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안평(西安平) 위치 비정 1부 - 서안평은 파림좌기(巴林左旗)에 없었다.
카테고리 없음서안평은 파림좌기에 없었다.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 본래 한(漢)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의 땅이다. 신(新)나라 [왕]망(莽)은 북안평(北安平)이라 하였다. 上京道上京臨潢府,本漢遼東郡西安平之地。新莽曰北安平。
『遼史』 권37 地理志1, 上京道
《遼史(요사)》에 의하면 한(漢) 요동군(遼東郡) 서안평(西安平)현과 요나라의 수도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는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遼史》의 기록과 더불어 상경임황부가 내몽골 시라무렌강 유역의 파림좌기(巴林左旗)에 있었다고 하는 학계의 통설을 좇는다면 서안평의 위치는 파림좌기가 된다.
그런데 주지하듯이 중국 학계는 《遼史》의 기록을 불신하여 '서안평 파림좌기설'을 부정하고, 서안평을 상경과 분리하여 今 압록강변 단동(丹東)에 비정하였고, 국내 주류학계는 이를 그대로 수용하였다. 한편 터무니없는 '서안평 단동설'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될 수 있다고 여긴 때문인지 재야사학계의 일각에서는 '서안평 파림좌기설'을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사료를 조금만 살펴보면, 상경(上京)이 되었든 서안평(西安平)이 되었든 그 위치는 파림좌기(巴林左旗)가 될 수 없음을 즉시 깨닫게 된다.
우선 담기양(譚其驤)의 《중국역사지도집》으로 대변되는 중국 학계의 매우 과장된 주장에 따르더라도 한(漢) 요동군의 영역은 내몽골 시라무렌강 유역에 미치지 못했던 게 분명하다. 파림좌기(巴林左旗)가 [통설상] 한(漢) 요동군의 북쪽 경계에서 한참 벗어나 있음을 「지도1」에서 볼 수 있다. 중국 학계에서 조차 아니라고 하는 곳까지 국내 재야사학계가 한(漢)의 영역을 사실상 넓혀주고 있는 상황은 아이러니하다.
지도 1 - 파림좌기(巴林左旗)가 [통설상의] 한(漢) 요동군 영역 밖으로 멀리 떨어져 있다. 본 지도 출처:『谭其骧 中国历史地图集2-精装本-秦汉』 譚其驤 지음
상경(上京)은 태조(太祖)가 창업한 땅이다. 산을 등지고 바다를 안고 있어서 자연적으로 갖춘 험한 형세가 견고한 요새에 충분하다. 上京,太祖創業之地。負山抱海,天險足以為固。
『遼史』 권37 地理志1, 上京道
[후(後)]조(趙) 횡해장군 왕화가 수군을 거느리고 바다를 통하여 연안평(燕安平)을 엄습하여 부수었다. [이곳은 요동군의 서안평(西安平)이다.] 趙橫海將軍王華帥舟師自海道襲燕安平,破之。[此遼東郡之西安平也。]
『資治通鑑』 권96, 咸康7년(341) 10월
아울러 위 《遼史》 및 《資治通鑑》의 사료에 드러나 있듯이 요나라 상경(上京)과 서안평(西安平)은 바다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게 틀림없는데, 파림좌기(巴林左旗)는 요동만의 바닷가에서 수백킬로미터 떨어진 내몽골의 내륙 고원지대로서 「바다를 안고 있다」라는 표현에 전혀 어울리지 않을뿐더러, 해발고도가 500미터에 달하여 「수군이 바다를 통해 공격」하기에는 아예 불가능한 곳이다.
따라서 파림좌기는 요나라 상경 또는 한(漢) 요동군 서안평(西安平)현이 될 수 없음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상경임황부(上京臨潢府)와 서안평이 같은 곳에 있었다는 《遼史》의 기록은 학계에서 불신하든 말든 여전히 유효하다.
2부에서 계속 ... ☞ https://earthlin9.tistory.com/3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