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주(咸州)와 은주(銀州) - 철령위(鐵嶺衞)와 위화도(威化島) 회군, 새로 밝혀지는 위치 2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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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령위2> 위치 비정
한(漢) 요동군 양평현(襄平縣), 즉 요나라 귀덕주(貴德州)의 절대 위치는 今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 수성진(遂城鎮) 일대가 틀림없다. 따라서 <철령위2>는 상기 《欽定盛京通志(흠정성경통지)》 기사에 의거하여, 수성진 기준 서북 방면의 그리 멀지 않은 곳, 즉 今 보정시 만성구(滿城區) 북부와 역현(易縣) 남부의 경계 부근에서 찾아야 한다.
그 일대는 내륙 깊숙이 들어와 있던 요해(遼海)와 요택(遼澤)의 습지가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중원과 동북방을 가르는 자연적인 경계를 이루었고, 요해와 태행산맥 사이의 좁은 통로를 거쳐 양 지역들 간의 인적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후술하겠지만, 허항종(許亢宗)이 거쳐 지나간 요나라 은주(銀州)가 바로 그 길목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는데, 훗날 고려와 명(明)의 경계가 된 철령위 역시 이러한 역사 지리적 배경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태행산맥의 산지에서 발원하는 今 조하(漕河 즉 徐水)가 그 일대를 흐른다. 「<철령위2>의 서쪽에 요하(遼河)가 있었다」는 상기 《明史(명사)》의 기사상의 '요하'는 수(隋)‧당(唐)대 이래 요수(遼水)로 비정되는 今 조하일 것이다. 정리하면, 이상의 지리적 요건에 부합하는 <철령위2>의 위치는 今 보정시 역현(易縣) 독락향(獨樂鄉) 일대에 비정된다. (지도2 참조)
아울러 《明史》의 기사에 부합하다시피, <철령위2> 남쪽을 흐르다가 요하(遼河)와 합류하였다는 범하(汎河)와 소청하(小淸河)는 今 만성구와 역현의 경계 부근에서 발원, 동남쪽으로 흘러 今 조하(漕河)와 합류하는 마련천(馬連川) 및 그 남쪽의 今 보정시 중심부를 동서로 가로질러 역시 今 조하와 합류하는 청수하(淸水河 즉 府河)에 각각 비정할 수 있을 듯하다.
<철령위2> 위치 교차 검증
《명일통지》에 따르면 철령위를 옛 은주(嚚州) 땅으로 옮겨 설치하였다. ['嚚']은 '銀'의 와전이다. 若明志徙鐡嶺衛置故嚚州地, 又銀之訛也.
『欽定大清一統志』 권38
살피건대 《요사》 '지리지'에는 은주(嚚州)가 없다. 당연히 은주(銀州)이다. 按遼志無嚚州當即銀州
『欽定盛京通志』 권23
상기 《明史》의 기사에 언급되었듯이 <철령위2>는 옛(즉 요나라 시기) 은주(嚚州)에 있었고, 은주(嚚州)는 곧 은주(銀州)이므로, 기록에 따른 은주(銀州)의 위치를 가늠할 수 있다면 이를 통해, 위에서 이끌어낸 <철령위2>의 비정 위치에 대한 교차 검증이 가능할 것이다.
심주로부터 70리를 가면 흥주에 이른다. 요태조가 발해국을 부수고 동경로를 세웠다. 이곳부터 이르는 곳마다 비록 모두 초가집들이지만, 거주민들이 점점 번성하여 먹거리가 넉넉하였다. 흥주를 떠나 50리를 가면 은주(銀州) 중돈에 이르고, 또 40리를 가면 함주(咸州)에 이른다. 自瀋州七十里至興州 遼太祖破渤海國建為東京路 自此所至屋宇雖皆茅茨然居民稍盛食物充足 離興州五十里至銀州中頓 又四十里至咸州
『欽定重訂大金國志』 권40 許奉使行程録
《許亢宗奉使行程録(허항종봉사행정록)》에 「흥주를 떠나 50리를 가면 은주(銀州)에 이르고, 또 40리를 가면 함주(咸州)에 이른다」하였다. 許亢宗奉使行程録 離興州五十里至銀州 又四十里至咸州
『欽定滿洲源流考』 권11
북송(北宋)의 허항종(許亢宗)이 휘종 선화(宣和) 7년(1125)에 금(金)의 태종(太宗)이 보위에 오른 것을 축하하기 위해 금(金)의 상경(上京)으로 갔을 당시의 여정을 기록한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선화을사봉사금국행정록)》이 《欽定重訂大金國志(흠정중정대금국지)》 권40에 수록되어 있다.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에 따르면 허항종이 은주(銀州)에서 40리를 이동하여 함주(咸州)에 이르렀다고 하여 은주, 즉 <철령위2>의 위치를 검증할 단서를 제공한다.
문제는 현존하는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이 청(淸)대의 왜곡된 역사 지리관에 따라 허항종의 목적지인 금(金)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 今 하북성 보정시 역현 일대)의 위치를 사실과 달리 今 북만주 하얼빈 일대에 설정해 놓고, 허항종의 본래 여정에 첨삭을 가하여 날조한 사료로 보인다는 데 있다. 이는 금(金)의 후예임을 자처한 청나라 만주족들이 금(金)을 계승하였다는 자신들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금(金) 시기의 지명들을 대륙 안쪽의 본래 위치로부터 자신들의 본거지인 만주 일대로 대거 옮겨 심은 데 따른 폐해의 전형일 듯한데, 이와 같은 의혹은 '欽定重訂大金國志'라는 책 이름에 드러나 있듯이 해당 사서가 청(淸)대에 들어 두 차례 교정을 거친 사료라는 점으로 미루어, 그 타당성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다.
그런데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이 그 내용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는 사료라는 점이 대단히 유감스럽기는 하나, 부분적으로는 본연의 사실이 전해졌을 것으로 생각한다. 예를 들자면 비록 《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 》 기록상의 은주(銀州) 및 함주(咸州)가 今 요녕성 요하(遼河) 동부 유역으로 옮겨져 그 위치가 조작되어 있지만, 「은주로부터 북동쪽 40리 거리에 함주가 있었다」는 한정적 내용은 본래의 기록이 그대로 전해진 사실로 보인다는 점이다. 「아기를 목욕물과 함께 버리지 말라」는 서양의 격언이 있다. 사료를 편향적으로 취한다는 비판이 있을 수 있으나, 사료가 절대적으로 부족한 한국 고대사 및 중세사 연구 전반의 실정을 헤아려, 버릴 것은 버리고 취할 것은 과감히 취하는 지혜가 필요하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지도 2 - <철령위2>의 위치 비정 및 교차 검증. 본 지도 출처: 구글 지도
필자는 이전 글에 원(元) 함평부(咸平府)의 위치를 今 보정시 역현(易縣) 당호진(塘湖镇) 남쪽 인근 폭하(瀑河) 건너편에 비정한 바 있는데, 같은 곳에 요나라 함주(咸州)가 있었다. 북송(北宋)대의 척(尺, 0.308미터)을 기준으로 '1리 당 1,800척'의 표준을 적용하면 《宣和乙巳奉使金國行程錄》의 해당 기록상 은주(銀州)로부터 함주까지의 거리 40리(22.176킬로미터)는 앞서 논한 바 은주(즉 <철령위2>)로 비정되는 今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독락향(獨樂鄉)으로부터 당호진 인근의 함주 비정 위치까지의 실제 도보 거리(22.8킬로미터)에 거의 정확히 일치하여 (은주 = <철령위2> = 독락향)의 비정 위치에 대한 교차 검증을 제공한다. (지도2 참조)
반면, 통설상 요나라 은주(銀州) 및 <철령위2>로 비정된 今 요녕성 철령시(鐵嶺市)로부터 요나라 함주(咸州)로 비정된 今 요녕성 개원시(開原市)까지의 거리는 40킬로미터(72.15리)에 달하여 사서의 기록에 어긋난다.
3부에서 계속 ☞ https://earthlin9.tistory.com/58
- 重訂(중정) : 책의 내용(內容)을 두 번째 고침.
- 줄여서 《許奉使行程錄(허봉사행정록)》로도 알려져 있다.
- 허항종(許亢宗)은 북송(北宋)의 수도 개봉(開封)을 떠나 목적지인 금(金) 상경(上京)을 향하여 대략 북동쪽으로 이동하였다. 은주(銀州) 다음의 경유지가 함주(咸州)이므로 함주는 은주를 기준으로 북동쪽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 ☞ Chinese units of measurement 참조 바람
- 한(漢) 요동군 양평현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는 ☞ 진개(秦開) 연장성(燕長城)의 기점 조양(造陽)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의 자형관(紫荊關) 일대에 있었다., ☞ 고구려 요동성의 절대위치 및 ☞ 당(唐) 평주(平州)와 노룡성(盧龍城)의 위치에 대하여 참조 바람
- 조하(漕河)에 관하여는 ☞ 요수(遼水)와 요택(遼澤) 그리고 마수산(馬首山),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위치 및 ☞ 임유관(臨渝關)과 발착수(渤錯水), 새로 밝혀지는 위치, 당태종의 회군 경로 참조 바람
- 요나라 함주(咸州)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는 ☞ 고려 시기 연행로와 원나라 함평부(咸平府) - 고려 서경 위치 비정 4부 및 ☞ 고대 창려현(昌黎縣)의 위치 비정 참조 바람
- 금(金)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의 위치 비정에 관하여는 ☞ 혼동강(混同江)은 고대의 요수(遼水) - 금나라 상경회령부(上京會寧府)는 보정에 있었다. 참조 바람
- ☞ 역수(易水)와 갈석산(碣石山) 그리고 창해(滄海), 지도 1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