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북평군(右北平郡) 석성현(石城縣)에 갈석산이 있었다. - 백랑산과 백랑수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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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북평군 석성현 위치 비정
[백랑]수는 우북평군(右北平郡) 백랑현(白狼縣) 동남쪽으로 나와서, 북쪽으로 흐르다가 서북쪽으로 굽어 광성현(廣成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왕망의 평로현(平虜縣)인데 세간에서는 광도성(廣都城)이라고 한다. 水出右北平白狼縣, 東南, 北流, 西北屈, 逕廣成縣故城南. 王莽之平虜也, 俗謂之廣都城.
『水經注』 권 14 '大遼水'
역현(易縣) 굴륭산(窟窿山)에서 발원하여 산 아래 류가장촌(劉家庄村) 마을 동남쪽으로 흘러나오는 물줄기가 위성사진에서 확인된다. 마을을 빠져나온 물줄기는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략 서북쪽으로 흐른 뒤 폭하(瀑河)의 주류에 합류하는데, 이는 위 《水經注(수경주)》에 서술된 백랑수(白狼水)의 발원 및 발원 직후의 흐름에 부합한다. 굴륭산과 류가장촌이 백랑산(白狼山)과 백랑현(白狼縣)에 각각 비정된다는 점을 감안하면 해당 물줄기가 바로 백랑수의 최상류일 것이다. (지도 2a 참조)
지도 2a 백랑산(白狼山)과 백랑수(白狼水) 및 주변 지명들의 비정위치, 본 지도 출처 : Tencent Maps
[백랑수는] 또한 서북쪽으로 흐르다가 석성천수(石城川水)가 백랑수(白狼水)로 흘러든다. [석성천]수는 서남쪽으로 석성산(石城山)을 나와서, 동쪽으로 흘러 석성현(石城縣) 옛 성의 남쪽을 지난다. 지리지에서 말하기를 우북평군(右北平郡)에는 석성현이 있다고 했다. [석성천수는] 북쪽으로 굽어서 백록산(白鹿山) 서쪽을 지나는데, 즉 백랑산(白狼山)이다. 又西北,石城川水注之,水出西南石城山,東流逕石城縣故城南,《地理志》:右北平有石城縣,北屈逕白鹿山西,即白狼山也。
『水經注』 권 14 '大遼水'
따라서 굴륭산(窟窿山)에서 발원한 물줄기(백랑수 최상류)와 합류하기 전까지의 폭하(瀑河) 주류의 흐름이 《水經注》에 언급된 석성천수(石城川水)인 것을 알 수 있다. 폭하는 그 최상류의 한 갈래가 낭아산(狼牙山) 산줄기 동쪽 부분의 한 골짜기에서 발원한다. 위 《水經注》의 기사에 대비하여, 그 골짜기를 이루고 있는 동남편의 산자락을 석성산(石城山)으로 볼 수 있는데, 특히 해당 물줄기가 실제로 골짜기를 서남 방향으로 흘러 산지에서 벗어난다는 점은 석성천수가 서남쪽으로 흘러 석성산에서 나온다는 《水經注》의 기사에 부합한다. 산지를 벗어난 폭하는 동쪽으로 타원을 그리며 그 일대의 평야 지대를 가로지른다. 《水經注》에 그려진 주변의 지리적 여건을 고려하면 폭하 이북, 산지 아래의 북기촌(北淇村)일대가 우북평군 석성현으로 비정된다.
이어서 폭하(瀑河)는 북으로 굽으며 굴륭산(窟窿山)의 서쪽을 지나는데, 이는 석성천수(石城川水)가 북쪽으로 굽어서 백록산(白鹿山) 서쪽을 지난다는 《水經注》의 기록에 정확히 일치한다. 한편 폭하가 흐르는 서북쪽에서 바라보는 굴륭산의 모습은 동남쪽에서 관찰되는 '백랑(白狼)'과는 다소 차이가 있다. 고대인들에게는 그 형상이 흰사슴 즉 '백록(白鹿)'과 유사하게 보인 듯하고, 동일한 산(山)이지만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산의 서북방면에서는 백랑이 아닌 백록으로 불렸던 게 아닌가 한다. 아마도 그런 연유로 사서에 '백랑산'과 더불어 '백록산'으로 기록 되었을 것이다. (사진 4 참조)
사진 4 폭하(瀑河)방면에서 바라본 굴륭산(窟窿山). 아마도 이 모습에서 '백록(白鹿)'이란 이름이 유래했을 것이다.
석성(石城)현 중급, 본래 임유(臨渝)현으로서 무덕(武德)7년(624년)에 없앴다. 정관(貞觀)15년(641년)에 다시 설치하였다가 만세통천(萬嵗通天)2년(696년 11월 ~ 697년 10월)에 이름을 바꾸었다. 임유관(臨渝關)이 있는데 또한 임여관(臨閭關)이라고도 한다. 대해관(大海關)이 있다.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온창진(温昌鎮)이 있다. 石城 中 本臨渝 武德七年省 貞觀十五年復置 萬嵗通天二年更名 有臨渝關 一名 臨閭關 有大海關 有碣石山 有温昌鎮
『新唐書』 권 39, '地理志', '平州 北平郡'
석성현(石城縣), ... 한(漢)의 요서군(遼西郡)에 속하였고, 한(漢)의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하였던 옛 려성현(驪成縣)으로서 동한(東漢)이 모두 없앴다. 우공(禹貢)의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진시황과 한무제 모두 다 [갈석산에] 올라 큰 바다를 바라보았다. 石城縣 ... 漢屬遼西郡,故驪成縣漢屬右北平郡,東漢皆省焉。有禹貢碣石山,秦皇、漢武皆登之以望巨海。
『輿地廣記』 권 12 '平州', 宋 歐陽忞 撰
갈석산(碣石山)은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에 있다. 춘추시기의 산융국(山戎國)이다. 碣石山在平州石城縣 春秋山戎國也
『尚書説』 권 2, 宋 黄度 撰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은 노룡(盧龍)의 서쪽 140리에 있다. 갈석(碣石)산이 있다. 진시황이 글을 돌에 새기고 한무제가 올랐다. 平州石城縣在盧龍西一百四十里 有碣石 始皇刻石漢武登之
『書蔡氏傳旁通』 권 2, 元 陳師凱 撰
석성현(石城縣), [평주(平州) 치소로부터] 서쪽 141리의 두 마을이다. 한(漢)의 옛 현으로서 갈석(碣石)이 성(城)과 같이 서 있다고 여기어 이름 지었으며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하였다. 당(唐) 정관(貞觀)15년 옛 임유현성(臨渝縣城)에 임유현(臨渝縣)을 설치하였다. 만세통천(萬嵗通天)2년 '석성(石城)'현으로 고쳐 한(漢)의 옛 이름을 그대로 따랐다. 石城縣。西一百四十一里,二鄉。漢舊縣,取碣石立如城以名之,屬右北平。唐貞觀十五年,於故臨渝縣城置臨渝縣,萬歲通天二年,改為石城,仍漢舊名。
『太平寰宇記』 권 70 '平州'
사진 5 낭아산, "성(城)과 같이 서있다."는 표현에 부합하는 모습이다.
위 《新唐書(신당서)》, 《輿地廣記(여지광기)》, 《尚書説(상서설)》, 《書蔡氏傳旁通(서채씨전방통)》,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 등의 기사에 서술된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은 모두 같은 곳을 가리키는데, 이렇듯이 여러 사서에 「평주 석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라고 단정적으로 명시되어 있는 점으로 미루어 평주 석성현은 갈석산에 인접한 곳에 위치하였음이 분명하고, 이는 《太平寰宇記》에 석성현(石城縣)의 명칭이 갈석산(碣石山)에서 유래하였다 하는 기록으로도 역시 뒷바침 된다.
갈석(碣石)은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 서남에 있다. 한(漢)의 우북평군(右北平郡) 려성현(驪城縣)이었다. 碣石在平州石城縣西南 漢右北平郡驪城縣
『通鑑地理通釋』 권 5, 宋 王應麟 撰
'지리지'는 말하기를 「갈석산(碣石山)은 북평(北平) 려성현(驪城縣) 서남쪽에 있다」 하였다. 地理志云碣石山在北平驪城縣西南
『史記索隱』 권 1
《通鑑地理通釋(통감지리통석)》에는 보다 구체적으로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의 서남에 갈석산이 있다 하였으므로 갈석산이 석성현의 중심부로부터 서남쪽 가까운 곳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太平寰宇記》에 따르면 평주(平州) 석성현은 같은 이름의 옛 한(漢)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의 속현으로서 곧 필자가 지금의 역현(易縣) 북기촌(北淇村)에 비정하는 지명이다. 특히 북기촌(北淇村) 서남쪽 10여 킬로미터 지점에 낭아산(狼牙山)의 주봉이 위치한 낭아산경구(狼牙山景區)가 있다는 사실은 주의을 요하는데, 주지하듯이 낭아산은 고대의 갈석산이므로 그 동북쪽의 북기촌 일대는 우북평군 석성현의 비정위치로서 해당 사료의 기록에 정확히 부합하여 그 신뢰성이 한층 더 공고히 보장된다.
참고로, 《新唐書》에 당(唐) 평주(平州) 석성현(石城縣)에 임유관(臨渝關)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미루어 볼 때 고구려-수(隋) 1차 전쟁 당시의 임유관(臨渝關) 전투의 현장이 바로 역현(易縣)의 북기촌(北淇村) 부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위 《通鑑地理通釋》 및 《史記索隱(사기색은)》의 기사에 따르면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석성현(石城縣)과 려성현(驪城縣)은 같은 위치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므로 위 논거에 따라 우북평군 려성현(驪城縣)의 위치 역시 역현(易縣) 북기촌(北淇村) 일대로 비정된다.
지도 3 통설상 한(漢)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 석성현(石城縣)의 위치 - 갈석산으로부터 멀리 떨어져있다.
본 지도 출처 : 『谭其骧 中国历史地图集2-精装本-秦汉』 譚其驤 지음
한편 통설에 따른 우북평군(右北平郡) 석성현(石城縣)의 위치는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호로도시(葫蘆島市) 건창현(建昌縣)과 조양시(朝陽市) 객라심좌익 몽골족자치현(喀喇沁左翼 蒙古族自治縣)의 접경 일대인데, 그 지역은 고대의 갈석산(보정의 낭아산)과는 동떨어진 곳으로서, 갈석산에 인접했던 것으로 사서에 기록된 우북평군 석성현이 될 수 없음은 더 말할 나위 없고, 같은 통설상 갈석산(碣石山)의 위치인 현 진황도시(秦皇島市) 창려현(昌黎縣)과도 역시 직선거리로 130킬로미터 이상 떨어져 있어 전혀 관련 없는, 자기모순적인 통설상의 엉터리 비정위치일 뿐이다. (지도3 참조)
북연 석성군태수 이숭의 행적으로 본 우북평군 석성현의 위치
이흔(李欣)은 자가 원성이고 아명이 진노이며 범양(範陽) 사람이다. 증조부 산(產)과 산의 아들 적(績) 두세대는 모용씨(慕容氏) 때에 이름이 알려졌다. 아버지 숭(崇)은 풍발(馮跋)의 이부상서(吏部尚書), 석성태수(石城太守)였다. 연화(延和)초에 거가가 화룡(和龍)에 이르렀을 때 숭(崇)이 10여 군(郡)을 거느리고 순순히 투항하였다. 세조(世祖)가 몹시 예우하여 이공(李公)이라 부르고 숭(崇)을 평서장군(平西將軍) 북유주자사(北幽州刺史) 고안후(固安侯)로 삼았다. 81세에 죽었고, 시호는 양후(襄侯)라 한다. 李欣,字元盛,小名真奴,範陽人也。曾祖產,產子績,二世知名於慕容氏。父崇,馮跋吏部尚書、石城太守。延和初,車駕至和龍,崇率十餘郡歸降。世祖甚禮之,呼曰「李公」,以崇為平西將軍、北幽州刺史、固安侯。卒,年八十一,謚曰襄侯。
『魏書』 권 46
석성군(石城郡), 전연(前燕)으로부터 북위(北魏) 초에 이르기까지의 군명(郡名)이다. 본래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석성현(石城縣)이었고, 동한(東漢)이 폐하였다. 모용씨(慕容氏)의 전연(前燕)이 다시 현(縣)을 세우고, 아울러 석성군(石城郡)을 설치하였다. 유송(劉宋) 원가(元嘉) 9년에 북연(北燕)의 석성군태수(石城郡太守) 이숭(李崇)이 군(郡)을 거느리고 후위(後魏)에 투항하였다. 북위(北魏) 태평진군(太平真君) 8년에 군(郡)을 폐하고 석성현(石城縣)을 개편하여 건덕군(建德郡)에 소속시켰다. 石城郡,前燕至北魏初年郡名。本漢右北平郡石城縣,東漢省廢。慕容氏前燕復置縣,並置石城郡。劉宋元嘉九年,北燕石城郡太守李崇以郡降後魏。北魏太平真君八年,郡廢,石城縣改屬建德郡。
『바이두 백과』 '石城郡'
서한(西漢) 때에 고안현(故安縣)을 설치하였다. 옛 치소가 지금의 하북(河北) 역현(易縣) 고맥향(高陌鄉)에 있다. 유주(幽州) 탁군(涿郡)에 속하였고, 동한(東漢) 시기에 인습되었다. 삼국 위(魏) 때에는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에 속하였다. 진(晉)대에는 유주(幽州) 범양국(范陽國)에 속하였다. 북위(北魏)초에 故安縣(고안현)의 '故(고)'자를 '固(고)'로 바꾸어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에 소속시켰다. 북제(北齊) 천보(天保) 7년 (556년)에 고안현(固安縣)을 폐하였다. 西漢時置故安縣,故治在今河北易縣高陌鄉,屬幽州涿郡。東漢時因之。三國魏時故安縣屬幽州范陽郡。晉代,故安縣屬幽州范陽國。北魏初,故安縣之“故”字改為“固”,屬幽州范陽郡。北齊天保七年(556年)固安縣廢。
『바이두 백과』 '故安縣'
서기 432년 북위(北魏) 세조 탁발도가 군사를 이끌고 진격하여 화룡(和龍)에 당도하자 북연(北燕)의 석성태수(石城郡太守) 이숭(李崇)이 주도하여 10여 개의 군읍들이 모두 북위에 순순히 투항하였는데, 이때의 공로를 치하하여 세조는 이숭에게 '평서장군(平西將軍) 북유주자사(北幽州刺史) 고안후(固安侯)'라는 작위을 내렸다.
북연(北燕)의 석성군(石城郡)은 본래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 석성현(石城縣)이 있었던 곳으로서 전연(前燕)에 이르러 군(郡)으로 승격되었으며, 앞서 언급하였다시피 통설에 따른 그 위치는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호로도시(葫蘆島市) 건창현(建昌縣)과 조양시(朝陽市) 객라심좌익 몽골족자치현(喀喇沁左翼 蒙古族自治縣)의 접경 일대이다.
이숭(李崇)이 북위(北魏)로부터 받은 작위 '고안후(固安侯)'는 곧 '고안현(固安縣)의 제후'라는 의미인데, 이와 관련하여 석연치 않은 점은 북위의 고안현은 지금의 보정시 역현(易縣) 일대에 있었던 지명으로서 이숭이 북연(北燕)의 태수로서 북위에 투항할 때 그의 관할하에 있던 석성군(石城郡)의 통설상 위치와는 아무런 연관 없이 멀리 (직선거리 390킬로미터)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이숭이 통설대로 현 요녕성 건창현-객라심좌익 일대의 군읍들을 설득하여 함께 이끌고 투항한 것이 맞다면 북위는 응당 같은 지역의 통솔권을 이숭에게 주고 그를 계속 간접적으로 이용하는 편의를 취하였을 것이다. 정황상, 통설로 정하여진 석성군(石城郡)의 비정위치에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앞서 논의하였다시피 필자가 한(漢) (右北平郡) 석성현(石城縣)[즉 북연(北燕) 석성군(石城郡)]의 위치로 비정하는 북기촌(北淇村)은 공교롭게도 다름 아닌 역현(易縣), 즉 이숭(李崇)과 관련 있는 옛 북위(北魏)의 고안현(固安縣)에 있다. 역현 일대는 또한 역사상 고대의 범양군(范陽郡) 또는 범양국(范陽國)에 속하였는데, 《魏書(위서)》에 기록되어 있다시피 범양(范陽)은 이숭 일족의 연고지였다. 즉, 이숭이 그의 일족이 연고를 둔 지금의 역현 일대에 위치했던 북연 석성군의 태수로서 주변의 군읍들을 설득하여 북위에 더불어 투항하고, 그에 대한 댓가로 같은 지역인 북위 치하 고안현의 제후가 되었던 것이라면 모든 정황들이 지극히 자연스럽다.
3부에서 계속 ... ☞ https://earthlin9.tistory.com/28
- 고구려-수(隋) 1차 전쟁 당시의 임유관(臨渝關) 전투가 있었던 곳이다.
- 북평(北平) : 위진(魏晉) 시기에 이르러 '북평(北平)'으로 개명된 한(漢) 유주(幽州) 우북평군(右北平郡)을 가리킨다.
- 갈석산과 낭아산에 관하여는 ☞ 갈석산 앞에 세운 연소왕의 황금대, ☞ 당대의 기록으로 본 갈석산의 바른 위치 및 ☞ 안사의 난 안록산 반란사건의 본거지 갈석산 참조 바람
- 한(漢) 우북평군(右北平郡)에 속한 석성현(石城縣)과 려성현(驪城縣)은 병존했거나 아니면 동일한 현(縣)으로서 시기에 따라 그 이름이 달랐던 것으로 볼 수 있는데, 병존했다면 상호 인접한 위치였을 것이다.
- 연화(延和)는 중국 북위(北魏) 태무제(太武帝)의 세 번째 연호이다. 432년에서 435년 정월까지 3년 1개월 동안 사용하였다.
- 화룡(和龍) : 북연(北燕)의 도읍 화룡성(和龍城). 한(漢)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 및 전연(前燕)의 도읍 용성(龍城)과 동일한 위치.
- 이숭(李崇)이 받은 '북유주자사(北幽州刺史) 고안후(固安侯)'란 벼슬 이름을 통하여 고대 중국 유주(幽州)의 중심부인 계현(薊縣)의 위치가 북위(北魏)의 유주(幽州) 범양군(范陽郡) 고안현(固安縣) 즉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을 기준으로 그 남쪽 방면이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 위 세조 태무황제 탁발도(魏 世祖 太武皇帝 拓跋燾, 408년 ~ 452년 3월 11일)는 중국 남북조 시대 북위의 제3대 황제(재위: 423년 ~ 452년)이다.
- 북연(北燕, 407년 ~ 436년)은 중국 오호 십육국 시대 때 고구려의 왕족 출신인 고운이 후연을 멸망시키고 건국한 국가이다.
- 范陽, 즉 範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