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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 위치 비정 1부 - 서경은 원나라 대도(大都)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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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서경은 원나라 대도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식(王禃, 원종)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신이 조서를 받들어 이미 복위하였으니, 이제 700인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가 뵙고자[入覲]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400인만 데리고 오고, 나머지는 서경(西京)에 머무르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고려 서경이 내속(內屬)하였으니 동녕부(東寧府)로 고치고 자비령(慈悲嶺)을 경계로 삼게 하였다.  高麗國王王禃遣使來言, “比奉詔臣已復位, 今從七百人入覲.” 詔令從四百人來, 余留之西京. 詔高麗西京内属, 改東寧府, 畫慈悲嶺爲界.
『元史』 권7 本紀7 世祖4 至元7年 庚午 春正月 甲寅, 1270년 1월 14일(음)

1270년 1월(음), 무신정권의 집권자 임연(林衍)에 의해 일시적으로 폐위당하였다가 원(元) 황제 쿠빌라이 칸의 도움으로 복위한 고려 원종(元宗)은 쿠빌라이를 만나기 위해 700인의 사절단을 이끌고 원(元)의 수도 대도(大都)를 찾는다. 사절단의 규모가 과하다고 여겼던지 쿠빌라이는 700명 중 400명만 입조를 허락하고 나머지 300명은 서경에서 기다리며 머무르게 하였다고 《元史(원사)》의 기록은 전한다.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원종과 700인은 이미 서경에 도달하여 원(元)에 입조하겠다는 통고를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 왜냐하면 만약 수도 개경에서 원(元)의 입조 허락을 구하였다면 어차피 대도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잉여로 남을 300인이 구태여 서경으로 이동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여기서 석연챦은 점은, 통설에 따라 고려 서경의 위치를 今 한반도 평양으로 볼 경우, 이는 곧 입조하지 못한 300인이 원(元)의 대도로부터 수천리 떨어진 곳에서 원종과 사절단 일행이 일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며 대기하였다는, 어이없는 상황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정황상 고려 서경은 원(元)의 대도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음이 분명한데, 이 사실을 거듭 뒷바침 할 아래 기사들을 아울러 살펴보자.

○경오. 왕이 원(元)에 갔다. 이번의 행차는 대개 전왕의 환국을 저지하고 또한 공주를 서흥후(瑞興侯) 왕전(王琠)에게 개가(改嫁)시키도록 청하기 위한 것이었으니, 사람들은 승지(承旨) 송린(宋璘)의 계획에 현혹된 것이라고 여겼다. 왕이 서경(西京)에 이르렀으나, 황제가 입조를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이내 돌아왔다.  ○庚午. 王如元. 是行也, 蓋欲沮前王還國, 又請欲以公主改嫁瑞興侯琠, 人以爲惑於承旨宋璘之謀也. 王至西京, 帝不許入朝, 乃還.
『고려사절요』  권22 충렬왕(忠烈王) 29년 9월, 1303년 9월 16일(음)

충렬왕 29년 (1303) 고려 충렬왕이 전왕(충선왕忠宣王)의 환국과 공주의 개가 문제로 원(元) 황제를 만나기 위해 서경에 이르렀으나 황제가 입조를 허락하지 않자 개경으로 돌아왔다는 《고려사절요》의 기사가 있다. 정황상 위 《元史(원사)》의 경우와 유사하게, 충렬왕은 일단 서경에 먼저 도달한 뒤 그곳에서 대기하며 원(元) 황제의 입조 허락이 떨어지길 기다린 듯한데, 아마도 서경은 [고려에서] 원의 대도(大都)로 들어가는 관문의 역할을 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앞서 언급했다시피 고려 서경은 원(元)의 대도로부터 멀지 않은 곳이었을 것이다. 원(元)의 대도로부터 수천리 떨어진 한반도 평양에서 대기하며 원(元) 황제의 입조 허락을 기다렸다는 통설상의 정황은 어떻게 보더라도 황당하다.

왕이 원(元)으로 가려고 해주(海州)에서 출발하였다. 이때 왕이 입조(入朝)하고 싶지 않아서 서경(西京)에 오래 머물렀다.   三月 丙辰 王將如元, 發海州, 時王不欲入朝, 久留西京.
『고려사』 권35 세가 충숙왕-후(忠肅王-後) 5년 3월 (1336년 3월 10일 음 병진)

1336년, 원(元)에 간 충숙왕(忠肅王)이 막상 서경에 다다르자 대도(大都)에 입조하기를 꺼려하여 그곳에 오랫동안 머물렀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충숙왕은 서경에 머무르며 입조할지 말지를 고민하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와 같은 정황은, 당장 입조하기 곤란하다고 하여 미련 없이 돌아서기에 서경은 고려 수도 개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이었던 반면, 마음만 먹으면 곧장 원(元)의 대도로 향할 수 있을 만큼 대도에서 가까운 거리에 서경이 위치하였음을 시사한다.

 

 

2부에서 계속 ...  https://earthlin9.tistory.com/49

  1. 본 글의 각부에 언급되는 '서경'은 [구체적으로 명시된 경우를 제외하고] 원나라 시기에 해당하는 고려 서경을 가리키는 것으로 한정한다.
  2. 엄밀히 말하자면 1271년 국호를 대원(大元)으로 고치기 1년 전이다.
  3. 주지하듯이 학계의 통설상 고려 서경은 今 한반도 평양에 비정되어 있다. 최근 고려 서경이 今 요녕성 요양(遼陽)에 있었다는 주장이 있으나, 요녕성 요양 역시 [통설상] 원(元)의 대도(大都)로부터 멀리(도보로 약 670킬로미터) 떨어져 있으므로 위 《元史(원사)》 기사의 정황에 맞지 않기는 매한가지다.
  4. 통설상 원(元)의 대도(大都)는 今 북경(北京, 베이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