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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시황(秦始皇)과 갈석산(碣石山)의 선인(仙人) 선문(羨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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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元)대의 시인 유인(劉因, 1249~1293, 하북성 보정 용성容城 출생)의 시집 《靜修集(정수집)》에 실린 '등형가산(登荊軻山, 형가산에 오르다)'이란 제목의 시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碣石東頭喚羨門   //  갈석(碣石)의 동쪽 머리가 선문(羨門)을 부르고,
六鰲載我三山來   //  여섯 자라(鰲)가 나를 싣고 삼산(三山)으로 돌아온다.

『靜修集』 권3, '登荊軻山'

 

형가산(荊軻山)이 [역(易)]주의 치소 서쪽 5리에 있다.  荊軻山在州治西五里

弘治易州志 권1, '山川', 明 弘治壬戌年 (1502년) 간행

 

 

지도 1  형가산(荊軻山)과 낭아산(狼牙山)의 상대적 위치, 본 지도 출처 : Tencent Maps

 

 

유인(劉因)이 오른 형가산(荊軻山)은 하북성 보정시 역현(易縣) 서쪽 인근의 나지막한 언덕으로서 지금도 같은 지명으로 남아있다.

 


32년, 진시황이 갈석(碣石)에 가서 연나라 사람 노생(盧生)을 시켜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게 하고 갈석의 문에 글을 새겼다. 성곽을 허물고 제방을 터서 통하게 하였다.  三十二年,始皇之碣石,使燕人盧生求羨門、高誓。刻碣石門。壞城郭,決通隄防。
『史記』 '秦始皇本紀'

 

장(張)이 이르기를 「선문(羨門)은 갈석산 위의 선인(仙人) 선문고(羨門高)이다」 하였다.  張云 : 「羨門, 碣石山上仙人羨門高也.」
『史記正義』 권119

 

장(張)이 말하기를 「선문자고(羨門子高)선인(仙人)으로서 갈석산 위에 거하였다」 하였다.  張曰 : 羨門子高, 仙人, 居碣石山上.

『資治通鑑』 권7, 胡三省


상기 '등형가산(登荊軻山)'의 구절은 《史記(사기)》에 기록된 대로 서기전 215년(진시황 32년) 진시황이 갈석산에 다녀갈 당시 노생(盧生)을 시켜 선인(仙人) 선문(羨門)과 고서(高誓)를 찾은 일을 가리키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런데 유인(劉因)은 왜 하필 역현(易縣)의 형가산(荊軻山)에 올라 갈석(碣石)과 선문(羨門)을 언급하였을까?

이에 대한 해답은 형가산(荊軻山)이 고대의 갈석산(碣石山)인 보정 낭아산(狼牙山)의 동쪽 측면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위치라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지도1 참조) 그리고 이는 유인(劉因)이 묘사한 "갈석의 동쪽 머리(碣石東頭)"와도 적절히 부합한다.

 

즉, 유인(劉因)은 형가산(荆軻山)에 올라 갈석산(碣石山)을 직접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의 시 '등형가산(登荊軻山)'을 지었던 것이고, 따라서 그가 인식한 진시황의 순행처(巡幸處) '갈석(碣石)'은 보정의 낭아산(狼牙山)이 틀림없음을 알 수 있다.

  1. 선문(羨門)은 문헌에 '선문고(羨門高)' 또는 '선문자고(羨門子高)'로도 기록되어 나온다.
  2. 갈석산과 낭아산에 관하여는 ☞ 갈석산 앞에 세운 연소왕의 황금대, ☞ 당대의 기록으로 본 갈석산의 바른 위치☞ 안사의 난 안록산 반란사건의 본거지 갈석산 참조 바람
  3. ☞ 역수(易水)와 갈석산(碣石山) 그리고 창해(滄海)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