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수(遼水)와 요택(遼澤) 그리고 마수산(馬首山),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위치
카테고리 없음정주(定州)와 유주(幽州)는 전쟁터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정관貞觀] 19年 봄 2월 경술일 (2월12일),[황]상이 친히 6군을 통솔하고 낙양에서 출발하였다. 을묘일 (2월17일),조서를 내려 황태자가 정주에 머물러 나랏일을 감독하도록 하였다. 十九年春二月庚戌,上親統六軍發洛陽。乙卯,詔皇太子留定州監國。
『舊唐書』 권 3 太宗本紀 下
3월 정축일(3월9일)에 거가가 정주(定州)에 도착하였다. 三月,丁丑,車駕室定州。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임진일(3월24일)에 거가가 정주를 출발하였다. [황제는] 친히 활과 화살을 차고, 손으로 비옷을 안장 뒤에 묶었다. 장손무기를 섭시중에, 양사도를 섭중서령에 각 임명하였다. 壬辰,車駕發定州。親佩弓矢,手結雨衣於鞍後。命長孫無忌攝侍中,楊師道攝中書令。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서기 645년, 고구려 원정에 나선 당태종(唐太宗)은 낙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의 당(唐)측 전방기지라 할 수 있는 정주(定州)에 먼저 도달한 뒤 그곳을 기점으로, 먼저 전장에 이르러 이미 성과를 올리고 있던 이세적(李世勣)과 이도종(李道宗) 등의 장수들에 합세하여 고구려의 요동성 공략에 돌입하였다. 즉 통상 알려진 것과는 달리 정주는 전쟁 직전 고구려와 일촉즉발의 대치 상태에 있던 당(唐)의 변경지역이었는데, 이를테면 당태종이 정주에서 출격하며 손수 활과 화살을 차고 비옷을 묶는 등 당(唐)군의 '총사령관'으로서 개인 전쟁 채비를 갖추며 전의를 다지는 비장한 모습은 전장이 그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었음을 시사한다.
당초 태종은 태자가 있는 곳(정주定州)에서 [요동遼東]행재소(行在所)까지 30리 간격으로 봉화(烽火)를 설치하고, 요동이 함락되는대로 봉화를 들기로 약속하였다. 이 날 봉화를 들게 하여 새(塞)안으로 [그 소식을] 전했다. 初, 帝自太子所屬行在, 舍置一烽, 約下遼東擧烽, 是日傳燎入塞.
『新唐書』 권 220 東夷列傳
당태종은 또한 자신의 태자를 정주(定州)에 남겨두어 전장으로 나가는 자신을 대신하여 국정을 돌보게 하였다. 그리고 요동성(遼東城)의 함락 소식을 태자에게 알릴 목적으로 정주에서 [요동성 부근의] 요동행재소까지 봉화대를 30리 간격으로 설치하였다.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봉화대의 설치는 사전에 계획된 것이라기 보다는 전장에서의 임기응변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었을 개연성이 짙고, 또한 기대되는 요동성 점령의 드라마틱한 연출 등 당태종의 정치적 의도가 더불어 내재된, 일시적인 용도였던 게 틀림없어 보인다.
여하튼 요동성은 당에 함락되었고 봉화는 올려져 약속대로 정주(定州)에 전달되었다. 그런데 학계의 통설상 요동성의 비정위치는 지금의 요녕성 요양(遼陽랴오양)시 부근으로서 정주로부터는 무려 800km(1,500리)가 넘는 먼 거리이다. 따라서 30리 간격으로 설치했다면 총 50여개의 봉화대가 필요했을 것이다. 면밀한 사전 조사, 계획 없이 전쟁 중에 일시적인 용도로 세워진 그 많은 수의 봉화대가 1,500리의 먼 거리 사이에, 그것도 전쟁의 혼란속에서 과연 제대로 연동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대목이다. 필자는 설치된 봉화대의 총수가 대여섯곳를 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한다.
[정관貞觀 19年] 여름 4월 계묘일 (4월6일),유주성 남쪽에서 군사들과 함께 승리를 다짐하고, 이어서 6군에게 잔치를 크게 베풀고 보냈다. 夏四月癸卯, 誓師於幽州城南, 因大饗六軍以遣之.
『舊唐書』 권 3 太宗本紀 下
정미일(4월10일)에 거가가 유주(幽州)를 출발하였다. 丁未,車駕發幽州。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645년 3월 24일(음) 정주(定州)를 출발한 당태종의 행적은 4월 6일 유주성(幽州城) 남쪽에 다시 보인다. 여기서 유주성은 당(唐) 유주(幽州)의 치소인 계현(薊縣)의 도성, 즉 계성(薊城)을 가리킨다. 계현의 위치는 정주의 정북 방향 25킬로미터 거리의 현 보정시 당현(唐縣) 일대이다. 학계의 통설에 따른 계현의 비정위치는 지금의 북경(베이징)시 서성구(西城區)이고 요동성의 비정위치는 앞서 언급한대로 지금의 요녕성 요양(遼陽랴오양)시 일대이다. 북경에서 요양까지의 거리는 직선으로 590킬로미터에 달하고 실제 당시의 도보로는 아마도 1,000킬로미터 이상의 거리였을 것이다. 통설대로라면, 전쟁은 나중 일이고 우선 머나먼 전장까지 장장 1,000킬로미터를 걸어가야 할 일을 앞둔 병사들에게 잔치를 먼저 베풀었다는 것인데, 어불성설이 아닐 수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계현에서의 잔치는 그곳으로부터 멀지 않은 전장으로 곧바로 보내져 다시는 살아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를 병사들을 위한 당태종의 마지막 배려였을 것이 틀림없다. 군사들이 떠난 수일 뒤 당태종 역시 계현을 떠나 북평(北平)으로 향하였다.
정사일(4월20일)에 거가가 북평(北平)에 도착하였다. 丁巳,車駕至北平。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후위가 북평군을 설치하였다. 북제가 [북평]군을 폐하였다. 포음[현]을 없애고 북평현을 설치하였다. 수(隋)와 당(唐)이 그대로 따랐다. 옛성이 지금의 직례 완현(完縣) 동북에 있다. 後魏置北平郡。北齊郡廢。省蒲陰置北平縣。隋唐因之。故城在今直隸完縣東北。
『中國古今地名大辭典』 '北平縣'
당태종이 유주(幽州)를 출발하여 645년 4월 20일(음)에 도달한 북평(北平)은 당(唐) 시기 정주(定州)의 관할하에 있던 북평현(北平縣)을 가리킨다. 당(唐) 정주(定州) 북평현은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무종현(無終縣)이 있던 곳으로서 그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완현(完縣, 즉 順平縣)이다. 참고로, 혹자는 당태종 일행이 유주에서 열흘 걸려 북평에 도달한 사실과 고대 보병의 평균 행군속도(하루에 30리)에 착안하여 유주와 북평간 거리의 산출을 꾀하기도 하지만, 그 일대가 행군에 영향을 미치는 여러 변수가 있을 수 있는, 고구려와의 국경에 근접한 최전방 지역이라면 평균 행군속도 등의 상수 값은 무의미할 것이다. 당시 고구려와의 전선(戰線)은 대략 요수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던 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어 지겠지만 북평으로부터 요수까지는 25킬로미터 남짓되는 가까운 거리였으므로 당태종의 거가는 매우 조심스럽게 움직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요수는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의 조하(漕河)이다.
경오일(5월3일)에 거가가 요택에 도착하였다. 진흙뻘이 200여 리였고 사람과 말이 통과할 수 없었다. 장작대장(將作大匠) 염입덕(閻立德)이 흙을 넓게 깔아 다리를 만들어 군대가 지체하지 않고 임신일(5월5일)에 [요]택 동쪽으로 건너갔다. 庚午,車駕至遼澤,泥淖二百餘里,人馬不可通,將作大匠閻立德布土作橋,軍不留行。 壬申,渡澤東。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정축일(5월10일)에 거가가 요수를 건너고는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황제는 강하왕 도종을 위로하여 상을 주고, 마문거의 직급을 몇 단계 올려 중랑장으로 삼았으며, 장군예의 목을 베었다. 황제는 직접 수백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요동성 밑에 가서, 군사들이 흙을 지고 참호를 쌓는 것을 보았다. 황제는 직접 제일 무거운 것을 자신의 말에 실었다. 이에 시종들이 다투어 흙을 운반하여 성 밑에 쌓았다. 丁丑,車駕渡遼水,撤橋,以堅士卒之心,軍於馬首山,勞賜江夏王道宗,超拜馬文舉中郎將,斬張君乂。上自將數百騎至遼東城下,見士卒負土填塹,上分其尤重者,於馬上持之,從官爭負土致城下。
『資治通鑑』 권 197 唐紀 貞觀 19년
당태종의 궁국적인 공격 목표였을 고구려 평양성을 향한 그의 이동경로를 주시해보면 그의 이전 행적이 마지막으로 드러난 북평(北平)으로부터 동북 방향으로 요택(遼澤)과 요수(遼水), 마수산(馬首山), 요동성, 평양성 등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고대 북평의 위치는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지금의 보정시 완현(完縣)이고 평양성은 완현으로부터 직선거리로 동북쪽 59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지금의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이다. 따라서 요택, 요수, 마수산, 요동성 등 고구려-당(唐) 전쟁시 당태종의 침공루트와 관련된 해당 지명들의 위치 추적 범위는 완현과 정흥현의 고성을 잇는 직선에서 좌우로 그리 멀리 벗어나지 않는 영역으로 대폭 좁혀진다. (지도1 참조)
우선 요수(遼水)를 찾아보자.
요수는 당태종의 이동경로상 북평(完縣)과 평양성(固城) 사이로 한정되는 구간의 어느 지점을 가로질러 흐르는 물줄기가 분명하다. 지금의 완현(完縣)에서 동북 방향으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固城)까지 이동하면서 건너게 되는 물줄기들로는 계하(界河), 조하(漕河, 즉 서수 徐水), 폭하(瀑河, 즉 남역수南易水), 계조하(鷄爪河) 등이 차례로 있다. 요수는 이들 물줄기들 가운데 하나일 것이다. 그런데 계조하는 이미 당시의 패수(浿水)로 밝혀졌으므로 요수가 될 수 없고, 폭하 역시 당시로부터 불과 30여년 전의 고구려-수(隋) 전쟁시 요수와는 분명히 구별되는 살수(薩水)였으므로 역시 요수의 후보목록에서 제외된다. 그렇다면 요수의 실체는 계하와 조하 둘 중 하나일 수 밖에 없다.
여러 부대는 승세를 타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요동성은 곧 한나라 때의 양평성(襄平城)이다. 諸軍乘勝進圍遼東城, 卽漢之襄平城也.
『資治通鑑』 권 181 隋紀 5 煬皇帝 大業8년(612) 2월 癸巳, 上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는 장성을 쌓기도 하였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史記』 匈奴列傳
주지하다시피 요동성은 고구려-수(隋) 전쟁 당시에도 역시 중원에서 비롯된 침략세력의 주요 공격 목표들 중 하나였다. 위 《資治通鑑(자치통감)》 권 181 '수기(隋紀)'에 밝혀져 있듯이 수(隋) [및 당(唐)]대의 요동성은 곧 한(漢)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의 현성인데, 양평현은 위 《史記(사기)》 '흉노열전(匈奴列傳)'의 기록대로 전국(戰國) 연(燕)이 쌓은 장성의 동쪽 끝으로 그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일대이다. 즉, 당(唐)군이 공격한 요동성의 위치는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 부근인 것이다. (지도1 참조)
당태종은 요수(遼水)를 건넌 뒤 곧바로 마수산(馬首山)에 군영을 세우고 즉시 이어서 요동성 공략에 나섰다. 이로써 요수, 마수산 및 요동성이 서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현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인근 남쪽 방면에 위치한 하천으로는 그 일대를 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조하(漕河)가 유일하다. 따라서 조하가 바로 고구려-당 전쟁 당시에 당태종이 건넜던 요수인 것을 알 수 있다.
고구려의 개소문이 임금을 죽이고 백성을 학대함을 인정상 어찌 참을 수 있겠는가? 이제 유주의 계(薊)에 순행하고, 요수와 갈석(碣石)에 가서 그 죄를 물으려고 하니, 지나는 곳의 군영과 숙사에서 노력과 비용을 지출함이 없도록 하라. 以髙句麗蓋蘇文弑主·虐民, 情何可忍. 今欲巡幸幽薊, 問罪遼·碣, 所過營頓, 無為勞費.
『삼국사기』 권21 보장왕 3년(서기 644년) 11월 (음)
'요갈(遼碣)'은 요수와 갈석[산]을 가리킨다. '碣'은 갈(其謁翻)로 발음한다. 遼碣謂遼水碣石 碣其謁翻
『資治通鑑』 권 107 胡三省 注
당태종은 고구려를 공격하기 전 조서를 내려 요수(遼水)와 갈석산(碣石山)을 한데 묶은 지명인 '요갈(遼碣)'에서 영류왕을 죽인 연개소문의 죄를 묻겠다고 하였다. 즉 당시의 요수와 갈석산이 서로 근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본글에서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요수로 밝혀진 조하(漕河)는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서북쪽의 낭아산(狼牙山)에서 발원한다. 낭아산은 고대의 갈석산이므로 낭아산에서 발원하는 조하 역시 당태종이 가리킨 '요갈(遼碣)'의 요수(遼水)가 분명한 것이다.
더구나 당태종은 '유계(幽薊)' 즉 유주(幽州)의 계현(薊縣)에 먼저 들린 다음에 요수(遼水)와 갈석산(碣石山)에서 죄를 묻겠다고 하였는데, 계현은 지금의 보정시 당현(唐縣)이므로 당태종의 조서 내용은 정주(定州), 당현, 완현(完縣), 조하(漕河)의 순서에 따라 이동한 것으로 드러나는 전쟁 초기 그의 실제 행적에 일치하여, 역시 요수가 현 만성 북쪽의 조하였음을 재차 확인시켜 준다.
당태종이 건너간 요택의 올바른 이해
《高驪記(고려기)》에 이르기를 「그 하천은 너비가 백여보(百餘步)로서 밋밋하게 흐르며 물이 맑고 깊다. 또한 굽이진 곳에 늪이 많고 여러 갈래의 지류로 퍼져있다. 양쪽 기슭은 빽빽히 자라는 키 큰 버드나무에 덮혀 있어 병마를 숨기기에 좋다. 양쪽 강변이 고르게 널리 펼쳐져 있어, 통틀어서 요택(遼澤)이라 이름한다. 잔풀과 부들, 온갖 들짐승과 날짐승이 많이 산다. 아침 저녁으로 안개가 드리워졌다가 곧 걷히곤 하는데, 누각의 담벼락과 같은 형상으로서, 즉 《漢書(한서)》에 이른바 신기[루]이다」 하였다. 高驪記云 其水闊百餘步平流清深 又多灣潭枝派 兩岸生長柳蒙密可藏兵馬 兩畔彌平 總名遼澤 多生細草雈蒲毛群羽族 朝夕相霧須臾卷斂狀若樓雉即漢書所謂蜃氣也
『翰苑』 蕃夷部, 660년경 (唐) 張楚金 편찬
위 《翰苑(한원)》의 요수에 관한 기사에 의하면 요택은 요수의 유로를 따라 주변에 형성되어 있었던 습지였던 것이 분명한데, 당태종군이 통과한 지점 일대에서는 요수의 남변(또는 서변)에 치우쳐 있었던 듯하다. 그런데 요택을 논함에 있어 한가지 분명히 해 두어야 할 중요한 사실은 《資治通鑑》, 《舊唐書(구당서)》, 《新唐書(신당서)》 등에 기록된 요택의 진흙뻘 200여 리란 요택의 폭이 아닌 길이를 가리킨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진흙뻘 200리를 이틀만에 통과하기란 불가능하고, 설령 가능했다 하더라도 당태종이 바보가 아닌 이상 군사작전상 위험하기 짝이 없었을 200리 늪지의 수렁길로 자신의 군대를 몰아 넣는 어리석은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현대전에 있어서도 공기부양정(hovercraft) 등의 특수 수륙양용 운송 수단 없이, 보병부대가 맨몸으로 200리 늪지에 스스로 들어가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이다.
고구려 정벌에 [염입덕이] 따라갔다. 군대가 요택에 이르렀는데, 동서로 200리가 진흙뻘이었다. 인마가 통과할 수 없었는데, 입덕이 길을 메우고 다리를 지어 병마의 지체가 그치니 태종이 몹시 기뻐하였다. 從征高麗, 及師旅至遼澤, 東西二百餘里泥淖, 人馬不通, 立德塡道造橋, 兵馬留礙, 太宗甚悅.
『舊唐書』 권 77 閻立德列傳
택주(澤州) 광제군(廣濟軍), 하등 주(州)로, 자사(刺史)를 두었다. 본래 한(漢) 토은현(土垠縣)의 땅이었다. 澤州,廣濟軍,下,刺史.本漢土垠縣地.
『遼史』 권39 지리지3, 中京道
《資治通鑑》에 드러난 진군 일정으로 미루어 볼 때 당태종군은 지금의 당현(唐縣)에서 동북 방향으로 이동하여 완현(完縣) 및 만성(滿城)을 차례로 경유하고 만성의 북쪽 부근에서 요택 및 요수 즉, 지금의 조하(漕河)를 건넌 것으로 이해된다. 한편 필자는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토은현(土垠縣)의 위치를 今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에 비정하였는데, 《遼史(요사)》 '지리지'에 따르면 요(遼) 중경대정부(中京大定府)에 속한 택주(澤州)는 한(漢) 우북평군 토은현과 동일한 곳으로서, 이는 곧 《武經總要(무경총요)》에 '요택의 땅(遼澤之地)'으로 기록된 '澤州'일 것이다.
실제로 조하는 만성의 북쪽 방면을 동 또는 동남방향으로 흘러 80여 킬로미터 (즉 200여리) 하류 고대 발해만의 내해였던 백양정(白洋淀)에 유입되는데, 요택의 습지가 동서로 200리를 길게 이어져 있었다는 사실은 위 《舊唐書》 '염입덕열전(閻立德列傳)'의 기사에서 확인되며, 이는 조하의 실제 길이 및 흐름 방향에 부합한다. (지도1 참조) 특히 조하(漕河) 상류 용문수고(龍門水庫, 저수량 1억1천800만 세제곱미터)의 댐이 조하 유역의 홍수 조절을 주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사실(바이두 백과 '龍門水庫')은 조하 주변에 본래 요택(遼澤)의 습지가 형성되어 있었을 개연성과 관련하여 의미심장하다.
위험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당태종군이 요택을 직접 돌파하여 건널 수 밖에 없었던 것는 습지가 더욱 심화되었을 하류쪽으로의 우회는 당연히 불가능하고, 상류쪽 역시 산지(山地)로 가로막혀 있어 대군이 우회하기에는 여건이 여의치 않았던 까닭이었을 것이다. 만성 북쪽 조하(漕河) 인근의 지형으로 미루어 보아 당태종군은 폭 1킬로미터 남짓한 요택의 습지를 동 또는 동북으로 가로질러 이틀만에 통과한 것으로 생각된다. (지도2 참조)
이제까지 요택에 대한 학계의 연구는 한결같이 당태종군이 요택의 습지 200리 길을 실제로 헤쳐 나아간 것으로 상정하였는데, 이는 고대의 요수가 지금의 요녕성 요하(遼河)일 것이라는 선입견에 따라, 「요택이 동서로 200리에 걸쳐 있었다」는 사서의 기록을 현 요하 주변의 지리적 여건에 섣불리 대입하여 잘못 해석한 어처구니없는 오류이자 학술적 참사이다.
마수산(馬首山)을 찾았다.
앞서 살펴본대로 당태종군은 만성(滿城) 북쪽 부근의 어느 한 지점에서 요수(遼水) 즉, 지금의 조하(漕河)를 건넌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마수산(馬首山)은 만성을 기준으로 동북방면 조하 건너편의 가까운 곳 어딘가에 있었을 것이다.
상산이 [서수]현 서쪽 43리에 있다. 그 모양이 코끼리와 비슷하다. 象山在縣西四十三里 其形類象
『徐水縣新志』 권 2 地理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맹촌(孟村) 인근에 해발 370미터 높이의 상산(象山)이 있다. 멀리서 보면 누워있는 코끼리의 모습과 비슷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십수년전의 광산 개발로 인해 현재는 무참히 훼손된 상태이다. 상산에 대하여 나름 알아보던 중 「이제는 어릴적 보았던 코끼리의 모습을 더 이상 볼 수 없다」는 등 많이 안타까워하는 중국 네티즌들의 글을 접할 수 있었다. 그런데 심한 훼손에도 불구하고 위성사진에서 어렵지 않게 확인되는 상산의 모습은, 코끼리라기 보다는 몸집에 비하여 머리 부분이 과하게 커보이는, 영락없는 '말대가리'의 형상이다. (사진1, 2 참조) 만성 부근의 조하(漕河)로부터 동북쪽으로 불과 6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상산의 위치가, 요수에서 매우 가까웠던 것으로 사서에 기록된 마수산(馬首山)의 위치에 절묘히 부합한다는 점을 감안하면 상산의 '말대가리(馬首)' 형상은 절대로 우연의 일치일 수가 없다.
또한 상산(象山)의 동쪽으로는 멀지 않은 거리에 연장성(燕長城)이 동남방향으로 지나는데, 그 부근이 한(漢)대의 양평성(襄平縣) 즉 요동성의 위치로 추정되는 곳으로서 마수산(馬首山)의 군영으로부터 곧바로 출격한 당태종군의 1차 공격 목표가 되었다. (지도1 참조) 이에 더하여 상산(象山) 동북쪽 1.5킬로미터 지점에 수양제의 동정(東征)과 관련이 있는 반희산(班姬山)이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상산(象山) 일대가 고구려-수(隋) 및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에 수(隋), 당(唐)군의 최전방 기지였을 개연성을 더해주는 동시에 상산(象山)이 바로 마수산(馬首山)이었음을 뒷바침한다.
결어
서기 645년 고구려-당(唐) 전쟁시 낙양을 출발한 당태종은 정주(定州)에 도달한 뒤 이어서 유주성(幽州城, 지금의 唐縣)과 북평(北平, 지금의 完縣)을 차례로 경유하여 지금의 만성(滿城) 북쪽에 있었던 요택의 습지를 가로질러 통과하고, 잇달아 요수(遼水, 지금의 漕河)를 건넜다. 곧바로 요수에서 가까운 마수산(馬首山, 지금의 象山)으로 진격하여 그곳에 진지를 구축하고, 동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서수구(徐水區) 서부 어딘가에 있었을 요동성으로 출격하여 전쟁에 돌입하였다.
고구려-당(唐) 전쟁시 요수(遼水)는 지금의 보정시 서북쪽의 낭아산(狼牙山)에서 발원하여 만성구(滿城區) 및 서수구(徐水區) 일대를 동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조하(漕河)이다.
마수산(馬首山)은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 맹촌(孟村) 부근에 위치한 상산(象山)이다.
- 행재소(行在所) : 임금이 궁을 떠나 멀리 거둥할 때에 임시로 머무르는 곳
- 舍 : 30리, 군대가 하루에 걷는 거리
- 誓 : 고대에는 '誓'자가 전장에 나가기 전에 승리를 다짐한다는 뜻으로 쓰였었다.
- 계현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는 ☞ 수나라 탁군 계현은 북경이 아니다. 및 ☞ 고대 유주 연국 계현의 절대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당현이다. 참조 바람
- 북평현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는 ☞ 새로 밝혀지는 우북평군 무종현의 절대위치 참조 바람
- 완현(完縣)은 1993년에 행정구역명이 바뀌어 지금은 순평현(順平縣)이다.
- 평양성의 위치에 관하여는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 패수의 실체에 관하여는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 살수의 실체에 관하여는 ☞ 살수대첩, 살수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의 폭하이다 참조 바람
- 연장성에 관하여는 ☞ 진개 연장성의 기점 조양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의 자형관 일대에 있었다 참조 바람
- 갈석산과 낭아산에 관하여는 ☞ 갈석산 앞에 세운 연소왕의 황금대, ☞ 당대의 기록으로 본 갈석산의 바른 위치 및 ☞ 안사의 난 안록산 반란사건의 본거지 갈석산 참조 바람
- 당태종군은 645년 5월 경오(庚午)일에 요택에 이르러 이틀 뒤인 임신(壬申)일에 요택의 동편에 도달하였다.
- 《舊唐書》 '염입덕열전(閻立德列傳)'에, 염입덕(閻立德)이 요택의 습지를 흙으로 메워 만들었다고 전하는 통로의 길이는 상식적으로 200리가 될수 없다. 실제로 염입덕은 요택의 좁은 구간 폭 2~3리를 가로지르는 길을 낸 것이다.
- 반희산에 관하여는 ☞ 살수대첩, 살수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의 폭하이다 참조 바람
- ☞ 포구수, 경수, 류수와 우북평군의 속현 위치 비정 참조 바람
- ☞ 고구려 요동성의 절대위치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