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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보정설'의 창시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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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랑군 보정설'의 창시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시다.

 

단재 신채호의 《朝鮮民族의 全盛時代 (조선민족의 전성시대)》란 제목의 글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北史」와 「隋書」를 考하면 「魏」와 「隋」가 일즉 「上爲」에 在하야 郡을 置하야 「樂浪」이라 하고 縣을 置하야 「遂成」이라 일홈 하얏스니 燕의 長城은 上爲谷에 起한 것이 明白하다. 「晉書」의 書載가 此를 指함이라. 「晉書」作者 「唐太宗」이 「隋」末에 生하야 「晉陽」에 家하매 항상 此를 見하고 燕의 長城을 이갓치 말함이라. 그러면 「碣石山」은 엇지 함이뇨. (禹貢冀州가 夾右碣石이라 하고 其下又云太行王屋至於碣石)이라 하니 이는 一時에 二碣石이 有한 연고라. 「新唐書」에 (平州石城에 有碣石山)이라 하고 (營州柳城에 亦有碣石山)이라 하니 당시에 대개 衆石이 碑碣 갓치 立한 것이면 「碣石山」이라 名함도 그럴 뜻하나니 엇지 上谷인덜 碣石山에 無하리요.
『朝鮮民族의 全盛時代』 (삼천리 제7권 제1호, 1935년 1월 1일 발행)

위 《朝鮮民族의 全盛時代》의 기사 중 「상위(上爲)」는 곧 선화(宣化)로서, 今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의 자형관(紫荊關)을 중심으로 한 내삼관(內三關) 일대를 가리키고, 「상곡(上谷)」은 今 하북성 보정시 역현 및 서수구(徐水區) 일대를 말한다. 「上爲谷」은 「上爲와 上谷」을 뜻한다.

 

원화원년(432), 태무가 친히 토벌하자 홍영성이 굳게 지켰다. 그 영구, 요동, 성주, 낙랑, 대방, 현도의 6군이 모두 투항하자 태무는 그 30,000여 가구의 사람들을 유주로 옮겼다.  延和元年,太武親討之,弘嬰城固守。其營丘、遼東、成周、樂浪、帶方、玄菟六郡皆降,太武徙其人三萬餘家於幽州。
『北史』  권93, 列傳 제81, 僭偽附庸


수성현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했다. 북위가 영주에 준하여 남영주를 설치했다. 5군 11현이다.(용성현‧광흥현‧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석성현‧양무현‧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한다. 양평현‧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현‧대방현‧영안현은 영구군에 속한다.) 북제(北齊)는 오직 창려군 한 개만 남겨놓고 영락현과 신창현 등 2개현을 다스렸으며,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개황원년(581년)에 주(州)를 옮겼으며, 3년에는 군을 폐하였고, 18년에는 수성현으로 고쳤다. 용산이 있다.  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 五郡十一縣. 龍城 廣興 定荒 屬 昌黎郡, 石城 陽武 廣都 屬建德郡, 襄平 新昌 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 帶方 永安 屬營丘郡. 後齊唯留黎一郡, 領 永樂 新昌 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為遂城. 有龍山.
『隋書』  지리지, 冀州 上谷郡 遂城縣

단재가 지적한 바와 같이, 위(魏)와 수(隋)가 두었다는 낙랑군(樂浪郡)과 수성현(遂城縣 즉 遂成縣)은 곧 위 《北史(북사)》 열전 및 《隋書(수서)》 지리지에 각각 기록된 북위(北魏)의 영주(營州) 낙랑군(樂浪郡)과 수(隋)의 기주(冀州) 상곡군(上谷郡) 수성현(遂城縣)을 가리킨다. 

낙랑군(樂浪郡) [한(漢)에서 설치하였다. 6개의 현을 다스린다. 가구수는 3700이다.] 조선현(朝鮮縣) [주(周)가 기자(箕子)를 봉한 땅이다.] 둔유현(屯有縣), 혼미현(渾彌縣), 수성현(遂城縣)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루방현(鏤縣), 사망현(駟望縣).  樂浪郡 [漢置 統縣六 戶三千七百] 朝鮮 [周封箕子地] 屯有 渾彌 遂城 [秦築長城之所起] 鏤方 駟望
『晉書』  권 14 '地理 上', '平州'

또한 "燕의 長城은 上爲谷에 起한 것이 明白하다. 「晉書」의 書載가 此를 指함이라."한 것은 《晉書(진서)》 지리지 '평주(平州) 낙랑군(樂浪郡)' 조항의 「수성현은 진(秦)이 쌓은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遂城, 秦築長城之所起」라는 기록을 가리킨다.

정리하면, 단재는 연(燕)/진(秦)장성의 기점이 「수(隋) 기주 상곡군 수성현 = 진(晉) 평주 낙랑군 수성현 = 今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 있었고, 갈석산 역시 그 일대(上谷)에 위치 하였음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1930년대에 이미 단재는 이와 같이 주장하였으니 명실상부한 '낙랑군 보정설'의 창시자는 다름 아닌 단재 신채호 선생이시다.

 

 

몽염(蒙恬)은 제(齊)나라 사람이다. 진(秦)나라 장수로서, 처음으로 붓을 만들었다. 진시황(始皇)이 몽염을 보내어 정병 30만을 거느리고 북녁에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다. 임조(臨洮)에서 일어나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를 뻗어 흉노(匈奴)에 위엄을 떨쳤다. [장성(長城)이 지금의 수주(遂州) 지경, 즉 안숙현(安肅縣) 지방에 있다.]  蒙恬齊人 始製筆爲秦將 始皇遣恬率精兵三十萬北築長城起自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 威振匈奴 [長城在今遂州界即安肅縣地方]
『保定郡志』 권9, 職官3 厯代宦蹟, [明 弘治甲寅年(1494년) 간행]

진(秦)나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었다는 명(明)대의 遂州(수주)가 정확히 지금의 보정시(保定市)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의 위치에 표기되어 있다.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7-精裝本-元明)



"낙랑군 수성현 = 진황도시 창려현" 설은 잘못된 사료 해석에서 비롯되었다.


갈석산은 담기양[譚其驤] 주편[主編]으로 중국사회과학원에서 만든 『중국역사지도집』 '진[秦]·서한[西漢]·동한[東漢]시기'에도 진황도와 난하 사이 창려현 북쪽에 위치하고 있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재의 창려현과 『사기』의 수성현은 과연 연관이 있을까? 그렇다면 현재의 창려현이 『사기』에 나온 수성현의 후신이라는 증거만 있으면 낙랑군의 위치에 관한 오랜 논쟁은 종지부를 찍는 셈이다. 
『수서(隋書)』 「지리지」 ‘상곡군(上谷郡)조’를 보면 “수성은 옛날의 무수이다. 후위에서 남영주를 설치하자 영주에서는 5군 11현을 비준했다. (수성의) 용성, 광흥, 정황은 창려군에 속한다[遂城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五郡十一縣: 龍城, 廣興, 定荒屬昌黎郡]”는 구절이 있다. 수성현이 창려현으로 변했다는 사료이다. 수성현은 당나라 때에는 북경 서쪽의 역주(易州)에 소속되었다는 기록들이 전한다. 이로써 갈석산이 있던 낙랑 수성현은 현재의 하북 창려임을 의심할 바가 없게 되었다.
『고조선은 대륙의 지배자였다』, 2006, 역사의아침, 109쪽

한편 재야사학계의 일각에서는 단재 신채호가 거의 1세기 전에 이미 주시하였던 상기 《隋書(수서)》 지리지의 기사를 주된 증거 사료로 내세워 한(漢) 낙랑군 수성현(遂城縣)과 갈석산이 今 하북성 진황도시 창려(昌黎)에 있었다고 주장하였는데, 불행히도 해당 학설은 주류강단사학계의 손쉬운 먹잇감이 되어 호되게 반박당한 뒤 근거 없음이 확인된 것에 더하여, 그들로 하여금 재야시민사학계 전체를 도매금으로 싸잡아 '사이비 역사학'이라 매도할 빌미를 주는 결과를 낳았다. 그도 그럴 것이 수나라의 상곡군(上谷郡) 수성현(遂城縣)이 今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일대라는 사실은 이 분야의 고대사 연구자들에게는 상식에 속하는데, 이를 엉뚱하게도 진황도시 난하 유역의 창려에 버젓이 가져다 놓았으니 심히 당혹스럽지만,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밖에 없다.

잘못된 사료 해석에 기반한 주장은 마땅히 철회되어야 하고, 실수는 품위있게 인정하여야 한다.
거짓으로 또 다른 거짓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1. 1936년 2월 21일, 단재 선생께서 옥사하기 1년 여 전인 1935년 1월 1일에 발행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朝鮮民族의 全盛時代》는 선생께서 여순 감옥에서의 수감 생활 중 매우 힘겨웠을 형편에서 집필한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원문 참조 ☞ 《朝鮮民族의 全盛時代 (조선민족의 전성시대)》
  2. 사실 "낙랑군 수성현 = 진황도시 창려현"설의 문제점은 재야사학자 김봉열 선생("고조선으로 가는 길" 저자)에 의하여 이미 10여 년 전에 제기되었다. 강단사학계는 같은 내용을 재탕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3. 내삼관(內三關)에 대하여는 ☞ 진개(秦開) 연장성(燕長城)의 기점 조양(造陽)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의 자형관(紫荊關) 일대에 있었다.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