의 왕검성, 고구려의 평양성(平壤城) 및 패수(浿水)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과 서수구(徐水區) 일대에 위치해 있었던 사실을 여러 근거를 들어 밝히고, 이렇듯 비로소 드러난 주요 지명들의 정확한 절대위치를 새로운 좌표의 기준으로 하여, 잊혀졌던 또 다른 고대 지명들의 위치 추적이 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견해를 피력한 바 있다. (☞ https://earthlin9.tistory.com/15 참조) 이와 관련하여 주의를 요하는 지명들 가운데 하나가 살수대첩의 현장인 살수(薩水)인데, 정흥현의 고성(固城)으로 밝혀진 평양성의 절대위치를 이용하면 어렵지 않게 살수를 찾을 수 있다.

 

(우문)술이 하루에 일곱 번 싸워 모두 이기니, 이미 여러 번 승리한 것을 믿고 또 여러 사람의 의논에 쫓기어, 드디어 동쪽으로 나아가 살수(薩水)를 건너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서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述一日之中七戰皆捷 旣恃驟勝 又逼群議 於是遂進東濟薩水 去平壤城三十里 因山爲營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서기 612)
** 거의 같은 내용의 기사가 《수서(隋書)》 권 61에 있다.

 

위 《삼국사기》의 기사에 따르면 수(隋)군이 평양성을 향하여 동쪽으로 진군하여 살수를 건넜으므로 수(隋)군이 건넌 지점의 살수가 대략 북↓남 (또는 남↑북) 방향으로 흐르던 하천인 것과, 살수의 동쪽 방면에 평양성이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아울러 기사는 살수 동편의, 평양성으로부터 30리 거리에 위치한 산(山) 부근에 수(隋)군이 집결하여 진을 쳤다고 전하여, 살수와 연관하여 당시 수(隋)군의 행적 및 평양성과의 지리적 대치 정황 등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하다.

 

[클릭 확대] 지도 1  살수대첩의 지리적 정황 (참고로, 덕산德山이라는 지명이 수군의 퇴각로 인근에 보인다.) 원 지도 출처: openstreetmap.org

 

필자가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주장하는 정흥현(定興縣)의 固城은 사방 주변에 산(山)이라고는 전혀없는, 그야말로 광활한 평야 한가운데에 있다. 서쪽 방면으로 한참을 가야만 산지(山地)가 점차 나타나기 시작하는데, 固城에서 가장 가까운 거리의 산은 固城 서북쪽 16.5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해발 170미터 높이의 황산(黃山)이다. 황산은 보정시 역현(易縣) 관내의 황산촌(黃山村) 마을 서북편에 있다. (지도1 참조)

 

《수서(隋書)》가 집필되던 당(唐)대의 대척(大尺, 0.2955미터)을 기준으로 통용되던 1리(里)는 1,500 대척 (443.25미터) 또는 1,800 대척 (531.90미터)이다. 그 중 '1리 당 1,800 대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固城에서 황산까지의 거리는 31.02리에 해당된다. 기록에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고 했으므로 황산(黃山)의 동남편 500여 미터 (즉 1리) 앞까지 수(隋)군이 주둔해 있었다고 가정하면 수(隋)군의 진영지로부터 固城까지의 거리는 정확히 30리가 된다. 이는 사서의 기록에 (특히, 固城을 중심으로 반경 31리 안쪽은 산(山)을 전혀 볼 수 없는 평지라는 점을 감안하면) 희한하게 일치하는 수치이다.

**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units_of_measurement 참조

 

또한 황산(黃山)은 그 일대를 북↓남 방향으로 흐르는 폭하(瀑河, 즉 남역수南易水)로부터 동쪽으로 불과 2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살수를 동쪽으로 건너 산(山)에 의지하였다."는 사실과 함께, 정황상 살수로부터 멀지 않은 곳에 수(隋)군이 주둔하였을 것이 분명해 보이는 기록의 내용에 역시 부합한다.

 

수(隋)군은 아마도 지금의 서수구(徐水區) 해촌(解村) 부근의 한 지점에서 폭하(瀑河)를 동쪽으로 건넌 뒤, 이어 북쪽으로 이동하여 황산(黃山) 바로 동남쪽 기슭의 황산촌(黃山村) 일대에 도달한 듯 한데, 그곳에서 황산을 등 뒤로 한 진지를 구축한 것으로 여겨진다. 황산을 진지로 택한 이유는 황산과 그 전방의 먼거리에 아스라이 보였을 평양성 사이에는 적의 공격시 고스란히 노출될 수 밖에 없는 들판이 펼쳐져 있을 뿐 그 어디에도 마땅히 숨을 곳이 없었던 점일 것이다. 평양성이 위치 했던 지금의 정흥현(定興縣) 固城에서 30리 거리에 산(山)을 의지하고 군대가 진을 칠만한 곳은 역현(易縣)의 황산촌 말고는 없다. 또한, 황산의 서편을 지나 흐르는 하천은 폭하가 유일하므로 살수는 폭하일 수 밖에 없다.

 

 

 

평양성과 隨山屈曲(수산굴곡)에 대하여

 

 

그 나라는 동서 2,000리, 남북 1,000여리이다. 평양성(平壤城)에 도읍하였는데, 장안성(長安城)이라고도 한다. 동서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여 있다.  其國東西二千里 南北千餘里 都於平壤城 亦曰長安城 東北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
『隋書』권 81 '東夷列傳' '高句麗'

 

앞서 언급한대로 정흥현의 固城은 인근에 산을 전혀 찾아볼수 없는 평야 한가운데 있다. 그런데 위 《수서(隋書)》 '동이열전(東夷列傳)'의 기사에 평양성이 산을 따라 굴곡진 곳에 있다 하였으니 이는 얼핏 필자가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로 주장하는 정흥현 固城 주변의 지리적 여건과 부합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다.

 

28년(서기 586), 장안성(長安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二十八年 移都長安城
삼국사기』권 19 '고구려본기' '평원왕'


이와 관련하여, 상기 《隋書》의 기사에 보이는 '장안성(長安城)'은 서기 586년 평양성에서 천도한 장안성을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지만, 기사의 「[평양성을] 장안성이라고도 한다. (亦曰長安城)」는 문구가 다소간의 혼동을 일으킨다. 즉, 같은 기사 뒷 부분의 「동서 6리이며 산을 따라 굴곡이 지고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여 있다. (東北六里 隨山屈曲 南臨浿水)」는 문구가 전하는 바가 천도 이전의 평양성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천도 이후의 장안성에 관한 것인지, 그도 아니면 평양성과 장안성에 각기 관계되는 사실들이 뒤섞여 해당 문구에 전하는 것인지가 애매모호하다는 점인데, 이로 인해 야기되는 문제의 해답을 구하기 위하여 아래 《주서(周書)》의 기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 지역은 동쪽으로 신라에 이르고 서쪽으로 요수(遼水)를 건너 2,000리요, 남쪽은 백제와 인접하고 북쪽은 말갈과 이웃하니 1,000여리이다. 평양성(平壤城)에서 다스리는데, 그 성은 동서 6리이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여 있다.  其地 東至新羅 西渡遼水二千里 南接百濟 北隣靺鞨千餘里 治平壤城 其城 東西六里 南臨浿水 
周書』(百衲本) 권 49 '異域列傳 上' '高句麗'

 

《周書》는 수(隋)나라 바로 이전 남북조 시기의 왕조인 북주(北周, 557~581)의 역사를 기록한 정사이다. 그런데 《隋書》와 달리 《周書》에는 「평양성은 동서 6리이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여 있다. (其城 東西六里 南臨浿水)」라고 만 전할 뿐 「산을 따라 굴곡이 진다. (隨山屈曲)」는 문구는 없다. 양 사서의 기록들 간에 보이는 차이는 어떤 까닭일까?

 

《隋書》와 《周書》에 각각 기재된 평양성의 지리적 묘사의 차이점에 처음 주목한 일본인 학자 타나카 토시아키(田中俊明)의 주장에 따르면 《隋書》의 기사는 장안성으로의 천도를 미처 인식하지 못한 《隋書》의 편자가 《周書》에서 인용한 「평양성은 동서 6리이며 남쪽으로 패수(浿水)에 임하여 있다. (其城 東西六里 南臨浿水)」에 더하여 「산을 따라 굴곡이 진다. (隨山屈曲)」는 새로운 사실을 첨부한 것인데, 「隨山屈曲」이라는 지리적 조건은 기존의 평양성과는 상관이 없고, 오로지 천도한 장안성에만 해당된다.

** 「또《周書》가 ‘其城東西六里 南臨浿水’라 하고, 《隋書》도 ‘東西六里’ ‘南臨浪水’라 한 것은《隋書》의 편자가 단순히《周書》의 기사를 전재한 것에 불과하다고 보았는데 즉《隋書》의 편자는 천도가 있었다고 하는 인식도 없이 같은 평양성이기 때문에 동일한 성으로 생각하고 별명이 장안성이라고 하는 새로운 정보와 합하여 기사를 구성한 것으로 보았다.《隋書》의 ‘隨山屈曲’도 장안성이라는 별명과 같이 새로운 정보라고 보았다.」  田中俊明,《高句麗長安城の位置と遷都の有無》1984  (高句麗 平壤城의 築城過程에 관한 硏究, 閔德植, 국사관논총 39집 31~32쪽 국문요약)

 

북주를 계승하여 세워진 수(隋) 시기에 들어 장안성으로의 천도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감안하면, 《隋書》에서만 보이는 「隨山屈曲」이 새로운 위치의 장안성과 관련된 기록일 것이라는 점은 매우 설득력 있는 견해가 아닐 수 없다.

**  田中俊明의 견해가 비록 '한반도 평양설'에 기반한 것임에도 불구하고《周書》와《隋書》에 서술된 평양성의 지리적 묘사에 주목한 그의 식견은 탁월하다고 할 수 있다.

 

결국 평양성은 본래 산(山)과는 관련 없는 평야에 자리잡았었고, 장안성으로의 천도 이후에도 여전히 고구려의 중심부로 남아, 기존의 위치에서 살수대첩 당시 수(隋)군의 공격 목표가 되었던 것이다.

 

 

살수대첩 수공(水攻)의 개연성

 

칠불사(七佛寺)는 북성(北城) 밖에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수(隋)나라 군대가 강가에 늘어서서 강을 건너려고 하였으나 배가 없었다. 그런데 문득 일곱 중[僧]이 와서는 여섯 중이 옷을 걷어올리고 건너가니, 이를 보고 깊이가 얕은 줄 알고 다투어 건너다가 빠져 죽은 시체가 강에 가득하여 흐르지 못할 정도였다. 이에 절을 짓고 칠불사라 하였으며 일곱 중처럼 일곱 돌을 세워 놓았다.」 한다.  七佛寺。在北城外。諺傳隋兵陣于江上。欲渡無舟。忽有七僧到江邊。六僧褰裳而涉。隋人見之。謂水淺。揮兵爭渡而溺。屍滿于川。水為之不流。因建寺為名。列置七石。以像七僧。
『신증동국여지승람』 권 52 평안도 안주목 불우(佛宇) 칠불사

文德(문덕)은 미리 사람을 보내서 沙囊(사낭)으로 薩水(살수)의 上流(상류)를 막고 精兵(정병) 수萬(만)을 뽑아 천천히 한아하게 隋兵(수병)의 뒤를 쫓더라. 살수에 이르러서는 舟船(주선)이 하나도 없으므로, 述(술) 등이 물의 淺深(천심)을 알지 못하여 머뭇머뭇하더니, 돌연히 高句麗僧(고구려승) 7人(인)이 다리를 걷고 물에 들어서며, 「오금에 미치지 못하는 물이라.」 하니, 隋兵이 大喜(대희)하여 다투어 물에 들어서더라. 隋兵이 중류에 못미쳐서 상류의 사낭을 터놓아 물이 폭력으로 내리어 밀리고, 文德(문덕)의 軍(군)이 뒤를 襲擊(습격)하니 隋兵이 칼과 활에 맞아 죽으며 물에 빠져 죽고, 남은 자는 나아가 1日(일) 1夜(야)에 450里(리)를 달리어 鴨綠江(압록강)을 건너 도망하여, 遼東城(요동성)에 이르러서는, 述(술) 등 9軍에 30萬 5千名(천명)이 겨우 2千 7百名(백명)이 되니, 百의 하나꼴의 剩餘(잉여)도 못되며, 軍器(군기) 輜重(치중) 累巨萬(누거만)이 모두 高句麗의 노획품이 되었더라.
『조선상고사』 '살수전'
** 沙囊(사낭) : 모래 주머니, 淺深(천심) : 얕고 깊음, 輜重(치중) : 말이나 수레 따위에 실은 짐, 累巨萬(누거만) : 매우 많음

 

단재 신채호는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오는 칠불전설(七佛傳說)을 살수대첩에 적용하여 《조선상고사》에 서술하였다. 《삼국사기》, 《隋書》 등의 정사에는 없는, 민간에 전해 내려온 듯한 설화의 형식이다 보니 비록 학계에서도 대부분 근거 없는 이야기로 치부되고 있지만, 단재는 살수대첩에서 고구려군의 수(隋)군에 대한 수공(水攻)이 실제로 이루어졌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고구려군이 살수에서 수나라의 대군을 격퇴시킨 전과는 잘 알려져 있는대로이다. 각종 첨단무기가 동원되는 현대전에서도 단번에 적군 30만을 섬멸하기란 매우 어려운 일일텐데, 세계 전쟁사를 통틀어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다른 한편으로는, 직접 창과 칼로 적과 맞붇거나, 고작 적진에 화살을 날리는 등의 방식이 전부였을 고대의 교전에서 어떻게 이런 엄청난 전과가 가능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다. 불가사의한 점이 없지 않지만, 살수에서 30만의 수(隋)군이 괴멸된 사실은 중국 측의 정사를 비롯한 수 많은 사서에 기록된 만큼 이를 의심할 여지는 없다. 그렇다면 살수대첩은 일반적인 접전 외에 고구려 측으로부터 그 무언가의 특출한 수법이 동원되었기에 가능하였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역사학의 천재로 알려져 있는 단재 신채호가 별 생각없이 허황된 저술을 했을리는 없다고 본다.

 

보정시 서수구(徐水區)에 폭하수고(瀑河水庫)가 있다. 그 이름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폭하수고는 필자가 고대의 살수로 주장하는 폭하(瀑河)의 물길에 소규모의 콘크리트 댐을 건설하여 조성된 저수지이다. 폭하수고의 댐벽은 서수구 해촌(解村) 마을의 서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있는데, 수고(水庫)의 존재는 그 일대가 폭하의 물줄기를 막음으로서 대량의 물을 가두어 두기에 적합한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지도1 및 사진1 참조) 1,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고 해서 지형이 크게 변할 수는 없으므로 살수대첩 당시에도 그 지역의 지리, 지형적 조건은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즉, 해촌 일대는 단재 신채호가 서술한 살수대첩의 수공(水攻)이 가능했을 것으로 판단되는 지역인 것이다. 아닌 게 아니라, 폭하수고 댐벽 바로 위쪽에 오래전에 흙과 돌로 쌓은 듯한 둑이 위성사진에서 확인되는데, 이는 근대에 들어 댐이 건설되기 오래전부터 (어쩌면 고대에도) 폭하의 물길을 막아 저수하였던 흔적이 분명하다. (사진1 참조)

 

사진 1 폭하수고(瀑河水庫)의 댐과 댐 건설 이전의 둑 (물이 빠진 상태), 위성사진 출처: 구글 지도

 

문덕이 다시 사신을 보내 거짓 항복하여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만약 군대를 돌리면 왕을 모시고 행재소로 가 황제를 뵙게 하겠습니다.」 하였다. 우문술이 사졸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음을 보고, 또 평양성이 험하고 견고하여 갑자기 함락시키기 어려운 것으로 헤아려, 드디어 그 속임수에 따라 돌아갔다. 우문술 등이 방형의 진을 치고 행군하였는데, 아군이 사방에서 수시로 공격하니 우문술 등이 잠깐 싸우고 잠깐 행군하고 하였다. 가을 7월에 살수(薩水)에 이르러 군사의 절반이 강을 건넜을 때 아군이 뒤에서 후군을 공격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辛世雄)이 전사하였다. 이에 여러 군대가 함께 무너져서 걷잡을 수 없게 되어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가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압록수에 도달하였으니 450리를 행군하였다.  文德復遣使詐降 請於述曰 「若旋師者 當奉王 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 不可復戰 又平壤城險固 度難猝拔 遂因其詐而還 述等爲方陣而行 我軍四面鈔擊 述等且戰且行 秋七月 至薩水 軍半濟 我軍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雄戰死 於是 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 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영양왕 23년 (서기 612)

위 《삼국사기》 의 기사로 미루어 알 수 있는 당시 수(隋)군의 움직임을 폭하(瀑河) 주변의 지리에 적용하여 살펴보면, 수(隋)군은 固城으로부터 서북쪽 30리 거리의 황산촌(黃山村)에 진을 치고 고구려군과 대치해 있던 상태에서, 곧 항복하겠다고 하는 을지문덕(乙支文德)의 꼬임에 빠진 우문술(宇文述)의 오판 및 수(隋)군에 불리해진 교전 여건 등에 따라 철군하여, 왔던 길을 되돌아 남쪽으로 향하였고, 고구려군은 이미 퇴각하고 있던 수(隋)군을 후미에서 의도적으로 몰아붙여, 해촌(解村) 일대에 은밀히 설치해 놓은 수공(水攻)이라는 거대한 덫으로 유도하여 떠밀어 넣은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30만 적군의 절반이 살수를 건너간 시점에 맞추어 상류에 가두어 놓았던 물을 일거에 터뜨림으로써, 적 병력의 허리를 끊어 타격을 극대화하였을 것이다.

 

또 한가지 흥미로운 사실은, 필자가 고구려군의 수공(水攻) 현장으로 추정하는 해촌(解村)의 동남쪽 1.7킬로미터 거리에 「물을 피하다」를 뜻하는 '타수장촌(躲水庄村)'이라는 마을이 현존한다는 것이다. 躲水庄村 마을이 폭하(瀑河)의 동변에서 살짝 비켜나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혹시 살수대첩의 수공 개시 직후 살수를 미처 건너지 못하였거나 또는 물살에 휩쓸렸다가 가까스로 빠져나온 수(隋)군이 물을 피해 모여 있던 곳이었던 연유로 그 마을이 '躲水庄村'이란 이름을 얻지 않았을까 하는 추론을 가능케 한다. (지도1 참조)

 

이렇듯 살수대첩 수공(水攻)의 개연성 마저 뒷받침하며 사서의 서술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는 상기 서수구(徐水區) 폭하(瀑河)의 주변 여건들이 그저 우연의 일치일 리는 없다.

 

 

살수 부근에서 죽어 묻힌 수양제의 비(妃) 반희(班姬)

 

반비산(班妃山), 《도경(圖經)》에 이르기를 「수양제(隋煬帝)가 동쪽을 정벌하였다. 산위에 반희(班姬)의 사당을 세웠다.」고 했다.  班妃山 圖經云 隋煬帝東征 於山上置班姬廟
『元豊九域志』 1080년 간행 (사고전서本) 권2 '安肅軍' '遂城縣'

 

반희산(班姬山) 일명 반비산(班妃山), 안숙현(安肅縣) 서쪽 40리에 있다. 수성현(遂城縣)에 반희산(班姬山)이 있다. 구역지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정벌에 비(妃) 반(班)씨가 따라나섰다가 죽었다. 장사지내어 묻고 그 위에 사당을 지었다. 주민들이 누에의 여신으로 삼아 매년 봄에 제례를 올렸다. 명승지 班姬山 一名班妃山 安肅縣西四十里 遂城縣有班姬山 九域志 隋煬帝征髙麗 有妃班姓 經此而薨 遂葬焉 建祠於上 嵗春居民以蠶姑禮祀之 名勝志
『畿輔通志』 권18 '保定府'
** 《대청일통지(大淸一統志)》, 《홍치 보정군지(弘治 保定郡志)》 1494, 《안숙현지(安肅縣志)》 1778 등에도 대동소이한 내용이 기재되어 있다.  **  蠶姑(잠고) : 누에의 여신. 좋은 비단을 얻기 위해 잠고에게 제사를 지냄.

 

위 《기보통지(畿輔通志)》 및 《원풍구역지(元豊九域志)》 등의 기사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수양제(隋煬帝)의 고구려 원정에 따라나섰던 수양제의 비(妃) 반희(班姬)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서 죽어 반희산(班姬山, 일명 반비산班妃山)에 묻혔다. 반희산은 지금도 서수구 상산(象山) 동북쪽 기슭의 고속도로변, 대왕점진(大王店鎮) 서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서 확인된다. (지도1 및 사진2 참조)

 

사진 2 반희산(班姬山),  위성사진 출처: 구글 지도

 

청(淸)대의 명사(名士) 여세렴(余世廉, 1753~?)은 반희산(班姬山)에 직접 찾아와서 둘러보고 아래의 시를 지어 남기기도 하였다.

 

班姬何自到天涯    반희가 어디로부터 하늘 끝에 이르렀던가?
大業東征扈翠華    대업(大業)의 동정(東征)에 뒤따르던 취화개로다.
獨向燕山留寸土    좁은 땅뙈기에 홀로 머물러 연산(燕山)을 향하였으니
免教人指玉鉤斜    기운 그믐달이 되어 손가락질 받을 일은 면하였구나.

『保定府志』 권18, 山川1 (1886년 간행)

** 大業(대업) : 수양제(隋煬帝) 때의 연호, 사용 기간 605년 1월 1일 ~ 618년 3월 11일 (음력), ** 翠華蓋(취화개) : 임금의 나들이 때 비 또는 햇빛 가리개의 용도로 쓰인 왕실 의장의 한 가지, ** 玉鉤(옥구) : 초승달, 그믐달 같이 생긴 모양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 ** 燕山(연산) : 즉 수양제의 1, 2차 고구려 원정 당시 수군(隋軍)의 집결지인 탁군(涿郡) 계현(薊縣)을 가리키는 지명이다. 통상적으로 연산(燕山)은 今 북경(北京, 베이징)에 비정되지만, 보정의 서수(徐水)에 묻힌 반희(班姬)가 중원의 반대편 방향인 동북쪽의 북경(北京)을 향할 리는 없으므로, 여세렴(余世廉)은 수나라 탁군 계현의 위치를 今 보정시 당현(唐縣)으로 올바르게 인식한 것으로 생각된다.

 

반희(班姬)가 필자의 주목을 끄는 이유는 그녀가 죽어 묻혔다는 반희산(班姬山)의 위치가 필자가 고구려의 평양성으로 주장하는 정흥현(定興縣)의 固城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거리(직선거리 25킬로미터)이고, 역시 필자가 살수대첩의 살수로 확신하는 폭하(瀑河)로부터는 불과 5, 6킬로미터 내외의 매우 가까운 곳에 있기 때문이다. (지도1 참조)

 

황실 여성의 몸으로 반희(班姬)가 그 위험한 전쟁터에 무엇하러 따라갔으며, 또 어떻게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반희의 기록이 여러 믿을만한 사서들에서 확인되고 반희산(班姬山)이 실재하는 점 등으로 미루어 대업(大業)년간 수차례에 걸쳐 시도된 수나라의 고구려 원정 당시의 어느 시점에선가 수양제(隋煬帝)와 반희가 보정의 서수(徐水)에 와 있었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겠다. 단, 사서에 보이는 기록들만으로는 수양제가 최종 목적지인 고구려 평양까지 아직 가야 할 먼길을 남겨두고 서수를 잠시 지나치는 동안에 반희가 비명횡사한 것인지, 아니면 서수 일대가 실은 평양성에 근접한 고구려-수(隋) 전쟁터였던 것이고, 양측간에 치고받는 교전이 이어지는 와중에, 이를테면 애꿎은 반희가 희생된 것인지 등이 명확치 않다는 점이 문제일 것이다.

** 《수서(隋書)》 '우문술전(宇文述傳)'에, 서초패왕 항우(項羽)의 애첩 우희(虞姬)의 경우를 선례로 들어 고구려 원정에 부인을 동반해도 좋다고 우문술에게 말한 것으로 미루어 자신의 비(妃) 반희(班姬)를 데리고 간 점 역시 수양제에게는 별스러운 일이 아니었던 듯하다.

 

그런데 상식적으로, 황제의 비(妃)가 불의의 사고 또는 질병 등으로 객사하였다면 마땅히 일단 시신을 도읍으로 옮긴 다음 정식으로 장례를 치르는 것이 정상적인 절차였을 것이다. 반희(班姬)의 경우가 예외라면 그렇게 할 수 없었던 불가피한 사정 때문이었을 터인데, 전쟁 중의 급박함이 한 이유일 수 있다.

 

수양제(隋煬帝)가 가령 통설대로 한반도의 평양을 치러 가는 길이었다면 서수(徐水)를 지날때는 목적지 평양까지 아직 1,000킬로미터 이상의 행군을 남겨둔 시점이었고, 고구려와의 (통설상) 국경인 지금의 요하(遼河)로부터도 역시 700킬로미터 안쪽이었다. 따라서 수양제와 반희(班姬)가 지나치던 서수는 평상시와 별반 다를 것이 없이 평범한 수나라의 안정된 영역이었을 것이다. 전쟁길 가기 바빳다고 하더라도 사람을 시켜 반희를 낙양(洛陽)으로 돌려 보냈으면 될일이었다. 즉 통설대로라면, 여세렴(余世廉)의 표현대로 수나라의 수도 낙양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낯선 곳의 좁은 땅뙈기에 황제의 비(妃)가 홀로 묻혀 있게 둘 수 밖에 없었을 만큼 다급했던 까닭을 서수에서는 찾을 수 없다.

 

고구려-수(隋) 전쟁의 중심지를 서수(徐水) 일대로 보는 필자가 추론하자면 반희(班姬)는 전쟁의 혼란 속에서 죽은 것이 분명하고, 당시 급박히 돌아가는 전장의 사정상 수양제(隋煬帝)에게는 반희의 시신을 낙양(洛陽)으로 옮기는 등의 일에 신경쓸 겨를이 없었다. 아마도 수양제는 자신의 체면을 위해서라도 전쟁이 끝나면 변방에 임시로 묻어둔 반희를 다시 거둘 생각이었을 것이나 주지하는 바와 같이 양제는 곧 파멸하고 수나라는 망함으로서 반희는 영영 낙양으로 돌아가지 못한 것으로 본다.

 

다른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이는 어쩌면 전쟁 중에 일시적으로 확보한 새 영토에 황비(皇妃)의 무덤을 만들어 놓고 "여기까지도 우리 땅!"이라는 억지 주장의 구실을 위한, 일종의 표지석의 용도로 써먹으려는 수양제의 의도적인 행위였을 개연성도 다분하다. 고구려 영토 침탈에 광적으로 집착한 폭군 수양제이고 보면 더욱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