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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령 위치 비정 1부 - 호랑이 출몰하는 자비령에 어린아이 둘 데리고 온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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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명일통지》에 기록된 자비령의 위치

 

자비령은 평양성(平壤城) 동쪽 160리(里)에 있다, 원나라 때 이곳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慈悲嶺 在平壤城東一百六十里元時畫此爲界
『大明一統志』  卷之89 外夷 朝鮮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에 자비령(慈悲嶺)이 평양성 동쪽 160리에 있었다고 뚜렷이 기록되어 있어 자비령 위치 관련 연구에 도외시할 수 없는 사료로 여겨지고 있다. 현 주류 학계는 고대, 중세 및 근세를 막론하고 사서에 나타나는 모든 '평양'을 한반도 평양으로 인식하므로, 평양성 동쪽 160리에 있었다고 하는 자비령을 통설상 한반도 평양 동남쪽 엇비슷한 위치의 황해도 황주군과 서흥군 사이의 산고개로 비정하고 있고, 이는 곧 이씨조선 이래 인식되고 있는 자비령의 위치이다. 물론, 《大明一統志》가 간행되던 1461년은 이씨조선의 세조가 재위에 있던 시기로서, 그 즈음은 이씨조선이 한반도를 중심으로 거의 자리잡은 이후일 것으로 생각되므로, 《大明一統志》 기록상의 '평양성' 역시 한반도의 평양성을 가리킬 것이다. 결국 자비령의 위치를 둘러싼 학술적 쟁점은 고려시기 자비령의 실제 위치와 이씨조선시기 이래의 역사 지리 인식상 자비령의 위치가 관연 동일한 곳인가 하는 문제로 귀착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고려의 서경과 이씨조선의 평양을 동일한 곳으로 치부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大明一統志》 편자의 역사 지리 인식, 또는 명(明) 조정으로부터의 강령 등이 편찬에 반영되었을 개연성을 헤아려 보아야 할 필요도 있다.

 

지도 1 - 통설상 자비령의 위치 (본 지도 출처: OpenStreetMap)

 

 

호랑이가 출몰한다는 자비령에 어린아이 둘 데리고 온 여인?

 

황주(黃州) 이동(以東)의 자비령(慈悲嶺)은 험조(險阻)하기가 비할 데가 없으니, 극성(棘城)과 자비령으로부터 수안(遂安)과 곡산(谷山)에 이르기까지도 또한 마땅히 관문(關門)을 설치하여 뜻밖의 변고에 대비해야 할 것입니다.  黃州以東, 慈悲嶺險阻無比, 自棘城、慈悲嶺, 至遂安、谷山, 亦宜設關, 以備不虞。
『조선왕조실록』 문종실록 3권, 문종 즉위년(1450) 8월 4일 을해

자비령(慈悲嶺)은 영로(嶺路)가 매우 험준해서 적(賊)이 반드시 들어올 땅은 아니다. 영 아래에 자비사(慈悲寺)가 있으니, 사변이 있으면 본관(本官)에서 군졸 약간 명을 정해 보내서 지키는 중[僧]과 더불어 힘을 합하여 수비하고 감영(監營)과 병영(兵營)에서는 적당하게 군사를 첨가할 것.  慈悲嶺嶺路極險, 非賊必入之地, 而嶺下有慈悲寺, 有事則本官定送軍卒若干人, 與守僧合力守備, 監、兵營量宜添兵。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9권, 숙종 6년(1680) 1월 6일 병신

자비령(慈悲嶺)은 부의 서쪽 60리에 있으며 절령(岊嶺)이라고도 하는데 평양에서 서울로 통하는 옛길이다. 세조 재위 시기 호랑이의 피해가 많고 또 중국 사신이 모두 극성(棘城)길을 경유하여 통행함으로 그 길이 폐지되었다. 《大明一統志》에 의하면 원(元)나라 때에 여기로 경계를 삼았다 한다.  慈悲嶺 在府西六十里, 一名岊嶺, 自平壤通京都舊路也 世祖朝以多虎害, 且中朝使臣皆由棘城路, 以行其路遂廢, 大明一統志元時畫此爲界.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1권 黃海道 瑞興都護府

위 기록들는 모두 이씨조선시기의 사료로서, 한반도의 황해도 황주군과 서흥군 사이에 있는 '자비령'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기록들에 따르면 그 위치는 매우 험준한 산지로서, 그 고갯길을 이용하던 사람들에 대한 호랑이의 위해 마저 심하였던 곳이다.

정사, 자비령(慈悲嶺) 미륵원(彌勒院)에 이르러 왕이 분향하고 의복(衣服)을 시주하였다. 행차가 절령(岊嶺)을 지날 때 길에서 한 부인이 두 어린아이를 안고 있어, 왕이 그를 가련하게 생각하고 쌀을 하사하였다.  丁巳 次慈悲嶺彌勒院, 行香施衣. 行過岊嶺, 道有一婦抱兩孩兒, 王憐之, 賜米.
『고려사』 세가 권제7 문종(文宗) 7년 10월, 날짜 | 1053년 10월 22일 (음)

《고려사》 에 고려왕 문종이 절령(즉 자비령)을 지나다가 한 여인이 아이 둘을 안고 있음을 가련히 여겨 쌀을 하사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의 미심쩍은 점은 「호랑이가 출몰하는 험준한 곳에 여인이 어린아이 둘을 데리고 왔다는 것도 이상하지만, 그 상황에 여인에게 쌀을 하사한 것이 과연 적절한 대처였는가」 하는 것이다. 만일 필자가 같은 광경을 마주하였다면 가련히 여겨 쌀을 줄 것이 아니라, 매우 위험하고도 불안한 상황이라 판단하고 일단 여인과 두 아이를 구제하는 등의 조치를 먼저 취하였을 것이다. 물론, 기록상 분명치는 않으나, 동행하던 무리가 있었다면 이야기가 다소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조선왕조실록》 과 《신증동국여지승람》 의 기록상에 그려진 험준한 자비령과, 고려왕이 여인과 두 어린아이를 마주쳤다는 《고려사》의 자비령 사이에 뭔가 부조화스런 괴리가 느껴지는 것은 분명하며, 이는 곧 기록상의 양 자비령이 같은 곳이 아니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자비령은 고려와 원(元)의 국경이 아닐 수도 있다.

 

정축일, 최탄(崔坦)이 몽고 군사 3천 명을 요청하여 서경(西京)에 주둔시키자, 몽고 황제가 최탄⋅이연령(李延齡)에게 금패(金牌)를, 현효철(玄孝哲)⋅한신(韓愼)에게 은패(銀牌)를 차등 있게 하사하였다. 조서(詔書)를 내려 내속(內屬)하니, 동녕부라고 이름을 고치고, 자비령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丁丑 崔坦請蒙古兵三千來鎭西京, 帝賜崔坦·李延齡金牌, 玄孝哲·韓愼銀牌 有差. 詔令內屬, 改號東寧府, 畫慈悲嶺爲界.
『고려사』 세가 권제26 원종(元宗) 11년 2월

고려국왕(高麗國王) 왕식(王禃)이 사신을 보내어 와서 말하기를, “근래에 신이 조서를 받들어 이미 복위하였으니, 이제 700인을 이끌고 조정에 들어가 뵙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조서를 내려 400인만 데리고 오고, 나머지는 서경(西京)에 머무르게 하였다. 조서를 내려 고려 서경을 내속(內屬)하니, 동녕부로 고치고, 자비령을 그어 경계로 삼았다.  高麗國王王禃遣使來言, “比奉詔臣已復位, 今從七百人入覲.” 詔令從四百人來, 余留之西京. 詔高麗西京内属, 改東寧府, 畫慈悲嶺爲界.
『元史』  卷7 本紀7 世祖4 至元 7年 春 正月 甲寅

고려 원종(元宗)10년(1269), 최탄, 이연령 등이 서경 일대의 고려 영토를 들어 귀부하자 원(元)은 서경을 내속하여 동녕부(東寧府)로 삼고 자비령에 경계를 그었다고 《고려사》와 《元史(원사)》에 전한다. 동녕부가 원(元)의 행정 구역인 것은 틀림없으니, 자비령에 그었다는 경계는 원(元)과 고려의 국경일 것으로 통상적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보다 세심히 들여다보면 기록상의 자비령이 정확히 무엇과 무엇을 구분하는 경계인지가 명료하지 않아 달리 해석할 여지도 없지는 않다. 말하자면, 어쨌든 영토를 새로이 확보하기는 하였으나 자신들에게 내속하게 된 과정에 고려의 반란 세력이 직접 관련되어 있다는 점에서, 고려 왕실과 적대적이어서 좋을 것이 없었을 원(元)의 입장에서는 내심 찝찝하였을 개연성에 미루어 보면, 탐이 나긴 하지만 노골적으로 서경을 병탄하기에는 외교적으로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원(元)은 동녕부를 완전무결한 자신들의 영토라기 보다는 일단 과도기적 특별구역으로 간주했을 수도 있다고 보여지는 만큼 자비령이 동녕부를 포함한 원(元)과 고려의 국경이 아닌, 기존의 원(元)과 새로 들인 동녕부 사이의 경계였을 가능성을 고려해보아야 한다.

 

 

 

2부에서 계속  ☞  https://earthlin9.tistory.com/63

  1. 《大明一統志》 기록상의 '평양성'은 고구려 평양 또는 고려 서경을 가리키는 것일텐데, 주지하듯이 학계의 통설상 고구려 평양과 고려 서경은 모두 한반도 평양에 비정된다.
  2. 통설상 자비령의 위치가 한반도 평양을 기준으로 남쪽에 가까운 동남쪽인 점이 《大明一統志》 기록상의 '동쪽'과 부합하지 않아 논란이 되기도 하지만, 《大明一統志》의 '동쪽'이 현대에 쓰이는 도북(圖北)이 아닌, 《大明一統志》가 저작되된 15세기 당시에 주로 쓰이던, 북극성에 기준한 진북(眞北) 방위상의 동쪽이라면 그리 문제될 것이 없을 듯하다.
  3. 김영섭, 동녕부 자비령(慈悲嶺)과 고려 서북 경계, 仙道文化 2020, vol.29, 157-15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