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수(遼水)와 요동고새(遼東故塞), 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선
카테고리 없음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선은 패수가 아니다.
조선왕 만(滿)은 옛날 연(燕)나라 사람이다. 처음 연(燕)나라의 전성기로부터 일찍이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복속시키고, 관리를 두어 국경에 성과 요새를 쌓았다. 진(秦)이 연(燕)을 멸한 뒤에는 [그곳을]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소속시켰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다시 요동의 옛 요새를 수리하고 패수(浿水)에 이르는 곳을 경계로 하여 연(燕)에 복속시켰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 至浿水爲界 屬燕
『史記』 '朝鮮列傳' (국사편찬위원회 해석)
조선왕 만(滿)은 옛 연(燕)나라 사람이다. 연(燕)나라의 전성기에 비로소 처음 진번(眞番)과 조선(朝鮮)을 침략하여 [연(燕)에] 속하게 하고, 관리를 두고 요새를 쌓았던 적이 있었다. 진(秦)이 연(燕)을 멸하자 [그곳은] 요동외요(遼東外徼)에 속하게 되었는데, 한(漢)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패수(浿水)에 이르기까지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손질하여 복구시키고, [요동고새를] 경계로 삼아 [요동외요 이서(以西) 지역을] 연(燕)에 속하게 하였다. 朝鮮王滿者 故燕人也 自始全燕時 嘗略屬眞番 朝鮮 爲置吏 築鄣塞 秦滅燕 屬遼東外徼 漢興 爲其遠難守 復修遼東故塞至浿水 爲界 屬燕
『史記』 '朝鮮列傳' (필자 해석)
주지하듯이 위 《史記(사기)》 '조선열전'의 기사는 고조선과 한(漢) 사이의 경계 위치를 알려주는 대단히 중요한 1차 사료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 경우와 같이 해당기사에 대한 거의 모든 학자들의 해석은 고조선과 한(漢)의 경계를 패수(浿水)와 결부시키고 있다. 이에 따라 패수가 고조선-한(漢) 국경선이라는 막연한 생각은 강단, 재야를 막론하고 분문율이 되다시피 하였다. 문제는 이러한 해석이 잘못된 것이라면 이는 한국고대사에 중요하기 그지없는 패수를 찾는 노력에 불필요하고도 중대한 혼선을 불러온다는데 있다. 이를테면 「주요 국가들간의 국경이니 만큼 패수는 일단 크고 긴 하천이어야한다」는 선입견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지도 1 - 요수와 요동고새의 위치, 본 지도 출처: Karte von Tschili und Schantung, 1907
요동고새와 요수는 같은 곳에 있었다.
필자는 '조선열전' 기록상의 '패수'는 단지 한(漢)이 들어서며 이루어진 요동고새(遼東故塞) 복구 공사의 지리적 범위를 적시할 뿐, 기록이 명료하게 전하는 고조선과 한(漢) 두나라 사이의 국경선 그 자체는 패수가 아닌 요동고새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해당 문구「復修遼東故塞至浿水」가운데 「至浿水(패수에 이르렀다)」부분의 주어는 두말할 필요 없이 「복구 공사 완료 이후의 요동고새(遼東故塞)」인 것이다.
필자의 이러한 견해는 아래에 소개하는, 후한 말의 학자 순열(荀悅, 148~209)이 편찬한 《前漢紀(전한기)》의 기사와 그에 대한 분석에 의하여 뒷받침된다.
조선왕이 배반하여 요동태수를 죽이니, 온 나라의 사형수들을 모집하여 조선을 공격했다. 조선은 본래 진(秦)시기 요동에 속했었는데, 漢(한)이 일어나서는 그곳이 멀어 지키기 어려우므로 요수(遼水)를 새(塞)로 삼았다. 朝鮮王反 殺遼東太守 募天下死罪擊朝鮮 朝鮮本秦時屬遼東 漢興以為其遠難守 故遼水為塞
『前漢紀』 권14 孝武5 元封 2년 4월
《前漢紀》의 기사는 《史記》 '조선열전'의 기사와 거의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다. 단, 「요수(遼水)를 새(塞)로 삼았다」는 《史記》 '조선열전'에는 없는 기록인데, 하천(요수)을 새(塞), 즉 군사적 방위를 목적으로 축조된 구조물로 삼았다니 이게 도대체 무슨 말인지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건 사실이다. 또한 통설에 따라 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을 패수로 본다면 이는 얼핏 「요수와 패수는 동일한 하천」이라는 뜻으로 잘못 해석될 소지도 있는 문구이다.
그러나 숙고해 보면, 《前漢紀》의 기록 「요수(遼水)를 새(塞)로 삼았다」의 '새(塞)'는 《史記》에 「요동고새(遼東故塞)를 손질하여 복구시키고...」의 '요동고새'에 상응하는 것이 분명하며, 기록의 내용은 곧 요동고새와 요수가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는 사실을 뜻함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요수라는 하천과 그 위치를 같이한 기록상의 요동고새는 보편적인 요새가 아닌, 하천과 같이 길게 뻗어 이어진 군사시설, 즉 장성(長城)을 뜻함이 틀림없다.
필자는 이전 글에서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서수구(徐水區) 및 용성현(容城縣) 일대를 가로지르는 연장성(燕長城, 이른바 연남장성燕南長城 또는 역수장성易水長城)이 바로 《史記》 '조선열전'의 요동고새(遼東故塞)라 주장한 바 있다. 낭아산(狼牙山) 동북쪽 끝자락의 과라타(科羅坨) 제2 봉우리에서 시작하여 서수구 수성진(遂城鎮)을 거쳐 계조하(鷄爪河, 즉 패수)에 접한 용성현 흑룡구촌(黑龍口村)까지 이어진 연장성은 '역수장성'이라는 별칭이 말해주듯이 상당부분의 구간에서 역수(즉 남역수南易水)의 유로에 밀착되어 축조되었다. (지도1 및 각주② 참조) 실제로 연장성은 홍수때에 남역수의 범람을 막아주는 제방의 역할도 겸하였었다.
사진 1 - 허물어진 연장성(燕長城) 유적, 장성의 서북쪽 기점인 과라타(科羅坨)의 주봉이 멀리 보인다.
사진 2 - 연장성(燕長城) 유지 표지석
사진 3 - 남역수(南易水) 상류, 발원지 인근의 과라타(科羅坨) 주봉이 멀리 보인다.
필자의 이러한 주장을 상기 《前漢紀》의 기사에 관련지어 생각해 보면 「남역수(南易水)를 따라 축조된 연장성(燕長城)」은 곧 「요수(遼水)를 따라 축조된 요동고새(遼東故塞)」와 절묘히 상통함을 즉시 깨닫게 되는데, 이는 물론 「남역수가 바로 고대의 요수」라는 조건하에서 이끌어낼 수 있는 추론에 기반한다.
그렇다면 과연 남역수(南易水)가 고대의 요수(遼水)였다는 가정에 대한 근거는 있는 것인가?
놀랍게도 유력한 정황들이 있다.
남역수 강변에 요수촌이 있다.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일대를 동남 방향으로 흐르는 남역수(南易水) 강변에 요수촌(潦水村)이라는 마을이 현존한다. (지도1, 2 참조) 요수촌이 남역수에 바로 접하여 있다는 사실은 남역수가 과거에 '요수(潦水)'로 불렸음을 강력히 시사한다.
지도 2 - 필자가 보정시 역현(易縣)에 위치한 '潦水(요수)'라는 지명을 발견하고 2017년 5월, '역사의병대' 카페를 통해 해당 정보를 공유한 글
요수(潦水)는 위고(衛皐) 동쪽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발해에 유입되며 요양(潦陽)으로 들어간다. 潦水出衛皐東 東南注渤海 入潦陽
『山海經』 '海內東經'
고구려현, 요산(遼山)에서 요수(遼水)가 나온다. [《山海經(산해경)》에서 말하기를 요수(遼水)가 백평(白平)의 동쪽에서 나온다 하였다.] 髙句驪 遼山遼水出 [山海經曰 遼水出白平東]
『後漢書』 郡國志 '幽州' '玄菟郡'
단, '潦水村'의 '潦'가 '요수(遼水)'에 보편적으로 쓰이는 '遼'와는 [비슷한 모양이지만] 다른 글자인데, 똑 같이 위고(衛皐, 즉 白平)의 동쪽에서 발원하는 요수를 두고 《山海經(산해경)》 '해내동경'에는 '潦水'로, 《後漢書(후한서)》 '군국지'에는 '遼水'로 각각 기록한 것으로 미루어 '遼水' 는 사서에 '潦水'로도 적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고조선 시기의] 潦水는 곧 遼水이다.
[위]백평산은 어디인가?
남역수(南易水)는 연장성(燕長城)의 서쪽 기점인 역현(易縣)의 과라타(科羅坨)산 동쪽 인근에서 발원하여 서수구(徐水區)를 거쳐 [한(漢)대 이전에는 발해만의 바다였던] 용성현(容城縣)에 이르기까지 거의 대부분의 구간을 대략 동남 방향으로 흐른다. (지도1 참조) 또한 서수구 및 정흥현(定興縣) 일대에는 역사상 요양(潦陽, 즉 遼陽)이라는 지명이 존재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들은 《山海經》 '해내동경' 기록의 내용에 적절히 부합한다.
사진 4 - 과라타(科羅坨, 전경의 오른쪽 상단), 보정(保定) 낭아산(狼牙山)의 5대 봉우리들 중 하나이다.
위고(衛皐)는 곧 [위(衛)]백평(白平)산을 말하는데, 남역수(南易水)가 고대의 요수인 것이 틀림없다면, 남역수의 발원지 부근 서쪽에서 그 위용을 드러내며 우뚝 서있는 과라타(科羅坨)가 [위]백평산의 실체일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사진3, 4, 5 참조). 참고로, 과라타는 흰색의 돌산이고 (사진6 참조), 그 주봉의 꼭대기는 넓고 비교적 평평하며, 사방의 경사면은 거의 절벽에 가까울 정도로 가파른데, 지리학적 형태를 구분하자면 메사(mesa)와 흡사하다. (사진5 참조) 다시 말하자면, 과라타의 주봉은 '衛皐(언덕을 지키다)' 또는 '衛白平(평평한 흰색 [언덕]을 지키다)'과 관련이 있을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
사진 5 - 과라타(科羅坨), 주봉이 뭉툭한 언덕의 모습이다.
사진 6 - 과라타(科羅坨), 흰색의 돌산이다.
요수는 갈석산에서 발원한다.
요수(遼水)는 갈석산(碣石山)에서 발원하여 새(塞)의 북쪽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요동의 서부와 만나고 남쪽으로 바다에 들어간다. 遼水出碣石山 自塞北東流 直遼東之西 南入海
『淮南子』 '墬形訓' 高誘 註
고구려의 국토는 사방 약 2천리이다. 국토 가운데 요산(遼山)이 있고, 요수(遼水)가 그곳에서 발원한다. 句驪地方可二千里 中有遼山 遼水所出
『梁書』 권 54
요수(遼水)는 지석산(砥石山)에서 발원한다고 말하기도 한다. 새(塞) 밖으로부터 동쪽으로 흘러, 요동군(遼東郡) 망평현(望平縣)의 서부과 만난다(直). 왕망의 장설(長説)이다. 遼水亦言出砥石山 自塞外東流 直遼東之望平縣西, 王莽之長説也.
『水經注』 권 14
앞서 소개한 《山海經》 '해내동경(海內東經)' 및 《後漢書》 '군국지(郡國志)'의 기사들과 더불어 《淮南子(회남자)》, 《梁書(양서)》, 《水經注(수경주)》 등의 사료에 따르면 요수(遼水)는 [위(衛)]백평(白平)산, 요(遼)산, 지석산(砥石山), 또는 갈석산(碣石山)에서 발원하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다소 복잡하게 얽혀 있는 듯하지만, 기록들을 곰곰이 분석해 보면 해당 산명(山名)들이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킴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특히 《淮南子》의 기록에 보이는 '새(塞)'는 곧 앞서 논의한 《前漢紀》의 '새(塞)'이자 《史記》 '조선열전'의 '요동고새(遼東故塞)'로 봄이 마땅한데, 실제로 요동고새로 비정되는 연장성(燕長城)의 북단 부근에서 발원하여 동, 남, 및 동남 방향으로 흘러 당시의 발해만에 유입되던 남역수의 흐름과 지리적 여건은 해당 기록상의 요수와 관련된 서술 내용에 부합한다.
따라서 이미 고대의 갈석산으로 밝혀진 보정 낭아산의 5대 봉우리 가운데 하나인 과라타(科羅坨)의 동쪽 인근에서 발원하는 남역수(南易水)가 고대의 요수일 개연성은 대단히 높다.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지나간 장성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碣石山在漢樂浪郡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而入高麗 遺址猶存
『通典』 ‘邊防’ 1
남역수(南易水)는 북↓남 방향으로 흘러 보정시 역현(易縣) 요수촌(潦水村)을 경과한 뒤 당호진(塘湖鎮) 부근에서 서→동 방향으로 이어지는 연장성(燕長城)과 교차한다. 이는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를 끊는다는 《通典(통전)》의 기록에 정확히 일치한다. (지도1 참조)
안시성과 요수의 상대적 위치
살펴보건대 고구려 때의 도읍은 안시성이며, 다른 이름은 안정홀이니 요수의 북쪽에 있었다. 按麗時都安市城 一名安丁忽在遼水之北
『삼국유사』 제3권 興法 제3 순도조려(順道肇麗)
안시성(安市城)이 요수(遼水)의 북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중국측의 사료에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일연선사는 아마도 지금은 유실되고 없는, 고구려 또는 발해로부터 전래된 사료를 접하고 위 기사를 《삼국유사》에 남긴 것이 아닌가 한다. 여하튼, 고대의 요수를 남역수(南易水)에 비정하고 보면 필자가 이전 글에서 밝힌 역현(易縣) 봉황산(鳳凰山)의 안시성(安市城)은 [지엽적인 남역수 최상류 구간을 제외하면] 명확히 요수의 북쪽에 위치한다. (지도1 참조) 따라서 위 《삼국유사》의 기사는 안시성의 '역현 봉황산 비정'에 대한 교차검증이 됨은 물론이고, 요수의 '남역수 비정'에 대한 신뢰성 역시 더하여 준다.
[대요수는] 또 동쪽으로 흘러 안시현 서남쪽을 지나고 바다로 들어간다. 又東過安市縣西南 入于海
『水經』 '大遼水'
아울러 요수(遼水)가 안시현의 서남쪽을 지난다고 한 《水經(수경)》의 기록 또한 안시현(安市縣)과 안시성(安市城)을 동일한 위치로 볼 경우, 역현(易縣) 봉황산(鳳凰山)과 남역수(南易水)의 상대적 위치에 정확히 일치한다. (지도1 참조)
요수의 길이는 1,250리인가?
망평현(望平縣) [대요수(大遼水)가 새(塞) 밖을 나와서 남쪽으로 안시현(安市縣)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가는데 1,250리를 흐른다. 왕망은 장설(長說)이라고 했다. 사고(師古)가 말하기를 '説'은 '열(悦)'로 읽는다고 했다.] 望平 [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莽曰長說 師古曰説讀曰悦]
『漢書』 권28下 地理志 제8下, 班固 (32~92)
漢書地理志 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 行一千二百五十里 『欽定滿洲源流考』 권15, 1778
漢志 望平縣 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禹貢錐指』 권2, 胡渭 1702
漢書地理志 望平縣 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 行一千二百五十里 『大清一統志』 권38, 1744
後漢書 地理志注 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欽定盛京通志』 권28, 1779
遼水 漢志 遼東郡 望平縣 大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水經注釋』 目錄, 1786
漢志 望平縣 遼水出塞外南至安市入海 行千二百五十里 『行水金鑑』 권86, 1725
《漢書(한서)》 '지리지' '유주(幽州) 요동군(遼東郡) 망평현(望平縣)' 조항의 주석에 요수(遼水)의 길이가 1,250리로 기록되어 있다. 역사학계는 기록에 대한 별다른 사료비판 없이 그 내용을 기정사실로 받아들이고 해당 기록을 통설상 고대의 요수로 비정되는, 비슷한 길이의 현 요녕성 의 요하(遼河)가 실제로 역사상의 요수였음을 뒷바침하는 사료로 인정하는 듯하다. 그런데 문제의 《漢書》 '지리지' 주석글이 과연 《漢書》가 편찬되던 후한(後漢) 시기의 사료가 맞는 것인지 의심이 드는 정황이 있다.
필자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漢書》 '지리지'를 인용하여 요수의 길이를 1,250리로 기록한 후대의 사서들에는 《欽定滿洲源流考(흠정만주원류고)》, 《禹貢錐指(우공추지)》, 《大清一統志(대청일통지)》,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 《水經注釋(수경주석)》 및 《行水金鑑(행수금감)》을 포함한 총 6종이 있는데, 희한하게도 해당 사서들 모두가 하나같이 18세기 청(淸)대의 저작들이다. 요수의 길이를 1,250리로 기록한 《漢書(한서)》 '지리지'의 주석글이 후한(後漢) 시기에 비롯된 것이 맞다면 1,700여 년의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응당 후대 여러 시대의 사서들에서 고루 인용되었어야 하거늘 인용기록들이 죄다 18세기 청(淸)대에 몰려있는 것은 대체 무슨 조화인가? 명확한 증거를 들어 밝히기는 어려울 듯하지만, 후대의 사서들이 인용하였다는 《漢書》 '지리지'의 주석글 자체 역시 고대의 요수(遼水)가 현 요하(遼河)의 위치로 지명 이동된 이후의 지리 인식에 맞추어 후대에 가필되었을 정황은 농후하다.
요수의 시원지 갈석산은 발해만의 해안 부근에 있었다.
견산과 기산을 인도하여 형산에 이르렀고, 황하를 건너 호구와 뇌수를 거쳐 태악에 이르렀으며, 지주와 석성으로부터 왕옥에 이르렀으며, 태행과 항산을 거쳐 갈석에 이르러 바다에 들어가게 하였다. 導岍及岐 至于荊山 逾于河 壺口 雷首 至于太岳 底柱析城 至于王屋 太行恒山 至于碣石 入于海
『書經』 '夏書 禹貢'
안사고가 말하기를 「태행산은 하내 산양현의 서북쪽에 있다. 항산은 상곡양현 서북쪽에 있다. 두 산이 동북쪽으로 이어져 길게 뻗어, 갈석과 접하여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師古曰 太行山在河内山陽西北 恆山在上曲陽西北 言二山連延東北 接碣石而入于海
『漢書』 권 28上, ‘地理志’
태행과 항산은 갈석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공안국이 말하기를 「이 두산이 동북쪽으로 이어져 길게 뻗어, 갈석과 접하여 창해로 들어간다」 하였다.] 太行常山至于碣石入于海 [孔安國曰 此二山連延東北 接碣石而入于滄海]
『史記集解』 권 2
갈석은 요서의 경계가 되는 바다 서쪽 해변에 있다. 조선은 낙랑의 현이다. 竭石在遼西界海水西畔 朝鮮樂浪之縣也
『淮南子』 '時則訓' 髙誘 注
치수와 공부를 살펴보면 제도(帝都, 기주)로부터 시작했다. 황하는 승주 동쪽에서 시작하여 곧바로 남으로 화음에 이른다. 또 동쪽으로 회주 남쪽에 이르고, 또 동북으로 평주 갈석산에 이르러 바다로 들어간다. 동하의 서쪽, 서하의동쪽, 남하의 북쪽이 모두 기주이다. 按理水及貢賦從帝都爲始也 黃河自勝州東 直南至華陰 卽東至懷州南 又東北至平州碣石山入海也 東河之西 西河之東 南河之北 皆冀州也
『史記正義』 권 2
요수(遼水)의 시원지인 갈석산은 여러 사서들에서 확인되듯이 고대 발해만의 해안 부근에 있었다. 즉, 요수는 바다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발원하여 곧장 바다에 유입되는 짧은 길이의 물줄기이었을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요수의 길이가 《漢書》 '지리지'의 주석글대로 1,250리였다면 이는 논리적으로 요수가 내륙 깊숙한 곳에서 발원했음을 의미하고, 결국 요수의 시원지인 갈석산이 바닷가 부근에 있었다는 사실과 모순된다.
아울러, 통설상 고대의 요수(遼水)에 비정된 현 요녕성의 요하(遼河)는 동서로 나뉘어, 내몽골의 내륙 고원 및 길림성 서부 산간 지역에서 각각 발원하는데, 양 발원 지역 모두 고대, 근대를 막론하고 바다에서 가까웠던 적이 전혀 없던 곳이므로 그곳에 갈석산이 있었을 리 또한 만무하다.
결어
《前漢紀》의 기록대로 같은 위치에 함께 존재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면서 고조선과 한(漢) 사이의 국경선이 될수 있는 요동고새(遼東故塞)와 요수(遼水)의 실체로서,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서수구(徐水區) 및 용성현(容城縣) 일대를 상호 근접하여 평행선을 이루며 가로지르는 연장성(燕長城)과 남역수(南易水)의 조합이 한반도, 만주 및 중국 대륙 전체를 통틀어 유일무이하다. 따라서 고조선 시기의 요수(遼水)는 하북성 보정의 남역수(南易水)이다.
- 한(漢)의 후국
- 요동고새와 패수의 지리적 관련성에 관하여는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 지도 6 참조 바람
- 조선의 비왕(裨王) 장(長)을 살해한데 대한 보복으로 응징하여 죽인 섭하(涉何)는 요동태수가 아닌 요동동부도위(遼東東部都尉)였다.
- 「『전한기』는 후한 헌제가 『한서』의 문장이 번잡하고 읽기가 난해하여 198년 荀悅(149~209)에게 명하여 기전체의 『한서』를 1/4분량의 편년체인 『(前)漢紀』로 편찬한 것이다. 주지하듯이 『한서』 조선열전은 『사기』 조선열전을 거의 그대로 전재한 것이다. 따라서 『전한기』에는 『한서』 저술 당시의 역사지리 인식이 반영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박준형, 『고조선 패수의 위치』, 2016년 상고사 토론회 (2016. 6. 21) 자료집 98쪽
- 「塞는 邊境에 설치하는 인위적인 군사시설이므로 한의 직접지배지역인 요동군의 관할 범위는 遼東故塞[邊塞]가 설치된 지점까지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자연하천을 인위적 군사시설인 塞로 삼았다고 하는 『전한기』의 기록은 이해가 잘 안되는 측면이 있다.」 박준형, 『고조선 패수의 위치』, 2016년 상고사 토론회 (2016. 6. 21) 자료집 99쪽
- 「 『漢紀』는 기본적으로 『사기』, 『한서』의 기록에 기초하였으므로 .... '遼水'를 塞로 삼았다는 표현은 "遼東[郡]의 옛 邊塞를 다시 수리하였다"는 구절과 상통한다. 그렇다면 한초에 수리한 옛 邊塞는 '遼水'에 위치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송진, 2014, 『戰國․秦․漢時期 遼東郡과 그 경계』, 한국고대사연구 76 (2014. 12) 88쪽.
-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이동(以東)의 장성은 전국(戰國)연(燕)이 망한 이후 시기에 축조되었으므로 엄밀히 말하자면 연장성(燕長城)이 아니다.
- '皐'는 '白平'을 한 글자로 축약한 것이다.
-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이다. 낙랑군 패수(浿水)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 mesa(메사) : 꼭대기는 평평하고 등성이는 벼랑으로 된 언덕
- 갈석산과 낭아산에 관하여는 ☞ 갈석산 앞에 세운 연소왕의 황금대, ☞ 당대의 기록으로 본 갈석산의 바른 위치 및 ☞ 안사의 난 안록산 반란사건의 본거지 갈석산 참조 바람
- 《삼국유사》 '순도조려'에 기록된 '요수'는 고구려-수당(隋唐) 전쟁 당시의 요수(지금의 조하漕河)와는 별개의 하천인 고구려 초기의 요수(지금의 남역수南易水)를 가리키는 것으로 판단한다.
- 역현(易縣)의 봉황산(鳳凰山)과 안시성에 관하여는 ☞ 안시성(安市城)과 주필산(駐蹕山), 새로 밝혀지는 위치 참조
- '後漢書'는 '漢書'의 오기인 듯함
- ☞ 고구려 요동성의 절대위치 참조 바람
- ☞ https://cafe.daum.net/his-militia/XD7r/79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