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의 대동강과 서해도 - 자비령 위치 비정 3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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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대동강
평양성(平壤城)은 지금[고려]의 서경(西京)과 같으며, 패수(浿水)는 곧 대동강(大同江)이다. 平壤城似今西京, 而浿水則大同江是也.
『삼국사기』 권 제37 잡지 제6 지리4 고구려
대동강(大同江)이 있다【곧 패강(浿江)으로, 또 왕성강(王城江)이라 부른다. 강의 하류는 구진익수(九津溺水)가 된다.】. 有大同江【卽浿江, 又名王城江. 江之下流, 爲九津溺水】.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북계 서경유수관 평양부
고려시기 사료에 보이는 서경(西京)의 '대동강(大同江)'을 통상 한반도 평양의 대동강으로 생각하기 쉬운데, 이는 고려의 서경은 당연히 한반도 평양에 있었을 것으로 모두들 철석같이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필자가 이미 고증하여 밝힌 바와 같이 고려 서경의 실제 위치는 今 하북성 보정시 정흥현(定興縣)의 고성진(固城鎮)이고, 고려의 대동강은 고성진의 동쪽을 흐르던 고대의 패수(浿水), 즉 今 계조하(鷄爪河)이다.
진나라가 천하 통일 후 동쪽으로 패수(沛水)를 건너 조선을 아우르고 멸했다. 秦旣幷天下, 東絶沛水, 幷滅朝鮮.
『鹽鐵論』 誅秦 제44
한편 패수(浿水)는 사서에 '패수(沛水)'로 기재되어 있기도 한데, '沛(패)'는 늪을 의미하므로, 이는 즉 패수가 물이 고여 있던 늪지를 흐르던 하천이었음을 시사한다. 아닌 게 아니라, 계조하는 중세 고성진의 서쪽 인근에 형성되어 있던 염태정(閻台淀) 습지를 동남 방향으로 가로질러 흘렀으므로 사서의 기록에 절묘히 부합한다. 아울러 후술하겠지만, 고려의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에 패강(浿江, 즉 浿水)으로 불리던 저천(猪淺)이 있었다고 《고려사》에 전하는데, 저천은 얕게 고인 물, 즉 늪지를 의미하므로, 이 역시 사서 기록상의 패수, 즉 대동강이 곧 염태정 습지를 흐르던 今 계조하란 사실을 증언한다.
대동강 건너편의 서해도
신우가 서쪽으로 사냥을 간다는 핑계를 대고 마침내 영비 및 최영과 함께 서해도로 가서 봉주(鳳州)에 행차하여 최영과 우리 태조(太祖)를 불러 말하기를, “요양(遼陽)을 공격하고자 하니 경들은 마땅히 힘을 다하라.”고 하였다. 禑托以西獵, 遂與寧妃及瑩往西海道, 次鳳州, 召瑩及我太祖曰, “欲攻遼陽, 卿等宜盡力.”
『고려사』 권113 열전 권제26 제신 최영
○경자. 우왕(禑王)이 경내의 죄인을 용서하고 드디어 서해도(西海道)로 가는데, 영비(寧妃)와 최영(崔瑩)이 그를 따랐다. 세자와 여러 비는 한양산성(漢陽山城)으로 옮기고 찬성사(贊成事) 우현보(禹玄寶)에게 명하여 경성에 남아 지키게 하였으며, 명목상 서쪽으로 해주(海州) 백사정(白沙亭)에 사냥하러 간다고 하였는데 실은 요동(遼東)을 공격하려던 것이었다. ○庚子. 禑宥境內, 遂如西海道, 寧妃與崔瑩從之. 徙世子及諸妃于漢陽山城, 命贊成事 禹玄寶留守京城, 名爲西獵海州 白沙亭, 實欲攻遼也.
『고려사절요』 권33 신우4 우왕14년(1388) 3월
서해(西海)·평양(平壤) 2도는 왕의 서쪽 사냥을 맞이하느라 추가로 병사를 모집하여 8도가 시끌시끌하였고 백성들은 농사일을 못하여 중외의 원망이 이인임(李仁任)·임견미(林堅味)·염흥방(廉興邦) 때보다 심하였다. 西海·平壤二道, 迎候西獵. 加以徵兵, 八道騷然, 民失農業, 中外之怨, 甚於仁任·林·廉時矣.
『고려사』 권137 세가 열전 권제50 우왕14년(1388) 3월
《고려사》 또는 《고려사절요》에 고려왕이 서해도(西海道)에 사냥을 갔다는 기록이 자주 보인다. 기록에 따르면 서해도는 고려의 서쪽 변경에 있었고, 그 위치는 서경(西京, 즉 평양)을 기준으로 그 서쪽 방면이었음이 분명하다.
적이 서경성 밖까지 이르러 안정역(安定驛)·임원역(林原驛) 및 참화사(旵華寺)·묘덕사(妙德寺)·화원사(花原寺) 등을 도륙하였는데 관군은 막아낼 수가 없었다. 적은 얼음을 밟고 대동강을 건너 마침내 서해도(西海道)에 들어와 황주(黃州)를 도륙하였다. 賊至西京城外, 屠安定·林原驛, 及旵華·妙德·花原等寺, 官軍不能沮遏. 賊履氷渡大同江, 遂入于西海道, 屠黃州
『고려사』 권103 열전 권제16 제신 김취려
○서경유수(西京留守)가 아뢰기를, “적이 안정역(安定驛)·임원역(林原驛) 등의 역 및 참화사(旵華寺)·묘덕사(妙德寺)·화원사(花原寺) 등의 절을 도륙하였습니다. 삼군(三軍)이 막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때 적들이 얼어붙은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마침내 서해도(西海道)로 들어왔다. ○西京留守奏, “賊屠安定 林原等驛及旵華 妙德 花原等寺. 三軍不能沮遏.” 時, 賊氷渡大同江, 遂入于西海道.
『고려사절요』 권14 고종안효대왕(高宗安孝大王) 고종(高宗) 3년 1216년 11월
1216년 11월, 거란군이 고려 서경(西京)에 쳐들어와 살육전을 벌인 뒤, 얼어붙은 대동강(大同江)을 건너 서해도(西海道)로 갔다는 《고려사》 및 《고려사절요》의 기사가 있다. 앞서 논하였다시피 서경은 今 고성진(固城鎮)이고 대동강은 고성진 서편의 염태정(閻台淀)습지를 흐르던 계조하(鷄爪河)이므로, 당시 거란군이 서경(고성진)에 먼저 침입하여 노략질하고 뒤이어 서쪽으로, 얼어붙은 겨울 대동강(계조하와 염태정)을 걸어서 건너 서해도에 도달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서해도는 고성진을 기준으로 계조하 및 염태정 습지 서쪽 건너편의 今 역현(易縣) 요촌(姚村)과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鄉) 및 대왕점진(大王店鎮) 일대를 아우르는 넓은 지역에 비정된다. (지도3 참조)
평주(平州)는 본래 고구려 대곡군(大谷郡)【다지홀(多知忽)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영풍군(永豐郡)으로 고쳤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 14년(995)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현종 9년(1018)에 지주사(知州事)로 정하였다. 원종 10년(1273)에 복흥군(復興郡)에 병합하였다. 충렬왕 때에 다시 예전으로 돌아갔다. 별호(別號)는 연덕(延德)이다. 또 동양(東陽)이라 부른다. 저천(猪淺)이【패강(浿江)이라고도 한다.】있고 온천(溫泉)이 있다. 속현(屬縣)이 1개이다. 平州本高句麗大谷郡【一云多知忽】, 新羅景德王, 改爲永豐郡. 高麗初, 更今名. 成宗十四年, 置防禦使. 顯宗九年, 定爲知州事. 元宗十年, 倂于復興郡. 忠烈王時, 復舊. 別號延德. 又號東陽. 有猪淺【一云浿江】, 有溫泉. 屬縣一.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서해도 평주
동주(洞州)는 본래 고구려의 오곡군(五谷郡)【우차탄홀(于次呑忽)이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오관군(五關郡)으로 고쳤다. 고려 때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었다. 성종 14년(995)에 방어사(防禦使)를 두었다. 현종 초에 방어사를 폐지하고 〈평주에〉 내속(來屬)시켰다. 원종 때에 왕의 태(胎)를 묻은 곳이라 하여 서흥현령관(瑞興縣令官)으로 승격시켰다. 별호(別號)는 농서(隴西)이고【성종[成廟] 때 정하였다.】요충지[要害處]로 절령(岊嶺)【곧 자비령(慈悲嶺).】이 있다. 洞州本高句麗五谷郡【一云于次呑忽】, 新羅景德王, 改爲五關郡. 高麗, 更今名. 成宗十四年, 置防禦使. 顯宗初, 廢防禦使, 來屬. 元宗朝, 以安胎, 陞爲瑞興縣令官. 別號隴西【成廟所定】, 要害處, 有岊嶺【卽慈悲嶺】.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서해도 평주 동주

지도 3 - 자비령(慈悲嶺) 및 고려 서해도(西海道)의 비정 위치, 본 지도 출처 : Tencent Maps
세부적으로 살펴보자면, 서해도(西海道)의 평주(平州)는 평평한 곳을 뜻하는 그 이름과 그곳에 저천(猪淺, 즉 염태정 습지)이 있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염태정(閻台淀) 서변의 今 역현(易縣) 요촌(姚村) 및 그 남쪽의 넓은 평야지대에 비정되고, 동주(洞州)의 경우 《고려사》의 기록대로 그곳에 자비령(慈悲嶺) 산고개가 있었다면 이는 곧 동주의 영역에 산지(山地)가 속해 있었음을 의미하므로, 그 위치는 평주 서쪽 방면 今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鄉) 일대의 산지에 비정된다. (지도3 참조)
안서대도호부(安西大都護府) 해주(海州)는 본래 고구려의 내미홀(內米忽)【지성(池城)이라고도 하고, 장지(長池)라고도 한다.】로,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에 폭지군(瀑池郡)이라 고쳤다. 태조(太祖)는 군(郡) 남쪽에 큰 바다가 있어 해주(海州)라는 이름을 내렸다. 安西大都護府海州本高句麗內米忽【一云池城, 一云長池】, 新羅景德王, 改爲瀑池郡. 太祖, 以郡南臨大海, 賜名海州.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서해도 안서대도호부 해주
해주(海州)는 그 남쪽에 큰 바다가 있다고 하였는데, 기록상의 '바다(海)'는 틀림없이 당시 보정 일대의 내륙해를 이루고 있던 당박(塘濼) 호수를 가리킬 것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해주 남쪽에 있었다는 바다는 당박 호수 6, 7, 8, 9구(區)일 것으로 추정되므로, 해주는 그 북쪽에 해당하는, 조하(漕河 즉 徐水) 이북(以北), 대왕점진(大王店鎮)에 이르는 지역에 비정된다. (지도3 참조)
위 사료 분석을 통해 밝혀지는 고려 서해도(西海道)의 위치는 서경(西京)을 기준으로 명백히 그 서쪽이다. 따라서 서해도 동주(洞州)에 있었던 자비령 역시 서경의 서쪽일 수 밖에 없으니, 이는 「자비령이 평양성( 즉 서경)의 동쪽 160리에 있었다」는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의 기록에 정면 배치된다. (본 글 1부 참조) 뜬금없이 불쑥 내밀어진 「평양성 동쪽 160리」라는 일방적 문구보다는 자비령이 속했던 당시 서해도의 지리적 정황과 함께, 실제로 일어났던 사건에 의해 검증되는 그 실제 위치에 훨씬 더 신뢰가 가는 것은 당연하다. 자비령(慈悲嶺)은 서경(西京)의 서쪽 방면에 있었던 것이다.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 해당 기록의 경우와 같이 한민족사 복원에 불필요하게 발목을 잡는 명(明)·청(淸)대의 엉터리 사료는 마땅히 추려내어져 배격되어야 한다.
서해도에 고죽국이 있었다.
[해주의] 별호(別號)는 대령(大寧)·서해(西海)이고 또 고죽(孤竹)이라고 부른다. 수양산(首陽山)이 있다. ... 別號大寧·西海, 又號孤竹. 有首陽山. ...
『고려사』 지 권제12 지리3 서해도 안서대도호부 해주
당의 배구전에는 고려(고구려)는 본래 고죽국[지금 해주]인데 주가 기자를 봉하여 조선이라 하였고, 한은 3군(三郡)을 나누어 설치하여 현도・낙랑・대방[북대방]이라 하였다. 唐裵矩傳云 高麗本孤竹國[今海州] 周以封箕子爲朝鮮 漢分置三郡 謂玄菟樂浪帶方
『삼국유사』 권1 기이1 고조선
해주(海州)의 별호가 '서해(西海)'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서해도(西海道)의 중심부는 해주(海州)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런데 《고려사》에 따르면 해주는 고죽(孤竹)으로도 불렸었고 또한 고죽국(孤竹國)의 백이(伯夷)・숙제(叔齊)와 관련있는 수양산(首陽山)이 그곳에 있었다. 이는 즉 고려의 서해도 일대가 바로 상고 시대 고죽국의 위치란 말에 다름아니다. 사실 고죽국이 한반도의 황해도에 있었을 것으로 믿는 분은 주류 강단사학계를 포함하여 그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손강(公孫康)의 대방군(帶方郡)과 고려의 '서해도'는 한반도 황해도에 버젓이 비정한다. 현 학계의 비논리성을 대변하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각설하고, 이 사실은 《隋書(수서)》 '배구전(裵矩傳)'의 기사를 인용한 일연(一然,)의 《삼국유사》에서 재확인된다. 즉 일연은 《삼국유사》에서, 고죽국의 위치로서 당시(고려)의 '해주(海州)'를 지목하였는데, 여기서 반드시 유의할 점은, 일연이 인식한 '해주'는 결코 한반도 황해도의 해주가 아닌 대륙의 하북(河北)에 있었던 해주라는 사실이다.
영주(營州), 닌해군(隣海軍), 下, 刺史. 원래 상(商) 고죽국(孤竹國)이다. 진(秦)에서는 요서군(遼西郡)에 속했다. 한(漢)은 창려군(昌黎郡)으로 삼았었다. 전연(前燕) 모용황(慕容皝)은 이곳에 도읍을 옮겼었다. 북위(元魏)는 영주(營州)를 세우고 창려(昌黎) 건덕(建徳) 요동(遼東) 낙랑(樂浪) 익양(翼陽) 영구(營丘) 등 6개의 군을 다스렸다. 營州, 隣海軍, 下, 刺史. 本商孤竹國. 秦屬遼西郡. 漢為昌黎郡. 前燕慕容皝徙都于此. 元魏立營州, 領 昌黎 建徳 遼東 樂浪 翼陽 營丘 六郡.
『遼史』 地理志4 南京道
필자는 북위(北魏) 영주(營州)의 치소 화룡성(和龍城)을 今 서수구 동부산향(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鄉) 일대에 비정하였는데, 《遼史(요사)》 '지리지'에 의하면 공교롭게도 그곳은 고죽국(孤竹國)의 영역이었다. 북위 화룡성으로 비정되는 서수구 동부산향과 고려의 서해도(西海道) 해주(海州)로 비정되는 대왕점진(大王店鎮)의 지리적 인접성은 그 일대가 바로 고죽국이었음을 알려줌과 동시에, 앞서 논한 서해도(西海道)의 비정 위치에 대한 교차 검증이 된다.
자비령 위치 비정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鄉)으로부터 서북쪽으로 백령(白嶺)이라는 고개를 넘으면 중원(中原)으로 통하는 태행산맥(太行山脈)아래의 좁은 길로 들어서게 된다. 서수구 일대는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던 요해(遼海)와 요택(遼澤)의 습지가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중원과 동북방을 가르는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었고, 요해와 태행산맥 사이의 좁은 통로를 거쳐 양 지역들 간의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 동북에서 중원으로 통하는 길목이 바로 그곳에 있었는데, 백령(白嶺)은 서수(徐水) 일대의 하북 평야지대로부터 그 길목으로 들어서기 전에 넘어야 하는 고개이다. 높이가 해발 130여 미터에 불과한 나즈막한 고개인 만큼 경사가 완만하여, 《조선왕조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 등에 서술된 '험준함'과 전혀 부합하지 않고, 또한 근처에 마을들이 있어, 부인이 어린아이를 동반하여 지나간다 해도 그다지 위험할 것 같지 않다. (본 글 1부 참조) 자비령(慈悲嶺)은 今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鄉)과 역현(易縣) 공산촌(孔山村) 일대를 가르는 백령(白嶺) 고개에 비정된다.
결론 (1부 ~ 3부 통합)
- 자비령(慈悲嶺, 즉 절령岊嶺)은 고려 서경(西京)을 기준으로 그 서쪽 방면의 서해도(西海道)에 있었다.
- 고려의 서해도(西海道)는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대왕점진(大王店鎮) 및 동부산향(東釜山鄉), 그리고 역현(易縣) 요촌진(姚村鎮) 일대에 비정된다.
- 고려의 서해도(西海道)에 상고 시대 고죽국(孤竹國)이 있었다.
- 자비령(慈悲嶺)은 지금의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鄉)과 역현(易縣) 공산촌(孔山村) 일대를 가르는 백령(白嶺) 고개에 비정된다.
- 「평양성 동쪽 160리에 자비령이 있었다」는 《大明一統志((대명일통지)》의 엉터리 기록은 배격되어야 마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