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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에 수나라 별동대는 없었다. - 압록수(鴨綠水) 위치 비정 4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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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름 끊긴 사서의 불완전한 기록


《삼국사기》 또는 《資治通鑑(자치통감)》에 기록된 살수대첩 직전의 상황을 살펴보노라면 뭔가 부자연스러운 서술의 전개가 감지된다. 설명하자면, 612년5월4일(음) 당시 양제(煬帝)의 허락을 기다리느라 요동 지역의 고구려성 점령에 차질을 빚고 있던 수(隋)군이, 그 다음의 상황 진전에 관한 이렇다 할 추가의 기록이 없는 채로, 한달 남짓 후 난데없이 압록수 서변에 집결하여 나타나는, 다소 엉뚱한 정황이 포착된다는 점이다. 한편의 영화에 비유하자면 중간에 필름이 끊겼다가 전혀 다른 장면에서 다시 이어지며, 플롯(plot)을 놓치게 되는 격이라고나 할까. 뭔가 핵심이 되는 일정부분의 기록이 잘려나간 듯한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여하튼 살수대첩에 대한 통상적인 이해는 「고구려 요동에 쳐들어온 수(隋)의 113만 대군이 평양성으로 가기 전에 요동성을 먼저 함락하려 하였으나 여의치 않자, 요동에 이미 와 있던 대군 중 정예병 30만을 추려 편성된 별동대가 요동의 본진을 떠나 동쪽으로 진군하여, 압록수와 살수를 건너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려던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사서에는 안보이는 이른바 '별동대'란 용어를 누가, 언제 갖다 붙였는지는 모르겠으나, 문제는, 불완전한 사료 분석에 따라 막연히 서→동 방향으로 요수, 요동성, 압록수, 살수 및 평양성이 차례로 나란히 위치했을 것이라는 단순한 짐작과 더불어 살수대첩과 관련하여 통상 당연시되는 수(隋)군 별동대의 존재가 사실과 다를 경우 초래될 역사 왜곡의 심각성에 있다.

 

 

요동에서 요동으로 떠난 별동대?


....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은 요동도(遼東道)로 나아가고 .... 모두 압록수(鴨綠水) 서쪽에 모였다.  .... 左驍衛大將軍荊元恒出遼東道 .... 皆㑹於鴨渌水西.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嬰陽王) 23년 06월 (612년 06월 음)

《삼국사기》 612년 6월 조항에 통상 요동에서 출발한 것으로 상정되는 수(隋)의 '별동대' 9군이 각각의 행군로로 나아가 압록수 서변에 집결하는 장면이 그려져 있다. 그 중 1군을 좌효위대장군(左驍衛大將軍) 형원항(荊元恒)이 이끌고 요동도(遼東道)로 나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석연찮은 점은 '요동도'란  행군로의 이름에 있다. 즉, '요동도'는 요동으로 가는길을 가리키고, 통설상 '별동대' 9군의 출발지는 요동이므로, 형원항은 별동대 1군을 이끌고 요동에서 출발하여 행선지인 요동으로 떠났다는 이상한 말이 된다는 점이다. 이는 9군의 실제 출발지가 요동이 아닐 개연성에 대한 하나의 단서가 될 수 있다.

 

 

양제와 수군은 살수대첩 이전에 요동에서 철군하였다.


3월 신묘일 (612.3.12음), 병부상서 좌후위 대장군 단문진이 죽었다. 계사일(612.3.14음), 황상이 군대가 있는 곳에 갔다. 갑오일(612.3.15음), 군대가 요수 다리에 다달았다. 무술일(612.3.19음), 대군(大軍)이 적에게 막혀, 생각한 바대로 건너지 못하였다. 우둔위대장군, 좌광록대부 맥철장, 무분랑장 전사웅, 맹금차 등이, 모두 죽었다. 갑오일(612.3.15음), 황제의 수레가 요수를 건넜다. 대전(大戰)이 [요수] 동쪽 연안에서 벌어져, 적을 격파하고, 진격하여 요동[성]을 포위하였다. .... 5월 임오일(612.5.4음), 지난 날 여러 장군이 각각 황제의 명을 받았으므로, 감히 기회에 따라 나아가지 못하였다. 곧 고려가 각각 성을 지키니, 공격하였으나 함락하지 못하였다.  三月辛卯,兵部尚書、左候衛大將軍段文振卒。癸巳,上御師。甲午,臨戎于遼水橋。戊戌,大軍為賊所拒,不果濟。右屯衛大將軍、左光祿大夫麥鐵杖,武賁郎將錢士雄、孟金叉等,皆死之。甲午,車駕渡遼。大戰于東岸,擊賊破之,進圍遼東。 .... 五月壬午,納言楊達卒。于時諸將各奉旨,不敢越機。既而高麗各城守,攻之不下。
『隋書』 권4 帝紀 煬帝下

《隋書(수서)》 '제기(帝紀)'에는 612년3월15일(음) 수군이 요수를 건너 요동에 진입한 이후, 적어도 5월4일(음)까지는 고구려군과 교전 상태로 요동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기술되어 있다.

요동 정벌에 [우작이] 따라갔다. 황제가 임해돈(臨海頓)에 머물다가 큰 새를 보았다. 황제는 기이하여 우작에게 글을 한 편 지을 것을 명했다. 내용은 이렇다. 「대업8년 임신년 여름 4월 병자일 (612.4.27음)에 황상께서 요수와 갈석산 일대를 평정하시어 위세를 떨치고 군사를 거두어 되돌렸다. 황상의 수레가 남쪽으로 출발하고, 난새가 그려진 깃발은 서쪽으로 나아갔다. 행궁은 유성현의 임해돈이었다. ....」 황제는 읽고 칭찬하며 담당 관리에게 돌에 새겨 바닷가에 세워 두게 했다. 요수를 건너는데 공이 있다 하여 건절위 직위를 주었다.  從征遼東, 帝舍臨海頓, 見大鳥, 異之, 詔綽爲銘. 其辭曰: 維大業八年, 歲在壬申, 夏四月丙子, 皇帝底定遼碣, 班師振旅, 龍駕南轅, 鸞旗西邁, 行宮次于柳城縣之臨海頓焉 ....」 帝覽而善之, 命有司勒於海上. 以渡遼功, 授建節尉.
『隋書』 권 76 열전 虞綽

그런데 같은 《隋書》의 '우작(虞綽)열전'에는 612년4월27일(음) 양제가 요동의 군사를 거두어 되돌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군사를 거두어 되돌렸다」는 것은 곧 '철군'을 의미한다. 또한 양제와 수(隋)군이 서, 남쪽으로 이동하여 행궁을 유성현(柳城縣)의 임해돈에 차렸다고 했는데, 여기서 '유성현'은 요수 서남편의 수(隋) 요서군 유성현을 가리키므로 양제 이하 수(隋)군이 요동에서 요수를 건너 모두 퇴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수(隋)군이 요수를 건너 퇴각한 사실은 또한 요수를 건너는데 세운 공으로 우작(虞綽)이 건절위에 임명된 것으로 더욱 분명해진다. 이렇듯 '제기(帝紀)'의 기록이 '우작열전'의 4월27일(음)철군 기록과 상반되는 것은, 《隋書》의 자체모순일 수 밖에 없는데, '우작열전'이 철군 날짜를 직접 명시하고 있고, 또한 철군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담고 있는 만큼 그 기록은 정확할 것으로 사료된다.

3월 신사일 (612.3.2음), 황제가 군사를 거느리고 거둥하였다. 무자일 (612.3.9음), 요수의 다리에서 진영에 임하였다. 신묘일(612.3.12음), 대군이 적의 저항을 받아 강을 건너지 못하였다. 우둔위대장군‧좌광록대부 맥철장, 무분랑장 전사웅, 맹금의 등이 모두 전사하였다. 갑오일(612.3.15음) 거가가 요수를 건넜다. 동쪽 기슭에서 교전이 일어나 적을 물리치고 진군하여 요동을 포위하였다. 이때 장수들은 일이 생기면 보고하라는 황제의 명 때문에 함부로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고구려가 성을 방어하자, 공격해도 함락할 수 없었다. 6월 기미일(612.6.11음) 황제가 요동으로 행차해 장수들에게 화를내며 문책했다. [요동]성 서쪽 수리에 멈추어 육합성을 통수하였다. 7월 임오일(612.7.4음), 우문술 등이 설수에서 패하고,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9군이 모두 어려움에 빠지자, 달아난 장수만 2,000여 기나 되었다. 계묘일(7.25.음) 철군하였다.  三月辛巳, 帝御師. 戊子, 臨戎于遼水橋. 辛卯, 大軍爲賊所拒, 不果濟, 右屯衛大將軍左光祿大夫麥鐵杖·武賁郞將錢士雄·孟金義等皆死之. 甲午, 車駕渡遼, 戰于東岸, 擊賊破之. 進圍遼東, 于時, 諸將爲奉旨, 不敢赴機, 而高麗城守, 攻之不下. 六月己未, 幸遼東, 責怒諸將, 止城西數里, 御六合城. 七月壬午, 宇文述等敗績於薛水, 右屯衛將軍辛世雄死之, 九軍竝陷, 將帥奔還, 亡者二千餘騎. 癸卯, 班師.
『冊府元龜』 권117 帝王部

隋書》 '제기(帝紀)'의 경우와 같은 날짜와 일정의 불일치는 대동소이한 내용을 담고 있는 《資治通鑑》과 관련하여서도 역시 나타나는데, 좀 더 신뢰가 가는 전쟁의 경과가 기술된 《冊府元龜(책부원귀)》에 의하면 수(隋)군은 612년3월15일(음)에 요수를 건너 요동성을 포위하였으나 점령에는 실패한 채 거의 1개월 반동안 요동성에서 고구려군과의 성과 없는 공성전(攻城戰) 벌인 뒤, [《隋書》 '우작(虞綽)열전'에 기록된 바] 4월27일(음) 수(隋)군측의 어떠한 사정으로 인한 철군을 단행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유추된다. 첫 요수 도하 과정에서의 치열한 접전 및 그 후 오랜 시간동안 지속된 공성전에서 양측 간에 치고받는 전투로 인한 고구려와 수(隋)군 모두에 상당한 병력 손실은 불가피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수(隋)군의 퇴각은 그때까지 온전히 남아 있던 병력에 대한 추가 손실 방지와 더불어 재정비를 위한 '작전상 후퇴'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수(隋)군이 어디까지 후퇴한 것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불과 1개월 반 뒤인 612년6월11일(음) 양제가 요동에 행차한 전후로 수(隋)군이 전장에 다시 나온 사실로 미루어 보아 멀리 후퇴하지 않고 [양제의 행궁이 자리잡았던] 유성현(柳城縣) 일대에 머무르며 다음 공격을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

요점정리하면, 612년4월27일(음) 수(隋)군은 요수를 건너 요동에서 모두 퇴각하였으므로, 평양성을 직접 공격하기 위해 요동에서 결성되었다고 통상적으로 알려진 수(隋)군 별동대의 존재는 근거 없음을 알 수 있다. 이른바 '별동대'의 실상은 「612년1월1일(음)~4월27일(음)」동안 고구려와의 전쟁 과정에서 소진되고 남은 수(隋)군 잔여 병력의 전부였던 것으로서, 요동에서의 '1차전'에서 사실상 고구려에 패배한 수양제는 살아남은 병력을 유성(柳城)으로 철수하여 재정비한 뒤, 요동에 재침입하기 위해 압록수 서변에 집결시켰던 것이다.

 

 

살수에서 압록수까지의 거리는 450리인가?

 

가을 7월 임인일, 살수에 이르러, 군대의 반이 건넜을 때, 고려가 뒤로부터 후군을 치니, 우둔위장군 신세웅이 전사하였다. 이리하여 모든 군대가 모두 무너져,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장수와 사졸들이 달아나 돌아갔는데, 하루낮 하룻밤에 압록수에 이르니, 450리를 행군하였다.  秋, 七月, 壬寅, 至蕯水, 軍半濟, 高麗自後擊其後軍, 右屯衛將軍辛世雄戰死. 於是諸軍俱潰, 不可禁止, 將士奔還, 一日一夜至鴨綠水, 行四百五十里.
『資治通鑑』  권181 隋紀5 煬皇帝

군대가 [하루에] 걷는 30리가 1사(舍)이다.  軍行三十里爲一舍
『呂氏春秋』 권15, 慎大覽 제3 不廣 (高誘注)

《資治通鑑》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서에 살수에서 대패한 수(隋)군이 하루낮, 밤으로 450리를 행군하여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러나 고대 보병의 평균 행군속도가 '하루에 30리'라는 점을 감안하면 무려 그의 15배가 되는 450리는 터무니없는 수치로서, 객관적으로 실현 불가능하다.

 

혹자는 말을 타고 달리면 하루에 450리도 가능하다고 주장하기도 하나, 사서에는 분명히  장사(將士), 즉 장수와 사졸(병졸)들이 압록수까지 행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졸은 곧 보병을 뜻하므로 그들이 말을 타고 달렸을 리는 없다. 더욱이 「行四百五十里」 의 '行'은 '걸어가다'를 뜻한다. (다음 한자사전 '行' 참조)

 

 

지도 5  -  살수에서 패한 후, 추정되는 수(隋)군의 도주로.   본 지도 출처 : 구글지도

 

 

또 말하기를, 양제가 고구려를 칠 때 수나라 대장군 우문술과 9군이 압록수를 지나고, 또 동쪽으로 살수에 닿아, 평양성에서 30리 떨어진 곳에 산을 의지하여 진을 쳤다 하였다. 고구려 대신 을지문덕이 사신을 보내 항복하여 우문술에게 청하여 말하기를 「군대를 돌리면 그 임금 고원(영양왕)을 받들고 행재소로 가 황제를 뵙게 하겠다.」 하였다. 우문술은 군사들이 피로하여 다시 싸울 수 없고, 또 평양이 험하고 견고하여 군사들이 힘을 다하기 어려움을 보고, 드디어 그 속임수에 따라 돌아갔다. 절반이 강을 건넜을 때 적들이 후군을 공격했다. 이에 손쓸 틈도 없이 크게 패하고 말았다. 9군은 패하고 하루낮, 밤으로 4, 50리를 걸어 압록수에 이르렀다.  又曰:煬帝征高麗,隋大將宇文述與九軍過鴨綠水,又東注薩水,去高麗平壤城三十里,因山為營。高麗國相乙支文德遣使偽降,請述曰:「遂旋師者,奉其主高元朝行在所。」 述見士卒疲弊,不可復戰,又平壤嶮固,卒難致力,遂因其詐而還。半濟,賊擊後軍,於是大潰不可禁止。九軍敗績,一日一夜還至鴨綠水,行四五十里。
『太平御覽』  권313 兵部44 決戰下

한편 이와 달리 《太平御覽(태평어람)》에 수(隋)군이 살수에서 4, 50리를 걸어서 압록수에 이르렀다고 하였는데, 이는 평균의 1.5배 정도에 달하는 행군 속도로서, 수(隋)군이 고구려군에 쫓기는 입장이었을 것을 고려하면 적절하고 현실감 있는 수치이다. 따라서 타 사서들에 적힌 '450리'는 본래 '4, 50리'였던 기록이 후대에 이르러 한반도 청천강과 압록강의 지리적 정황에 맞추어 와전 또는 변조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실제로, 살수대첩의 현장으로 추정되는 서수구(徐水區) 해촌(解村)에서 당시의 압록수로 비정되는 연혁(易縣) 폭하 상류 부근까지의 도보거리는 18.9킬로미터인데, 「1리 당 1,500 당대척(唐大尺, 0.2955미터)」의 표준을 적용하면 해당 수치는 42.64리로서 《太平御覽》에 기록된 '4, 50리'에 부합한다. (지도5 참조)

 

 

 


5부에서 계속 ...  ☞  https://earthlin9.tistory.com/47

 

  1. 《隋書(수서)》 '제기(帝紀)'에는 수(隋)군에 앞서 양제가 먼저 요수를 건넜다는 등의 앞뒤가 안맞는 내용이 있어 기록에 대한 신뢰성을 다소 떨어뜨린다. 그러나 타 사서들의 해당 기록과 비교하여 보면 612년3월15일(음) 즈음에 수(隋)군이 요수를 동쪽으로 건넌 것은 사실인 듯하다.
  2. ☞ 한(漢), 당(唐)대 사이에 서쪽으로 옮겨진 요수(遼水)와 유성(柳城) 참조 바람 (「수(隋) 기주(冀州)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은 「당(唐) 영주(營州) 유성군(柳城郡) 유성현(柳城縣)」과 동일한 위치에 있었다.)
  3. 고구려-수(隋)•당(唐) 전쟁 당시 요동의 중심부는 요동성이 위치했던 今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 일대로서,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압록수(今 역현 폭하 상류)의 동쪽에 있었던 것이다. ☞ 지도1☞ 지도4의 지리적 정황 참조 바람
  4. ☞ Chinese units of measurement 참조 바람
  5. ☞ 살수대첩, 살수(薩水)는 하북성 보정시 서수구(徐水區)의 폭하(瀑河)이다. 참조 바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