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창려현(昌黎縣)의 위치 비정
카테고리 없음창려는 요나라와 북송의 국경 부근에 있었다.
《唐書》 '地理志'에 평주(平州)에 자몽(紫蒙), 백랑(白狼), 창려(昌黎) 등의 수(戍)가 있다고 하였다. 모두 평주의 북쪽 지경, 거란의 남쪽 경계이다. 唐書地理志平州有紫䝉白狼昌黎等戍 盖平州之北境契丹之南界也
『資治通鑑』 권 214, 胡三省 註
평주(平州) 북평군(北平郡) 下, 처음에 임유(臨渝)에서 다스리다가 무덕(武德) 원년에 노룡(盧龍)으로 옮겨 다스렸다. 토공(土貢)으로는 곰가죽과 순비기나무열매(蔓荆實)와 인삼(人葠)이 있다. 가구수는 3113이고 인구수는 2,5086명이다. 현은 3개이다. 부(府)가 하나인데 노룡(盧龍)이라고 한다. 노룡군(盧龍軍)이 있는데 천보(天寳) 1년에 설치하였다. 또한 유성군(柳城軍)이 있는데 영태(永泰) 원년에 설치하였다. 온구(温溝)와 백망(白望)과 서협석(西狹石)과 동협석(東狹石)과 녹주(緑疇)와 미부(米磗)와 장양(長楊)과 황화(黄花)와 자몽(紫蒙)과 백랑(白狼)과 창려(昌黎)와 요서(遼西) 등의 12 수(戍)가 있다. 애천(愛川)과 주기(周夔) 등의 2개의 진성(鎮城)이 있다. 동북쪽에는 명질관(明垤闗)과 골호성(鶻湖城)과 우모성(牛毛城)이 있다. 平州 北平郡 下 初治臨渝 武德元年徙治盧龍 土貢 熊鞹 蔓荆實 人葠 户三千一百一十三 口二萬五千八十六 縣三 有府一 曰盧龍 有盧龍軍 天寳一載置 又有柳城軍 永泰元年置 有 温溝 白望 西狹石 東狹石 緑疇 米磗 長楊 黄花 紫蒙 白狼 昌黎 遼西 等十二戍, 愛川 周夔 二鎮城 東北有 明垤闗 鶻湖城 牛毛城
『新唐書』 권 39, 지리지
위 《新唐書(신당서)》 '지리지' 기사에 따르면 당(唐) 평주(平州)에는 12개소의 수(戍)가 있었다. 이와 관련하여 송(宋)-원(元)대 학자 호삼성(胡三省, 1230~1302)은 《資治通鑑(자치통감)》 권 214의 주석을 통하여 그들 수(戍) 가운데 자몽(紫蒙), 백랑(白狼) 및 창려(昌黎)는 평주(平州)의 북쪽 지경이자 거란 즉 요(遼)나라의 남쪽 경계인 곳에 있었다고 기록하였다. 이와 같은 사실이 해당 지명들의 위치 추적 범위를 대폭 좁히는데 용이한 단서가 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하여, 필자는 이미 고대 자몽현(紫蒙縣)과 백랑현(白狼縣)의 위치를 찾아내어 밝힌 바 있다. 호삼성이 언급한 수(戍) 3개소들 중 나머지 하나인 창려 역시 한국고대사와 밀접히 연관된 지명이니 만큼 이번에는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위치를 찾아보기로 한다.
교려(交黎) [유수(渝水)가 새(塞) 밖의 상류에서 [물을] 받아 남쪽으로 바다에 흘러든다. 동부도위(東部都尉)가 다스린다. 왕망은 금로(禽虜)라고 하였다. 응소가 말하기를 지금 昌黎(창려)라고 했다. 師古(사고)가 말하기를 渝의 음은 유(喻)라고 했다. 그 아래는 모두 같다.] 交黎 [渝水首受塞外, 南入海. 東部都尉治. 莽曰禽虜. 應劭曰今昌黎師古曰渝音喻其下並同.]
『漢書』 권 28下, 지리지 幽州 遼西郡
창료(昌遼)는 옛 천료(天遼)로서 요서(遼西)에 속했다. 昌遼 故天遼 屬遼西.
『後漢書』 권 33, 군국지 幽州 遼東屬國
「창료(昌遼)는 옛 천료(天遼)로서 요서(遼西)에 속했다.」 ○생각컨대 《前漢書(전한서)》 '지리지'에 천료현(天遼縣)은 없다. 고염무(顧炎武)가 옛 문서를 살펴 의심한 바가 이 기록이다. 「昌遼故天遼」 다섯자는 마땅히 「昌黎故交黎」로 적혔어야 한다. 昌遼故天遼屬遼西○按前志遼西無天遼縣 顧炎武考古錄疑此志 昌遼故天遼五字當作昌黎故交黎是也
『後漢書』 권 33 考證 (四庫全書本)
창려군(昌黎郡), 한(漢)에서는 료동속국(遼東屬國) 도위(都尉)에 속했고, 위(魏, 즉 曹魏)에서 군을 설치하였다. 관할하는 현은 2개이고 가구수는 900이다. 창려(昌黎), 빈도(賔徒). 昌黎郡, 漢屬遼東屬國都尉, 魏置郡. 統縣二, 戶九百. 昌黎. 賔徒.
『晉書』 권 14, 지리上 平州 昌黎郡
용성(龍城), 진군(真君) 8년에 유성(柳城), 창려(昌黎), 극성(棘城)을 병합하여 속하게 하였다. 요사(堯祠)와 유돈성(榆頓城)과 랑수(狼水)가 있다. 龍城, 真君八年併桞城 昌黎 棘城 屬焉. 有堯祠 榆頓城 狼水.
『魏書』 권 106上, 지형2上 營州 昌黎郡
본래 전한(前漢)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의 속현이었던 교려현(交黎縣)은 후한(後漢)시기에 유주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창료현(昌遼縣, 즉 창려현昌黎縣), 서진(西晉) 시기에는 평주(平州) 창려군(昌黎郡)의 창려현(昌黎縣)이었다가 남북조 시기 북위(北魏)에 의하여 용성현(龍城縣)에 병합된 뒤 ['창려昌黎'란 군(郡)명은 유지되었지만] 창려현은 점차 잊혀지고, 당(唐)대에 이르러서는 결국 동북쪽 변방의 수(戍)로 잔존한 듯하다.
창려현(昌黎縣)의 연혁을 간략히 표로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표1 참조)
시대 | 주 | 군 / 국 | 현 | 사료 |
전한(前漢) | 유주(幽州) | 요서군(遼西郡) | 교려현(交黎縣) | 《前漢書》 '지리지' |
후한(後漢) | 유주(幽州) | 요동속국(遼東屬國) | 창료현(昌遼縣) | 《後漢書》 '군국지' |
서진(西晉) | 평주(平州) | 창려군(昌黎郡) | 창려현(昌黎縣) | 《晉書》 '지리지' |
북위(北魏) | 영주(營州) | 창려군(昌黎郡) | 용성현(龍城縣)에 병합 | 《魏書》 '지형지' |
당(唐) | 평주(平州) | 북평군(北平郡) | 창려(昌黎, 戍) | 《新唐書》 '지리지' |
표 1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시대별 연혁
《資治通鑑》 권 214 호삼성(胡三省) 주석에 언급된 당(唐) 평주(平州)는 대체로 今 하북성 보정시(保定市) 관할구역과 일치하는 곳이고, 「거란의 남쪽 경계」는 서기 1125년 금(金)나라의 공격으로 멸망하기 직전 거란족의 요(遼)나라와 그 남쪽에 위치하였던 북송(北宋) 사이의 국경선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려현(昌黎縣)의 위치 추적 범위는 대략 하북성 보정시 관할구역 내 거란-북송 국경선이 지나는 부분으로 좁혀진다. 아울러 호삼성(胡三省)이 창려(昌黎)와 함께 자몽(紫蒙)과 백랑(白狼)을 언급한 것으로 미루어 창려현는 이미 그 위치가 밝혀진 자몽현(紫蒙縣) 및 백랑현(白狼縣)으로부터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을 것으로 유추된다.
백랑수(白狼水)는 또한 동북쪽으로 흘러 창려현(昌黎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교려현(交黎縣)으로서 동부도위(東部都尉)에서 다스리며 왕망이 금로(禽虜)라고 바꾸었다고 했다. 응소(應劭)가 말하기를 지금의 창려(昌黎)라고 하였다. 白狼水又東北, 逕昌黎縣故城. 西地理志曰..交黎也, 東部都尉治, 王莽之禽虜也. 應劭曰..今昌黎也.
『水經注』 권 14
《水經注(수경주)》 권 14의 기록에 「백랑수(白狼水)가 동북쪽으로 흘러 창려현(昌黎縣) 옛 성의 서쪽을 지난다.」하였는데, 같은 기록에 '창려현'이 《前漢書》 '지리지'의 교려현(交黎縣)이며 응소(應劭)가 살던 후한(後漢)시기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창려현(昌黎縣)이라 하였으므로 《水經注》 기록상의 '창려현'은 본글에서 그 위치를 추적하는 '창려현'과 동일한 곳이 분명하다.
今 보정시 역현(易縣)의 폭하(瀑河) 상류에 비정되는 고대의 백랑수(白狼水)는 그리 긴 물줄기가 아니다. 더구나 백랑수가 동북 방향으로 흐르는 구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해당 구간의 백랑수 동편에 있었던 것으로 《水經注》에 기록된 창려성(昌黎城)의 위치는 거의 정확히 今 보정시 역현 당호진(塘湖鎮) 동남 방면 1킬로미터 거리의 폭하 건너편 구릉 지대에 비정된다. (지도 1, 사진 1 참조)
지도 1 창려성(昌黎城)과 백랑성(白狼城)의 상대적 위치 (본 지도 출처: Tencent maps), 거란-북송(北宋) 국경선은 담기양(譚其驤)의 『中國歷史地圖集6-精裝本-宋遼金』을 참조하였다.
사진 1 창려성(昌黎城) 비정위치 전경 (위성사진 출처: 구글어스)
창려현 서쪽 20리에 갈석산이 있었고, 서남쪽 60리에 유성현이 있었다.
갈석산은 [창려]현 서쪽 20리에 있었다. 옛 부지(府志)에 이르기를 「창려현(昌黎縣)은 곧 옛 3읍(邑)의 땅으로서 류현(絫縣) 및 왕망(王莽)의 선무(選武)와 풍덕(憑德)이라 일컬었다」 하였다. 그리 된 갈석은 마땅히 창려(昌黎)와 무녕(撫寧) 모두로부터 남쪽에 있었다. 碣石山縣西二十里 舊府志云今昌黎縣乃古三邑地謂絫縣及王莽之選武憑德也 其爲碣石當自昌黎撫寧南皆是
『昌黎縣志』 권 2, 地理 山川, 馬恂 編, 同治5년(1866) 간행
문영(文穎)이 말하기를 갈석(碣石)은 료서군 류현(絫縣)에 있다고 하였는데 왕망이 선무(選武)로 바꾸었다. 류현(絫縣)은 아울러 임유(臨渝)에 속한다. 왕망(王莽)은 임유(臨渝)를 풍덕(馮德)으로 바꾸었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대갈석산(大碣石山)은 우북평(右北平) 려성현(驪成縣) 서남쪽에 있으며 왕망이 게석(掲石)이라고 했다고 하였다. 文穎曰..碣石在遼西絫縣. 王莽之選武也. 絫縣并屬臨渝, 王莽更臨渝為馮徳. 地理志曰..大碣石山在右北平驪成縣西南, 王莽改曰掲石也.
『水經注』 권 14, 濡水
지도 2 통설상의 갈석산이 진황도시 창려(昌黎)의 북쪽 및 무녕(撫寧)의 서쪽에 표시되어 있다. (본 지도 출처: 最新中華形勢一覽圖 1935)
청(淸) 동치(同治) 5년(1866)에 간행된 《昌黎縣志(창려현지)》에 「갈석산이 창려현(昌黎縣) 서쪽 20리에 있었다」는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水經注(수경주)》의 고대 창려현 관련 사항이 인용된 옛 부지(府志)를 언급한 점, 그리고 기사의 내용과는 달리 통설상의 갈석산이 하북성 진황도시 今 창려현의 서쪽이 아닌 북쪽에 위치하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지도2 참조) 《昌黎縣志》 기사상의 '창려현(원문의 '縣')'은 통설상의 창려현이 아닌, 진황도 방면으로 지명이동되기 이전 본래의 창려현을 가리킴에 틀림없다. 아울러 해당 기사는 「[진짜] 갈석산은 진황도시 창려(昌黎)와 무녕(撫寧)을 기준으로 당연히 그 남쪽에 있다」고 전하여, 이 또한 통설상의 갈석산과는 부합하지 않는 양상이므로 (지도2 참조) 정리하면 즉, 《昌黎縣志》 의 편자 마순(馬恂)은 진황도시 창려(昌黎) 북쪽 인근에 위치한 통설상 갈석산의 존재를 전면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는 자신이 직접 접하여 알고 있는 옛 부지(府志), 또는 '창려(昌黎)', '갈석(碣石)', '영평(永平)' 등이 보정에서 진황도로 지명이동되기 이전을 기록한 여타 사료에 의거하여 당당히 소신을 밝힌 듯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고대의 갈석산에 비정되는 보정의 낭아산(狼牙山)이 필자가 주장하는 창려성의 위치로부터 정확히 서쪽 20리 거리에 있다. (지도3 참조) 이는 필자의 「창려현 위치 비정」에 대한 절묘한 교차검증이 된다.
영평부(永平府) 옛 기록 : 유성(柳城)은 창려현(昌黎縣) 서남쪽 60리에 있다. 한(漢)시기 오랫 동안 오환(烏桓)의 근거지이었으나 조조(曹操)가 멸하였다. [북]위(魏) 및 진(晉)시기를 지나며 모용씨(慕容氏) 부자의 근거지가 되었다. 수(隋)가 [유성]현을 설치하여 요서군에 소속시켰다. 당(唐)이 영주(營州)를 설치하였고, 원(元)이 폐하여 창려(昌黎)[현]에 편입하였다. 정안사(靜安社)가 되었다. 永平府舊志:柳城在昌黎縣西南六十里。漢永為烏桓所據,曹操滅之。歷魏、晉為慕容氏父子所據。隋置縣,屬遼西郡。唐置營州,元省入昌黎,為靜安社。
『日知錄』 권 31
한편 앞서 살펴본 《昌黎縣志(창려현지)》에 언급된 '옛 부지(舊府志)'는 아마도 위 《日知錄(일지록)》에 그 기사가 인용된 '영평부 옛 기록(永平府舊志)'을 가리키는 듯한데, 이에 따르면 창려현(昌黎縣)의 서남쪽 60리에 당(唐) 영주(營州)의 유성현(柳城縣)이 있었다. 필자는 당(唐)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을 今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타남향(坨南鄉)에 비정한 바 있다. 그런데 타남향은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인근의 창려성(昌黎城) 비정지로부터 도보로 서남쪽 35.4 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으므로 (지도3 참조), 역시 기록상의 '서남쪽 60리'에 방향과 거리 모두 일치한다.
지도 3 낭아산(狼牙山)이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인근의 창려성 비정위치로부터 서쪽 20리 (12km) 거리에 있고, 유성(柳城)이 서남쪽 60리 (35.4km) 거리에 있다. (본 지도 출처: 구글지도)
북제 문선제군(文宣帝軍)의 행군 경로에 비추어 본 백랑성과 창려성의 상대적 위치
겨울 10월 정유(丁酉)일, 임금이 평주(平州)에 이르러 마침내 서쪽길을 좇아 장참(長塹)에 다다랐다. 사도(司徒) 반상락(潘相樂)으로 하여금 정예기병 5천을 거느리고 동쪽 길로 청산(靑山)으로 달려가도록 명하였다. 신축(辛丑)일, 백랑성(白狼城)에 도착하였다. 임인(壬寅)일, 창려성(昌黎城)을 지나쳤다. 다시 안덕왕(安德王) 한궤(韓軌)로 하여금 정예기병 4천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달려 거란의 도주로를 차단하도록 명하였다. 冬十月丁酉,帝至平州,遂從西道趣長塹。詔司徒潘相樂率精騎五千自東道趣青山。辛丑,至白狼城。壬寅,經昌黎城。復詔安德王韓軌率精騎四千東趣,斷契丹走路。
『北齊書』 권 4, 553년
《北齊書(북제서)》 권 4에는 서기 553년 10월 북제(北齊)의 문선제(文宣帝)가 거란을 상대로한 군사작전에 따라 병력을 이끌고 이동한 행군 경로가 기재되어 있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신축(辛丑, 10.12 음)일 백랑성(白狼城)에 있던 문선제가 이튿날인 임인(壬寅, 10.13 음)일에는 창려성(昌黎城)에 도달하여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선제와 그의 군사가 낮 시간 동안에만 이동했다고 가정할 경우 창려성은 백랑성으로부터 최대 하룻낮 동안만 이동하여도 다다를 수 있는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필자가 백랑현[성]으로 비정하는 今 보정시 역현(易縣) 류가장촌(劉家庄村)에서 창려현[성]으로 비정하는 今 보정시 역현 당호진(塘湖鎮) 일대까지는 도보로 10킬로미터가 채 안되는 가까운 거리로서, 고대 보병의 평균 행군속도가 하루에 30리('舍', 약 15km)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북제(北齊) 문선제군(文宣帝軍)의 행군 경과로 유추되는 상황에 정확히 부합한다.
그렇다면 통설상 백랑성(白狼城)과 창려성(昌黎城)이 비정된 곳들의 경우는 어떠할까?
통설상, 전한(前漢)의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교려현(交黎縣) 및 동일한 위치에 있었던 후대의 창려현(昌黎縣)은 今 요녕성 의현(義縣)에 비정되어 있다. 그 위치는 같은 통설상 요녕성 객좌현 평방자진 황도영자촌(喀左縣 平房子鎮 黃道營子村)에 비정된 백랑현(白狼縣)으로부터 직선 거리로 144킬로미터 떨어진 곳으로서, 이와 같은 수치는 도저히 하룻낮 시간 동안 이동 가능한 거리가 될 수 없으므로, 위 《北齊書(북제서)》 권 4에 기록된 북제(北齊) 문선제군(文宣帝軍)의 행군 경과에 완전히 배치된다. (지도4 및 지도5 참조)
지도 4 통설상 전한(前漢)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교려현(交黎縣)과 우북평군(右北平郡) 백랑현(白狼縣)의 상대적 비정위치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2-精裝本-秦漢)
지도 5 통설상 서진(西晉) 평주(平州) 창려군(昌黎郡) 창려현(昌黎縣)의 비정위치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3-精裝本-魏晉)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비정위치와 관련하여, 주지하다시피 1979년 요녕성 조양시(朝陽市) 근교의 한 무덤에서 출토하였다고 알려진, 후연(後燕)의 범양(范陽), 창려(昌黎) 2군태수(太守) 최휼(崔遹)의 이름, 직위 및 사망년도 등이 간략히 새겨진 묘지석이 고대 창려현(昌黎縣)에 대한 「今 요녕성 조양 비정위치」의 확증에 쐐기를 박는 결정적인 근거로 내세워지고 있는 반면에는 절대적인 것으로 여겨졌던, 소위 고고학적 근거에 의한 주장이 『北齊書』 권4, 문선제군(文宣帝軍) 행군기사의 경우와 같이 중국 정사를 포함한 문헌 사료에 기초한 팩트에 심각히 어긋나는 문제가 실재한다. 필자는 문헌과 고고학적 사료가 이처럼 충돌하는 경우 문헌이 우선시 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한다. 아울러 '최휼' 묘지석이 조양에 묻히게 된 배경에는 별도의 합리적인 요인이 있을 것으로 본다. |
결론
(前漢)의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교려현(交黎縣)을 위시한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현성(縣城)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동남 방면 1킬로미터 거리의 폭하(瀑河) 건너편 구릉 지대에 있었다.
- 戍(수) : 수자리 즉 변경의 요새를 뜻한다.
- 자몽현(紫蒙縣)의 비정위치에 관하여는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이다. 낙랑군 패수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백랑현(白狼縣)의 비정위치에 관하여는 ☞ 백랑산과 백랑수 1부 - 흰색 이리를 닮은 산 참조 바람.
- 평주의 위치에 관하여는 ☞ 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참조 바람
- 《資治通鑑(자치통감)》, 《冊府元龜(책부원귀)》 등에도 대동소이한 기사가 실려 있다.
- 문선제(文宣帝) : 중국 남북조 시대 북제(北齊)의 초대 임금. 재위 550년~559년
- 바이두 백과 '昌黎縣' 참조
- 바이두 백과 '白狼縣' 참조
- 옛 부지(府志) : 아마도 명(明)대 또는 청(淸)대 이른 시기의 《永平府志(영평부지)》를 가리키는 듯하다.
- 청(淸)대의 '1리 당 1,800척' 표준 적용. ☞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units_of_measurement 참조 바람
- ☞ 임유관(臨渝關)과 발착수(渤錯水), 새로 밝혀지는 위치 , 당태종의 회군 경로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