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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난과 자비령 - 자비령 위치 비정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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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위총의 반란과 자비령(절령)의 위치

정중부(鄭仲夫)·이의방(李義方) 등이 의종을 죽이고 명종(明宗)을 〈왕으로〉 세우자, 명종 4년(1174) 조위총은 군사를 일으켜 정중부 등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였다. 드디어 동·북 양계(兩界)의 여러 성(城)에 격문(檄文)을 돌려 군사를 불러 모아 말하기를, “소문에 따르면 개경(開京)의 중방(重房)에서 ‘북계(北界)의 여러 성들은 거칠고 사나운 무리[桀驁]를 많이 거느리고 있으니 토벌해야 한다.’고 논의하고 이미 많은 병력을 동원했다고 하니 어찌 가만히 앉아서 스스로 죽을 수 있겠는가? 각자 군사와 말을 규합(糾合)하여 빨리 서경(西京)으로 달려와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절령(岊嶺) 이북의 40여 성들이 모두 호응하였으나, 유독 연주성(延州城)만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켰다.  鄭仲夫·李義方等, 弑毅宗, 立明宗, 明宗四年, 位寵起兵, 謀討仲夫等. 遂檄召東北兩界諸城兵曰, “側聞上京重房議, ‘以北界諸城, 率多桀驁, 欲討之.’ 兵已大擧, 豈可安坐, 自就誅戮? 宜各糾合士馬, 速赴西京.” 於是, 岊嶺以北四十餘城, 皆應之, 獨延州閉城固守.
『고려사』  권100 열전 권제13 제신(諸臣) 조위총

윤인첨(尹鱗瞻)이 서경(西京)을 공격하였는데, 조위총(趙位寵)은 식량이 떨어져 심지어 사람의 시체까지 먹으면서도 때때로 성을 나와 도전하였다. .... [중략] .... 조위총이 다시 서언(徐彦) 등을 보내어 금에 가서 표(表)를 올려 아뢰기를, “전 왕(前王)은 본래 왕위를 사양하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仲夫)와 낭장(郎將) 이의방(李義方)이 시해한 것입니다. 신(臣) 조위총은 절령(岊嶺)의 서쪽에서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 40여 성을 들어 내속(內屬)할 것을 요청하니 군사를 보내 도와주실 것을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鱗瞻攻西京, 位寵食盡, 至啗人屍, 時出挑戰. .... [중략] .... 位寵復遣徐彦等, 如金上表曰, “前王本非避讓, 大將軍鄭仲夫, 郞將李義方弑之. 臣位寵請以岊嶺以西至鴨綠江四十餘城內屬, 請兵助援.”
『고려사』  권100 열전 권제13 제신(諸臣) 조위총

〈대정(大定)〉 15년(1175)에 고려의 서경유수(西京留守) 조위총(趙位寵)이 왕호(王皓, 명종)에게 반란을 일으켜서 서언(徐彦) 등 96명을 보내어 표문(表文)을 올리기를, “전왕(前王, 의종)은 본래 〈왕위를〉 피하여 양위한 것이 아니고, 대장군(大將軍) 정중부(鄭沖夫)와 낭장(郞將) 이의방(李義方)이 사실 시해하였습니다. 신 조위총은 자비령(慈悲嶺) 서쪽에서부터 압록강(鴨綠江)에 이르는 40여 성(城)으로써 내속(內屬)하기를 청하오니, 청컨대 군사로 원조하여 주시옵소서.”라고 하였다. 상이 말하기를, “왕호에게 이미 책봉[封冊]을 더해주었는데 조위총이 갑자기 군대를 동원한다고 칭하고는 반란을 일으키고는 또 땅을 바치려 하고 있도다. 짐은 만방(萬邦)을 품에 품고 어루만져야 하는데 어찌 반란한 신하가 포학한 짓을 하는 것을 도울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서언 등을 잡아서 고려로 보내라고 명하였다.  〈大定〉十五年, 高麗西京留守趙位寵叛皓, 遣徐彦等九十六人上表曰,校勘 001 “前王本非避讓, 大將軍鄭沖夫·郞將李義方實弑之. 臣位寵請以慈悲嶺以西至鴨綠江四十餘城內屬, 請兵助援.” 上曰, “王皓已加封冊, 位寵輒敢稱兵爲亂, 且欲納土, 朕懷撫萬邦, 豈助叛臣爲虐?” 詔執徐彦等送高麗.
 『金史』  권135 열전73 외국(外國)下 

1174년 무신정권의 폭거에 반발해 저항한 조위총(趙位寵, ?~1176)은 반란 초기 자비령(慈悲嶺, 즉 절령岊嶺) 이북 40여 성의 호응을 입고 한때 수도 개경을 위협하기도 하였으나, 시간이 지나며 관군의 진압에 밀려 고전한 끝에 서경성에 갇혀 포위되었다. 갈수록 악화되는 상황을 뚫어보려 하였으나 결국에는 식량이 떨어져 시체를 먹고 버텨야 하는 절박한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관군에 의해 전멸될 위기에 처한 반군의 수장 조위총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자비령으로부터 서쪽으로 압록강에 이르는 지역의 40여 성을 들어 내속하겠으니 구원군을 보내 줄 것을 금(金)에 요청하였지만, 금(金)은 단호히 거절하고 도리어 사자로 간 서언(徐彥) 등을 잡아 고려에 압송하였다. 관군에 의해 서경의 반란군이 이미 포위된 마당에 반란군을 도와주어 생길 득보다 실이 훨씬 더 클 것으로 금(金)은 판단했을 때문일 터이다. 한편 조위총이 금(金)에 바치겠다고 한 「자비령 이서(以西) 40여 성」은 곧 반란에 동조한 「자비령 이북(以北) 40여 성」일 것으로 생각되는데, 아마도 그 성들이 위치했던 지역이 자비령을 기준으로 서쪽 또는 북쪽에 해당하던 곳이었던 듯하다. 

위 《고려사》 및 《金史》의 기사에 따른 당시의 지리적 상황을 대략 그려보자면, 고려의 서쪽 변경이었던 압록강 유역이 금(金)과의 국경을 이루었고, 또한 국경 안쪽(동쪽)으로 자비령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살펴본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의 기록을 아울러 검토하면, 서→동 방향으로 압록강, 서경, 이어서 160리의 거리를 두고 자비령이 차례로 위치해 있었다는 통설상의 지리적 정황이 성립된다. (지도2 참조)

 

 

    지도 2 - 통설상 조위총의 난 당시 자비령의 위치

 

언급한대로 조위총은 자비령으로부터 서쪽으로 압록강 유역 금(金)과의 국경에 이르는 지역의 40여 성을 금(金)에 바치겠다고 했는데, 이와 관련하여 유의할 점은, 통설대로라면 조위총이 바치겠다는 영역에 서경과 아울러 서경(평양) 동편으로 자비령과의 사이에 있는 160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생기는 의문은 「반란군이 사수하고 있던 서경성이 관군에 함락될 절망적 위기에 처한 마당에 서경을 금(金)에 바치겠다는 것도 말이 안되지만, 조위총이 어떻게 관군에 의해 이미 평정되었을 것이 분명한 서경 동쪽 방면 160리의 넓은 구역을 더불어 금(金)에게 바치겠다고 한 것일까」라는 것이다. 곧 죽을 처지에 있던 조위총이 이 상황을 몰랐을 리 없는 금(金)에 속된 말로 「뻥카를 날렸을」 리는 없다고 여겨진다.

즉, 자비령이 서경의 서쪽 방면에 있어야만 당시의 정황이 논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 듯한데, 이는 곧 앞서 1부에 논한 바와 같이 자비령이 동녕부를 포함한 원(元)과 고려의 국경이 아닌, 기존의 원(元)과 새로 들인 동녕부 사이의 경계였다면 가능하다. 다시 말해서, 조위총은 아직 관군에 점령되지 않은, 금(金)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자비령 이서(以西) 압록강 유역의 40여 성을 들어 금(金)과 협상을 하려던 것으로 보이는데, 그렇다면 자비령은 서경의 동쪽이 아닌 서쪽에 있어야 한다.




자비령은 서해도 동주에 있었다.

〈충렬왕(忠烈王)〉 34년(1308) 8월에 충선왕(忠宣王)이 즉위하였다. 11월에 교지(敎旨)를 내려 이르기를, “서해도(西海道) 절령(岊嶺)으로부터 7참(站)에 이르기까지와 회원(會源)·탐라(耽羅)의 연로(沿路)를 길잡이하는 참호(站戶)는 지난 번 일본 정벌[東征] 때에 각 도(道)의 인호(人戶)와 떠돌아다니는 사람들을 아울러 연한을 정해 들어가 거주하게 하였는데, 지금까지도 머뭇거리며 교체하지 않고, 혹 죽은 사람이 있으면 본읍(本邑)으로 하여금 그 수를 충당하게 하고 마필(馬匹)도 또한 이와 같이 하니 원망이 대단히 심하다. 해당 관청은 마땅히 파견해야 할 자를 선발하여 참역(站役)에 충당하고 그 각 읍(邑)의 인호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허락하라.” 라고 하였다.  三十四年八月 忠宣王卽位. 十一月 下敎曰, “西海道岊嶺, 至七站, 及會源·耽羅, 指沿路站戶, 頃在東征時, 以各道人戶, 幷流移人物, 限年入居, 至今因循未遞, 或有物故, 令本邑, 充其數, 馬匹亦如之, 怨咨尤甚. 令有司, 擇選當差者, 以充站役, 其各邑人戶, 並許還本.”
『고려사』 지 권제36 병2(兵 二) 참역

동주(洞州)는 본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 14년(995)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평주에〉 내속(來屬)시켰다. 원종 때에 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서흥현령관(瑞興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농서(隴西)이고【성종[成廟] 때 정하였다.】요충지[要害處]로 절령(岊嶺)【곧 자비령(慈悲嶺).】이 있다.  洞州本高句麗五谷郡【一云于次呑忽】, 新羅景德王, 改爲五關郡. 高麗, 更今名. 成宗十四年, 置防禦使. 顯宗初, 廢防禦使, 來屬. 元宗朝, 以安胎, 陞爲瑞興縣令官. 別號隴西【成廟所定】, 要害處, 有岊嶺【卽慈悲嶺】.
『고려사』 지 권제12 지리3 서해도 평주 동주

《고려사》에 따르면 자비령(절령)은 고려의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의 속주인 동주(洞州)에 있었다. 서해도 동주의 위치를 찾을 수 있다면 자비령의 위치 역시 함께 드러나게 될 것이다.

 

 

 

3부에서 계속  ☞  https://earthlin9.tistory.com/64

  1. 압록강이 서경(즉 평양)의 서쪽에 있었음은 《明一統志(명일통지)》 에서 확인된다. 「살수는 압록강 동쪽, 평양성 서쪽에 있었다. 수(隋)의 장수 신세웅이 이곳에서 전사하였다. 薩水在鴨渌江東平壤城西 隋將辛世雄戰死于此」 『明一統志』 권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