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동강(混同江)은 고대의 요수(遼水) - 금나라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는 보정에 있었다.
카테고리 없음필자는 이전 글에 혼동강(混同江)[과 더불어 압록수, 흑룡강, 속말수]의 실체는 보정의 今 폭하(瀑河), 즉 남역수(南易水)라는 견해를 피력하였다. 혼동강을 今 북만주의 송화강(松化江)으로 보는 학계의 통설과 매우 동떨어진 주장이다 보니 아마도 이를 대하는 대부분의 독자분들께서는 "이게 뭔 엉뚱한 소리인가?" 하셨을 것으로 짐작한다. 사실 필자 역시 전혀 예상치 못하였던 연구 결과였던 터라 다소 망설여졌던 것도 사실이지만, 사료의 논리적 분석과 아울러 정황의 개연성 검토에 따른 결론대로 해당 글을 발행하였었다. 그런데 최근 이 견해를 뒷바침하는 유력한 사료를 추가로 발견하여, 이를 소개하고 금(金)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의 위치 비정과 결부하여 간략히 논해보기로 한다.
혼동강은 고대의 요수, 즉 보정의 남역수가 틀림없다.
혼동강(混同江)은 그 시원(始原)을 알 수 없으나, 금(金)의 옛 둥우리가 이에 곧바르게 임하여 있다. [혼동]강은 비스듬히 동남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데, 그 하류가 요해(遼海)로 된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는 이 강물이 나눈 [땅을] 가리킨다. 混同江不知其所出,金舊巢正臨此。江斜迤東南流入海,其下爲遼海。遼東、遼西,指此水而分也。
『朱子語類』 권79, (南宋) 黎靖德 撰
남송(南宋)의 여정덕(黎靖德)이 저술한 《朱子語類(주자어류)》의 놀라운 위 기사를 살펴보자. 참고로, 《朱子語類》는 명(明)•청(淸)대의 역사 조작이 본격적으로 진행되기 이전인 송(宋)대의 저작이므로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할 수 있다.
《朱子語類》에 혼동강(混同江)이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를 나눈다고 하였으니, 이는 혼동강이 곧 고대의 요동과 요서를 상호 구분하는 경계로서의 요수(遼水)라는 말에 다름 아니다.
고대(즉 漢대)의 요수가 요(遼)•금(金) 시기에 이르러 '혼동강'으로 불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다음의 의문이 떠오를 수 밖에 없다.
현 학계에서 혼동강으로 주장하는 북만주 송화강(松化江) 유역에 그 언제라도 요동(遼東) 또는 요서(遼西)라 불리던 곳이 있었던가? 아니면 송화강 하류에 요해(遼海 즉 창해滄海)로 불리던 바다가 있었던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요수가 북만주 땅에 있었을 리는 없다.
요수가 북만주에 없었으니 송화강은 결코 혼동강이 될 수 없다.
사실 필자는 고대(漢대)의 요수가 今 남역수(南易水)임을 고증하여 밝혔고, 아울러 또한 혼동강이 [압록수, 흑룡강, 속말수와 더불어] 今 남역수를 가리킨다고 하였으니, 간접적으로는 「혼동강이 곧 요수」라고 이미 주장한 셈이 되지만, 솔직히 혼동강이 곧 요수라는, 명백한 사서의 기록이 따로 있을 줄은 전혀 예상치 못하였다. 여하튼 「혼동강이 요동과 요서를 가른다」는 《朱子語類》의 기사는 필자가 제기하는 「혼동강=요수=남역수」설에 대한 건실한 교차 검증을 제공한다.
더욱이 남역수는 보정시 역현(易縣) 및 서수구(徐水區) 일대를 대략 동남 방향으로 흘러, 고대 발해만 내해(內海)의 흔적으로서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는 백양정(白洋淀) 습지에 유입되므로, 이는 「혼동강이 비스듬히 동남쪽으로 요해에 흘러든다」는 《朱子語類》 기록상의 서술에 정확히 일치한다.
요(遼)•금(金)과 관련되어 사서에 등장하는 혼동강은 今 하북성 보정의 남역수가 틀림없다.
금나라 상경회령부 위치 비정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는 금(金)을 세운 여진족 완안부(完顔部)의 근거지로서 1153년, 금(金)이 중도(中都)로 천도하며 버려지기 전까지 금(金)의 초기 수도 역할을 하였다. 통설상 그 위치는 今 흑룡강성(黑龍江省) 하얼빈시(哈爾濱市) 아청구(阿城區)로 정해져 있고, 재야 민족사학계 역시 대부분 그러려니 하고 믿는 듯하다. 그런데 요(遼)•금(金)•원(元) 시기의 수 많은 지명들이 그렀듯이, 이는 청(淸)에 의하여 今 하북(河北)으로부터 북만주로 이동되어 심어진 금(金) 상경(上京)의 가짜 위치가 무비판적으로 학계에 수용된 결과다.
사실 필자는 금(金)의 상경이 어디가 되었든 그 자체에는 별 관심이 없지만, 상경을 비롯한 금(金)의 주요 지명들의 위치가 고려의 역사 강역과 불가피하게 맞물려있다는 점을 상기하면 마냥 모른 척 관심 밖에 둘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면 새로 드러난 혼동강(混同江)의 실체를 통해 금(金) 상경회령부의 위치에 대해 알아보자.
혼동강(混同江)은 그 시원(始原)을 알 수 없으나, 금(金)의 옛 도읍이 이에 곧바르게 임하여 있다. [혼동]강은 비스듬히 동남쪽으로 바다에 흘러드는데, 그 하류가 요해(遼海)로 된다.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는 이 강물이 나눈 [땅을] 가리킨다. 混同江不知其所出,金舊都正臨此。江斜迤東南流入海,其下爲遼海。遼東、遼西,指此水而分也。
『朱子五經語類』 권42 書2, (淸) 程川 撰
... 금(金)이 그대로 따라 동경(東京)을 세웠다. 혼동강 이동(以東)을 상경(上京)으로 삼고, [혼동]강 이서(以西)를 함평로(咸平路)로 삼았다. ... 金仍建東京而以混同江以東爲上京 江以西爲咸平路
『欽定大清一統志』 권37
혼동강은 회령(會寧)의 서남에 있다. 混同江在會寧西南。
『讀史方輿紀要』 권38
앞서 살펴본 《朱子語類》의 기사상 혼동강에 곧바르게 임하여 있었다는 「금(金)의 옛 둥우리(金舊巢)」는 아마도 금(金)의 수도 상경(上京)을 송(宋)의 관점에서 비하한 표현인 듯한데, 해당 기사를 전재한 청(淸)대 程川(정천)의 《朱子五經語類(주자오경어류)》에는 「금(金)의 옛 도읍(金舊都)」 으로 순화되어 있다. 또한 《欽定大清一統志(흠정대청일통지)》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금(金)이 혼동강 이동(以東)에 상경(上京)을 두었다고 했고,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에는 혼동강의 동북에 회령(會寧)이 있다고 했으므로, 사료들을 종합하면 혼동강이 똑바로 바라보이는 혼동강 동변 또는 동북변 가까운 곳에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가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통설상 상경회령부의 위치로 비정된 今 흑룡강성(黑龍江省) 하얼빈시(哈爾濱市) 아청구(阿城區) 일대는 학계에서 혼동강으로 주장하는 今 송화강(松化江)으로부터 동남쪽으로 35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으므로 방향과 거리 모두 「상경은 혼동강에 곧바르게 임하여 있다」 또는 「혼동강은 상경의 서남에 있다」는 기록에 부합한다고 보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다. 어쨌든 이미 논의한 바와 같이 고대의 요동(遼東)과 요서(遼西)는 당연히 북만주 송화강 유역에 없었던 고로 어차피 송화강은 혼동강이 될 수 없으므로, 이와 관계없이 [상경회령부=하얼빈시 아청구]의 통설은 속절없이 무너질 수 밖에 없다.
그렇다면 금(金) 상경회령부의 진짜 위치는 과연 어디일까?
필자가 주장하듯이 혼동강의 실체가 보정의 今 남역수(南易水)라는 전제하에 상경회령부의 위치를 추적해보자.
남역수는 그리 긴 물줄기가 아니다. 이에 더하여 사서에 기록된 대로 상경회령부가 대략 혼동강, 즉 남역수의 동쪽 방면에 있었다면 그 위치의 추적 범위는 남역수가 대략 북↓남 방향으로 흐르는 구간의 동쪽 유역으로 좁혀진다. 또한 「혼동강 이동(以東)에 상경(上京)」과 아울러 「혼동강 이서(以西)에 함평로(咸平路)」를 두었다는 《欽定大清一統志》의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상경회령부와 함평로가 혼동강(남역수)을 사이에 두고 멀지 않은 거리에서 서로 마주보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와 같은 지리적 정황이 위치 추적에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지도 1 - 혼동강( 混同江)과 금(金)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의 위치 비정. 본 지도 출처 : Tencent maps.
필자는 [금(金) 함평로 함평부와 동일한 위치의] 원(元) 함평부를 고대 창려성(昌黎城)의 위치이자 당(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의 마지막 위치인 今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镇) 남쪽 인근 폭하(瀑河) 동남변의 구릉지대에 세세히 비정하였다. 그 곳을 기준으로 동쪽 방면 남역수 건너편이 바로 《欽定大清一統志》, 《讀史方輿紀要》 및 《朱子語類 》의 기록상 혼동강 동변 또는 동북변에 있었다는 상경의 위치에 해당한다. 정확히는 今 보정시 역현(易縣) 위도촌(尉都村) 일대이다.
참고로, 필자는 금(金) 함평로와 상경회령부가 혼동강을 경계로하여 상호 인접해 있었다는 사실을 이번 연구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필자는 원(元) 함평부( 咸平府, 금金 함평로 함평부와 동일한 곳)와 금(金) 상경회령부의 위치를 각각 전혀 다른 사료와 상호 무관한 분석 과정 및 논리 전개에 기반하여 비정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결과가 《欽定大清一統志》등의 기록에 정확히 부합하여 나타났다는 사실 자체가 해당 비정 위치들에 대한 절묘한 교차 검증이 된다.
함평부(咸平府)는 옛 조선땅으로서 기자를 그곳에 봉하였으며 한(漢)의 낙랑군이다. 후에 고구려가 쳐들어와 그 땅을 차지하였다. 당(唐)이 고구려를 멸하고 안동도호부를 두어 거느렸다. 이어서 발해의 대(大)씨가 그곳을 점거하였다. 요(遼)나라가 발해를 평정하고, 그 땅이 지세가 험하여 막힌 곳이 많다 하여, 성을 짓고 피난민이 살게하여 함주(咸州) 안동군(安東軍)이라 이름하였다. 함평현(咸平縣)을 거느린다. 咸平府,古朝鮮地,箕子所封,漢屬樂浪郡,後高麗侵有其地。唐滅高麗,置安東都護以統之,繼為渤海大氏所據。遼平渤海,以其地多險隘,建城以居流民,號咸州安東軍,領縣曰咸平。
『元史』 권59, 地理2 開元路
반면, 《元史(원사)》 '지리지'에 「원(元) 함평부(咸平府)는 한(漢)의 낙랑군」이라 하였는데, 담기양(譚其驤)의 《중국역사지도집》으로 대변되는 중국 학계의 통설에 따라 원(元) 함평부(咸平府)로 비정된 今 요녕성 개원(開原)은, 같은 통설상의 낙랑군과는 동떨어진 한(漢)의 영역 밖에 있다. 제멋대로 지명들의 위치를 비정해 놓은 통설이 자체모순적 엉터리임을 알 수 있다.
결론
- 요(遼)•금(金)과 관련되어 사서에 등장하는 혼동강(混同江)은 고대의 요수(遼水), 즉 지금의 남역수(南易水)가 틀림없다.
- 금(金)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의 위치는 지금의 보정시 역현(易縣) 위도촌(尉都村) 일대에 비정된다.
- 반도사관 못지않게 논리적으로 엉성한 만주사관을 탈피해야만 한민족의 참된 역사 강역에 다가설 수 있다.
- ☞ 흑룡강(黑龍江)과 혼동강(混同江) - 압록수(鴨綠水) 위치 비정 2부 참조 바람
- 여정덕(黎靖德) : 남송(南宋)의 성리학자
- ☞ 요수(遼水)와 요동고새(遼東故塞), 고조선과 한(漢)의 국경선 참조 바람
- ☞ 역수(易水)와 갈석산(碣石山) 그리고 창해(滄海), 지도 1 참조 바람. 북송(北宋) 시기의 박하(鮑河), 즉 남역수(南易水)가 동남 방향으로 흘러 당박(塘濼)호수 제 6구(區)에 흘러드는 것이 확인된다.
- 중도(中都) : 금나라의 연경(燕京) 즉, 대흥부(大興府)로서, 통설상의 위치는 今 북경(北京, 베이징)으로 알려져 있으나, 실제 위치는 今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에 비정된다.
- ☞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위치 비정 참조 바람
- ☞ 고려 시기 연행로와 원나라 함평부(咸平府) - 고려 서경 위치 비정 4부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