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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요동성의 절대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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遂城道中 (수성으로 가는 길 가운데서)
元(원) • 劉因(유인)

鐵城秋色接西垣,    견고한 성(城) 가을빛은 서쪽 담벽에 잇닿고, 
遠客還鄉易斷魂。    고향에 돌아온 원객(遠客)에 넋이 끊길 듯한 슬픔이 번진다.
霸業可憐燕太子,    가련하다 연태자의 패업(霸業)이여!
戰樓誰弔漢公孫。    한나라 공손(公孫)의 전루(戰樓)에 조문할 이 아무도 없는가?
冷煙衰草千家塚,    차가운 연기, 시든 잡초 무성한 천가총(千家塚),
流水斜陽一點村。    그리고 냇물이 흐르는 해질녁 마을 하나.
慰眼西風猶有物,    서풍은 불거진 눈을 오히려 달래주고,
太行依舊壓中原。    태행(太行)은 의구(依舊)히 중원(中原)을 누르고 있다.

 

원(元)대 보정의 토박이 시인 유인(劉因, 1249~1293)의 시 《遂城道中(수성으로 가는 길 가운데서)》는 그가 고향(보정 용성현容城縣)으로 가는 길에 지금의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의 수성(遂城) 유적지를 지나치며 감회에 젖어 세월의 덧없음을 노래한 시이다.

 

시의 내용 중 사료적으로 중요한 부분은 유인(劉因)이 수성(遂城)의 루대(樓臺)를 바라보며 '공손(公孫)의 전몰(歿)'과 연관지어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공손'은 주지하듯이 후한(後漢)말 일어나 요동을 차지하고 독립된 세력을 구축하였다가 삼국시기에 이르러 그 치소인 양평성(襄平城)이 위(魏) 사마의(司馬懿)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 공손씨(公孫氏) 정권을 가리킨다.

 

그 후 연나라에 현명한 장수 진개(秦開)가 있어 호(胡)에 볼모로 갔는데 호가 매우 신임했다. 돌아와 동호(東胡)를 습격해 격파하니 동호가 천여 리를 물러났다. 형가와 함께 진시황을 암살하려 했던 진무양이 진개의 손자이다. 연나라는 장성을 쌓기도 하였는데, 조양(造陽)에서 양평(襄平)까지이다. 상곡, 어양, 우북평, 요서, 요동군을 설치하여 호를 막았다.  其後燕有賢將秦開 爲質於胡 胡甚信之. 歸而襲破走東胡 東胡卻千餘里. 與荊軻刺秦王秦舞陽者 開之孫也.燕亦築長城 自造陽至襄平 置上谷 漁陽 右北平 遼西 遼東郡以拒胡.
『史記』 '匈奴列傳'

더구나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는 전국시대 연장성(燕長城)의 동쪽 기점이 있다.
그렇다면 유인(劉因)은 수성진의 수성(遂城)이 곧 공손씨 정권의 마지막 수장인 공손연(公孫淵)이 결사 항전 끝에 사마의에 패하여 그의 일족 및 백성 수천과 더불어 최후를 맞은 곳, 즉 한(漢) 요동군의 양평성(襄平城)인 것으로 인식한 것이 분명하다.

 

공손연은 남쪽의 포위를 공격하여 돌파했으나 선제가 군사를 이끌고 추격하여 쳐부수고, 유성이 떨어진 양수(梁水)에서 그를 참하였다. 성에 들어간 후 두개의 푯말을 세워 젊은이와 늙은이를 구분하고, 15세 이상 남자 7천여 명을 모두 죽여 경관(京觀)을 만들었다.  文懿攻南圍突出,帝縱兵擊敗之,斬于梁水之上星墜之所。既入城,立兩標以別新舊焉。男子年十五已上七千餘人皆殺之,以為京觀。
『晉書』  권1, 宣帝紀

 

또한 유인(劉因)이 수성(遂城)을 지나며 본 천가총(千家塚)은 수 많은 사람이 함께 묻힌 큰 무덤을 말하는 듯한데, 이는 晉書(진서) '선제기(宣帝紀)'에, 양평성(襄平城) 함락 후 15세 이상 남자 7,000여 명을 죽여서 만들었다고 전하는 경관(京觀)을 가리키는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유인이 살던 13세기까지도 그 흔적이 수성 인근에 남아있었던 듯하며, 유인은 폐허가 된 수성과 함께 경관을 바라보며 양평성의 참혹한 최후를 안타까워했던 것이다.

 

[경초(景初)] 2년 봄에 조정에서는 태위 사마의(司馬懿)를 보내 공손연을 토벌하도록 했다. 6월, 군대가 요동(遼東)에 도착하니, 공손연은 장군 비연과 양조 등을 파견해 보병 과 기병 수만 명을 요수(遼隧)에 주둔시켰으며, 주위에 20리 이상 참호를 팠다. 사마의의 군대가 도착한 후, 공손연은 비연에게 명령하여 맞아 싸우도록 했다. 사마의는 장군 호준 등을 보내어 그들을 쳐부수게 했다. 사마의는 군대에 명령을 내려 주위에 참호를 파도록 하고, 군대를 이끌고 동남 쪽으로 달려가다가, 동북쪽으로 급히 방향을 돌려 즉시 양평(襄平)으로 달려갔다. 비연 등은 양평(襄平)이 무방비 상태로 있음을 걱정하고 밤중에 달아났다. 사마의의 군대는 수산으로 나아갔으며, 공손연은 또 비연 등을 다시 보내어 위나라 군사와 사력을 다해 싸웠다. 다시 공격해 크게 무찌르고, 드디어 성 아래까지 진군하여 주위에 참호를 팠다. 마침 30여 일간 장맛비가 내려 요수(遼水)가 불어났으므로, 운송선이 요수 입구(遼口)에서 성 아래 까지 직행했다. 비가 그치자, 사마의는 흙산을 쌓고 누대를 만들어, 그 위에서 연발식 화살을 성안으로 쏘았다. 공손연은 급박해졌다. 성안에는 양식이 다 떨어져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지경에 이르렀으며 죽은 자가 매우 많았고, 장군 양조 등은 투항했다. 8월 병인(丙寅)일 밤에 길이가 수십 장 되는 큰 유성이 수산의 동북쪽에서 양평성(襄平城) 동남쪽으로 떨어졌다.  二年春,遣太尉司馬宣王征淵。六月,軍至遼東。淵遣將軍卑衍、楊祚等步騎數萬屯遼隧,圍塹二十餘里。宣王軍至,令衍逆戰。宣王遣將軍胡遵等擊破之。宣王令軍穿圍,引兵東南向,而急東北,即趨襄平。衍等恐襄平無守,夜走。諸軍進至首山,淵復遣衍等迎軍殊死戰。復擊,大破之,遂進軍造城下,為圍塹。會霖雨三十餘日,遼水暴長,運船自遼口徑至城下。雨霽,起土山、脩櫓,為發石連弩射城中。淵窘急。糧盡,人相食,死者甚多。將軍楊祚等降。八月丙寅夜,大流星長數十丈,從首山東北墜襄平城東南。
『三國志』   魏書 권8, 二公孫陶四張傳

더불어 《三國志(삼국지)》 '위서(魏書)'에 따르면 서기 238년, 사마의(司馬懿)의 공격 당시 전쟁 물자를 실은 배가 요수(遼水)를 따라 양평성(襄平城) 아래까지 도달하였다고 했는데, 양평성이 수성진(遂城鎮)의 수성(遂城)이라면 당시(전, 후한 및 삼국시기)의 요수(遼水)는 수성(遂城)에 근접하여 동남 방향으로 서수구(徐水區) 일대를 흐르는 지금의 폭하(瀑河) 즉 남역수(南易水)가 틀림없다.

 

연나라는 진나라가 머지않아 6국을 멸망시키고, 진나라의 군대가 역수(易水)까지 밀어닥쳐 화가 연나라에 미칠 것을 알았다. 태자 단은 몰래 장사 20명을 기르고 형가(荊軻)를 보내 독항(督亢)의 지도를 [진나라에] 바치면서 기습적으로 진왕을 찌르게 했다. 진왕이 이를 알아채고 형가를 죽이고는 장군 왕전(王翦)을 보내 연나라를 공격했다. 29년에 진나라가 연나라의 도성 계(薊)를 빼앗자, 연왕은 요동(遼東)으로 도망쳐서는 태자 단의 목을 베어 진나라에 바쳤다. 30년(서기전 225년)에 진나라가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33년(서기전 222년)에 진나라가 요동을 빼앗고, 연왕 희(喜)를 사로잡아 마침내 연나라를 멸망시켰다.  見秦且滅六国, 秦兵臨易水, 禍且至燕. 太子丹陰養壮士二十人, 使荊軻献督亢地図於秦, 因襲刺秦王. 秦王覚, 殺軻, 使将軍王翦撃燕. 二十九年, 秦攻抜我薊, 燕王亡, 徙居遼東, 斬丹以献秦. 三十年, 秦滅魏. 三十三年, 秦抜遼東, 虜燕王喜, 卒滅燕.
『史記』  권34 燕召公世家

유인(劉因)이 아울러 언급한 '연태자(燕太子)의 패업(霸業)'이란 곧 연태자 단(丹)이 주도하여 실행하였으나 실패로 끝난 진시황(秦始皇) 암살미수 사건을 가리킨다. 《史記(사기)》 '연소공세가(燕召公世家)'에 따르면 이로 말미암은 진시황의 공격을 피해 계(薊)에서 요동(遼東)으로 달아난 연왕(燕王) 희(喜)가 그곳에서 자신의 아들 단(丹)의 목을 베어 진(秦)에 바친 댓가로 연(燕)은 몇년 더 버틸 수 있었으나 결국에는 진(秦)에 멸망 당하였다. 유인은 수성(遂城)을 연태자 단의 목이 잘린 곳(즉 요동성)으로 당연히 인식하였으므로 그곳을 지나치며 몹시 애달퍼했던 것이다.

 

보정에서 태어나고 자란 토박이 지식인이었던 만큼 유인은 그 지역의 역사와 유적 등에 매우 박식하였을 것으로 여겨지는 바, 그의 생각은 옳았을 것이다.

 

 

사진 1 - 徐水遂城古城遗址(서수 수성 고성유지)의 허물어진 성벽



다시 소부감 하조에게 명하여 다리를 잇게 하여 이틀만에 완성하였으므로, 여러 군대가 차례로 이어서 나아가 동쪽 언덕에서 크게 싸웠는데, 고[구]려 군사들이 크게 패하여 죽은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여러 군대가 승세를 타고 나아와서 요동성 을 포위하니 곧 한나라의 양평성이었다.  更命少府監何稠接橋,二日而成,諸軍相次繼進,大戰於東岸,高麗兵大敗,死者萬計。諸軍乘勝進圍遼東城,即漢之襄平城也。
『資治通鑑』  권 181 隋紀 5 煬皇帝 大業8년(612) 2월 癸巳, 上

주지하다시피 요동성은 고구려-수(隋)•당(唐) 전쟁 당시에 중원에서 비롯된 침략세력의 주요 공격 목표들 중 하나였다. 위 《資治通鑑(자치통감)》 권 181 '수기(隋紀)'에 밝혀져 있듯이 고구려의 요동성은 곧 한(漢) 요동군의 치소인 양평성(襄平城)과 같은 곳으로서, 필자는 이미 수(隋) 및 당(唐)군이 공격한 고구려 요동성을 지금의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일대에 비정한 바 있다. 그런데 이제 유인(劉因)이 남긴, 보다 직접적인 증빙 사료를 추가로 찾았으니 고구려 요동성 및 한(漢) 요동군 양평성의 절대위치를 수성(遂城)에 지정할 수 있다고 본다.


  1. ☞ 요수(遼水)와 요택(遼澤) 그리고 마수산(馬首山),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위치 참조 바람
  2. ☞ 요수(遼水)와 요동고새(遼東故塞), 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선 참조 바람
  3. 선제(宣帝): 진 고조 선황제 사마의(晉 高祖 宣皇帝 司馬懿, 179년 ~ 251년 8월 5일)는 중국 삼국시대 조위(曹魏)의 관료이자 서진(西晉)의 추존(追尊) 황제이다.
  4. 경관(京觀): 큰 구경거리라는 뜻으로 전공(戰功)을 보이기 위하여 전쟁이 끝난 뒤에 적의 시체를 쌓아 올리고 흙을 덮은 큰 무덤.
  5. ☞ 진개(秦開) 연장성(燕長城)의 기점 조양(造陽)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의 자형관(紫荊關) 일대에 있었다 참조 바람
  6. 문의(文懿): 공손연의 자(字)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