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령위(鐵嶺衞)와 위화도(威化島) 회군, 새로 밝혀지는 위치 1부 - 철령위는 한나라 양평현(襄平縣) 서북쪽에 있었다.
카테고리 없음두 번째 철령위는 한나라 양평현 서북쪽에 있었다.
홍무(洪武) 21년(1388) 3월에 옛 철령성(鐵嶺城)에 설치하였다. 26년(1393) 4월에 옛 은주(嚚州)의 땅으로 옮겼으니 이는 곧 지금의 치소이다. 【서쪽에는 요하(遼河)가 있고 남쪽에는 범하(汎河)가 있으며 또 남쪽에는 소청하(小淸河)가 있는데 모두 요하로 흘러 들어간다. 또한 남쪽에는 의로성(懿路城)이 있는데, 홍무 29년(1396)에 의로천호소(懿路千戶所)를 이곳에 설치하였다. 또한 범하성(范河城)이 위(衛)의 남쪽에 있는데 범하성(汎河城)이라고도 하며, 정통(正統) 4년(1439)에 범하천호소(汎河千戶所)를 이곳에 두었다. 동남쪽에는 봉집현(奉集縣)이 있는데 즉, 옛 철령성으로 고려(高麗)와의 경계에 접해 있으며, 홍무 초년에 현(縣)을 설치했다가 곧 폐지하였다. 또한 함평부(咸平府)가 있는데 원의 직예(直隷) 요동행성(遼東行省)이었다. 지정(至正) 2년(1342) 정월 항복하여 현이 되었다. 홍무 초년에 폐지하였다.】남쪽으로 도사(都司)까지 240리 떨어져 있다. 鐵嶺衞洪武二十一年三月以鐵嶺城置. 二十六年四月遷於古嚚州之地, 即今治也.【西有遼河, 南有汎河, 又南有小淸河, 俱流入於遼河. 又南有懿路城, 洪武二十九年置懿路千戶所於此. 又范河城在衞南, 亦曰汎河城, 正統四年置汎河千戶所於此. 東南有奉集縣, 即古鐵嶺城也, 接高麗界, 洪武初置縣, 尋廢. 又有咸平府, 元直隸遼東行省. 至正二年正月降爲縣. 洪武初廢.】 南距都司二百四十里.
『明史』 권41 地理2 山東 遼東都指揮使司
《方輿紀要(방여기요)》에 말하기를 「철령위는 진(秦), 한(漢) 시기의 요동(遼東)땅이다. 발해가 부주를 설치하고, 거란이 이름을 은주(銀州)로 고쳤다」하였다. 方輿紀要曰:鐵嶺衛,秦、漢時遼東地,渤海置富州,契丹更名銀州。
『遼史拾遺』 권13
철령위는 도사 북쪽 240리에 있다. 북쪽으로 삼만위까지 90리이고, 동남쪽으로 무순천호소까지 100리이다. 진(秦), 한(漢) 시기의 요동(遼東)땅이다. 발해가 부주를 설치하고, 거란이 이름을 은주(銀州)로 고쳤다. 금(金) 황통3년에 [은(銀)]주를 폐하고 그 땅을 함평부(咸平府)에 소속시켰다. 원(元)이 그대로 따랐다. 명(明) 홍무 26년에 [철령]위(衛)를 설치하였다. 지금은 철령현으로 바뀌어 설치되어 있다. 봉천부에 속한다. 鐵嶺衛司北二百四十里。北至三萬衛九十里,東南至撫順千戶所一百里。秦、漢時遼東地。勃海置富州,契丹更名銀州。金皇統三年,州廢,以其地屬咸平府。元因之。明洪武二十六年,置衛。今改置鐵嶺縣,屬奉天府。
『讀史方輿紀要』 권37 山東8
《讀史方輿紀要(독사방여기요)》에 철령위가 진(秦), 한(漢) 시기 요동(遼東)땅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여기서 '철령위'은 1388년에 처음 설치된지 5년 후 은주(銀州, 즉 嚚州) 땅으로 옮겨졌다고 하는 명(明)의 두 번째 철령위(이하 편의상 <철령위2>로 표기함), 즉 통설에 따르자면 청(淸)대 봉천부 철령현(今 요녕성 철령시)이다.
귀덕주는 철령현 동남쪽에 있었다. 《遼史(요사)》 '지리지'에 「귀덕주 영원군은 본래 한(漢) 양평현 땅으로서 한(漢)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였다」 하였다. 貴德州在鐵嶺縣東南。遼史地理志: 貴德州寧逺軍,本漢襄平縣地,漢公孫度所據。
『欽定盛京通志』 권100
귀덕옛성 [철령현 동남에 있다. 요(遼)가 귀덕주 영원군을 설치하였다. 또 귀덕현을 두어 [귀덕]주의 치소로 삼았다. 금(金)이 [영원]군을 폐하고 [귀덕]주와 치소 [귀덕]현을 보존하였다. 원(元)이 폐하였다.] 貴德故城 [在鐡嶺縣東南,遼置貴徳州寜逺軍。又置貴德縣為州治。金廢軍,存州治縣,元廢。]
『欽定大清一統志』 권39
귀덕주(貴德州) 영원군(寧遠軍), 하급으로 절도를 두었다. 본래 한(漢) 양평현(襄平縣) 땅으로서 한(漢) 공손탁(公孫度)이 점거하였다. 貴德州 寧逺軍 下 節度, 本 漢 襄平縣地, 漢公孫度所據.
『遼史』 권38, 지리2 東京道
한편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등에 요나라 귀덕주(貴德州)가 <철령위2>(즉 철령현) 동남쪽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는데, 《遼史(요사)》 '지리지'에 요나라 동경도 귀덕주가 곧 한(漢) 요동군의 치소 양평현(襄平縣)과 같은 곳이라고 하여 <철령위2>의 위치를 찾는데 매우 유용할 수 있다. 즉 이를 「<철령위2>가 한(漢)의 요동(遼東)땅에 있었다」는 위 《讀史方輿紀要》의 기사와 더불어 검토하면 <철령위2>가 한(漢) 요동군 양평현을 기준으로 서북 방면의 가까운 곳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통설상 <철령위2>로 비정된 今 요녕성 철령시(鐵嶺市)의 동남 방면에는 한(漢) 양평현이 위치할 만한 곳이 없다는 사실이다. 아닌 게 아니라 통설상 한(漢) 양평현으로 비정된 今 요녕성 요양시(遼陽市)는 철령시를 기준으로 [동남이 아닌] 서남쪽에 있으므로 일단 사서의 기록에 어긋나고, 거리 역시 직선으로 125킬로미터에 달하여 위 《欽定盛京通志》의 기사와 연계시키기에는 무리가 있다. (지도1 참조)
지도 1 - (明)철령위 및 (唐)평주 노룡현을 기준으로, (漢)요동군 양평현의 통설상 비정 위치가 사서의 기록에 전혀 부합하지 않는다. 본 지도 출처:『谭其骧 中国历史地图集2-精装本-秦汉』 譚其驤 지음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와 같은 지리적 정황의 불일치는 《欽定盛京通志》 기록상의 '철령현'이 청(淸)대 봉천부의 통설상 <철령위2>가 아닌, 명(明)‧청(淸)대의 역사 날조 공작에 따라 봉천부로 지명이동되기 이전 <철령위2>의 진짜 위치를 가리킬 수 있음을 시사하는데, 이는 한국사 연구의 관점에서 매우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전국(戰國)시대 연장성(燕長城)의 동쪽 기점인 한(漢) 요동군 양평현(襄平縣)의 위치를 아직껏 今 요녕성 요양(遼陽)인 것으로 믿는 분들은 적어도 민족사학계의 연구자들 중에서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
양평(襄平)은 현(縣)으로, 요동군에 속해 있었다. [양평의] 옛 성이 지금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 서남에 있다. 襄平,縣,屬遼東郡,故城在今平州盧龍縣西南。
『後漢書』 권104下, 李賢 注
이를테면 당(唐) 장회태자(章懷太子) 이현(李賢, 654~684)이 《후한서(後漢書)》에 주석하였다시피 한(漢) 요동군 양평현은 당(唐) 평주(平州) 노룡현(盧龍縣)의 서남쪽에 있었으므로, 노룡현을 실제 위치보다 수백리 동쪽의 今 난하 유역에 잘 못 비정한 통설에 따르더라도 양평현의 서북쪽에 있었다는 <철령위2>는 今 요녕성 요양(遼陽)에서 서쪽으로 한참을 더 나아간 今 하북성 일대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지도1 참조)
2부에서 계속 ☞ https://earthlin9.tistory.com/57
- 기록상의 '요동땅'이란 후한(後漢)시기 요동속국(遼東屬國)의 영역을 포괄한 넓은 의미의 '요동' 지역을 말하는 듯하다.
- 고대 평주 노룡현의 위치에 관하여는 ☞ 명나라 영평부(永平府) 노룡현(盧龍縣)은 보정에서 난하 유역으로 지명이동된 가짜다. (문헌 증거사료 공개) 및 ☞ 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