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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록수(鴨綠水) 위치 비정 1부 - 답돈도(踏頓道)와 오골성(烏骨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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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세웅이 향한 답돈도

 

이듬해, 황제는 또 요동으로 출정하면서 그를 우후위장군에 임명했다. 군사들이 답돈도(踏頓道)로 향하였다.  明年, 帝復征遼東, 拜右候衛將軍, 兵指踏頓道.
『隋書』 권 65 列傳 제30 薛世雄

살수에서 고구려에 대패한 이듬해인 서기 613년 정월 수양제는 전국의 군사들을 탁군(涿郡)에 소집하여 또 다시 요동으로 쳐들어간다. 수(隋)의 장수 설세웅(薛世雄) 역시 이번에도 출정하여 군사들을 이끌고 답돈도(踏頓道)로 나아간다. 여기서 '답돈도'라는 공격로를 주시할 필요가 있는데, '답돈'은 후한(後漢) 말 조조(曹操)에 의하여 토벌된 오환(烏丸)족의 수장 답돈(踏頓)을 가리킨다. 따라서 '답돈도'는 답돈의 본거지였던 한(漢) 요서군 유성현(柳城縣)으로 가는 길을 지칭함이 틀림없어 보인다. 답돈도는 제2차 고구려-수(隋) 전쟁 당시에도 이미 수(隋) 右제7군이 향했던 공격로이기도 하다.

참고로, 다른 모든 공격로는 '지명+도(道)'의 형식으로 명명한 반면 유독 답돈도(踏頓道)만 '유성도(柳城道)'라 부르지 않은 이유는 수(隋)•당(唐)대에 이르러 '유성(柳城)'이란 지명이 본래의 위치에서 서남쪽으로 옮겨진 연유로, '유성도'라 할 경우 초래될 혼란을 피하기 위함일 것으로 생각된다.

용주(龍州) 황룡부(黃龍府)가 설치되었다. 본래 발해 부여부(扶餘府)이다.  龍州黃龍府 本 渤海扶餘府.
『遼史』 권 38 地理志2 東京道 龍州 黃龍府

통주(通州) 안원군(安遠軍)이 설치되었으며 절도를 두었다. 본래 부여국(扶餘國)의 수도였으며 발해는 부여성(扶餘城)이라고 불렀다. 태조가 용주(龍州)로 고쳤고 성종이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  通州 安逺軍 節度, 本 扶餘國王城.  渤海 號 扶餘城.  太祖 改 龍州, 聖宗 更今名.
『遼史』 권 38 地理志2 東京道 通州 安遠軍

신묘일, 거란이 [후(後)]진(晉) 임금[석중귀(石重貴)]을 부의후로 삼고 황룡부에 두었다. 황룡부는 곧 모용씨의 화룡성이다.  辛卯,契丹以晉主為負義候,置於黃龍府。黃龍府,即慕容氏和龍城也
『資治通鑑』 권 286 (天福12년 正月 辛卯, 947년 1월 5일 음) 

거란의 우두머리가 발해를 공격하여 그 부여성을 빼앗았다. [호삼성 주: 즉, 부여성은 당나라때 고려의 부여성이다.]  契丹主攻勃海,拔其夫餘城,[胡三省 注: 即唐高麗之夫餘城也。]
『資治通鑑』 권 275 (926년 7월 음) 

후한(後漢)말 답돈(踏頓)의 본거지였던 유성(柳城)은 今 보정시 서수구(徐水區) 동부산향(東釜山鄕) 일대로서 고구려의 부여성(夫餘城)이 그곳에 있었다. [遼 통주안원군 = 遼  용주황룡부 = 발해 부여성 = 고구려 부여성 = 모용씨 화룡성 = 漢 요서군 유성현 = 부여국 수도] 즉 설세웅은 고구려의 부여성을 치기 위하여 답돈도로 출격한 것이다.

 

 

압록수의 실체가 드러나다

 

이듬해, 황제는 또 요동으로 출정하면서 그를 우후위장군에 임명했다. 군사들이 답돈도로 향하였다. 군사들이 오골성에 이르자 때마침 양현감이 반란을 이르켜서 철군했다. 황제는 유성에 이르러 설세웅을 동북도대사에 임명하고 연군태수를 겸임시켜 회원을 지키게 했다.  明年, 帝復征遼東, 拜右候衛將軍, 兵指蹋頓道. 軍至烏骨城, 會楊玄感反, 班師. 帝至柳城, 以世雄爲東北道大使, 行燕郡太守, 鎭懷遠.
『隋書』 권 65 列傳 제30 薛世雄

그런데 설세웅이 고구려의 오골성에 도달한 때 마침 수(隋) 예부상서 양현감(楊玄感)이 반란을 일으켜 후방이 불안해지자 설세웅이 이끌던 군사를 포함한 양제 이하 수(隋)군 모두가 요동에서 철군하게 된다.

여러 신하도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장량의 군대가 사성(沙城)에 있으니, 그를 부르면 이틀 밤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고구려가 두려워하는 틈을 타서 힘을 합쳐서 오골성을 함락시키고, 압록수를 건너면 곧장 평양을 빼앗을 것이니, [전쟁의 성패가] 이 거사에 달려 있습니다.」  群臣亦言 , 「張亮兵在沙城, 召之 信宿可至. 乘高句麗忷懼, 倂力拔烏骨城, 度鴨淥水, 直取平壤, 在此擧矣.」
『삼국사기』  권 21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4년 (645)

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오골성(烏骨城)은 압록수 서편 가까운 곳에 있었다. 따라서 철군하기 직전 설세웅은 압록수 서쪽 강가에 거의 도달하여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이와 관련하여 통상적으로 한반도의 북쪽 경계를 이루고 있는 今 압록강인 것으로 알려져 있는 고대 압록수의 비정위치에 이해가 안되는 부분이 있다. 논하자면, 설세웅의 목적지인 '답돈' 즉 한(漢) 유주(幽州)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은 통설상 今 요녕성 조양시(朝陽市) 인근에 비정되는데, 설세웅은 '답돈'에 이르기도 전에 이미 압록수에 와 있었다는 사실로서, 이는 고구려-수(隋)•당(唐) 전쟁 당시의 압록수를 한반도 압록강에 두고서는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한 지리적 정황이다. 최근 今 요녕성 요하(遼河)가 고대의 압록수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는 했지만, 요녕성 조양시는 요하로부터 서쪽으로 멀리(직선거리 140km 이상) 떨어져 있으므로 이 역시 설세웅의 진군 경로에 논리적으로 어긋나기는 매한가지다.

 

오골성은 어디인가?

사서의 기록들에 따르면 오골성(烏骨城)은 압록수 서변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필자는 안시성, 백암성, 백랑성 등 고대 산성의 이름이 성터의 지형과 관련이 있는 경우를 수차례 보았다. 오골성 역시 산성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그 이름 또한 성이 위치한 지형, 즉 산세(勢)에서 유래했을 개연성이 있다.

압록수로 비정되는 今 보정시 역현(易縣) 폭하(瀑河) 상류 유역의 산서촌(山西村) 인근에 나즈막한 야산이 확인된다. 광산 개발로 인한 훼손이 심하지만, 야산의 본래 모습이 길죽한 타원형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오골(烏骨)은 오징어뼈를 뜻하고, 그 모양은 공교롭게도 길죽한 타원이다. 아울러 그 위치는 압록수의 배후에 해당되어, 적군이 압록수를 건너기 전에 미리 제압해 두어야 할 당위성이 있어 보이므로, 사서에 기록된 정황에 부합한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한 부분일 수 있으나, 필자는 고구려의 오골성을 본 야산(☞ 39°9′48″N 115°17′13″E)에 비정한다.

 

대업9년(613) 봄 정월 정축일, 황제가 조서로 천하의 군사를 탁군에 모았다. 백성들을 모집하여 효과(군)으로 삼고, 요동 옛성을 수리하여 군량을 저장하였다.  大業九年春,正月丁丑,詔征天下兵集涿郡。始募民為驍果,修遼東古城以貯軍糧。
資治通鑑卷一百八十二 隋紀六 煬皇帝中
『삼국사기』 권 20 고구려본기 제8 영양왕 24년 (613)

 

 

지도 1 - 서기 613년 설세웅(薛世雄)의 '답돈(踏頓)' 공격로.  본 지도 출처: opentopomap.org

 


서기 613년, 제3차 고구려-수(隋) 전쟁 때에도 612년의 제2차 전쟁때와 같이 수(隋)군은 탁군(今 보정시 당현唐縣)에 집결하여 출격하였다. 645년,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당태종과는 달리 요동으로의 행군 경로상에 요택(遼澤)에 관한 언급이 전혀 없는 점으로 미루어 보아 수(隋)군은 요택의 습지를 서쪽으로 우회하여 임유관(臨渝關)을 통과하고 유성에 이른 뒤, 회원진(懷遠鎭)으로 나아가 요수(遼水)의 상류를 건너는 경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설세웅 역시 회원진(懷遠鎭)을 경유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양현감의 반란으로 인하여 [공격로를 거슬러] 후퇴하던 설세웅이 회원진을 지키는 임무를 새로 부여받은 것으로도 알 수 있다.  즉, 설세웅이 이끈 수(隋)군은 [ <탁군(당현唐縣)> → <임유관(만성구 석정향石井鄕)> → <수(隋) 요서군 유성현(만성구 타남향坨南鄉)> → <회원진(역현 독락향獨樂鄉)> → <요수(조하漕河)> ]의 경로를 통해 요수에 도달하여, 도하한 것으로 유추된다.

 

설세웅이 요수(今 조하漕河)를 건너 '답돈' 즉 고구려 부여성(今 서수구 동부산향東釜山鄕)에 이르는 길은 요수와 갈석산(今 낭아산狼牙山) 산지 사이의 좁은 통로를 지나서, 今 폭하(瀑河)의 최상류를 건너 오골성이 위치한 그 일대의 평지에 도달한 뒤 백랑산(今 굴륭산窟窿山) 인근에서 다시 폭하를 동쪽으로 건너 그 일대 산지의 통로를 이용하는 경로가 가장 개연성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압록수는 폭하일 수 밖에 없다. (지도1 참조)

 

 

2부에서 계속 ...  ☞  https://earthlin9.tistory.com/43

 

  1. 「먼저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군의 行軍名 가운데 보이는 右제7군으로 踏頓 道의 존재가 있다. 踏頓은 기록에 頓으로도 보이는데 일찍이 후한말 遼西 柳城縣에서 참살된 흉노 수장의 이름이다. 頓으로 상징되는 유성 일대에 대한 정복을 의미하는 行軍이 편성되었던 것이다.」 - 『隋唐의 對外政策과 高句麗 遠征 - 裴矩의'郡縣回復論'을 중심으로』 윤용구, 북방사논총 5호 (2005.6)
  2. 《隋書(수서)》 '지리지' '상곡군(上谷郡) 수성현(遂城縣)' 조항에, 개황(開皇)원년(581)에 [속군인 창려군(昌黎郡)을 今 서수구(徐水區) 수성진(遂城鎮)에 남겨두고 (2년 후 폐지)] 껍데기뿐인 남영주(南營州)를 옮겼다 하였는데, 《隋書》 '지리지' '요서군(遼西郡) 유성현(柳城縣)' 조항의 기록에 따르면 같은 해(개황원년, 581)에 오직 건덕군(建德郡)의 용성현(龍城縣)만 용산현(龍山縣)으로 개명하여 남겨두고 [건덕군을 포함한] 영주(營州)의 모든 군(郡), 현(縣)들을 폐하였다 했으므로 개황원년에 남영주와 영주가 사실상 동시에 폐지되어 한 곳으로 옮겨지고, 개황18년(598)에, 옮겨진 영주의 용성현(龍城縣)이 유성현(柳城縣)으로 다시 개명되어, 대업(大業)초(605)에 이르러서는 같은 곳에 요서군이 새로 설치된 것으로 볼 수 있을 듯하다. 《新唐書(신당서)》 '지리지'에 영주[유성군]가 본래 요서군이었다 한 것으로 보아 당(唐) 영주(營州)는 [북위의 영주/남영주 가 수(隋)시기에 남쪽으로 옮겨져 설치된] 수(隋) 요서군(遼西郡)이 당(唐)대에 이르러 본래의 지명으로 복귀된 것임을 알 수 있다.
  3. ☞ 한(漢), 당(唐)대 사이에 서쪽으로 옮겨진 요수(遼水)와 유성(柳城) 참조 바람
  4. ☞ 백랑산(白狼山)과 백랑수(白狼水) 1부 - 흰색 이리를 닮은 산 참조 바람
  5. ☞ 임유관(臨渝關)과 발착수(渤錯水), 새로 밝혀지는 위치 , 당태종의 회군 경로 참조 바람
  6. 「이세적의 군사는 유성(柳城)을 떠나면서 형세를 과장하여 마치 회원진(懷遠鎭)으로 향하는 것처럼 위장하였다. 그리고 비밀리에 북쪽 샛길로 진군하여 우리가 예상치 못하던 곳으로 진군하였다. 여름 4월, 이세적이 통정(通定)에서 요수를 건너 현도에 이르렀다. 李世勣軍發柳城, 多張形勢, 若出懷逺鎮者, 而潛師北趣甬道, 岀我不意. 夏四月, 世勣自通㝎濟遼水, 至玄菟.」 『삼국사기』 권21 고구려본기 제9 보장왕 4년(645) 3월 (음) - 기사에 따르면 회원진(懷遠鎭)은 당(唐) 영주(營州) 유성(柳城) (즉 수隋 요서군遼西郡 유성柳城)에서 요수를 건너 요동에 이르는 주된 길목의 요수, 즉 今 조하(漕河) 강가에 위치한 역현(易縣) 독락향(獨樂鄕) 일대에 비정된다.
  7. ☞ 수나라 탁군(涿郡) 계현(薊縣)은 북경(베이징)이 아니다. 참조 바람
  8. ☞ 요수(遼水)와 요택(遼澤) 그리고 마수산(馬首山), 고구려-당(唐) 전쟁 당시의 위치 참조 바람