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인의 고대사공부방


안시성(安市城)과 주필산(駐蹕山), 새로 밝혀지는 위치

카테고리 없음

서론

 

고구려의 안시성(安市城)은 당(唐)의 거대한 무력 침공을 결사 항전으로 막아낸 위대한 역사의 현장으로서, 그곳에서 이끌어낸 극적인 승리는 우리 모두에게 가슴 뿌듯한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막상 안시성이 어디에 있었느냐 하는 기본적인 물음에 대해서는 아직까지 누구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물론 안시성의 위치에 대한 현 학계의 견해는 지금의 요하 동쪽 유역, 요녕성 해성시(海城市) 근교의 영성자성(營城子城)으로 수렴하는 듯하지만, 이는 기존의 통설에 기반한 대략적인 추정일 뿐, 주장을 뒷바침 할만한 뚜렷한 사료적 근거나 단서가 있어서는 아니다. 더욱이 안시성의 '영성자성 비정'은 통설에 따른 여타 고구려 지명들의 위치 비정이 그렇듯이, 고구려의 강역이 서쪽으로 지금의 요하를 넘지 못하였을 것이라는 고리타분한 고정관념을 극복하지 못한 태생적 한계를 안고 있다.

 

그렇다면 본글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필자가 새로 찾아내어 밝히는 안시성의 위치는 과연 어디를 말하는가?

알아보도록 하자.

 


주필산은 어디인가?

 

필자는 이전 글의 문헌 고증을 통하여 한(漢) 낙랑군 패수현(浿水縣)의 절대위치를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상락부촌(常樂富村)에서 찾아내어 밝힌 바 있다. 패수현의 위치가, 패수의 실체는 물론이고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를 찾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되었음은 이미 서술한 바와 같다.

(https://earthlin9.tistory.com/15 참조)

 

아래의 논거에서 분명해지겠지만, 패수현의 올바른 위치는 또한 이제껏 꼭꼭 숨겨져 있던 안시성의 위치를 둘러싼 비밀을 풀어줄 유일한 열쇠이기도하다.

 

수산(首山)이 (요양遼陽)성 서남 15리에 있다.[각주:1] 산 정상에 마르지 않는 샘이있다. 진(晉)의 사마의가 양평에서 공손연을 에워쌌다 하였고, 유성이 수산(首山)을 좇아 성의 동남쪽에 떨어졌다 하였는데, 즉 이곳이다. 당태종이 고구려를 칠때 주필(駐蹕)하여 돌에 그 공적을 새겼다 하여 주필산(駐蹕山)으로 고쳤다.[각주:2]  首山 城西南十五裡 山頂有泉不竭 晉司馬懿圍公孫淵於襄平 有星從首山墜城東南 即此 唐太宗伐高麗嘗駐蹕 勒石紀功 因改駐蹕山
『遼東志』 권1 '遼陽', (1443년 처음 편찬 후 1537년에 간행된 수정본)

 

명대(明代) 《遼東志(요동지)》의 위 기사에 따르면 수산(首山)은 곧 당(唐)의 고구려 침공시에 당태종이 주필(駐蹕)[각주:3]하였던 주필산(駐蹕山)으로서 요양성(遼陽城) 서남 15리에 있었다. 여기서 '요양성'은 요(遼)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에 속한 요양현(遼陽縣)의 현성(縣城)을 가리킨다.

 

《全遼志(전요지)》에 「수산(首山)이 요양성(遼陽城) 서남 15리에 있다. 진(晉)의 사마의가 양평에서 공손연을 에워쌌다 하였고, 유성이 수산(首山)을 좇아 성의 동남쪽에 떨어졌다 하였는데, 즉 이곳이다.」 하였다. 혹은 수산(手山)이라고도 한다.  全遼志曰 首山在遼陽城西南十五里 晋司馬懿圍公孫淵於襄平 有星從首山墜城東南 即此 一作手山
『遼史拾遺』 권 13

 

또한 청대(淸代)의 역악(歷鶚)이 《遼史(요사)》를 보완하여 지은 《遼史拾遺(요사습유)》에 수산(首山)을 수산(手山)이라고도 한다 하였으니, 기록들을 종합하면 수산(首山), 수산(手山), 주필산(駐蹕山)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요양현(遼陽縣)은 본래 발해의 금덕현(金德縣) 지역이었다. 한(漢)나라 때 패수현(浿水縣)이었는데, 고구려가 구려현(句麗縣)으로 고쳤다. 발해때에 상락현(常樂縣)이 되었다. 호구 수는 1,500호이다.  遼陽縣 本渤海國 金徳縣地 漢浿水縣 髙麗改為勾麗縣 渤海為常樂縣 户一千五百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그런데 《遼史(요사)》 '지리지'에 요(遼)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의 요양현(遼陽縣)은 한(漢) 시기 낙랑군의 패수현(浿水縣)이라고 하였다. 즉, 두 현(縣) 모두 동일한 위치에 있었던 것이다. 앞서 밝힌대로 패수현의 절대위치는 지금의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상락부촌(常樂富村)이다. 따라서 위 《遼東志》의 기록에 수산(首山)과 관련하여 언급된 요양성(遼陽城)의 위치 역시 지금의 상락부촌이다. 그러므로 수산(首山), 즉 수산(手山) 또는 주필산(駐蹕山)은 상락부촌 서남 방면 15리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지도 1  안시성과 주필산(駐蹕山)의 위치도   원 지도 출처 : OpenStreetMap

 

지도 1-1  안시성과 주필산(駐蹕山)의 위치도 (광범위)   원 지도 출처 : OpenStreetMap

 


사람의 손과 팔목 모양을 닮은 수산

 

주필산(駐蹕山)은 당(唐) 태종(太宗)이 고구려를 정벌할 때 그 산 앞머리(巔)에서 며칠을 주필(駐蹕)하며 돌에 공(功)을 새겼던 곳이다. 속칭 수산(手山)이다. 산 앞머리(巔)[각주:4]의 평평한 돌 위에 손바닥과 손가락의 형상이 있어, 그 가운데에서 샘이 솟는데, 이를 취하여도 마르지 않는다.  駐蹕山 唐太宗征高麗 駐蹕其巔數日 勒石紀功焉 俗稱手山 山巔平石之上有掌指之狀 泉出其中 取之不竭
『遼史』 '地理志', '東京遼陽府'

 

위 《遼史》 '지리지'의 기사에 언급된 주필산(駐蹕山)의 속칭, 즉 '수산(手山)' 및 그에 대한 설명에서 알 수 있듯이 수산(手山)의 모양새는 '손(手)'과 관련이 있다.

 

정흥현(定興縣)의 상락부촌(常樂富村)에서 서남쪽으로 약 8킬로미터 떨어진 보정시 역현(易縣) 관할 황산촌(黃山村)의 서북변에 해발 170여 미터 높이의 황산(黃山)[각주:5]이 있다. 《遼東志》의 수산(首山) 관련 기록이 비롯된 것으로 유추되는 요(遼)나라 시기 (즉  북송北宋 시기)의 척(尺, 0.3080미터)을 기준으로 통용되던 당시의 1리(里)는 1,500척 (462.00 미터) 또는 1,800척 (554.40미터)이다.[각주:6] 그 중 '1리 당 1,800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상락부촌에서 황산까지의 거리는 14.43리에 해당된다. 이 수치는 '서남' 방향과 더불어, 수산(首山)의 위치와 관련하여 사서에 기록된 요양성(遼陽城)으로부터의 거리, 즉 15리에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지도1 참조)

 

사진 1  사람의 손과 팔목 모양을 닮은 황산黃山(즉 수산手山 또는 주필산駐蹕山),

         채석으로 뜯겨나간 부분에 인공 수림이 조성되어 있다.  사진 출처 : 구글어스

 

사진 1-1  사람의 손과 팔목 모양을 닮은 황산黃山(즉 수산手山 또는 주필산駐蹕山)   사진 출처 : satellites.pro

 

더욱이 《遼史》 '지리지'에 수산(手山)의 '앞머리(巔)' 부분에 손(즉, 손바닥과 손가락 掌指)의 형상이 있다고 하였는데, 희한하게도 위성사진에서 확인되는 황산(黃山)의 모습은 사람의 팔목과 손의 형상이다. 황산의 뒷 부분이 팔목, 그리고 앞머리 부분이 손에 각각 해당된다. (사진1 및 사진 1-1 참조) 또한 (남아있는) 앞머리 부분이 특이하게도 평평한 너럭바위로 되어 있어 《遼史》 '지리지'의 기록에 언급된 '平石'에 부합한다. (사진2 참조) 다만, 근대에 들어 역현(易縣) 일대에 다수의 채석장들이 들어서면서, 황산 역시 채석으로 인하여 심하게 훼손되어, '손' 형상의 가운데 손가락 두세개에 해당되는 부분이 뜯겨나간 상태이다. (사진1 참조) 예전의 항공사진 등이 존재한다면 대조를 통해 확실해지겠지만, 채석 이전에는 더욱 완전한 형태의 '손' 모양이었을 것이 틀림없다.

 

사진 2  황산黃山(즉 수산手山, 주필산駐蹕山) 의 평석(平石)   사진 출처 : 구글어스

 

이상의 근거들로 미루어 볼때 필자는 역현(易縣)의 황산(黃山)이 곧 「《遼東志》의 수산(首山)」 및 「《遼史》 '지리지'의 수산(手山)」이자 「당태종의 주필산(駐蹕山)」이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혹자는 이런 주장에 대하여, 그것은 필자의 '상상력'에서 나온 주관적인 생각이 더해진 것일 뿐, 믿지 못하겠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본글의 주제인 안시성과 직접 관련하여 아래에 추가로 제시되는 증거들로 인하여 그러한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게 될 것이다.

 


안시성은 주필산의 서북쪽 8리에 있었다.

 

보정시 역현(易縣) 관할의 북소촌(北邵村) 인근에 해발 230미터 높이의 봉황산(鳳凰山)이 있다. 남쪽으로 뻗은 봉황산 줄기가 동쪽으로 굽었다가 다시 북동쪽으로 이어지며 그려지는 곡선 내부에 위치한 오목한 지형은 동북쪽의 출구를 제외한 사방이 산으로 둘러 싸여 있어 산성(山城)의 자리로서 제격으로 보인다. 또한 위성사진 상 해당 지형의 동남변에 무너진 성벽의 흔적으로 보이는 형체가 띠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그곳은 틀림없는 옛 성터일 것으로 유추된다. (사진3, 4, 6 및 지도2 참조)

 

사진 3  봉황산과 안시성 전경   채석으로 심하게 훼손된 상태다. 이대로 가면 머지않산 전체가 사라질 듯 보인다.

사진 출처 : satellites.pro

 

사진 4  안시성 3D 전경   황토지대가 산비탈에 올라와 있는 것이 확인된다.   사진 출처 : 구글어스

 

황제가 밤에 문무관을 불러 계책을 의논한 다음, 이세적에게 보병과 기병 1만5천 명을 주어 서쪽 고개에 진을 치게 하고, 장손무기와 우진달(牛進達)에게 정예군 1만1천 명을 주어 기습병으로 삼아 산의 북쪽에서 협곡으로 나와 후면을 공격하게 하였다. 황제는 고연수가 주저하면서 나아오지 않을까 염려하여, 대장군 아사나사이(阿史那社尒)에게 명령하여 돌궐의 기병 1천 명을 이끌고 그를 유인하게 하였다. 첫 교전에서 당나라의 병사가 거짓으로 패주하는 척 하자 연수가 말했다. “다루기가 쉽구나.” 앞을 다투어 기세를 타고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이르렀고, 산에 의지하여 진을 쳤다. .... 황제는 직접 보병과 기병 4천 명을 이끌고 북과 나팔을 옆에 끼고 깃발을 눕혀서 산으로 올랐다. 황제는 모든 군대에게 북과 나팔 소리가 들리면 일제히 맹렬한 공격을 하라고 명령하였으며, 또한 담당자에게는 항복받을 군막을 조당(朝堂) 옆에 설치하도록 명령하였다. 이날 밤에 유성이 고연수의 진영에 떨어졌다. .... 황제가 올랐던 산의 이름을 고쳐서 주필산(駐蹕山)이라 하였으며, 고연수를 홍려경(鴻臚卿)으로 삼고, 고혜진을 사농경(司農卿)으로 삼았다.[각주:7]  帝夜召文武計事 命李世勣將步騎萬五千 陣於西嶺 長孫無忌牛進達 將精兵萬一千 爲奇兵 自山北出於狹谷 以衝其後 帝恐其低徊不至 命大將軍阿史那社尒 將突厥千騎以誘之 兵始交而僞走 延壽曰 易與耳 競進乘之 至安市城東南八里 依山而陣 .... 帝自將步騎四千 挾鼓角 偃旗幟 登山 帝勑諸軍 聞鼓角 齊出奮擊 因命有司 張受降幕於朝堂之側 是夜 流星墜延壽營 .... 更名所幸山 曰駐驆山 以高延壽爲鴻臚卿 高惠眞爲司農卿
『삼국사기』 보장왕 4년 (서기 645년)

 

《삼국사기》, 《資治通鑑(자치통감) 등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당(唐)의 대군에 겹겹이 포위되어 위기에 처한 안시성을 구하기 위해 출병한 고연수(高延壽), 고혜진(高惠眞)의 고구려군이 주필산(駐驆山)에 의지하여 주둔하던 중 당태종(唐太宗)과 이세적(李世勣)이 이끄는 당(唐)군의 기습을 받고 대패하였다. 당(唐)군이 서쪽과 북쪽으로부터 주필산을 넘어 고구려군을 공격한 사실에 미루어 보아, 지금의 황산(黃山)을 주필산으로 볼 경우 고구려군의 주둔지는 황산의 동남쪽 기슭이 된다. 또한 고구려군이 안시성 동남방 8리 지점에 진을 쳤다 하였으므로 안시성은 주필산, 즉 황산 동남쪽 기슭으로부터 서북 8리 지점에 있었다. 황산의 동남쪽 기슭으로부터 앞서 언급한 봉황산(鳳凰山) 성터까지의 거리는 서북 방향으로 약 4.2킬로미터이다. 당(唐)대의 대척(大尺, 0.2955미터)을 기준으로 당시에 통용되던 1리(里)는 1,500 대척 (443.25미터) 또는 1,800 대척 (531.90미터)인데[각주:8], 그 중 '1리 당 1,800 대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해당 거리는 7.9리로서, 방향과 아울러 사서에 기록된 8리에 정확히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지도1 참조)

 


안시성은 봉황산 아래에 있었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高勾麗方言 稱大鳥曰‘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열하일기』'도강록'

 

많은 내외 문헌에 이 양만춘의 안시성이 바로 봉황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옛 성터로 적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박연암을 비롯, 많은 연행 학자들이 옛날 서당에서 가르치는 천자문에 '봉(鳳)'자가 "안시 봉"으로 훈독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봉황의 옛 방언이 안시요, 곧 안시성이 봉황성이라고 고증하고있다.
『이규태의 新 열하일기』 '봉황산 안시성'

 

지도 2  역현 봉황산 지형도  날아오르는 봉황의 모습이다.   지도 출처 : OpenStreetMap

 

사진 5  봉황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 주작

 

한편,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에 '안시'는 '봉황'을 뜻하고 안시성은 곧 봉황성이라 하였다. 그런데 필자가 문헌사료에 근거한 위치 추적을 통해 안시성으로 비정하는 상기 보정시 역현(易縣)의 옛 성터가 위치한 산(山)의 현재 이름이 놀랍게도 '봉황산(鳳凰山)'인 것이다. (지도3 참조) 또한 《이규태의 新 열하일기》 에 옛 문헌을 인용하여 봉황산의 남쪽 기슭에 안시성이 있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역현 봉황산 성터의 지리적 조건에 신기하게도 일치한다. 뿐만 아니라, 인근에 채석장이 들어서며 마을 자체는 없어진 듯하지만, 봉황산 서북쪽 기슭에, 고(高)씨들이 모여 살았다는 의미에서 비롯된 듯한 '고가장(高家庄)'이란 지명이 남아있어 봉황산이 고구려와 깊은 연관이 있었을 개연성을 더해준다. (지도3 참조) 혹자는 '봉황산'이란 이름은 현대의 명칭일 뿐, 고대에도 '봉황산'으로 불렸는지 어떻게 아느냐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봉황산의 산세(山勢)를 보라. (지도2, 사진5 참조) 누가 보더라도 땅을 박차고 막 날아오르는 봉황의 형상이 아닌가? 풍수지리를 매우 중요하게 여겼던 동아시아인들은 고대로부터 지세(地勢)를 살펴 범, 용, 거북, 까마귀, 봉황 등을 닮은 지형을 찾아내는데 능하였던 만큼, 놓칠 수 없는 봉황의 모습을 한 역현의 '봉황산'은 고대로부터 전해 내려온 이름임이 틀림없다.

 

지도 3  봉황산 지명  鳳凰山(봉황산)高家庄(고가장)의 지명이 표기되어 있다.   지도 출처 : Tencent Maps

 

 

안시성 동남쪽에 쌓은 당태종의 토산

 

강하왕 도종이 군사들을 독려하여 성(城)의 동남쪽에 토산(土山)을 쌓아 차츰 성으로 접근해왔다. 성 안에서도 성 높이를 더 올려서 굳게 방어하였다. 군사들은 당번을 정하여 하루에도 예닐곱 차례씩 싸움을 벌였다. 당나라 군사의 돌격 수레와 포석이 누대와 성 위의 작은 담을 허물었으나, 성 안에서는 그때마다 목책을 세워 부서진 곳을 막았다. 도종이 발을 다치자 황제가 직접 침을 놓아 주었다. 당나라는 밤낮을 쉬지 않고 60일 동안 토산을 쌓았다. 이 작업에 인원 50만 명이 동원되었다. 토산이 완성되자, 이 토산의 꼭대기가 성보다 몇 길 높았기 때문에 성 안을 내려다 볼 수 있었다.  江夏王道宗 督衆築土山於城東南隅 侵逼其城 城中亦增高其城 以拒之 士卒分番 交戰日六七合 衝車礮石 壞其樓堞 城中隨立木柵 以塞其缺 道宗傷足 帝親爲之針 築山 晝夜不息 凡六旬 用功五十萬 山頂去城數丈 下臨城中
『삼국사기』 보장왕 4년 (서기 645년)

 

사진 6  안시성 동남쪽 성벽과 토산   사진 출처 : satellites.pro

 

주지하듯이 당(唐)군은 안시성 내부를 직접 공격할 목적으로 동남쪽 성벽 가까이에 높은 토산(土山)을 쌓았다. 50만 명이 동원되어 60일 동안 쌓았으니 그 규모는 상당했을 것이고, 비록 천 수백년의 세월이 흘렀다 하더라도 그 흔적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역현(易縣)의 봉황산(鳳凰山) 성터 동남쪽 가장자리에, 위성사진 상 녹색으로 나타나는 주변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황토지대가 확인된다. (사진6 참조) 봉황산 곳곳이 파헤쳐지며 가동 중인 채석장들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봉황산은 지표(地表)가 거의 없는 돌산이다. 따라서 성벽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언덕 바로 아래의 산비탈을 거슬러 올라와 자리잡고 있는 황토지대는 인위적인 작업에 의하여 조성된 것임이 틀림없다. (사진4 참조) 아마도 방치되어 있던 흙더미들을 근래에 들어 정리해 놓은 듯한 모습인데, 사서에 기록된 토산의 위치에 절묘히 부합하는 황토지대는 안시성 전투 당시에 당(唐)군이 쌓은 토산의 흔적일 수 밖에 없다.

 


결론

 

요(遼)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요양(遼陽)현의 절대위치인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상락부촌(常樂富村)을 좌표의 기준점으로 하여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안시성(安市城) 및 주필산(駐蹕山)의 위치를 밝혔다. 제시된 여러 근거들을 종합해 볼 때 고구려의 안시성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소재 북소촌(北邵村) 인근 봉황산(鳳凰山)의 남쪽 기슭에 위치하였고, 주필산(駐蹕山)은 역현(易縣) 소재 황산촌(黃山村) 인근의 황산(黃山)이 그 실체이다. 아울러 본글에서 밝힌 안시성과 주필산의 위치는 역으로 한(漢) 낙랑군 패수현과 요나라 동경요양부 요양현의 절대위치(즉 정흥현 상락부촌)에 대한 신뢰도를 한층 강화시키는 교차검증이 된다.

 

 

 

 

  1. 필자는 「수산(首山)이 요양(遼陽)성 서남 15리에 있다.」는 기록이 명대(明代)《遼東志(요동지)》저자의 창작이 아닌, 그 이전 요(遼, 즉 거란) 시기에 이미 존재했던 기록이 후대에 전해진 것으로 판단한다. 따라서 해당 기록이 가리키는 요양(遼陽)의 위치는《遼東志》상의 비정 위치와 다를 수 있다고 본다. [본문으로]
  2. 동일한 내용이 《全遼志》(1565년 간행)에 실려 있다. [본문으로]
  3. 주필(駐蹕) : 임금이 행차하다가 잠시 어가를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던 일 [본문으로]
  4. '巔'은 보통 산꼭대기의 뜻으로 통하지만, '顛'에는 '앞머리'의 의미가 있으므로 여기서의 '巔'은 '산의 앞머리 부분'을 뜻한다고 볼 수 있다. 당태종이 굳이 산 정상에 수일 동안 머무르면서 주필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본문으로]
  5. 황산(黃山)은 살수대첩 당시 수(隋)군의 주둔지이기도 하였다. https://earthlin9.tistory.com/19 참조
  6.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units_of_measurement 참조
  7. 대동소이한 내용이 《통전(通典)》 권186, 《자치통감(資治通鑑)》 권198 등에도 기재되어 있다. [본문으로]
  8. https://en.wikipedia.org/wiki/Chinese_units_of_measurement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