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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안평(西安平) 위치 비정 2부 - 요나라 상경(上京)은 안시성(安市城) 북동쪽 60리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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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나라 상경(上京)은 안시성(安市城) 북동쪽 60리에 있었다.

 

철주(鐵州) 건무군(建武軍). 자사를 두었다. 본래 한나라 안시현(安市縣)으로 고구려 때는 안시성(安市城)이었다. 당태종이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설인귀가 흰 옷을 입고 올랐다는 성이 바로 이곳이다. 발해가 주를 설치하였다. 옛날 4개의 현이 있었다. 위성(位城)•하단(河端)•창산(蒼山)•용진(龍珍)인데 모두 폐지되었다. 호수는 1,000이다. 경(京) 서남쪽 60리에 있다. 1개의 현을 거느렸다. 탕지현이다.  鐵州,建武軍,刺史。本漢安市縣,高麗為安市城。唐太宗攻之不下,薛仁貴白衣登城,即此。渤海置州,故縣四:位城、河端、蒼山、龍珍,皆廢。戶一千。在京西南六十里。統縣一:湯池縣。
『遼史』 권38 地理志2, 東京道

 

필자는 이전 글에서 고구려 안시성의 절대위치에 대하여 밝힌 바 있는데, 《遼史(요사)》 지리지의 '동경도(東京道)'편에 「안시성(즉 철주)이 경(京) 서남쪽 60리에 있다」는 기록이 있어, 요나라 상경(上京)의 위치 추적과 관련하여 주목을 끈다. 그 이유는 물론 '京'이 상경을 의미할 경우 기록은 요나라 상경의 위치를 가늠할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기록상의 '京'이 가리키는 바가 애매모호하다는 점이다. 즉, '京'이 요나라 전체의 수도 상경을 가리킬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반면 '동경도'편의 기록인 만큼 '京'은 마땅히 동경(東京)을 뜻한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당 기록의 전문적인 해석 또한 일관되지 못하여, 2012년 간행된 《國譯 遼史(국역 요사, 단국대학교출판부)》에는 '京'이 동경(東京)으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에는 상경(上京)으로 각각 달리 번역되어 있다. 아직 이에 대한 학계의 정설이 없는 게 분명한 듯한데, 해석에 따라 고구려 안시성과 요나라 상경(上京) [또는 동경(東京)]의 상호간 위치와 직접 결부되어, 증빙 사료가 될 수 있다는 중대성을 감안하면 '京'의 의미는 반드시 밝혀져 올바르게 정의되어야 한다.

 

필자는 오랜 분투 끝에 위 《遼史》 지리지 기록상의 '京'이 상경(上京)을 의미한다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는데, 이에 대한 논증에 대하여 알아보자.

 

지도 2 - 고구려 성(城)들과 요나라 경(京)들의 상대적 위치도

암주(巖州)는 본래 고구려의 본거지였다. 당태종이 요(遼)를 정벌하여 백암성(白巖城) 아래에 주둔함으로 인하여 암주를 세웠다. 지금은 거란이 병영을 두어 지키는데, [암]주의 이름은 고치지 않았다. 동쪽 190리에 여진과 경계하고,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동경(東京)에 이른다. 남으로 집주에 이르고 북으로 운산현에 이른다.  巖州,本高麗所據之地,唐太宗伐遼,師次白巖城下,因建為巖州。今契丹置兵屯守,州名不改。東至女真界百九十里,東南至東京五十里,南至集州,北至雲山縣。
『武經總要』 前集 권16下

황제가 백암(白巖)[성]에서 이기고 이세적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安市城)은 험준하고 병력이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으니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그에게 주었다고 하오. [반면] 건안(建安)[성]은 병력이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만일 불의에 나가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오. 공이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소.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뱃속에 있는 셈이니, 이것이 병법에서 이른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될 성도 있다"라는 것이오.」하였다.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遼東)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했다가 만약 고구려인[麗人]이 우리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해야 합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을 치며 행군하여 건안성도 빼앗으면 그만입니다.」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소.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하시오.」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乱,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囙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小, 若岀其不意攻之, 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 "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将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為将, 安得不用公䇿, 勿誤吾事.」 世勣遂攻安市.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645)

황제가 [이]적([李]勣)과 공격할 방법을 논의하였다. 황제가, 「내가 들으니 안시(安市)[성]은 지세가 험하고 무리들이 사나워 막리지가 공격하였지만 능히 이기지 못하였다고 한다. 그러므로 [안시성은] 그대로 두자. 건안(建安)[성]은 험준하여 단절됨을 믿고 있는데, 군량은 많으나 군사가 적으므로, 만약 불의에 나아가 친다면 서로 구원해 주지 못할 것이다. 건안[성]을 차지하면 안시[성]은 우리 뱃속에 있게 될 것이다」라고 하자, [이]적([李]勣)은, “그렇지 않습니다. 요동(遼東)에 군량을 쌓아 두고 서쪽으로 건안[성]을 친다면, 적들이 장차 우리의 귀로(歸路)를 막을 것이므로 안시[성]을 먼저 치는 것만 같지 못합니다」하였다. 이에 황제는 "좋다" 하고,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는데, 함락시킬 수 없었다.  帝與勣議所攻, 帝曰: 「吾聞安市地險而衆悍, 莫離支擊不能下, 因與之. 建安恃險絶, 粟多而士少, 若出其不意攻之, 不相救矣. 建安得, 則安市在吾腹中.」 勣曰: 「不然. 積糧遼東, 而西擊建安, 賊將梗我歸路, 不如先攻安市.」 帝曰: 「善.」 遂攻之, 未能下. 
『新唐書』 東夷列傳, 高句麗

위 《武經總要(무경총요)》의 기사에 따르면 암주(巖州), 즉 백암성(白巖城) 동남쪽 50리에 요나라 동경(東京)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백암성은 요나라 동경 서북쪽 50리에 있었다. 

한편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이세적의 언급 내용에서 안시성(安市城), 백암성(白巖城) 및 건안성(建安城)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즉 이세적이 백암성에서 말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북↓남 방향으로 안시성, 백암성, 건안성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시성은 백암성의 북쪽 방면에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武經總要》에 「백암성(白巖城)이 요나라 동경(東京)의 서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논리적으로, 백암성 보다 더 북쪽에 위치했던 안시성(安市城)이 동경의 서남쪽에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遼史》 지리지의 '동경도(東京道)' 편에 「안시성이 경(京) 서남쪽 60리에 있다」는 기록상의 '京'은 동경이 될 수 없음을 알 수 있다. 동경이 아니라면, '京'은 상경(上京)을 가리킴이 틀림없다. 즉 안시성은 요나라 상경 서남쪽 60리에 있었던 것이다. (글을 통한 해설이 다소 번잡하므로 지도2의 도면 참조 바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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