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백암성(白巖城), 새로 밝혀지는 위치
카테고리 없음백암성은 안시성 가까이에 있었다.
황제가 백암(白巖)[성]에서 이기고 이세적에게 말하기를, 「내가 들으니 안시성(安市城)은 험준하고 병력이 정예하며, 그 성주는 재능과 용기가 있으니 막리지의 난에도 성을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고, 막리지가 이를 공격하였으나 함락시킬 수 없어 그에게 주었다고 하오. [반면] 건안(建安)[성]은 병력이 약하고 양식이 적으므로, 만일 불의에 나가 공격한다면 반드시 이길 것이오. 공이 먼저 건안[성]을 공격하는 것이 좋겠소. 건안[성]이 함락되면 안시[성]은 내 뱃속에 있는 셈이니, 이것이 병법에서 이른바 "성 가운데는 공격해서는 안될 성도 있다"라는 것이오.」하였다. [이세적이] 대답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으며, 우리 군량은 모두 요동(遼東)에 있습니다. 지금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했다가 만약 고구려인[麗人]이 우리의 보급로를 끊는다면 장차 어찌하겠습니까? 먼저 안시[성]을 공격해야 합니다. 안시[성]이 함락되면, 북을 치며 행군하여 건안성도 빼앗으면 그만입니다.」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공을 장수로 삼았으니 어찌 공의 책략을 쓰지 않겠소. 나의 일을 그르치지 말도록 하시오.」하였다. [이]세적이 드디어 안시[성]을 공격하였다. 帝之克白巖也, 謂李世勣曰, 「吾聞安市城險而兵精, 其城主材勇, 莫離支之乱, 城守不服, 莫離支擊之, 不能下, 囙而與之. 建安兵弱而糧小, 若岀其不意攻之, 必克. 公可先攻建安, 建安下則安市在吾腹中, 此兵法所謂 "城有所不攻者也"」 對曰, 「建安在南, 安市在北, 吾軍糧皆在遼東, 今踰安市而攻建安, 若麗人斷吾糧道, 将若之何. 不如先攻安市, 安市下, 則鼓行而取建安耳.」 帝曰, 「以公為将, 安得不用公䇿, 勿誤吾事.」 世勣遂攻安市.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보장왕 4년(645)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기록된 이세적의 언급 내용에서 안시성(安市城), 백암성(白巖城) 및 건안성(建安城)의 상대적 위치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즉 이세적이 백암성에서 말하기를 「건안성은 남쪽에 있고 안시성은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북↓남 방향으로 안시성, 백암성, 건안성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안시성은 백암성의 북쪽 방면에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안시성과 백암성의 이러한 상대적 위치를 염두에 두고 이세적의 계속되는 언급을 주의 깊게 살펴보면 뭔가 앞뒤가 안맞는 정황이 포착된다. 설명하자면, 당태종과 이세적의 대화가 이루어진 지점인 백암성에서 남쪽으로 건안성을 공격하는 상황을 두고 이세적이 「안시성을 넘어서 건안성을 공격한다」라고 말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논리적으로, 백암성으로부터 그 남쪽 방면에 위치한 건안성으로 가기 위하여 구태여 [백암성의 북쪽에 있는] 안시성을 "넘을" 필요는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제기된다는 것이다.
이는 원문의 「踰安市」에 대한 해석상의 문제일 수 있는데, 「踰安市」는 「안시를 넘어서」, 「안시를 지나쳐서」, 「안시를 건너뛰어」 등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모두 같은 논리적 문제를 안고 있다.
우선 '踰'의 정의된 뜻을 확인하여 번역이 정확한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듯하다.
사진 1 - 국립중앙도서관 《유니코드 한자사전》 : '踰'
국립중앙도서관의 《유니코드 한자사전》에는 '踰'의 뜻이 영어의 'exceed(~을 초과하다)', 'cross over(~을 건너다)', 및 'transgress'로 정의되어 있다. 'exceed'는 이미 위에서 살펴본 「안시를 지나쳐서」의 경우에 해당할 듯하고, 'cross over' 역시 「안시를 넘어서」 또는 「안시를 건너뛰어」와 같은 예일 것이다.
'transgress'는 「~의 한계를 벗어나다」란 뜻으로서, 이를 적용할 경우 해당 문구 「今踰安市而攻建安」는 「지금 안시(安市)의 영역[즉 한계]을 벗어나서 건안(建安)을 공격했다가 ...」로 해석된다. 이는 즉 백암성에서 남쪽으로 이동하면 안시성의 영역에서 벗어나 멀어지게 된다는 뜻으로서, 안시성이 백암성의 북쪽에 위치한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일단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보다 중요하게는 「백암성은 안시성의 영역에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백암성은 안시성 가까이에 있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백암은 '배암'이었다.
백애성(白崖城)을 치기 위하여 앞으로 나아가는데, 성(城)이 산을 등지고 물가에 있어 매우 험난하였다. 進攻白崖城, 城負山厓水, 險甚.
『新唐書』 권220, '東夷列傳 高句麗'
위 《新唐書(신당서)》의 기록을 통하여 백암성이 산성(山城)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위 논거에 따라 「백암성이 안시성 가까이에 있었다」고 가정할 경우, 백암성의 위치 추적 범위는 안시성 남쪽 방면의 멀지 않은 곳 어딘가에 있었던 산(山)으로 좁혀진다.
고구려의 옛 방언에 큰 새를 ‘안시(安市)’라 하니, 지금도 우리 시골말에 봉황(鳳凰)을 ‘황새’라 하고 사(蛇)를 ‘배암(白巖)’이라 함을 보아서, 「수(隋)·당(唐) 때에 이 나라 말을 좇아 봉황성을 안시성으로, 사성(蛇城)을 백암성(白巖城)으로 고쳤다」는 전설이 자못 그럴싸하기도 하다. 高勾麗方言 稱大鳥曰安市 今鄙語往往有訓鳳凰曰安市 稱蛇曰白巖 隋唐時就國語 以鳳凰城爲安市城 以蛇城爲白巖城 其說頗似有理
『열하일기』 '도강록'
많은 내외 문헌에 이 양만춘의 안시성이 바로 봉황산의 남쪽 기슭에 있는 옛 성터로 적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박연암을 비롯, 많은 연행 학자들이 옛날 서당에서 가르치는 천자문에 '봉(鳳)'자가 "안시 봉"으로 훈독되었음을 상기시키면서 봉황의 옛 방언이 안시요, 곧 안시성이 봉황성이라고 고증하고있다.
『이규태의 新 열하일기』 '봉황산 안시성'
백암성(白巖城)은 통상, 문자 그대로 백암(白巖) 즉 흰돌로 쌓은 고구려의 산성으로 알려져 今 요녕성 등탑시(燈塔市)의 연주성(燕州城)에 비정되어 있지만, 연암 박지원이 《열하일기》에 언급한 '전설'에 따르면 「安市」는 큰 새를 뜻하는 우리 말 「안시」를, 「白巖」은 우리 말 「배암(蛇)」을 한자로 각각 음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다면, 안시성의 옛터가 위치한 역현(易縣)의 봉황산(鳳凰山)이 봉황(즉 '큰 새')의 형상을 한 산(山)인 것에 부합하여 백암성 역시 「배암」 형상의 산(山)과 관련이 있지 않을까?
사진 2 - 보정시 역현(易縣)의 백암성터와 안시성터 전경 (이미지 출처 : 구글어스)
역현의 봉황산 남쪽 방면 약 1킬로미터 [북소촌(北邵村) 동쪽 2킬로미터] 거리에 위치한 해발 116미터 높이의 야산이 확인된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위성사진상 산의 모습이 영락없는 '뱀대가리'의 형상이다. (사진2 참조)
《열하일기》에 기록된 「봉황과 배암」의 조합과 묘하게 매치되는 위 역현(易縣)의 지리적 정황이 그저 우연의 일치인 것일까?
우선 사서에 기록된 여러 고구려성들 가운데 하필이면 안시성과 백암성이 함께 엮여, 두 동물과 관련된 그 유래가 알려진 정황을 감안하면, 우연일 가능성은 희박할 듯하다. 비록 문헌이 아닌 구두로 전해진 전설의 형식인 듯하나, 위 《열하일기》의 서술 내용은 안시성과 백암성에 얽힌 엄연한 사실들이 고대로부터 정확히 후대에 전달된 것으로 판단된다.
사서의 기록에 의하여 교차검증되는 백암성의 절대위치
암주(巖州)는 본래 고구려의 본거지였다. 당태종이 요(遼)를 정벌하여 백암성(白巖城) 아래에 주둔함으로 인하여 암주를 세웠다. 지금은 거란이 병영을 두어 지키는데, [암]주의 이름은 고치지 않았다. 동쪽 190리에 여진과 경계하고, 동남쪽으로 50리를 가면 동경(東京)에 이른다. 남으로 집주에 이르고 북으로 운산현에 이른다. 巖州,本高麗所據之地,唐太宗伐遼,師次白巖城下,因建為巖州。今契丹置兵屯守,州名不改。東至女真界百九十里,東南至東京五十里,南至集州,北至雲山縣。
『武經總要』 前集 권16下
지도 1 - 백암성과 요나라 동경요양부의 상대적 위치 (본 지도 출처: tencent maps)
《武經總要(무경총요)》에 따르면 암주(巖州), 즉 백암성(白巖城) 동남쪽 50리에 요나라 동경(東京)이 있었다. 다시 말해서 백암성은 요나라 동경 서북쪽 50리에 있었다. 송(宋)대의 척(尺, 0.2700미터)을 기준으로 통용되던 당시의 「1리(里) 당 1,500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요나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의 절대위치인 今 보정시 정흥현(定興縣) 고성진(固城鎮)의 서북쪽 50리(20.25km)에 해당하는 곳은 역현(易縣) 「뱀대가리 형상 산」의 실제 위치에 정확히 일치한다. 이는 곧 앞서 논한 바와 같이, 이세적이 언급한 「踰安市」에 대한 필자의 새로운 해석 및 《열하일기》상의 「백암성 관련 전설」에 기반하여 추적한 백암성의 절대위치에 대한 교차검증이 된다.
아울러 위성사진에서 확인되는 백암성터는 한눈에도 안시성터보다 훨씬 작아 보이는데, 이는 사서에 기록되어 있듯이, 백암성이 10,000여 명을 수용하는 크기로서 요동성 또는 안시성에 비하여 작은 규모였던 사실에 부합한다.
결론
고구려 백암성(白巖城)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북소촌(北邵村) 동쪽 2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한 배암(蛇) 형상의 야산(☞ 39°11′59″N 115°29′04″E)에 있었다.
- 백애성(白崖城): 곧 백암성(白巖城)을 말한다.
- ☞ 안시성과 주필산, 새로 밝혀지는 위치 참조 바람
- 《武經總要(무경총요)》는 1126년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이 금(金)에 함락되었을 당시 원본이 소실되었고, 남송(南宋) 시기에 다시 간행되었다.
- ☞ Chinese units of measurement 참조 바람
- ☞ 고조선의 왕검성과 고구려 평양성의 위치는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의 고성이다. 낙랑군 패수현의 정확한 위치 발견 참조 바람
- 장사(長史): 지방 장관의 속관
- 참고로, 통설상 요(遼)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로 비정되는 今 요녕성 요양시(遼陽市)는 같은 통설상 고구려 백암성으로 비정되는 今 요녕성 등탑시(燈塔市) 연주성(燕州城)의 서남 방면에 위치하여 《武經總要(무경총요)》의 기록에 정면 배치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