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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석산(碣石山) 앞에 세운 연소왕(燕昭王)의 황금대(黃金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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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唐)대 시인 호증(胡曾, 840 ~ ?)이 지은 영사시(詠史詩) 150수를 동시대 사람 진개(陳蓋)가 주해하였다. 그 중 '황금대(黃金臺)'라는 제목의 시를 해석한 진개의 글은 《춘추후어(春秋後語)》에 나오는 한 일화를 인용하였는데, 그 내용에는 이제껏 알려지지 않았던 갈석산의 위치에 관한 중요한 사실이 기술되어 있다. 《春秋後語》는 서진(西晉) 과 동진(東晉)시대를 살았던 학자 공연(孔衍, 268 ~ 320)이 《전국책(戰國策)》의 저술이 완벽하지 못하다고 하여 사마천의 사기(史記)를 참고해 편찬했다고 하나 안타깝게도 책의 일부가 유실되어 지금은 온전히 전하지 않는다. 일거양득(一擧兩得)이란 고사성어가 《春秋後語》에서 유래되었다.

 

 

 



 

황금대 (黃金臺)

북으로 지친 말을 몰아 연나라에 이르렀건만 / 北乗羸馬到燕然

이곳에서 누가 다시 현자를 예우하리오 / 此地何人復礼賢

소왕을 찾고자 하였으나 왕의 처소는 없고 / 欲問昭王無處所

황금대위에 잡초만 하늘에 닿을 듯 / 黃金臺上草連天

 

 

후어(後語)에 이르기를.. 옛 연나라 쾌왕이 제나라 대왕에게 피살되었다. 연(燕)나라 소왕(昭王)이 이어서 즉위하여 대신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현사(賢士)를 얻어 똑같이 선왕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겠소?" 곽외(郭隗)가 답하였다. "왕께서 갈석산(碣石山) 앞에 누대를 지으시고 저(곽외)를 높여 현왕(玄王)으로 삼으시면 곧 왕께서 좋아하실만한 천하의 현사들이 반드시 스스로 찾아 올 것입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누대를 짓고 금옥으로 가득 채워 황금대(黃金臺)라 일컬었다. 後語云 昔燕噲王被斉大王所殺 燕昭王次立乃謂大臣曰 安得賢士与同大以報先王之? 郭隗曰 王能築臺於碣石山前 尊隗為玄王 即天下賢士以王好賢必自至也 王如其言作此臺 多以金玉崇之 号 黃金臺

 

『胡曾 詠史詩』('常熟瞿氏鐵琴銅劍樓藏景宋鈔' 本)의 '黃金臺' 및『春秋後語』인용 기사

 

 

 

'황금대'는 폐허가된 황금대의 유적지를 찾은 호증이 감회에 젖어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 시로서 짤막하지만 시의 역사적 배경을 모르고 읽으면 이해가 어려울 수도 있는데, 공연(孔衍)이 전한 일화가 도움이 된다.

 

여하튼 본글의 논점와 관련하여 위 《春秋後語》 인용 기사의 핵심되는 내용은 "연(燕)나라의 소왕(昭王)이 곽외(郭隗)의 권고에 따라 황금대(黃金臺)라는 누대(樓臺)를 지었는데, 그 누대를 세운 위치가 바로 다름 아닌 갈석산 앞"이라는 사실이다. 황금대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역현(易縣)의 연하도(燕下都)에 그 유지가 현존하며 아래《중국고금지명대조표(中国古今地名对照表)》 등의 자료에서 볼 수 있듯이 그 위치가 명확하다. 따라서 한국 고대사의 참된 영역을 찾는데 필수적인 요건임에도 불구하고 여태껏 지지부진했던 고대 갈석산의 실체 규명에 결정적인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서 《春秋後語》에 언급된 황금대 축조에 관한 기사는 대단히 중요한 문헌사료인 것이다.

 


황금대 - 연소왕(燕昭王)이 현사를 초빙하기 위해 세움. 지금의 하북 역현 동남의 북역수(北易水) 남쪽에 있다. 지금의 북경시, 서수, 만성, 정흥에도 두루 황금대가 있는데 후대 사람들이 차용한 것이다. 黃金台 - 燕昭王招賢所筑, 在今河北易縣東南的北易水南. 今北京市, 徐水, 滿城, 定興均有黃金台, 乃后人依托

中國古今地名對照表』'黃金台'


서기전 311년에 연소왕이 즉위하였다. 곽외(郭隗)의 협조하에 역수(易水) 곁에 황금대를 축조하였다. 널리 천하의 인재들을 불러들였는데, 악의(乐毅), 추연(邹衍), 극신(剧辛) 등이 찾아와 의탁하였다. 公元前311年, 燕昭王即位. 在郭隗的協助下, 於易水旁修筑黃金台, 廣招天下人才, 樂毅, 鄒衍, 劇辛等前來投奔 바이두 백과 - '燕昭王修筑黃金台'

 

 

『大淸廣輿圖』(1785), '곽외의 처소 황금대(黃金臺郭隗処)'가 보정시 역현 연하도의 위치에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다.

 

 

(안숙)현의 서북 25리에 장성(長城)이 있다. 예로부터 전하기를 진시황이 장군 몽염(蒙恬)무수로 보내 장성을 쌓았다고 한다. 長城在縣西北二十五里 舊傳秦始皇遣將蒙恬於武遂築長城

『安肅縣志』 (乾隆 43, 1778) 권2 '古蹟' 조항, **안숙(安肅)은 보정시 서수구(徐水區)의 옛 지명이다. **무수(武遂)는 서수구 수성진(遂城鎭)의 고대 지명이다.

 

광신군 치소는 수성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의 땅이다.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라 하여 수성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본조(송나라)가 군을 세웠다. 동쪽에는 안숙(安肅)군이 있고, 군에서 20리 서쪽에 장성이 있다. 廣信軍治遂城縣 戰國時武遂縣地 秦築長城所起因名遂城 本朝建軍 東至安肅軍 二十里西至長城

『武經總要』前集 권16 上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 이목장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燕)에서 남쪽으로 탁군의 북신성(北新城)에 이른다." 하였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 하였다. 후위의 무제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 25리에 있다. 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太平寰宇記』권68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史記索隱』권1 '夾右碣石' 조항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遂城鎭) 해촌(解村)의 장성 유지

 

 

황금대 관련 지명 위치도

 

 

황금대 유적이 자리한 연하도(燕下都) 남변의 역수(易水) 건너편에 근접해 있는 낭아산(狼牙山)의 위치는 "황금대는 애초에 갈석산을 염두에 두고 그 앞에 세워졌다."는 《春秋後語》의 기록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뿐만 아니라 낭아산의 5대 봉우리 중 하나인 과라타(科罗坨)로부터 시작된 장성(長城)유지가 동남 방향으로 이어져 지금도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남아있는 보정시(保定市)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鎭)에 이르기까지 실물로 존재하며, 진시황이 장수 몽염(蒙恬)을 보내어 수성진의 장성을 쌓았다고 명시한 문헌 기록 (위 《安肅縣志》, 武經總要》, 太平寰宇記》의 기사 참조) 까지 있다. 더구나 《春秋後語》의 저자 공연(孔衍)은 서진(西晉)및 동진(東晉) 시기의 학자이다. 즉 공연(孔衍)이 활동하던 때는 한국 고대사의 주요 논쟁거리 중 하나인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는 문구가 적힌 《태강지리지(太康地理志)》(282년, 서진 태강3년 저작) 가 저술되던 바로 그 시기이다. 따라서 공연(孔衍)과 《太康地理志》의 저자들은 갈석산에 관한 같은 지식을 공유했을 개연성이 높은 것이다. 이렇듯 모든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太康地理志》의 갈석산은 곧 《春秋後語》의 공연(孔衍)이 가리키는 갈석산 즉 보정의 낭아산이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아니, 가능성을 넘어 갈석산의 실체는 곧 낭아산인 것으로 거의 입증되었다고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

 

역수변에서 본 낭아산

 

 

참고로《春秋後語》의 황금대 관련 기사는 후대의 저작인 사고전서의 《흠정일하구문고(欽定日下舊聞考)》와 《수경주석(水經注釋)》에도 아래와 같이 호증(胡曾)의 영사시(詠史詩)와 대동소이하게 인용되어 있다.

 

추후어.. 연소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현사를 얻어 제나라에 원수를 갚을 수 있겠소?" 곽외가 답하였다. "왕께서 갈석산 앞에 누대를 지으시고 저(곽외)를 높여 스승으로 삼으시면 반드시 천하에 현사들이 스스로 찾아 올 것 입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누대를 짓고 금옥으로 채워 황금대라 일컬었다. 燕昭王曰 安得賢士以報齊讐 ? 郭隗曰 王能築臺于碣石山前 尊隗為師 天下賢士必自至也. 王如其言 作臺以金玉崇之 號 黃金臺
『欽定日下舊聞考』(1787) 권8,『春秋後語』의 기사 인용

 

 

춘추후어.. 연소왕이 물었다. "어찌하면 현사賢士를 얻어 제나라에 원수를 갚을 수 있겠소?" 곽외가 답하였다. "왕께서 갈석산 앞에 누대를 지으시고 저(곽외)를 높여 스승으로 삼으시면 반드시 천하에 현사들이 스스로 찾아 올 것 입니다." (왕이) 그 말을 따라 누대를 짓고 금옥으로 채워 황금대라 일컬었다. 燕昭王曰 安得賢士以報齊讐 ? 郭隗曰 王能築臺于碣石山前 尊隗為師 天下賢士必自至. 如其言 作臺以金玉崇之 號 黃金臺
『水經注釋』 (趙一淸, 1709 ~ 1764) 권11 '易水' 조항,『春秋後語』의 기사 인용

 

 

 

 

* 본글은 2016년과 2017년에 필자가 "마고의 노래" 및 "역사의병대" 다음 카페에 각각 올린 같은 주제의 글을 바탕으로 집필되었음

☞ https://cafe.daum.net/mago-net/TPR8/98

☞ https://cafe.daum.net/his-militia/XGnV/163

 

* 본글의 영문본은 이곳에 있음 ☞ King Zhao of Yan (燕昭王) builds Huangjintai (黃金臺) in front of Jieshishan (碣石山) mounta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