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무려산(醫巫閭山)과 금나라 광녕부(廣寧府)의 위치 비정
카테고리 없음이해할 수 없는 의무려산 망제 위치
입동(立冬)에 정주(定州)에서 북악(北岳) 항산(恆山)과 북진(北鎮) 의무려산(醫巫閭山)에 나란히 제사를 지냈다. 立冬 祀北岳恆山、北鎮醫巫閭山並於定州
『宋史』 권 112, 太平興國8년(983)
송(宋)나라의 역사를 다룬 정사인 《宋史(송사)》에 북송(北宋)시기 정주(定州)에서 항산(恆山)과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제사를 지냈다는 기사가 있다.
이로부터 오악(五嶽)과 사독(四瀆) 모두에 일정한 예를 거행하게 됐다. 동악인 태산을 박에서, 중악인 태실산을 숭고에서, 남악인 첨산을 첨에서, 서악인 화산을 화음에서, 북악(北嶽)인 상산(常山)을 상곡양(上曲陽)에서, 황하를 임진에서, 장강을 강도에서, 회수를 평씨에서, 제수를 임읍의 경계 안에서 각각 제사를 지내고 모두 사자가 부절을 갖고 가서 제사를 모시도록 했다. 自是五嶽、四瀆皆有常禮。東嶽泰山於博,中嶽泰室於嵩高,南嶽灊山於灊,西嶽華山於華陰,北嶽常山於上曲陽,河於臨晉,江於江都,淮於平氏,濟於臨邑界中,皆使者持節侍祠。
『漢書』 권25 下 郊祀志
항산(恆山), [한서]지리지에 상곡양현(上曲陽縣) 서북에 있다 하였다. 지금의 정주(定州) 곡양(曲陽)이다. 恆山、地志在常山郡上曲陽縣西北。今定州曲陽也。
『書經集傳』 권2, 宋 蔡沈 撰
《漢書(한서)》에 의하면 오악(五嶽)과 사독(四瀆)에 예를 올리는 관례에 따라 북악(北嶽) 항산(恆山)에 대한 제사를 상곡양(上曲陽)에서 지냈다고 하는데, 남송(南宋)의 채침(蔡沈, 1176~1230)이 《書經(서경)》의 '항산(恆山)'에 대하여 주해하기를 「항산은 《漢書》 '지리지'에 상산군(常山郡) 상곡양현(上曲陽縣)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정주(定州) 곡양(曲陽)이다.」라고 하였다. 송(宋)대의 정주 곡양현은 今 하북성 보정시 곡양현(曲陽縣)이므로 당시의 항산에 올린 제사 역시 같은 곳에서 이루어졌을 것으로 유추할 수 있다. 고대의 항산은 곡양현(曲陽縣)의 서북 방면에 위치한 今 당현(唐縣) 소재 대무산(大茂山 즉 神仙山)이다.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요녕(遼寧) 북진현(北鎭縣) 서쪽 5리에 있다. 사람들이 광녕산(廣寧山)이라고 부른다. '毉無閭'로 쓰기도 한다. 음산산맥의 갈래이다. 醫巫閭山在遼寧北鎭縣西五里。人呼爲廣寧山。一作毉無閭。爲陰山山脈之分支。
『中國古今地名大辭典』 '醫巫閭山'
위 《宋史》의 기사 중 문제가 되는 부분은 북송(北宋)시기 의무려산에 대한 제사 역시 정주(定州)에서 지냈다는 점이다. 주지하듯이 통설상 의무려산의 위치는 今 요녕성 북진시(北鎮市) 부근으로서, 정주로부터는 직선거리로 670여 킬로미터나 떨어진 먼 곳이다. (지도1 참조), 망제(望祭)란 문자 그대로 멀리서나마 그 대상을 바라보면서 지내는 제례 의식인데, 하북성 정주에서 아득히 먼 거리에 있는 요녕성의 '의무려산'에 망제를 지낸 통설상의 정황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생각컨대 송(宋)시기에 북진(北鎮)은 경계 밖에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정주(定州)에서 멈추어 망제(望祭)를 지냈다. 按:宋時,北鎮遠隔封外,是以止於定州望祭。
『滿洲源流考』 권14
《滿洲源流考(만주원류고)》를 편찬한 청(清)나라 사관들도 《宋史》의 '의무려산 망제' 기사가 의아했던지 「북송(北宋)시기 의무려산이 위치했던 북진(北鎮)은 [청(清)대의 역사지리 인식에 따라] 북송의 국경 밖 거란족 요(遼)나라의 영토에 있었으므로 부득이 정주(定州)까지만 가서, 그곳에서 멈추어 제사를 지낼 수 밖에 없었을 것」이란, 다소 궁색하지만, 나름의 해명을 내놓았다. 그러나 한(漢)족의 북송 조정에서 굳이 만리장성 밖 멀리 '오랑캐'의 땅에 있는 '의무려산'에 애써 예를 올릴 이유가 있었을까 하는 점에서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지도 1 송(宋)대 정주(定州), 항산(恆山) 및 통설상의 의무려산(醫巫閭山)과 금(金) 광녕부(廣寧府)의 위치
금나라 광녕부는 하북성 보정에 있었다.
입동(立冬)에 정주(定州)에서 북악(北嶽) 항산(恆山)에 제사 지내고, 광녕부(廣寧府)에서 북진(北鎭) 의무려산(醫巫閭山)에 제사 지냈다. 立冬祭北嶽恆山于定州 北鎭醫巫閭山于廣寧府
『金史』 권 34, 大定4년(1164)
요(遼)가 현주(顯州) 봉선군(奉先軍)을 설치하고 현릉(顯陵)의 제사를 받들게 하였다. 치소는 봉선현(奉先縣)이었다. 겸하여 산동현(山東縣)을 거느렸다. 금(金)이 산동현을 고쳐 광녕(廣寧)이라 하였다. 아울러 광녕부(廣寧府)를 설치하고 치소를 이곳(광녕현廣寧縣)에 두었다. 원(元)이 [광녕]현을 없애어 광령부에 편입하였다. 명(明)이 [광녕]위(衞)를 설치하였다. 청(清)이 광녕현을 다시 설치하였다. 봉천(奉天) 금주부(錦州府)에 속한다. 민국(民國) [시기에] 북진현(北鎭縣)으로 고쳤다. 遼置顯州奉先軍以奉顯陵。治奉先縣。兼領山東縣。金改山東縣曰廣寧。並置廣寧府治此。元省縣入廣寧府。明置衞。清復置廣寧縣。屬奉天錦州府。民國改爲北鎭縣。
『中國古今地名大辭典』 '廣寧縣'
광녕부는 일개의 중국 고대 부(府)이다. 금(金) 천보7년(1123)에 현주(顯州)를 광녕부(廣寧府)로 승격시켰다. 부(府)의 치소는 산동현(山東縣)에 있었다. (1189년에 광녕현廣寧縣으로 고쳤다.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북진시北鎮市이다.) 경계는 지금의 요녕성 요하(遼河) 이서, 부신(阜新), 장무(彰武) 이남, 의무려산(醫巫閭山) 이동이었다. 廣寧府,中國古代一個府。金朝天輔七年(1123年)升顯州為廣寧府,府治所在山東縣(1189年改為廣寧縣,今遼寧省北鎮市),轄境為今遼寧省遼河以西,阜新、彰武以南,醫巫閭山以東。
『위키백과』 '廣寧府'
금(金)나라의 역사를 다룬 정사인 《金史》에도 역시 의무려산에 제사지냈다는 기사가 있어 주의를 요하는데, 이는 앞서 살펴본 《宋史》보다 2세기 정도 늦은 시기의 사료로서, 《宋史》와 달리 정주(定州)가 아닌 광녕부(廣寧府)에서 제사지냈다고 전한다. 통설상 금나라의 광녕부는 今 요녕성 북진시(北鎮市)의 '의무려산' 이동 지역이므로, 표면적으로는 요녕성 '의무려산' 부근의 금나라 '광녕부'에서 '의무려산'에 올리는 제사를 지낸것으로 당연히 이해되니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통상적으로 용인되는 요녕성 요하 유역의 의무려산과 금(金)나라 광녕부(廣寧府)의 비정 위치에 과연 문제가 없는 것일까?
안숙(安肅), 생각컨대 《金初州郡志(금초주군지)》에 「웅주(雄州), 패주(霸州), 보주(保州), 안주(安州), 수주(遂州), 안숙주(安肅州)의 6주(州)가 모두 광녕부(廣寧府)에 속하였다」 하였다. 《太宗紀(태종기)》에 실려 있기를 천회(天會)7년(1129년)에 하북(河北)을 동(東), 서로(西路)로 나누어 [6주를] 곧 하북동로(河北東路)에 소속시켰다 하였는데, 어찌 평주가 남경(南京)에 딸리고 6주가 광녕(廣寧)에 속하였겠는가? 그렇지 않다면 군지(郡志 즉 《金初州郡志》)가 그릇된 것이다. 安肅 按《金初州郡志》,雄、霸、保、安、遂、安肅六州皆隸廣寧府。《太宗紀》載天會七年分河北為東、西路,則隸河北東路,豈以平州為南京之後,以六州隸廣寧也?不然則郡志誤。
『金史』 권24, 지리上 安肅州
금(金)나라 광녕부(廣寧府)의 위치와 관련하여 위 《金史》 '지리지'의 안숙주(安肅州) 조항에 《金初州郡志(금초주군지)》란 책의 내용을 인용한 흥미로운 기사가 있다. 《金初州郡志》는 아마도 지금은 유실되어 전하지 않는 책인 듯하나, [후술하겠지만] 《金史》의 편자가 자신이 부정하려는 기록이 실린 사료를 굳이 《金史》의 본문에 소개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金初州郡志》는 《金史》가 편찬될 당시에 실존하였던 게 틀림없을 것으로 여겨지므로, 유실된 사료라는 이유만으로 기사의 진위에 대한 선입견을 가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도 2 《金初州郡志》에 드러난 금(金)나라 광녕부(廣寧府)의 실제 위치와 영역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6-精裝本-宋遼金)
여하튼, 《金初州郡志》의 기사가 전하는 중요한 사실은 웅주(雄州), 패주(霸州), 보주(保州), 안주(安州), 수주(遂州), 안숙주(安肅州) 등 6주, 즉 今 하북성 보정시 일대를 포괄하는 넓은 지역이 모두 금(金)나라의 광녕부(廣寧府)에 속하였다는 것이다. (지도2 참조) 이는 다시 말해서 금(金)나라 광녕부가 今 하북성 보정 일대에 있었다는 뜻인데, 의무려산의 실제 위치와 관련하여 실로 놀라운 기록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광녕부를 今 보정에 놓고 보면 북송(北宋)의 정주(定州)에서 의무려산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과 아울러 금(金)나라 광녕부에서 의무려산에 제사 지냈다는 기록]에 대한 의문이 비로소 모두 풀리기 때문이다.
참고로, 명(明)대의 저작인 《金史》의 편자는 다음과 같은 이유에서 《金初州郡志》의 기사를 부정하고 있다.
- [보정(保定) 일대의] 웅주(雄州), 패주(霸州), 보주(保州), 안주(安州), 수주(遂州), 안숙주(安肅州) 등 6주는 하북동로(河北東路)에 속하였으므로 [편자의 역사지리 인식상 今 요녕성 북진시의] 광녕부(廣寧府)에 있었을 리 없다.
- [보정(保定) 일대의] 6주와 [편자의 역사지리 인식상 今 요녕성 북진시의] 광녕부(廣寧府) 사이에는 [편자의 역사지리 인식상 今 진황도시 난하 유역의] 평주(平州)가 위치하였는데, 광녕부(廣寧府)는 분명히 평주에서 북동쪽으로 더욱 멀리 떨어져 있었으므로 6주가 광녕부(廣寧府)에 속했을 리 없다.
《金史》 편자의 이와 같은 태도는 평주(平州)와 광녕부(廣寧府)가 今 보정에서 진황도시 난하(灤河) 유역 및 요녕성 요하(遼河) 유역으로 각각 지명 이동된 이후의 왜곡된 역사지리관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계현(薊縣) : 망(望) 천보(天寳)원년에 [계현(薊縣)을] 나누어 광녕현(廣寧縣)을 설치하였다가 3년되는 해에 없앴다. 철(鐵)이 있다. 옛 수(隋)의 임삭궁(臨朔宫)이 있다. 薊 望 天寳元年 析置 廣寧縣 三載 省 有鐵 有故隋臨朔宫
『新唐書』 지리지 幽州 范陽郡
한편, 《新唐書(신당서)》 '지리지'에 따르면 천보(天寳)원년(742)에 유주(幽州) 계현(薊縣)의 일부를 떼어 광녕현(廣寧縣)을 설치하였다. 당(唐) 유주 계현의 위치는 今 하북성 보정시 당현(唐縣)이므로 당(唐)시기 그 부근에 광녕현이란 지명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금(金)대에 이르러 광녕부(廣寧府)의 치소인 광녕현이 같은 위치에 자리하였을 것으로 유추되는 대목이다.
의무려산은 갈석산의 서쪽에 있었다.
유성현(柳城縣), 중급. 서북쪽으로 해(奚)와 접하며 북쪽으로 거란과 접한다. 동북의 진(鎮)으로 의무려산사(醫巫閭山祠)가 있다. 또 동쪽에 갈석산(碣石山)이 있다. 柳城. 中. 西北接奚, 北接契丹. 有東北鎮醫巫閭山祠. 又東有碣石山.
『新唐書』 지리지 營州 柳城郡
위 《新唐書》 '지리지'의 기사에 따르면 당나라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에 의무려산 사당이 있었고 그 동쪽으로 갈석산이 위치하였다. 의무려산 사당은 마땅히 의무려산 부근이었을 것이므로 의무려산과 갈석산이 서→동 방향으로 상호 인접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학계의 통설상 고대의 의무려산으로 당연시 되는 今 요녕성 북진시(北鎮市)의 '의무려산'은 고대의 갈석산이 틀림없는 보정의 낭아산(狼牙山)과는 동떨어진 위치에 있으므로 참된 의무려산이 될 수 없다. 설사 백번 양보하여 갈석산의 위치를 다른 곳에 둘 수 있다 하더라도 요녕성 '의무려산'의 동쪽 방면으로는 광활한 만주 벌판이 끝없이 펼쳐져 있을 뿐 그곳에 갈석산이 있을 리 만무하다. 도리어 같은 통설상의 '갈석산'은 '의무려산'을 기준으로 서남쪽 멀리(직선거리 300여 킬로미터) 떨어진 今 진황도시 창려현(昌黎縣)에 비정되어 있으므로 《新唐書》 '지리지'의 기사에 정면으로 배치된다. 《新唐書》가 틀리지 않다면 통설상 의무려산의 비정 위치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金初州郡志》에 따라 웅주(雄州), 패주(霸州), 보주(保州), 안주(安州), 수주(遂州), 안숙주(安肅州) 등 6주를 포괄하는 금(金)나라 광녕부(廣寧府)의 위치를 가늠해 볼 때, 태행산맥(太行山脈)에 닿아 있는 광녕부의 서쪽 끝을 제외한 그 이동 지역은 나즈막한 야산 조차 볼 수 없는 광활한 평야 지대이므로 의무려산은 광녕부 서쪽 끝에 해당되는 보주(保州)의 서부, 즉 今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일대의 산지에서 찾아야 한다. (지도2 참조)
필자는 이전 글에서,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 안시성(安市城)에서의 패배 이후 당태종의 퇴각로와 관련하여, 당(唐) 영주(營州) 유성현(柳城縣)의 위치를 今 하북성 보정시 만성구(滿城區)의 타남향(坨南鄉) 일대에 비정한 바 있는데, 공교롭게도 그 부근이 곧 보정 의무려산의 위치로 비정되는 곳이다. 의무려산에 대한 제사가 있었다고 전하는 금(金)나라 '광령부(廣寧府)' 및 북송(北宋)의 '정주(定州)'는 같은 곳, 좀더 구체적으로는 今 만성구 타남향 일대를 가리키고 있을 것으로 유추된다. (지도2 참조)
고대의 의무려산(醫巫閭山)은 조하(漕河)를 경계로 하여 낭아산(狼牙山)과 잇닿아 있는 지금의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소재 와룡산(臥龍山)에 비정된다.
- 오악(五嶽)과 사독(四瀆): 중국의 오대 명산과 사대강
- 전한(前漢) 문제(文帝)의 이름 유항(劉恆)을 피휘(避諱)하여 항산(恆山)을 상산(常山)으로 바꿔 불렀다.
- 청(清)대에 《金史》의 오류를 바로잡기 위한 대대적인 수정 작업이 이루어졌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주석글의 형식으로 실린 《金初州郡志》 인용 기사가 어쩌면 보다 늦은 청대에 첨가되었을 개연성도 있다. ☞ http://www.chinaknowledge.de/Literature/Historiography/jinshi.html
- 고대 유주 계현의 위치에 관하여는 ☞ 수나라 탁군 계현은 북경이 아니다. 및 ☞ 고대 유주 연국 계현의 절대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당현이다. 참조 바람
- 갈석산과 낭아산에 관하여는 ☞ 갈석산 앞에 세운 연소왕의 황금대, ☞ 당대의 기록으로 본 갈석산의 바른 위치 및 ☞ 안사의 난 안록산 반란사건의 본거지 갈석산 참조 바람
- ☞ 임유관과 발착수, 새로 밝혀지는 위치, 당태종의 회군 경로 참조 바람
- 2011년에 출간된 《宋遼金元方志輯佚》의 목차에 《金初州郡志》가 등재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金初州郡志》는 현존하는 사료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