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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 당(唐)대 사이에 서쪽으로 옮겨진 요수(遼水)와 유성(柳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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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이전 글들을 통하여 한(漢)대의 요수(遼水)와 당(唐)대의 요수(遼水)는 그 위치가 다른 별개의 하천들이었음을 피력한 바 있다.  즉, 한(漢)대의 요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의 남역수(南易水)였는데, 당(唐)대에 이르러서는 그 비정위치가 서[남]쪽으로 대략 15킬로미터 정도 지명이동된 조하(漕河, 즉 徐水)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사서의 기록을 살펴보면 고대의 유성(城) 역시 한(漢), 당(唐)대 사이에 요수(遼水)와 유사하게 지명이동되었음을 깨닫게 된다.

정축(丁丑)일, 거가가 요수(遼水)를 건넜다. 다리를 철거하여 군사들의 결심을 굳게 하고 마수산(馬首山)에 진을 쳤다.  丁丑 車駕度遼水 撤橋以堅士卒之心 軍於馬首山
『資治通鑑』 권 197

 

유성(城)현 [마수산(馬首山)이 현의 서남쪽에 있다. 참류수(參水)가 북으로 [흘러] 바다로 들어간다. 서부도위(西部都尉)의 치소이다.]  城 馬首山在西南 參栁水北入海 西部都尉治
백납본(百衲本) 『漢書』 '地理志' '幽州 遼西郡'
 
위 《資治通鑑(자치통감)》 권 197 및 《漢書(한서)》 '地理志'의 기사들을 연계하여 분석하면 한(漢) 요서군(遼西郡)의 유성(柳城)은 마수산(馬首山)의 동북쪽에 있었고 마수산은 당(唐)대의 요수(遼水) 이동(以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렇다면 논리적으로 한(漢)대의 유성 역시 당(唐)대의 요수를 기준으로 그 이동(以東)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성(柳城), 한(漢)의 현(縣)으로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柳城 漢縣 屬遼西郡
『舊唐書』 권 39 '地理志' '營州上都督府'

위 《舊唐書》 '지리지'의 기사에 미루어 보면 당(唐)대 영주(營州)의 유성(柳城)은 얼핏 한(漢)대 요서군(遼西郡)의 속현이었던 유성이 그대로 당(唐)대에 인습된 것인 듯 보인다. 그러나 양 시기간 유성의 계보는 이어졌을지 모르지만, 위치는 달랐던 게 분명하다.

 

지도 1  漢, 唐대간 유성(柳城), 요수(遼水) 및 마수산(馬首山)의 상대적 위치

 

李世勣軍發柳城,多張形勢,若出懷遠鎭者,而潛師北趣甬道,出高麗不意。夏,四月,戊戌朔,世勣自通定濟遼水,至玄菟。이세적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고구려가 예상치 못하는 곳으로 나왔다. 여름 4월 무술(戊戍) 초하루 (645년 4월 1일 음) 세적(世勣)이 통정으로부터 요수(遼水)를 건너 현도(玄菟)에 이르렀다.
『資治通鑑』 권 197


서기 645년 고구려-당(唐) 전쟁시 이세적(李世勣)의 진격로를 기록한 위 《資治通鑑》 권197의 기사에 따르면 이세적은 요수(遼水)를 건너기 전 이미 유성(柳城)에 있었다.

 

병술(丙戌)일 (9월 21일), 요수(遼水)를 건넜다. 요택(遼澤)이 진창이 되어 수레와 말이 지나가지 못하자 장손무기(長孫無忌)에게 명하여 1만 명을 거느리고 풀을 베어 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은 수레로써 다리를 삼았다. 황상은 몸소 말의 안장걸이에 섶을 묶는 일을 도왔다.  丙戌,渡遼水。遼澤泥潦,車馬不通,命長孫無忌將萬人,翦草塡道,水深處以車爲梁,上自繫薪於馬鞘以助役。
『資治通鑑』 권 198

 

병오(丙午)일 (10월 11일 음), 영주(營州)에 도착하였다. 조서를 내려 요동(遼東)에서 사망한 사졸들의 해골을 유성(柳城)의 동남쪽에 모두 모아 놓게 하고 유사(有司)로 하여금 태뢰(太牢)를 갖추어 베풀게 하였다. 황상이 손수 글을 지어 제례를 올리고 곡하여 극진히 애도하였다.  丙午,至營州。詔遼東戰亡士卒骸骨並集柳城東南,命有司設太牢,上自作文以祭之,臨哭盡哀。
『資治通鑑』 권 198

 

그뿐만 아니라 당(唐)군은 회군시 645년 9월 21일 (음), 병술(丙戌)일 요수(遼水)를 먼저 건넌 뒤인 10월 11일 (음), 병오(丙午)일에 영주(營州) 즉 유성(柳城)에 도착한 것이 명백하다. 

 

이로써 당(唐) 영주(營州) 유성은 [당(唐)대의] 요수 이서(以西)에 있었던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앞서 논거를 통하여 한(漢) 요서군(遼西郡)의 유성이 [당(唐)대의] 요수 이동(以東)에 있었음이 밝혀졌으므로, 정리하자면 한(漢) 요서군의 유성은 당(唐)대 이전에 [당(唐)대의] 요수를 기준으로 그 서쪽 건너편으로 지명이동되었음이 분명하다. (글을 통한 해설이 다소 번잡하므로 지도1의 도면 참조 바람)

 

이상 요수(遼水) 및 유성(柳城)의 지명 이동에 관하여 간략히 논하여 보았다.

 

불필요한 혼란을 피하기 위하여 한(漢), 당(唐)대간 유성과 요수의 위치는 상호 구분되어야 한다.

  1. 한(漢)대 요수의 위치에 관하여는 ☞ 요수와 요동고새, 고조선과 한의 국경선, 당(唐)대 요수의 위치에 관하여는 ☞ 요수와 요택 그리고 마수산, 고구려-당 전쟁 당시의 위치 참조 바람
  2. 아울러 한(漢)대의 유성(柳城)은 요서군(遼西郡)의 속현이었으므로 그 위치는 한(漢)대의 요수(遼水) 서쪽편이었음도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