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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용선비 후연(後燕)의 용성(龍城)과 용등원(龍騰苑)이 하북성 석가장(石家庄)이라는 주장의 맹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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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모용선비 후연(後燕)의 수도 용성(龍城)이 今 하북성 석가장시(石家庄市) 정정현(正定縣)에 있었다는 재야시민사학계 일각의 주장이 있는데, 이에 대하여 해당 연구자들이 간과한, 명백한 맹점이 있는 듯하여 간략히 논하여본다.

문제가 되는 주장의 요지는, 서기 407년 후연의 멸망 과정에서 후연 왕 모용희(慕容熙)가 풍발(馮跋)의 반란군에 쫓기어 용등원(龍騰苑)이란 후원에 숨어들었다가 사로잡혀 최후를 맞았는데, 당시의 정황상 용등원은 용성에서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고, 용등원의 현 위치는 今 하북성 석가장시 정정현의 융흥사(隆興寺)이므로, 용성의 위치 역시 석가장시 정정현이라는 것이다.

주지하듯이 후연의 용성은 한(漢) 시기 요서군 유성현(柳城縣)이었고, 전연(前燕)과 북연(北燕)을 아울러 포괄한 삼연(三燕)의 수도였던 곳이자 그 후 그 지역을 차지한 북위(北魏) 영주(營州)의 치소인 화룡성(和龍城)과 동일한 곳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취덕흥(就德興) 등의 반란(524~529)으로 효창(孝昌, 525~527)중에 영주(營州)가 함락되자 영희(永熙) 2년(533) 북위가 남영주(南營州)를 설치하고 영주(營州)의 5군 11현을 남영주의 영웅성(英雄城)에 기치(寄治)하였다는 사실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수성현은 옛날에 무수武遂라 했다. 북위가 영주에 준하여 남영주를 설치했다. 5군 11현이다.(용성현‧광흥현‧정황현은 창려군에 속한다. 석성현‧양무현‧광도현은 건덕군에 속한다. 양평현‧신창현은 요동군에 속한다. 영락현은 낙랑군에 속한다. 부평현‧대방현‧영안현은 영구군에 속한다.) 북제北齊는 오직 창려군 한 개만 남겨놓고 영락현과신창현 등 2개현을 다스렸으며, 나머지는 모두 없앴다. 개황원년(581년)에 주州를 옮겼으며, 3년에는 군을 폐하였고, 18년에는 수성현으로 고쳤다. 용산이 있다.  遂城. 舊曰武遂. 後魏置南營州, 准營州置, 五郡十一縣. 龍城 廣興 定荒 屬 昌黎郡, 石城 陽武 廣都 屬建德郡, 襄平 新昌 屬遼東郡, 永樂屬樂浪郡, 富平 帶方 永安 屬營丘郡. 後齊唯留黎一郡, 領 永樂 新昌 二縣, 餘並省. 開皇元年州移, 三年郡廢, 十八年改為遂城. 有龍山.
『隋書』 권13 地理中 '上谷郡 遂城縣'

수성현은 옛날 23개 마을이었는데 지금은 4개 마을이다. 전국시기 무수武遂현이다. 『사기』에 조나라 도양왕 1년 이목장군이 연나라를 공격해 무수를 빼앗았다고 하는 것이 이것이다. 본래 한나라 북신성현이었다. 『한서지리지』는 말하기를 ‘연나라 남쪽 탁군의 북쪽에 신성이 있다.’고 했다. 후한 때는 중산국에 속했다. 『13주지』에는 ‘하간에 신성이 있으므로 북北자를 더한 것이다.’고 했다. 후위의 무제 영희2년(533년) 이곳에 남영주를 설치했다가 신창현으로 고쳤다. 수나라 개황16년(596년)에 수성현으로 고쳤다. 지금 치소는 부산釜山촌이다. 진나라가 축조한 장성의 시작점이 이 읍의 경계에 있다. 수성산의 옛 이름은 용산龍山인데 현의 서쪽25리에 있다.  遂城縣舊二十三鄕今四鄕 戰國時武遂縣也 史記趙悼襄王一年 李牧將功燕拔武遂是也 本漢北新城縣 漢書地理志云 燕南得涿郡之北新城 後漢屬中山國土地 十三州志云 河間有新城故加北字 後魏武帝永熙二年於此置南營州改爲新昌縣 隋開皇十六年改爲遂城縣 今治釜山村 秦築長城起首故 此邑之界遂城山舊名龍山在縣西二十五里
『太平寰宇記』 권68

《隋書(수서)》 및 《太平寰宇記(태평환우기)》 등 사서의 기록에 따르면 북위 남영주의 위치는 今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일대임이 명백하고, 이에 대한 이론(異論)은 없다.

위 《隋書》 '지리지'의 기록대로 남영주는 기존의 영주에 준(准)하여 설치하였으므로 그 위치는 '남(南)영주'라는 이름이 말해주듯이 영주의 남쪽 방면이었음이 자명하다. 즉, 영주는 남영주의 북쪽 방면에 있어야 한다. (지도1 참조)

그런데 今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즉 북위 남영주)을 기준으로 석가장시 정정현의 위치는 어떠한가? 기록이 시사하는 방향의 반대쪽인 서남 방면 130여 킬로미터 거리에 있다. 다시 말해서, 영주(화룡성, 즉 용성)가 정정현에 있었다면 이는 곧 영주의 동북쪽 130킬로미터 거리에 영주에 준하여 행정구역을 새로 설치하고서 엉뚱하게도 [북영주가 아닌] '남영주'로 명명했다는 말이 되는데, 절대로 그럴 리는 없다는 점이다.

 

지도 1 - 북위(北魏) 남영주(南營州)와 今 석가장시 정정현(正定縣)의 상대적 위치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 4-精装本-南北朝)


물론 《畿輔通志(기보통지)》에 용등원이 정정부(正定府) 정정현(正定縣)에 있다는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畿輔通志》는 용등원이 존재하던 후연 시기로부터 무려 1천 수백년이 지난 청(淸)대의 저작물인데다가 용등원이 정정현에 있었다는 기록이 다른 사료에서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점에서 신뢰성에 의문이 제기된다. 따라서 《畿輔通志》의 기록 하나만으로써 용등원의 위치를 단정 짓는 것은 옳지 않다.

결어 : 삼연(三燕)의 용성(龍城) [고로 한(漢) 요서군 유성현(柳城縣) 및 북위(北魏) 영주(營州)]는 남영주(南營州), 즉 今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镇)을 기준으로 그 북쪽 방면에 있어야 하므로, 그 위치는 今 하북성 석가장시(石家庄市) 정정현(正定縣)이 될 수 없다.

 

 

** 참고로, 필자는 삼연(三燕)의 용성(龍城), 한(漢) 요서군 유성현(柳城縣) 및 북위(北魏)의 영주(營州)의 위치를 今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鄉) 일대에 비정한다.

  1. 기치(寄治): 공적인 임시 의탁을 가리키는 용어이다. 지방관청이 타처에 더부살이하며 잠시 관리하는 것.
  2. ☞ 백랑산(白狼山)과 백랑수(白狼水) 1부 - 흰색 이리를 닮은 산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