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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시기 연행로, 원나라 대도(大都)와 요나라 연경(燕京) - 고려 서경 위치 비정 5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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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나라 대도는 북경에 없었다.

진(秦)의 상곡(上谷), 어양(上谷) 2군 땅이었다. 한(漢)초에 연국(燕國)이 되었다가 또 나뉘어 탁군(涿郡)이 설치되었다. 원수(元狩)중에 연국을 유주(幽州)로 고쳤다. 원봉(元鳯)초에 광양군(廣陽郡)으로 고쳤다. 본시(本始)초에 광양국(廣陽國)으로 재차 고쳤다. 동한(東漢)이 광양을 덜어 상곡에 합하였다. 영원(永元)초에 다시 광양군을 세웠다가 후에 [광양]군을 없애고 유주를 세웠는데, 치소는 계(薊)였다. 삼국위(三國魏)의 연국(燕國)이 되었다가 진(晉)이 범양국(范陽國)으로 고쳤다. 후위(後魏)가 계(薊)에 연군(燕郡)을 세우고 또[연]군에 유주(幽州)를 설치하였다. 북제(北齊)가 유주에 동북도행대를 설치하였고 후주(後周)가 고쳐 연(燕) 및 범양(范陽) 2군을 설치하고 겸하여 유주에 총관을 세웠다. 수(隋) 개황(開皇)초에 군(郡)을 폐하고 주(州)를 보존하였다. 후에 주를 없애어 탁군(涿郡)에 편입하였다. 당(唐) 무덕(武徳)초에 유주총관부로 고쳤다. 개원(開元)연간에 [유]주를 범양군으로 고쳤다가 건원(乾元)초에 다시 유주로 삼았다. 요(遼)나라가 유주를 남경유도부로 승격시키고 후에 유도[부]를 석진부(析津府)로 고쳤다. 송(宋) 선화(宣和)중에 연산부(燕山府)로 개명하였다. 이내 다시 금(金)에 들어 연경(燕京)이라 칭하다가 중도(中都)로 개호하고 석진부를 대흥부(大興府)라 하였다. 원(元) 초에 연경로(燕京路)가 되었고 호는 대흥부였다. 지원 (至元)초(1264)에 중도(中都)를 세워 후에 대도로(大都路)로 고쳤다. 본조(明) 홍무(洪武)초(1368)에 북평부(北平府)로 고쳤고, 영락(永樂)초(1403)에 순천부(順天府)로 고쳤다. 5주, 22현을 거느린다.  秦為上谷漁陽二郡地 漢初為燕國又分置涿郡 元狩中改燕國為幽州 元鳯初改為廣陽郡 本始初更為廣陽國 東漢省廣陽合上谷 永元初復立廣陽郡後罷郡立幽州治薊 三國魏為燕國 晉改范陽國 後魏於薊立燕郡又於郡置幽州 北齊於幽州置東北道行臺 後周改置燕及范陽二郡兼立總管於幽州 隋開皇初郡廢州存後省州入涿郡 唐武徳初改為幽州總管府 開元間改州為范陽郡 乾元初復為幽州 遼陞幽州為南京幽都府 後改幽都為析津府 宋宣和中改名燕山府 㝷復入金稱燕京改號中都以析津府為大興府 元初為燕京路號大興府 至元初建中都後改為大都路 本朝洪武初改為北平府 永樂初改為順天府 領州五縣二十二
『明一統志』 권1 順天府

연산(燕山)은 한(漢)이 유주(幽州)의 치소로 삼은 계현(薊縣)이다. 원봉(元鳯)초에 광양군(廣陽郡)으로 고치고 본시(本始)초에 다시 광양국(廣陽國)으로 바꾸었다. 동한(東漢) 시기에 다시 유주가 되었다. 삼국위(三國魏)가 연국(燕國)으로 고치고, 진(晋)이 범양국(范陽國)으로 고쳤다. 후위(後魏)가 계(薊)에 연군(燕郡)을 세우고 또 [연]군에 유주를 설치하였다. 후주(后周)가 유주에 총관을 세웠다. 수(隋)가 [유]주를 없애고 탁군(涿郡)에 편입하였다. 당(唐) 초에 유주가 되었다가 개원(開元)중에 범양군(范陽郡)으로 고쳤다. 건원(乾元)초에 다시 유주가 되었다. 요(遼)나라 초에 유도부(幽都府)로 고쳤고, 후에 석진부(析津府)로 바꾸었다. 송(宋)이 연산부(燕山府)로 고치고 금(金)이 대흥부(大興府)로 고쳤다. 원(元)이 대도로(大都路)로 고쳤다. 홍무(洪武)초에 북평포정사사가 되었다. 태종(太宗)이 이곳에 연왕으로 책봉되었다. 후에 정난[의 변]이 있었고 천도하여 순천부(順天府)로 고치고 대흥, 완평 두 현을 더하여 늘렸다.  燕山漢為幽州冶薊縣 元鳯初改廣陽郡 本始初更廣陽國 東漢復為幽州 三國魏改燕國 晋改范陽國 後魏於薊立燕郡 又於郡置幽州 后周立總管於幽州 隋省州入涿郡 唐初復為幽州 開元中改范陽郡 乾元初復為幽州 遼初改幽都府 後改析津府 宋改燕山府 金改大興府 元改大都路 洪武初為北平布政使司 太宗封此為燕王 後靖難遷都改順天府以大興宛平貳縣附
『駱丞集』 권2, 唐 駱賔王 撰, 明 顔文選 註

원(元)의 수도 대도(大都)는 통상 지금의 북경(北京, 베이징)인 것으로 당연시되지만, 사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위 《明一統志(명일통지)》와 《駱丞集(낙승집)》의 '顔文選(안문선) 註'의 기사를 비롯한 여러 사료에 따르면 원(元)의 대도(大都)는 금(金)의 중도대흥부(中都大興府), 요(遼)나라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 및 그 이전 시기의 수(隋) 탁군(涿郡), 당(唐) 유주대도독부(幽州大都督府), 한(漢) 유주(幽州) 연국(燕國)·광양군/국(廣陽郡/國) 등의 치소인 고대 계현(薊縣)과 동일한 곳으로서, 그 위치는 今 하북성 보정시 소재 당현(唐縣)이다. 명(明)·청(淸)대에 이르러 고대 계현의 위치가 슬그머니 今 북경으로 지명이동되며 계현에 자리잡았던 원(元)의 대도를 비롯한 역대 모든 지명들이 그에 맞추어 막연히 북경으로 인식되어 고착화된 것일뿐 그 실제의 위치는 당현이다. 고대 계현의 실제 위치에 대하여는 필자가 이미 상세히 고증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 해설은 생략한다.

 

지도 6 - 고려 서경·요(遼)동경으로부터 원(元)대도·요(遼)연경까지의 연행로. 본 지도 출처: openstreetmap.org


원(元)의 대도(大都)를 今 보정시 당현(唐縣)의 올바른 위치에 놓고 보면 본 글의 1부에서, 고려 서경이 대도로부터 그리 멀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한 필자의 생각이 옳았음을 알 수 있고, 또한 1287년 서경(今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에서 함평부(咸平府, 今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일대를 경유하여 대도에 이르는 고려 공주와 세자의 연행 경로가 비로소 이해된다. 살펴보자면, 그들은 고성진(고려 서경) 서편 계조하(鷄爪河) 주변의 습지를 남쪽으로 우회하여 서수구(徐水區)의 중심부를 지나고 이어서 수성진(遂城鎮)을 거쳐 대왕점진(大王店 )에 도달한 뒤, 조하(漕河, 즉 요수)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던 당시 요택의 습지를 피해 북쪽의 동부산향(東釜山鄕)방면으로 우회하는 길를 택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어서 폭하(瀑河)상류(즉 압록수)를 건넜을 그들은 낭아산(狼牙山, 즉 갈석산) 아래의 좁을 통로를 지나 이번에는 조하(漕河 , 즉 요수)를 건넌 뒤, 만성구(滿城區) 타남향(坨南鄉)에 이르러 당현(대도)으로 곧장 향하는 길로 들어섰을 것이다. (지도6 참조) 하지만 그들이 통과해야 했던 今 폭하 상류 일대는 때마침 도적이 일어났던 함평부의 영역이었으므로 여정을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요나라 연경으로 향한 고려 사신들의 연행길

《한서지(漢書志)》에서 이르기를 「요동군(遼東郡)은 낙양(洛陽)에서 3천 6백리 떨어져 있으며, 속한 현으로서 무려(無慮)가 있다」고 했다. 곧 《주례(周禮)》에서 보이는 북진(北鎭)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이며, 대요(大遼)때에 그 아래에 의주(醫州)를 설치하였다. ...[중략]... 옛날 대요(大遼)가 멸망하지 않았을 때에 요(遼)의 황제가 연경(燕京)에 있었으니, 곧 우리의 조빙하는 사신들이 동경(東京)을 지나 요수(遼水)를 건너 하루 이틀에 의주(醫州)에 이르러, 연계(燕薊)로 향하였음으로 고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漢書志云 遼東郡 距洛陽三千六百里 屬縣有無慮 則周禮北鎮醫巫閭山也 大遼於其下置醫州 ...[중략]... 所謂朱蒙所都紇升骨城 卒夲者 蓋漢玄菟郡之界 大遼國東亰之西 漢志所謂玄菟屬縣髙句麗是歟 昔大遼未亡時 遼帝在燕景 則吾人朝聘者 過東京渉遼水 一兩日行至醫州 以向燕薊 故知其然也
『삼국사기』 권37 잡지 제6

후당(唐)으로부터 후진(晉)에 이르러 고조(髙祖, 석경당)는 요(遼)가 나라를 세우는데 돕는 노고가 있음으로 인하여 유주(幽州) 등 16개의 주를 분할하여 바치었다. 태종(太宗)은 이를 승격시켜 남경으로 삼았고 또한 연경(燕京)이라고 하였다.  自唐而晉, 髙祖以遼有援立之勞, 割幽州等十六州以獻. 太宗升為南京, 又曰燕京.
『遼史』 권40, 地理志4 南京道

대도로(大都路)는 당(唐) 유주범양군이다. 요(遼)나라가 연경(燕京)으로 고쳤다. 금(金)이 [이곳으로] 천도하여 대흥부(大興府)가 되었다.  大都路,唐幽州范陽郡。遼改燕京。金遷都,為大興府。
『元史』 권58, 地理1

한편 《삼국사기》에는, 위에 살펴보았던 공주와 세자의 연행보다 다소 이른 때이지만, 역시 같은 고려 시기의 사신들이 요(遼)나라의 연경(燕京)으로 향하던 연행로에 대하여 서술되어 있다. 기사상 사신들의 행선지인 '연경' 또는 '연계(燕薊)'는 곧 요나라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 今 당현唐縣)로서, 앞서 논증하였듯이 요나라 남경석진부와 원나라 대도(大都)는 동일한 위치에 있었으므로 양 시기의 연행로는 거의 같았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는 고려 사신들이 연행길에 거쳐간 요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는 곧 훗날 고려 공주와 세자가 역시 거쳐간, 동일한 위치의 원(元)의 동녕로(東寧路)이자 고려의 서경, 즉 今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이었다는 사실로도 뒷바침된다. 또한 고려 사신들이 요수(今 조하漕河)를 건너 도달한 의무려산(醫巫閭山) 아래의 요나라 의주(醫州)는 앞서 언급한 今 만성구(滿城區) 타남향(坨南鄉) 일대에 비정되는데, 그들 역시 타남향에 이르러 당현(연경)으로 향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고려 사신들은 동경(今 고성진)으로부터 의주(今 타남향)까지 70여 킬로미터의 거리를 하루 이틀 걸려 이동한 뒤 곧장 연경(今 당현)으로 향했던 것이다. (지도6 참조)

 

 

결론 (1부 ~ 5부 통합)

 

  • 원(元)의 동녕로(東寧路)는 명(明) 광녕위(廣寧衛)의 북쪽 방면에 있었다.
  • 원(元)의 동녕로(東寧路)는 한반도 평양•평안도 또는 요녕성 요양(遼陽)에 비정될 수 없다.
  • 고려 서경은 한반도 평양•평안도 또는 요녕성 요양에 비정될 수 없다.
  • 고려 서경은 고구려 평양의 위치, 즉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鎮)에 있었다.
  • [고려 서경 = 고성진(固城鎮)] 비정 위치는 청나라 유수 학자들에 의하여 교차검증되었다.
  • 원(元) 함평부(咸平府)의 위치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鎮) 일대에 비정된다.
  • 원(元) 대도( 大都) 및 요(遼)나라 남경석진부(南京析津府)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