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령(慈悲嶺) 위치 교차 검증 1부 - 이나바 이와키치(稲葉 岩吉)는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의 진짜 위치를 알고 있었다.
카테고리 없음이나바의 유치스런 주장 ?
이나바 이와키치(稲葉 岩吉, 1876~1940)는 자신의 1910년 논문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에서 진장성(秦長城)의 동쪽 기점인 한(漢) 낙랑군(樂浪郡) 수성현(遂城縣)의 위치가 한반도의 황해도 수안(遂安)임을 아래와 같이 주장하였다.
진장성의 동단이 지금의 조선 황해도 수안(遂安)의 경내에서 시작하여 대동강 상류의 시원으로 나와서 청천강을 끊고, 서북으로 달려, 압록강 및 동가강 상류의 시원을 둘러싸고서 개원(開原) 동북 지역으로 나온다는 사실은 《漢書(한서)》 '지리지'에 의하여 의심할 바 없다. 秦長城の東端は,今朝鮮黃海道遂安の境に起り,大同江の上源出で、淸川江を截り、西北走して鴨綠江及佟家江の上源を繞り、以て開原東北の地に出でたること、漢志によりて疑はれず。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 21編 2號 173쪽, 1910
이나바는 진장성이 황해도 수안(遂安)에서 시작된 사실이 《漢書》 '지리지'에 의하여 의심할 바 없다고 확정적으로 말하였지만, 정작 《漢書》 '지리지'에 수안(遂安)이란 지명은 없고, 진장성이 한반도 황해도에 까지 이어졌다고 해석될만한 기록 역시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나바가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표면적으로는, 「'수성현(遂城縣)'과 '수안(遂安)'의 '遂'자가 같으니 동일한 곳이다.」라는 유치스런 주장을 한 것으로 볼 수 밖에 없는데, 이와 같이 근거도 없이 진장성을 한반도 안으로 끌어들이려 했다면 괘씸한 그 죄과에 따라, 그의 학설을 이어받은 제자 이병도와 함께 비판의 대상이 되어, 대중의 뭇매를 맞고 '식민사학자'로 낙인 찍히게 된 것은 물론 정당하다 할 것이다.
그런데 비록 일본군국주의에 고용되어 《조선사》를 날조한 주범들 중 하나인 것은 틀림없으나, 만주철도주식회사 역사지리조사실 연구원, 조선총독부 조선사 편찬위원, 만주건국대학 교수 등을 거친 그의 경력과 아울러 그가 남긴 조선사, 만주사 및 중국사에 관한 많은 저작들을 감안하면 이나바는 절대로 가벼이 볼 수 없는 당대 동북아 역사 및 역사지리학의 대가였음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고 볼 때 그의 위 논문과 관련하여 한가지 석연찮게 느껴지는 점은, 이렇듯 보여지는 이나바의 학문적 지위와 그에 따르는 전문성과는 걸맞지 않게, 그의 수성현(遂城縣) 위치에 대한 논지에, 일반인이 보더라도 허술하기 짝이없고 비논리적인 주장의 헛점이 너무 쉽게 드러난다는 것이다. 이나바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이런 말도 않되는 자신의 설을 확신한 것일까? 혹시 그의 글 속에 우리가 놓치고 있는 숨겨진 의도나 뜻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흔히 쓰는 표현대로 이나바의 서술에 「행간을 읽어야하는」 것은 아닐까?
이나바 이와키치는 낙랑군 수성현의 진짜 위치를 알고 있었다.

수성(遂城)이 곧 지금의 수안(遂安)이라는 사실은 《고려사》 '지리지'에 「수안은 본래 고구려 장새현(獐塞縣)이었다. 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한다.」라고 보인다. 遂城即ち今の遂安のことは、高麗史地理志に、遂安本高句麗獐塞縣一云古所於と見ゅ。
稲葉 岩吉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73쪽, 1910
이나바의 이상한 논리 전개는 같은 논문의 「《고려사》 '지리지'에 "수안(遂安)은 본래 고구려 장새현(獐塞縣)이다."라고 하였으니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은 곧 지금의 수안(遂安)이다.」라는 일방적인 주장으로 계속 이어진다. 「수안이 본래 고구려 장새현이었던」 사실과 「낙랑군 수성현은 곧 지금의 수안이다.」라는 그의 주장에 사이에는 어떠한 논리적 연결 고리도 안보이는데, 이나바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일까?
수안(遂安)과 수성(遂城)의 관련성에 관한 위 이나바의 미심쩍은 서술에 숨겨진 의도는, 논의의 핵심이 됨에도 불구하고 정작 인용문에서 빠뜨린 《고려사》 '지리지' 기사 말미의 '수주(遂州)' 관련 부분에서 극적으로 드러난다. 결론부터 말하지면, 이나바는 한(漢) 낙랑군 수성현의 절대 위치가 今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일대였음을 정확이 인지하고 있었던 게 분명한데, 살펴보도록 하자.
서해도(西海道)는 본래 고구려의 땅으로 당(唐)나라 고종(高宗)이 고구려를 멸망시켰지만 능히 지켜내지 못해 신라가 결국 병합하였다. 신라 말엽에 이르러 궁예(弓裔)가 근거지로 삼았다. 태조가 즉위하여 그 땅을 다 차지하였다. 성종 14년(995)에 영토를 나누어 10도(道)를 만들면서 황주(黃州)·해주(海州) 등의 주현(州縣)을 관내도(關內道)에 속하게 하였고, 뒤에 서해도(西海道)로 고쳤다. 뒤에 수안(遂安)·곡주(谷州)·은율(殷栗) 등의 현(縣)이 원(元)나라에 편입되었다. 충렬왕 4년(1278)에 이르러 원나라로부터 그곳을 돌려받았다. 관할하는 대도호부(大都護府)가 1개, 목(牧)이 1개, 군(郡)이 6개, 현(縣)이 16개, 진(鎭)이 1개이다. 西海道本高句麗之地, 唐高宗滅高句麗, 而不能守, 新羅遂幷之. 及其季世, 爲弓裔所據. 太祖旣立, 盡有其地. 成宗十四年, 分境內, 爲十道, 以黃州·海州等州縣, 屬關內道, 後改爲西海道. 後遂安·谷州·殷栗等縣, 沒于元. 至忠烈王四年, 元乃歸之. 領大都護府一, 牧一, 郡六, 縣十六, 鎭一.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서해도 연혁
신미 원(元)에서 우리나라의 수안(遂安)과 곡주(谷州)를 돌려주었다. 辛未 元歸我遂安·谷州.
『고려사』 권30 세가 권제30 충렬왕(忠烈王) 12년(1286) 1월
우선 고려 서해도의 수안(遂安) 지역은 원(元)과의 접경 지역으로서, 원(元)에 점령되었다가 되돌려 받기를 수차례 반복한 곳으로서 《고려사》에 기록되어 있다. 즉 수안이 본래부터 고려의 땅이었던 것은 맞지만, 때에 따라 원(元)의 관할 하에 놓였던 곳이기도 한 것이다.

수안현(遂安縣)은 본래 고구려의 장새현(獐塞縣)【고소어(古所於)라고도 한다.】으로, 신라 때에 서암군(栖巖郡)의 영현(領縣)으로 삼았다. 고려 초에 지금 이름으로 바꾸어 곡주(谷州)의 임내(任內)로 속하게 하였다가, 뒤에 현령(縣令)을 두었다. 충선왕 2년(1310)에 원(元)나라 황제의 총애를 받던 환관(宦官) 이대순(李大順)의 요청으로 수주(遂州)로 승격시켰다.【혹은 고을 사람 이연송(李連松)이 나라에 공을 세웠기에 군(郡)으로 승격시켰다고도 한다.】 遂安縣本高句麗獐塞縣【一云古所於】, 新羅時, 爲栖巖郡領縣. 高麗初, 改今名, 屬谷州任內, 後置縣令. 忠宣王二年, 以元嬖宦李大順之請, 陞爲遂州.【一云, 以郡人李連松, 有勞於國, 陞爲郡.】
『고려사』 권58 지 권제12 지리3 서해도 곡주 수안현
위 《고려사》구절이 바로 이나바의 논문에 부분적으로 인용된 기사인데, 이에 따르면 수안(遂安) 지역은 서기 1310년에 원(元)에 의하여 수주(遂州)로 승격되었다. 고려 출신 환관 이대순(李大順)의 요청이 무슨 이유에서였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여하튼 원(元)의 관할권에 의해 수주(遂州)로 승격되었으므로 당시 수안 일대는 원(元)의 강역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주(遂州), 하급. 당(唐)의 수성현(遂城縣)으로서 역주에 속했다. 송(宋)이 광신군으로 고쳤다. 금(金)이 [광신군을] 폐하고 수성현으로 삼아 보주에 예속시켰다. 원(元) 지원2년(1265)에 [수성현을] 없애고 진(鎮)으로 삼아 안숙주에 편입하였다. 후에 다시 [수(遂)]주(州)를 설치하고 [수성]현은 폐하여, 보정에 예속시켰다. 遂州,下。唐為遂城縣,屬易州。宋改廣信軍。金廢為遂城縣,隸保州。元至元二年,省入安肅州為鎮,後復置州而縣廢,隸保定。
『元史』 권58 지리1 保定路

수성폐현(廢遂城縣)은 안숙현 서쪽 25리에 있다. 한(漢) 하간국 무수현 땅이었다. 후위가 그곳에 남영주를 설치하였고, 수(隋)가 수성현으로 고쳤으며, 당(唐)의 역주에 속하였다. 오대 시기 주(周)가 삼관(三關)을 넘어섰는데, 이곳은 안문관과 연계된 요충지였다. 송(宋)이 광신군을 설치하고, 금(金)이 수주(遂州)로 고쳤으나 이내 폐하였다. 원(元)이 [수성]현을 없애고 수주(遂州)로 되돌려 설치하였다. 본조(明)가 [수주를] 없애어 안숙현에 편입하였다. 廢遂城縣。在安肅縣西二十五里。漢爲河間國武隧地,後魏於此置南營州,隋改遂城縣,唐屬易州。五代周克三關,此係雁門關衝要。宋置廣信軍,金改遂州,尋廢。元省縣,復置遂州。本朝省入安肅縣。
『明一統志』 권2 '保定府'
그런데 '수주(遂州)'와 관련하여 실로 놀라운 것은 《元史(원사)》, 《明一統志(명일통지)》 등을 비롯한 수많은 사서에 당시 원(元) 보정로(保定路)의 속주로서 수주가 기재되어 있고, 그 위치는 당시의 안숙현 서쪽 25리, 즉 今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으로 명확히 밝혀져 있다는 사실이다. 즉 《고려사》의 기록상 1310년에 주(州)로 승격되어 설치된 '수주(遂州)'는 곧 원(元)대에 수성현이 되돌려져(승격되어) 설치된 위 《元史》 및 《明一統志》 기록상의 '수주(遂州)'와 동일한 곳이었을 개연성이 농후해 보인다.

몽염(蒙恬)은 제(齊)나라 사람이다. 진(秦)나라 장수로서, 처음으로 붓을 만들었다. 진시황(始皇)이 몽염을 보내어 정병 30만을 거느리고 북녁에 장성(長城)을 쌓게 하였다. 임조(臨洮)에서 일어나 요동(遼東)에 이르기까지 만여 리를 뻗어 흉노(匈奴)에 위엄을 떨쳤다. [장성(長城)이 지금의 수주(遂州) 지경, 즉 안숙현(安肅縣) 지방에 있다.] 蒙恬齊人 始製筆爲秦將 始皇遣恬率精兵三十萬北築長城起自臨洮至遼東延袤萬餘里 威振匈奴 [長城在今遂州界即安肅縣地方]
진(秦)나라의 만리장성(萬里長城)이 있었다는 명(明)대의 遂州(수주)가 정확히 지금의 보정시(保定市)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의 위치에 표기되어 있다. (본 지도 출처: 譚其驤 中國歷史地圖集7-精裝本-元明)
『保定郡志』 권9, 職官3 厯代宦蹟, 明 弘治甲寅年(1494)
그리고 더욱 놀랍게도 《보정군지》에 「원(元)‧명(明)대 안숙현 지방의 수주(遂州)에 진시황(始皇)이 몽염을 보내어 쌓은 진장성이 있다.」라고 기록되었고, 이 사실은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 (979), 《원풍구역지(元豊九域志)》 (1080), 《무경총요(武經總要)》 (1231) 등의 사료들에서 검증된다. 이로써 진장성이 시작된 今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일대에 고려 치하 서해도 곡주(谷州) 수안현(遂安縣)이 있었음이 명백히 입증된다.
이나바 이와키치가 《고려사》 권58에 기록된 수안현(遂安縣)의 연혁 사항을 접했던 것이 분명한 만큼, 수안현의 위치를 밝혀줄 열쇠가 되는 '수주(遂州)'란 지명을 그냥 지나쳤을 리는 절대로 없다고 생각된다. 또한 중국 화북(華北)에서 유학하여 중국어와 한문에 능통하고 북중국의 지리에 밝았을 이나바가 《元史)》 '지리지' 및 《明一統志》 등 당대의 기본 역사지리서들에 명확히 기록된 원(元) 수주(遂州)의 위치를 놓쳤을 리도 없다.
그렇다면, 고려 서해도 곡주(谷州) 수안현(遂安縣)의 위치를 한반도 황해도의 수안에 지정하고, 그곳에서 진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이나바의 '뻔뻔한' 주장의 행간이 비로소 읽혀지는 듯하다.
필자의 생각에는, 이나바 이와키치가 반도식민사관에 입각한 《조선사》의 조작을 기획한 일본군국주의 군부의 패권적 논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는 어용 사학자로서 비록 불의한 역사 날조 공작에 부역하긴 했으나, 최소한의 학자적 양심을 지키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마든지 못 본 척할 수 있었으나 그는 《고려사》 권58 수안현(遂安縣) 관련 연혁의 앞부분을 그의 논문에 기재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한(漢) 낙랑군 수성현(遂城縣)과 고려 서해도 수안현(遂安縣)의 진짜 위치를 밝힐 결정적 단서를 의도적으로 후학들에게 남긴 것이 틀림없다고 본다. 두계 이병도는 스승이 남긴 '맹랑한 설'의 석연찮은 점들을 인지한 듯 보이나, 불행이도 그 행간을 끝내 놓친 듯하고, 그에 따른 폐해는 주류강단사학계의 무능함과 더불어 아직껏 극복되지 못하고 있다.

이병도 「樂浪郡考」, 『韓國古代史硏究』, 박영사, 1976
2부에서 계속 ☞
- ※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 하였다. 《太康地理志》云 樂浪遂城縣有碣石山 長城所起 『史記索隱』 권1 '夾右碣石' 조항
- 이나바는 자신의 논문에 조지연(趙志淵)의 글을 인용하여 기존에 나도는 「수성(遂城)이 수안(遂安)이 되었다는」 설이 있었음을 밝히기는 했다. ※ 「조지연(趙志淵)도 정약용의 원고(原考)를 의심하여 이렇게 말했다. "고구려사에 의거하면 태무신왕 21년에 낙랑을 습격하여 멸하고, 7년 후에 한(漢) 광무제가 낙랑을 쳐서 그 땅을 취하자 살수 이남이 한(漢)에 속하게 되었다. 동천왕 21년에 고구려가 평양성을 축조했다는 말은 즉 살수 이북의 땅과 평양성이 고구려의 소유였다는 것과 같다. 이미 한(漢)과 위(魏)의 지경에 있었던 의주, 창성 등의 땅은 특히 고구려의 수도에 가까이 붙어 있었는데, 어찌 낙랑군이 수성을 현으로 거느릴 수 있었겠는가? 이에 근거하면 즉 수성(遂城)이 수안(遂安)이 되었다는 설이 조심스럽기는 하나, 정확히 나의 견해를 반영한다. 趙志淵も、鏞の原考を疑ひて、據句麗史、太武王二十年、襲樂浪滅之、後七年漢光武伐樂浪、取其地、薩水以南屬漢、東川王二十一年、句麗築平壤城云、則薩水以北之地、及平壤之城、句麗所有者、已在漢魏之際、而義州昌城等、地尤爲密邇句麗都、遂城一縣、惡得爲樂浪郡統縣耶、據此則遂城爲邃安之說恐然とありたるが、此説は正さに吾人の意を得たり。"」 「秦長城東端及王險城考」『史學雜誌』21編 2號 171~172쪽, 1910
- 이나바가 자신의 논문에 조지연(趙志淵)의 글을 인용하여 소개한 「수성(遂城)이 수안(遂安)이 되었다는」 설은 한백겸의 《東國地理志(동국지리지)》에 실린 기록과도 관련이 있을 듯한데, 아마도 「한(漢) 낙랑군 수성현(遂城縣)이 황해도 수안(遂安)이 되었다.」는 전설이 구전으로 당시 조선의 지식인 층에 이미 알려져 있었던 듯하다. ※ 「수성(遂城), 《通典(통전)》에 말하기를 "갈석산은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에 있다. 장성이 이 산에서 일어났다. 지금 그 증거로 장성이 동쪽으로 요수(遼水)를 끊고 고구려로 들어간 흔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하였다. .... 그런즉 지금의 수안(遂安)이 옛 수성현(遂城縣)과 같은 곳이고, 자비령(慈悲領)은 갈석산이다. 遂城 通典曰 碣石山在漢樂浪遂成縣 長城起於此山 今驗長城東截遼水入高麗 遺址猶在云云 .... 然則今遂安似爲古遂城縣而慈悲領爲碣石山」 『東國地理誌』 卷上 四郡 樂浪郡
- 비록 이나바가 반도사관에 입각하여 진장성의 동쪽 기점을 황해도 수안(遂安)으로 단정짓기는 했으나, 사실상 그가 가리키는 '수안(遂安)'은 고려 서해도 곡주(谷州)의 수안이다. 다시 말해서, 진장성 즉 만리장성이 한반도 황해도에서 시작되었다고 하니 누가 보더라도 어처구니없는 주장으로 들리지만, '한반도 고려'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수안'이 대륙에 있었던 고려의 지명일 수도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해본다면 사실 그리 별스러울 것도 없는 주장이다. 따지고 보면 이나바의 주장이 어처구니없게 들리는 원인은 상당부분 듣는 이의 '한반도 고려' 고정관념에서 비롯된다.
- 물론, 한(漢) 낙랑군 수성현의 위치가 今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 비정된다는 사실은 1935년 단재 신채호의 독자적인 문헌 고증을 통하여 밝혀진 바 있고☞ '낙랑군 보정설'의 창시자는 단재 신채호 선생이시다., 대략 십수년전 이래 재야시민사학계의 유력한 학설로서 자리잡고 있다.
- ☞ 갈석산(碣石山) 앞에 세운 연소왕(燕昭王)의 황금대(黃金臺) 참조 바람
- ☞ 낙랑군 (樂浪郡) 수성현 (遂城縣) 진장성 (秦長城) 관련 새로운 사료 - 원풍구역지 (元豊九域志)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